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71)

베로니카가 곁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셀라가 매섭게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꽤 머리를 썼더구나.”

황제는 즐거운 듯 입을 열었다.

“마탑주를 대공의 보좌관인 양 모습을 바꾸어 황궁으로 들여보낸 건 그럴듯한 생각이었어.”

‘그걸 저자가 어떻게…….’

아셀라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새파랗게 어린놈의 마법 따위로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알렌이 라이젠 대신 칼릭스와 동행했다. 유디트가 메리엘로 변한 것처럼 모습을 바꾸어서. 그런데 그걸 들키고 만 거였다.

‘그렇다면 왜 성녀는 알아보지 못한 거지?’

아셀라가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황제는 유디트의 신성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관에게까지 흑주술을 걸어 조종했던 자가 어째서 신성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거지?’

황제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게 확실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나도 네게 장난을 좀 쳐보았지. 반응이 아주 볼만하더구나.”

황제가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셀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칼릭스는 지금 어디 있지?”

그녀의 동요를 읽어낸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네 처지에 다른 사람 걱정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대답해. 그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황제가 웃었다. 즐거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도주하는 대공비 142화

“흑주술이 네 남편의 눈을 가렸어. 지금쯤 환각 속에서 헤매고 있을 거야.”

아셀라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거짓말 마. 칼릭스는 네 주술의 영향을 받지 않아.”

“아, 네 말대로 직접 주술을 거는 건 불가능해. 그 대단하신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내려오는 힘 때문에.”

빈정거리는 말투로 답한 황제가 다시 반문했다.

“하지만 눈앞의 세상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뭐?”

“공들여 함정을 팠거든. 공간에 환각을 입혀서 천천히 침식되도록. 그렇게 일단 눈앞의 현실을 믿고 나면…… 대상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황제가 말을 멈추곤 살짝 뜸을 들였다.

“재밌더군.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대공이 걸려들 줄이야.”

주술이 성립하기 위해선 대상자의 두려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는 대공에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 베네비토라는 사내는 마치 공포라는 감정 자체가 거세된 인간 같았다. 죽음조차 그에겐 예외가 아닐 터.

그러나 황제는 베네비토 혈족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역대 대공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대공이 뭘 봤는지 알려줄까?”

그가 검지로 제 턱을 슬슬 쓸며 말했다. 마치 큰 아량이라도 베푸는듯한 태도였다.

“지금쯤 네 남편은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친 널 쫓아가느라 정신없을 거야. 널 붙잡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며 분노에 차 있겠지.”

아셀라가 입술을 짓이겼다. 여린 살이 터지며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그녀는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꾸했다.

“속임수로 잠깐 눈을 가린다고 해서 진실이 감춰질 것 같아?”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얼굴색을 가다듬고는 태연히 답했다.

“상관없어. 그 전에 모든 게 끝나있을 테니까.”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곧 있으면 메리엘 록트린도 올 테지.’

생각보다는 늦어지는 것 같았으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시종을 포함해 그녀에게 붙인 개만도 수십이었다.

“너희 자매를 살려두길 잘했어. 그렇지 않으면 그릇으로 쓰지 못했을 테니까.”

“그릇이라고?”

“내가 다시 세상에 재림할 그릇 말이야.”

황제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정체가 뭐야.”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보군.”

“대답부터 해.”

이제 아셀라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그는 즐겁게 그 모습을 감상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초대 베네비토 대공과 계약했던 마족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불현듯 스친 불길한 예감에 아셀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원래 황제는…… 어디에 있지?”

“이 몸의 어리석은 주인 말인가?”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잡아먹었어. 흑마법을 알려준 계약의 대가로 말이야.”

“잡아먹었다고?”

“그래. 바로 오늘 아침에 드디어.”

황제, 정확히는 그의 육체를 차지한 마족이 제 몸을 만족스럽게 훑었다.

“완전히 흡수된 모양이군.”

이제 황제의 육체엔 본래의 영혼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남김없이 집어 삼켜버렸다.

“멍청한 작자 같으니. 흑마법을 쓰면 쓸수록 내게 몸을 빼앗기게 되는 줄도 모르고.”

“몸을 빼앗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당연하잖아?”

마족이 아셀라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푸른 눈에 불안과 두려움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의 땅에서 흑마법이 금기인 이유가 뭐겠어? 여신 헤르니야가 왜 흑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을까?”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그녀는 마족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흑마법이 마족의 것이니까. 사용할수록 잠식당하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나?”

갑자기 잿빛 눈이 먹이를 앞에 둔 짐승의 것처럼 사나워졌다.

“초대 베네비토, 그놈이 계약이 잘못된 걸 눈치채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는데.”

“계약이…… 잘못되다니?”

이제 아셀라의 얼굴은 아연함으로 희게 질려 있었다. 절망스럽겠지. 마족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나를 애먹인 만큼 갖고 놀아주마.’

승기를 확신한 마족은 완전히 경계심을 무너뜨리곤 술술 진실을 토해냈다.

“그놈의 몸을 차지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계약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더군. 샤르투스의 도움까지 빌려 가면서 말이야.”

“샤르투스?”

“그래. 신의 힘을 가졌던 그 여자.”

초대 샤르투스 후작이 베네비토의 핏줄에 걸린 계약을 무효화하려 했다.

“계약을 완전히 깨뜨리진 못했지만, 일부가 비틀리고 불완전해지면서 내게 역으로 타격이 왔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마족이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난 육신과 대부분의 힘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됐지. 인간의 시간으로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말이야.”

아셀라는 침착하게 그의 말을 가늠하고는 입을 열었다.

“육체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약간의 힘은 남아 있었으니까. 소멸 직전에 간신히 작은 동물의 몸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

폐가의 벽을 기어다니 던 바퀴벌레부터 시작이었다. 쥐, 고양이, 개…….

그렇게 동물의 몸을 옮겨 다니며 조금씩 힘을 축적한 끝에 인간에게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고 나자 한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인간의 육체가 마족의 기운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몸을 완전히 차지하고 나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육체가 붕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 베네비토의 육체만이 내 힘을 버틸 수 있으리라는걸.”

이를 위해 수많은 인간의 몸을 거쳐 지금의 황제에 이르렀다. 황제 정도가 아니면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접근 자체가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도 몸을 차지할 수는 없었어.”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그의 주술은 전부 튕겨 나가 버렸다.

“초대 샤르투스가 베네비토의 핏줄에 새겨놓은 마법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

역대 대공들이 광기와 저주에 고통받으면서도 잠식당해 미치광이가 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한 가지 예외가 베네비토의 격세 유전자였지만 그들을 위한 성물도 이미 만들어 놓았더군.”

“……성배.”

아셀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황제가 성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신의 축복인 신성력이 마족에게서 유디트를 보호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거야. 성배를 이용해 베네비토의 힘을 빼낸 뒤 다른 인간의 몸에 이식하는 방법을. 성공만 한다면 베네비토의 육체와 별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그의 잿빛 눈은 이제 광기로 번들거렸다. 엄청난 세월 동안 갈망해왔던 걸 곧 손에 쥐게 될 거란 기대에 남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능자인 넌 분명 잘 버틸 수 있을 테지. 안 그렇나?”

만일 실패한다면 네 동생인 메리엘 록트린도 있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예배당 안을 울렸다.

욕망에 바짝 다가선 자의 얼굴은 징그러울 정도로 희열에 차 있었다.

“베네비토의 능력이 이식된 너희의 육체로 나는 다시 태어나는 거야. 누구도 거스르지 못할 완전한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커헉!”

그러나 환희에 젖은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충격이 일었다. 시선을 내려 제 몸을 확인한 마족의 눈이 잘게 진동했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제 확실히 알겠어.”

“으헉……! 큭!”

건조하리만치 메마른 목소리와 함께 무수한 빛의 창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엄청난 격통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침에 몸통이 꿰뚫린 거미처럼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게, 무슨…….”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이 충격으로 홉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감히 마족이 세상에 다시 더러운 발을 디디려 했어.”

아셀라가 어느새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를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마족의 첫 번째 본능은 생존.

충격적인 상황과 전신을 엄습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 본능이 그를 움직였다.

‘일단 성배부터 가져와야 해!’

그는 제 몸의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모았다. 한시가 급했다.

“크윽!”

엄청난 고통과 함께 몸에 박혔던 빛의 창이 천천히 밀려 나갔다. 마족은 눈앞이 허옇게 번지는 아픔을 이를 악물며 견뎠다.

빌어먹을 인간의 육체는 이래서 곤란했다. 턱없이 약한 데다 통각만 발달했으니까.

이윽고 몸에서 창이 완전히 빠져나가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허억, 허억…….”

가까스로 몸을 속박했던 마법에서 벗어났다. 그는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마력을 움직였다.

재빨리 몸을 깨끗하게 치유하고는 자유로운 손을 까닥여 성배를 향해 뻗었다.

‘어서……!’

이내 공중에 뜬 성배가 쏜살같이 날아 그의 손에 안착했다. 마족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는 힐끗 고개를 들어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곤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족이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다면 그 모습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없었다. 처음 겪었던 끔찍한 고통, 그리고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마족 특유의, 인간을 하등한 생물이라 여기고 깔보는 습성이 눈앞의 빤한 상황마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만들고 말았다.

“멍청한 계집, 제일 먼저 성배부터 가져왔어야지.”

마족은 가쁜 숨을 헉헉대면서도 아셀라를 조롱하는 걸 잊지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약을 먹였으니 성배의 힘에 영향을 받을 터.’

그는 빠르게 계산을 마치곤 황녀를 재촉했다.

“베로니카! 당장 와서 성배를 작동시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황녀가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좀 이상했다. 지나치게 여유롭고 느릿한 걸음이었다.

마족은 꿈쩍 않고 서 있는 아셀라를 힐끗거리며 답답함에 빽 소리를 질렀다.

“뭘 미적거리는 거야! 서둘러 달려오지 못해?”

그러나 이제 베로니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쪽은 아셀라였다.

“비전하, 몸은 괜찮으신가요?”

“문제없어요.”

그를 두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밀려드는 당혹감에 마족이 상황도 잊고 크게 외쳤다.

“베로니카!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설마 했는데 이렇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줄이야.”

그는 도무지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눈을 부릅뜬 그를 향해 베로니카가 싸늘한 비소를 던졌다.

“아까 비전하가 먹은 건 마비를 푸는 약이었어.”

“뭐라고?”

“한 가지 더 알려줄까?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는 성배는 가짜야.”

“그럴 리가…….”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떨리는 눈동자에 성배와 황녀가 번갈아 담겼다.

“이 망할 계집! 진짜 성배는 어디 있어!”

“글쎄. 지금이라도 찾아오려고? 하지만 어차피 네 손으론 성배를 사용할 수도 없잖아.”

베로니카가 받아쳤다. 황제는 성배를 작동시키는 건 물론, 아예 성배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했다.

“넌 내가 당연히 네 말에 복종할 거라고 여겼겠지.”

하지만 모든 건 아셀라와 그녀가 미리 짜둔 계획이었다.

황제는 보기 좋게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껍데기 속 본체가 마족이라는 사실까지 밝혔다.

“멍청한 건 바로 너야.”

베로니카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네놈은 이제 끝났어.”

도주하는 대공비 143화

자신이 놀아났음을 깨달은 마족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베로니카, 이 은혜도 모르는 계집! 널 진즉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그녀의 쓸모가 다하면 마지막으로 갖고 놀기 위해 아껴두었던 진실이 험한 말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속내를 감추는 것까지도 던컨 놈을 빼다 박았어. 누가 제 아비 아니랄까 봐! ”

죽여버리겠다는 살벌한 협박에도 꿈쩍 않던 황녀가 그 말에 움찔했다. 황후를 쏙 빼닮은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내 아버지가…… 던컨이라고?”

“네 어미가 황제와 결혼할 때 이미 애를 밴 상태였지.”

베로니카는 제게 유독 잔인했던 황제와 반대로 늘 제게 미안해하던 황후를 떠올렸다.

던컨에게는 기이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다. 지금까지는 황제에게 이용당하는 같은 처지라서라 여겼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묘한 데가 있었다. 드물지만 가끔 던컨이 황후궁을 찾을 때면, 어머니와 그 사이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지곤 했다.

베로니카는 마족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깨달았다.

“리사크 경도 그 사실을 알아?”

그러자 그가 히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 아둔한 개새끼는 전혀 눈치를 못 챘더군.”

사람의 마음을 휘두르며 희열을 느끼는 자 특유의, 악의가 가득한 웃음이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네 아비에겐 네 시체를 던져주며 말해줄 생각이니까.”

누군가가 막을 새도 없이 마족이 재빨리 손을 펼쳤다.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줄이 뻗어 나왔다. 번들거리는 잿빛 눈이 베로니카의 줄을 찾았다.

‘지금이라도 흑주술로 조종해서 성배를 작동시킨 뒤에…….’

“소용없어. 황녀의 주술은 파훼되었으니까.”

귓가에 들어온 차분한 음색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마족이 눈썹을 추켜 올렸다가 이내 입매를 팽팽하게 당기며 비웃었다.

“주술이 깨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일 부서졌다면 내가 지금까지 못 알아챌 리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이 멈추었다.

‘설마.’

마족은 당황하며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이젠 주술이 깨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 만큼 이능이 강해졌단 말인가?’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웃기지 마. 겨우 너 따위가 어떻게…….”

“못 믿겠다면 직접 봐.”

나직한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이능이 퍼져나갔다.

“……!”

이윽고 마족의 눈에 충격적인 장면이 비쳤다.

그의 눈앞에서 흑주술이 붕괴하고 있었다. 예배당 천장을 거의 뒤덮을 정도로 많던 줄이 일순간에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많은 주술이 단숨에 파괴되는데도 어떠한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 보는 장면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예배당 안을 가득 메웠던 흑주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가 마족을 엄습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은 채였다. 그저 시선 한번을 주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마족은 과거에 겪었던 비슷한 일을 떠올렸다. 마치 자신이 한낱 미물처럼 느껴지던 그 끔찍한 감각도 함께.

‘무(無)의 이능!’

또다시 마주한 신의 능력. 그의 안면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의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지며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 어린 음성이 귀에 꽂혀 들었다.

“너는 영혼조차 구제받지 못할 거야.”

마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길 나가야 해.’

하지만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들키고 말 것이다. 그의 눈이 도르륵 굴렀다. 어떻게든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줌의 객기를 끌어모았다. 목소리가 간사스럽게 변했다.

“그런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무슨 소리지?”

“대공이 환각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

“아.”

아셀라가 짧게 탄성을 냈다. 마족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기대감은 곧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괜찮아. 칼릭스는 무사할 테니까.”

“대공은 네가 배신한 줄 알고 있어! 그걸 그대로 둬도 상관없다고?”

“아니. 칼릭스는 네 환각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야.”

마족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걸 어떻게 자신하지? 내 환각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해!”

아셀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온화한 얼굴에 마족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거야…….”

“약속했으니까.”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중저음의 나직한 음성이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내를 믿겠다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셀라의 얼굴이 꽃이 개화하듯 환해졌다.

“칼릭스!”

아셀라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가 남편의 품에 안겼다. 칼릭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뛰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폐부를 가득 채우는 익숙한 향기와 몸 전체를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그녀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황제가 당신한테…….”

그러자 칼릭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수건이 감긴 손목을 들어 올렸다.

“무사해. 당신이 준 부적 덕분에.”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은 마치 실제처럼 지독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굳건한 믿음 앞에, 악랄한 마법은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내가 너무 늦었지?”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았다.

“알렌은요? 무사한가요?”

“아, 마탑주는 지금-”

칼릭스가 도중에 말을 멈추곤 아셀라를 재빨리 안아 들었다. 뒤로 훌쩍 피하자마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베로니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가 바깥으로 도망쳤어요!”

가증스럽게도 부부를 이간질하려 들었던 마족이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마족의 손에 있었던 성배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버려진 채였다.

“이런, 그새를 못 참은 모양이군.”

그러나 부부는 여유롭기만 했다. 아셀라가 떨어진 성배를 주워 베로니카에게 건네고는 미소 지었다.

“돌아올 때까지 잠시만 보관해 줘요.”

마족이 속은 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성배는 진짜였다. 베로니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선 아셀라가 칼릭스의 손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나가볼까요?”

* * *

가까스로 예배당 밖으로 나온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배당을 포함해 황제궁의 정원 전체가 반구 형태의 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결계였다.

“언제쯤 나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은 그의 눈이 요동쳤다. 그가 이를 으드득 갈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결계를 구축할 시간이 모자랄까 봐 내심 우려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더군요.”

“비켜!”

그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이따위 결계로 날 붙잡아 두겠다고?”

마탑주라고 해봐야 애송이일 뿐이다. 어린애 소꿉장난과도 같은 결계는 얼마든지 없앨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등 뒤로 꼬리처럼 따라붙는 인기척에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도망치실 순 없을 겁니다, 폐하.”

“……마탑주.”

“아니, 마족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일이 완전히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의 몸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컥……!”

금방이라도 몸 전체를 짜부라뜨릴 것만 같은 압박감이었다.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마족이 절명 직전의 짐승처럼 몸을 바르르 떨며 힘의 근원을 향해 눈을 치떴다. 유유히 걸어 나오는 여자의 모습이 그의 눈에 비쳤다.

“어딜 가려고?”

무섭도록 낮은 목소리는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하기만 했다.

지독한 절망이 마족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마족은 다가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눈의 핏줄이 터져 흰자가 붉게 물들었다.

‘네가, 너 때문에……!’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미칠 듯한 분노가 일었다. 코앞에 둔 목표가 무너진다는 좌절과 절망이 그의 전신을 휩쌌다.

“그래…….”

뇌옥의 눅눅함을 떠올리게 하는 질척한 음성에 분노가 스몄다.

저만 처참하게 끝날 순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망가뜨려 버리리라.

“차라리 잘 되었어.”

폐부를 찌를듯한 강렬한 악의는 남아 있던 일말의 이성마저 집어삼켰다.

“너희 모두 죽여 지옥으로 끌고 들어 가주마.”

그는 마족의 본능에 몸을 내던졌다. 동시에 잿빛 눈이 검게 변했다. 눈의 흰자까지 완전히 물들이며 안구 전체가 새카맣게 변했다.

“피해!”

칼릭스가 소리치며 아셀라의 앞을 막아섰다. 어느새 뽑힌 검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툭, 투둑.

뭔가가 뜯겨나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황제의 몸체가 부풀어 올랐다.

힘을 견디지 못한 옷이 모조리 뜯겨나갔다. 드러난 피부는 어느새 적갈색으로 변해 표면에 종기가 돋아나듯 우둘투둘해져 있었다.

머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과 노란 안구가 그의 존재가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냈다.

괴물에 가까운 모양새로, 마족이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외쳤다.

“산 채로 갈가리 찢어…… 마수의 밥으로 던져주마……!”

그러나 그가 미처 알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여신의 힘을 부여받은 이능자는 마족이 본체로 변하기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이었다.

“네 어리석음이 결국 나를 불러내고 말았구나.”

“……!”

등골을 쭈뼛하게 만들 정도로 스산한 음성이 공간을 갈랐다. 주위의 대기가 무섭게 요동쳤다.

샤르투스의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왔던 신의 이능. 그 힘이 오랜 잠을 끝내고 마침내 깨어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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