아셀라의 몸에서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환한 빛이 터졌다.
“비전하…….”
알렌은 넋을 잃고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말을 잃은 건 그녀 곁의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아셀라의 주변으론 회오리가 일듯 기류가 넘실거렸다. 눈을 감은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죄 풀려 바람결에 나부꼈다.
칼릭스는 그녀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은하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냘픈 육체는 마치 신이 달빛을 빚어 만든 것처럼 반투명하게 빛났다.
‘아셀라.’
숭고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경외감마저 일었다. 당장 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에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아셀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하더니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칼릭스는 소리 내어 탄식에 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맑은 바다색 눈은 이제 심해처럼 짙은 파란색이었다. 눈동자 속에는 별을 박아놓은 것처럼 금빛 조각들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찬연한 빛이었다.
한편, 비로소 목도한 진정한 신의 힘에 마족은 얼어붙었다.
공포에 이가 맞부딪히며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숨이 막혔다. 살을 에는 듯한 끔찍한 두려움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도망쳐야 한다는, 오직 본능에 의한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미친 듯이 지진하는 노란 눈동자에 지독한 공포가 어렸다.
아셀라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껍데기를 벗기니 추악한 본모습만이 남았구나.”
제 욕망을 위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앗았던 악귀의 본질은 결국, 신의 힘을 흉내 내고 싶었던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미물에 불과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44화
아셀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내 부름에 응하라.”
그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부터 긴 자루가 만들어지더니 거대한 낫이 완성되었다.
가로로 길게 휘어진 은빛 날붙이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이 온몸을 옥좨는 촘촘한 살기에 마족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상의 온갖 부정한 것을 태우고 소멸시키는 신의 이능으로.”
그녀의 영롱하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공간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곧 벌어질 일을 직감한 마족이 울부짖듯 외쳤다.
“안 돼! 오, 오지 마……! 컥……!”
그러나 몸은 땅에 붙박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발버둥 칠수록 몸 전체의 살갗을 칼로 저미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 땅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악한 것을 무로 돌리니.”
아셀라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두 손으로 낫의 자루를 단단히 움켜쥔 채였다. 주변을 둘러싼 대기가 자르르 진동했다.
그녀가 제 몸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낫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족의 노란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건 번쩍이는 칼날의 유려한 호선이었다.
“너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심판받으라.”
악을 벌함에 있어 신의 칼날은 무자비할 정도로 단호했다.
아셀라는 그대로 심판의 낫을 내리그었다.
* * *
아셀라가 연회장에서 막 황녀를 만나고 있었을 때.
유디트는 시종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시종이 자신을 연회장으로 데려가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간파하고 있었다.
시종은 황궁에서도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건 유디트 역시 바라던 바였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유디트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뒤따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멎자, 앞서가던 시종이 몸을 돌렸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거짓 웃음을 지은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영애, 왜 그러십니까?”
“길이 이상해서요.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시종이 생글거리며 유디트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다 손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자.
“착각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짐승처럼 두 눈을 번득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려 순식간에 뻗어져 나왔다.
“잡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황제의 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여유롭게 투덜거린 유디트가 재빨리 공격을 막아냈다.
“어디 한번 제대로 힘을 써볼까?”
유디트는 자신이 성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나게 날뛰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한숨 푹 자요. 일어나면 좋은 일이 잔뜩 생겨나 있을걸?”
그녀는 기절해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두고 손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오래간만에 몸을 푼 탓인지 관절 마디마디에서 뚝뚝 끊기는 소리가 났다.
“정 고마우면 나중에 나한테 감사 인사라도 하러 오고.”
이 가여운 이들이 황제의 개로 사는 삶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녀가 흡족한 얼굴로 씩씩하게 외쳤다.
“자, 그럼 이제 내 할 일을 하러 가볼까?”
* * *
황후궁에서는 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회장으로 갈 채비를 마친 황후, 레티샤가 궁을 나서는데 기사들이 가로막은 것이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성난 외침도 소용없었다.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황후궁에서 나가실 수 없다는 전갈입니다.”
“뭐라?”
“황후 폐하,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레티샤는 던컨의 말에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뒤따라오는 던컨을 향해 외쳤다.
“설명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던컨이 잠자코 응접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착잡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모릅니다.”
“모르겠다니, 그게 말이 돼?”
기가 막혔다. 하나뿐인 딸의 데뷔탕트였다. 저가 가지 않으면 베로니카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당장 기사들을 물려. 연회에 참석하겠어.”
“안 됩니다.”
“베로니카, 그 아이가 혼자 연회장에 갔을 거야. 걔가 얼마나 굴욕감을 느끼며 참담해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안 됩니다.”
던컨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내보냈다간 레티샤가 위험해지고 만다. 그녀가 딸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던컨에게는 레티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오직 그녀에게만 맹목적이었다.
“던컨.”
레티샤는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베로니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던컨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황제가 황녀에게 시켜왔던 일은 극비이기도 했지만 던컨 스스로도 말하길 원치 않았다. 레티샤가 알게 된다면 크게 충격받을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러나 옛 연인은 그의 표정만으로도 생각을 읽어내는 여자였다.
“황제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 거지?”
던컨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내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정 내가 갈 수 없다면 베로니카를 여기로 데려오기라도 해줘.”
“그럴 순 없어.”
“던컨!”
분노한 레티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바깥으로 뛰어나가려 하는 그녀를 던컨이 붙들었다.
“이거 놔!”
“레티샤, 이번 한 번만 참아. 제발.”
“그렇게는 못 해.”
그가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말렸다.
“이번 일만 끝나면 너와 황녀 모두 자유롭게 놓아주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던컨이 심호흡했다. 원래라면 말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레티샤를 말릴 방도는 이뿐이었다.
“황녀가 황제에게서 약속을 받아냈어. 이 일만 끝나면 당신과 황녀는 그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황궁에서 나갈 수 있다고.”
“황제가 나와 베로니카를 내보내 주겠다 했다고?”
“그래.”
레티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말의 저의를 곱씹었다. 황제는 절대 대가 없이 약속을 내걸 인간이 아니었다.
“대체 베로니카에게 무슨 일을 시켰길래…… 그런 조건까지 내건 거야?”
“말할 수 없다고 했잖아.”
“황제의 약속을 믿어?”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였다.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망가뜨리며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설사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잖아.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
“던컨 리사크!”
살갗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던컨의 뺨이 붉어졌다.
“넌 지금까지 황제가 베로니카에게 한 짓을 다 알면서도 숨긴 거지? 그 애가 갇혔을 때도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레티샤, 제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던컨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그렇게 고통받는 애를 어떻게 모른 척 내버려 둘 수가 있어!”
“……미안해.”
항상 그녀 앞에선 죄인이었던 남자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네 딸이란 말이야!”
일순,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엔 충격이 가득했다.
“그, 그게 무슨…….”
“네 딸이라고! 우리 아이라고!”
레티샤가 펑펑 눈물을 쏟으며 악을 쓰듯 외쳤다. 스무 해 동안 참았던 멍울을 쏟아내듯 토해냈다.
“황녀가…… 당신과 내 딸이라고?”
“그래.”
던컨의 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일며 몸이 비틀거렸다.
“설마…… 그날 밤에?”
넋을 잃은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했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는 며칠 전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던컨, 네가 내 곁에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되었지?’
‘스무 해 정도 됩니다.’
‘적지 않은 세월이군.’
황제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덧붙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건국제 일이 끝나면 속박 마법을 풀어주마.’
‘그게…… 정말입니까?’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나. 내 개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테지.’
황제의 개로 사는 삶이 드디어 끝날 거란 기대에 취해 정작 중요한 걸 생각하지 못했다. 황제의 말과 행동엔 늘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대가나 이유 없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 자가 아니었다.
‘황제는 이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
던컨은 아연해졌다.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갔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 던컨은 지금 자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언지 떠올렸다.
‘당장 베로니카를 구해야 해!’
황녀가 위험했다. 생각을 마친 던컨이 다급히 몸을 돌릴 때였다.
그의 눈이 창가에서 멈추더니 크게 뜨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레티샤도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아이?”
열 살쯤이나 되어 보이는 꼬마가 테라스 난간을 넘어오고 있었다.
폴짝, 가볍게 테라스에 착지한 아이가 치마를 털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몸이 점점 늘어나며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긴 연분홍색 머리칼에 금안을 가진 성녀가 테라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저를 쳐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태연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어요, 유디트라고 해요.”
* * *
때는 무르익었다.
레티샤와 던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디트가 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과감할 정도로 알고 있던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둘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난 거짓말은 안 했어요.’
먼저 결정을 내린 쪽은 레티샤였다. 그녀는 성녀의 제안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알았다.
‘좋아요. 우리가 뭘 하면 되죠?’
‘황궁 문의 개방.’
무리한 요구라는 건 유디트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두 사람이 필요했다.
황후와 황제의 최측근. 그만한 일을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들뿐이었다.
‘문이 열리면 곧바로 군대가 황궁을 장악할 거예요. 황실은 전복될 테고.’
이를 위해 라이젠과 지크가 이끄는 카르마가 황궁 근처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유디트가 레티샤를 똑바로 응시했다.
‘베로니카 황녀는 더 이상 황녀가 아니게 되겠죠.’
황후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밤을 틈타 빠르게 움직였다. 연회가 열리는 황궁이라지만 외진 곳은 있기 마련이라서, 몸을 숨기며 이동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거의 목표한 장소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밤하늘 한복판이 밝아졌다. 셋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듯이 검은 허공에 눈 부신 빛이 반짝거렸다. 빛의 커튼이 하늘에 드리운 것처럼 너울거리다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유디트는 직감했다.
‘해냈구나.’
마침내 이 땅에 깊게 뿌리내렸던 악이 사라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145화
마족의 몸체가 서서히 기울었다. 그러나 소음은 나지 않았다. 고꾸라진 몸은 땅에 닿기도 전에 먼지로 화해 사라졌다.
여신이 수호하는 인간의 땅을 더럽히려던 마족의 최후는 허망했다. 신의 칼날 앞에 타락한 영혼은 무력하기만 했다.
마족이 소멸하자 아셀라가 손에 쥐고 있던 신의 무기도 사라졌다.
허공에 있던 그녀의 몸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발이 지면을 디딤과 동시에 주위를 휘몰아치듯 감돌던 기류가 잠잠해졌다.
아셀라는 몸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몸을 빌려 현신했던 신의 이능은 서늘한 밤공기와 밤이슬 맺힌 풀, 단단한 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아셀라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셀라.’
칼릭스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내의 얼굴이 마치 슬픈 꿈을 꾸는 사람처럼 아련해 보여서였다.
그러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불쑥 내비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참지 못하고 발을 뗐다.
그때, 아셀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그녀는 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남편을 발견하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무얼 보기라도 한 걸까. 파리한 낯빛엔 슬픔이 역력했다.
입매만 당겨 짓는 아스라한 미소에, 그의 심장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당신…… 괜찮은 거야?”
그녀는 두어 번쯤 눈을 깜박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셀라?”
그녀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칼릭스, 나…… 마음이 너무…….”
그는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연신 다독거렸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응? 내가 들어줄 테니까.”
혼자서 울지 말고. 아픔을 숨기지 말고. 괴롭고 슬픈 건 뭐든 내게 토해.
다정한 속삭임에 아셀라가 울먹거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
어머니를 보았다.
해쓱해진 얼굴과 마른 몸.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의 모습이었다. 한밤중의 집무실에 홀로 있던 아델은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착잡한 얼굴로 힘을 방출했다. 예지의 이능이었다.
그러자 아셀라와 메리엘의 미래가 비쳤다.
처음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다 돌연 장면이 뒤바뀌며 끔찍한 내용이 펼쳐졌다. 딸을 차가운 땅에 묻으며 울부짖는 제 모습이 보였다.
아델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아델이 거듭 이능을 방출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자매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주 어리기도 했고, 좀 더 자란 모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끝은 항상 같았다. 아셀라는 여지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남편인 클라우드의 생명력까지 바쳐 살려낸 아이들이었다. 그의 죽음을 이대로 헛되이 만들 순 없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아셀라를 살릴 방도가…….”
그러나 무리가 갈 정도로 계속해서 힘을 사용한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한계가 찾아왔다.
“쿨럭!”
아델의 하얀 손바닥 위에 검붉고 진득한 액체가 쏟아졌다. 그녀는 익숙한 듯 책상에 놓여있던 손수건으로 대강 손을 닦아냈다.
메리엘을 임신한 상태로 아셀라에게 가해지는 황제의 주술을 대신해서 받아낸 탓에, 몸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서둘러 미래의 물줄기를 틀기 위한 조건식을 찾아야만 했다.
“뭐가 문제인 걸까. 왜 미래가 바뀌지 않는 걸까…….”
무수한 가능성을 찾아 조건을 틀고 바꾸었다. 그러나 거듭된 시도에도 아셀라의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미래에선 아셀라와 메리엘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정적인 뭔가가 충족되지 않은 거야.”
아셀라의 죽음이라는 미래를 바꿀 단 하나의 단서. 아델은 빠진 퍼즐 조각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한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어쩌면 우리 셋이 함께 살아남는 미래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입술이 파르르 진동했다. 아델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부디 자신이 방법을 찾아냈길 바라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니길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잘게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허공에 진을 그리고 예지의 힘을 불어넣었다.
‘내가 죽었을 때의 가정하에 펼쳐질 미래.’
여러 갈래로 미래가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하나의 가지를 찾아냈다.
아셀라와 메리엘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미래를.
‘헤르니야 여신이시여, 정녕 이 방법뿐인가요?’
아델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애써 참아도 끅끅 비어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아직 마냥 어리기만 한 딸이 걷게 될 가시밭길이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의 죽음을 되돌리려 해서도, 또한 자신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미리 발설해서도 안 되었다. 그게 첫 번째 조건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메리엘의 생존과 이능 각성이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아셀라가 성년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자라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결정적인 키는.
“……칼릭스 베네비토.”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가의 하나뿐인 후계자. 그녀는 연회에서 잠깐 보았던 무표정한 소년을 떠올렸다.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워 보이는 성숙함에 열다섯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는 미래의 장면에선 완연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서늘한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며 지배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되었다.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그래서 아셀라를 지켜줄 수 있을 사내.
아픔을 가진 채 오랜 시간 상처받으며 자라날 딸아이를 보듬고 감싸줄 유일한 존재.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마법도 사람의 마음만큼은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회는 만들어 줄 수 있어.”
인연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찰나의 순간이어도 족했다. 두 사람이 마주칠 작은 계기의 불씨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아델은 몸속에 남은 힘을 가늠했다. 이 일을 끝마치면 그녀에게 남아 있던 마력은 전부 사라지고, 황제의 주술 공격도 더는 막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손끝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유려하고 섬세하게 마법진을 허공에 새겨넣기 시작했다.
세밀함이 요구되는 정교한 주술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델의 혈색은 창백해졌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입은 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만큼 고되고 힘든 일이었으나, 마법을 구축하는 내내 그녀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마침내 아델이 작업을 끝마쳤을 땐, 기나긴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완성된 마법진은 그녀의 소망과 간절함이 담겨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양과 색을 띠었다.
‘이거라면…….’
운명을 관조하는 여신도 한 번쯤은 눈감아 주리라.
아델은 기쁜 마음으로 제게 남은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 * *
비로소 아델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비밀이 풀렸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았고, 딸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아낌없이 제 모든 것을 걸었다. 인생을 전부 거는 승부였다.
그 덕분에 두 자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셀라의 푸른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반질거렸다.
“저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요.”
“당신 탓이 아니야.”
칼릭스가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을 건넸다.
운 탓에 퉁퉁 부어 발개진 눈 밑으로 눈물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당신 부모님은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거야. 과정도, 끝도.”
칼릭스는 누구보다도 선대 후작 부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너무나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면 자신보다도 소중해진다. 원한다면 제 가슴을 갈라, 심장도 꺼내어 바칠 수 있게 되어버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동하여 움직이고 만다.
그는 제게 그런 존재인 아내를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선대 후작 부부가 그 결정을 후회했을 것 같아?”
아셀라가 눈물로 흠뻑 젖은 은빛 속눈썹을 깜박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당신을 믿고 선택한 거야.”
그제야 아셀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야.”
그러자 그녀의 푸른 눈이 사르르 휘며 고운 미소가 번졌다.
예쁘기도 하지. 칼릭스는 아내의 얼굴 곳곳에 빈틈없이 쪽쪽 거리며 입을 맞췄다. 눈꺼풀이라던가 귓불 같은 예민한 곳도 놓치지 않았다.
간지러운 숨결이 닿을 때마다 아셀라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야 웃는군.”
기어이 아내의 밝아진 모습을 보는 데 성공한 사내가 입맞춤을 멈추었다.
“이제야…… 정말로 다 끝난 기분이 들어요.”
아셀라가 후련한 듯 웃자, 칼릭스가 부드럽게 눈매를 접으며 답했다.
“당신은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뻐.”
“앞으론 울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아셀라가 급히 손등으로 쓱쓱 눈물 자국을 닦아내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아니.”
칼릭스가 웃음기를 거두었다. 선홍빛 루비 같은 눈이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한결 깊어진 눈은 어느새 고요했다.
아셀라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멈칫했다.
“내가 노력할게.”
차분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매일 웃을 수 있도록.”
아, 아셀라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맹세를 읊었다.
“날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평생 내 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하루하루가 너무나 달콤해서 잠드는 것조차 아쉬울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