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71)

아셀라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셀라와 유디트가 차례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준비되셨나요?”

“물론이에요.”

그녀의 푸른 눈에 깊은 결의가 차올랐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24. 되찾음의 시간

해가 저물었으나 황궁은 낮처럼 환했다. 궁 곳곳이 황금색의 불빛으로 번쩍번쩍했다.

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문장이 위에 얹어진 황궁 출입문을 지난 뒤로도, 마차는 한참이나 더 달리고서야 멈추었다.

“비전하,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부가 고하는 목소리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받침대를 밟고 땅에 내려서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칼릭스……?”

그녀의 부름을 들은 남자의 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그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아셀라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양 입매가 팽팽해졌다.

“왔군.”

“……!”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머리털이 쭈뼛 솟는 것 같은 오싹함과 함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섰다.

“오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아셀라는 보이지 않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짓누르자 몸에 일던 희미한 진동이 가까스로 멈추었다.

“……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답했으나, 남자는 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차에서 따라 내리는 자그마한 소녀.

동시에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확연할 정도로 화색이 일었다.

“영애가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도주하는 대공비 140화

아셀라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답했다.

“네. 아이들을 위한 작은 연회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요. 다행히…… 황궁 출입을 허가받았어요.”

“그래.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저택에만 있으려면 무료할 테지. 잘 생각했어.”

그의 입술이 찢어질 듯 길게 위로 휘었다. 지독히도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셀라는 무어라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비릿한 웃음을 흘린 그가 근처의 시종을 불렀다.

“아이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영애를 안내해 주어라.”

“예, 전하.”

당황한 아셀라가 막아서려 했다.

“전하, 잠깐만요.”

“언니, 나 재미있게 놀고 올게.”

아셀라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메리엘로 모습을 바꾼 유디트였다.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인 성녀가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럼 이따가 봐!”

이 기이하고 섬뜩한 감각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셀라의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계획한 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새 유디트는 시종을 따라 모습을 감추었다.

“뭐 하나?”

“네?”

앞쪽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아셀라가 고개를 돌렸다. 제게 뻗어진 손이 보였다. 그녀는 하얀 장갑을 낀 길쭉하고 모양 좋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고 싶지 않아.’

그러나 망설임도 사치였다.

‘어설프게 굴어선 안 돼.’

모두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 순 없었다. 한 번뿐일 오늘의 기회.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아셀라는 얼굴에 한껏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요, 칼릭스.”

* * *

황궁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 전하와, 아셀라 베네비토 대공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동시에 홀이 놀라우리만치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에게로 꽂혀 들었다.

온갖 소문만이 무성한 베일 속 대공 부부.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수도까지 상경한 지방 귀족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 순간을 견디는 아셀라에겐 남들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내내, 그녀가 느낀 감상은 하나였다.

‘역겨워.’

아셀라는 잡힌 손을 빼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다는 게 끔찍했다. 수백 마리의 독지네가 남자와 닿은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춤이라도 추겠나?”

“아니요.”

순간 참지 못하고 거절의 말이 튀어 나간 건 그래서였다. 남자의 붉은 눈매가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그녀는 다급히 덧붙였다.

“아직 폐하께서 도착하지 않으셨으니…….”

“당연히 그 이후를 말하는 거였다.”

아셀라가 숨을 삼켰다. 의도를 가늠하는 서늘한 눈빛이 제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게 느껴졌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술을 뗐다.

“실은 춤을 잘 추지 못해서요.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했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변명을 듣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이나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셀라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와중 연회장에 울려 퍼진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저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과까지 할 거 있나.”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잠깐 일이 있어서 말이야. 다른 부인들과 담소라도 나누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도록 해.”

“……그럴게요.”

아셀라가 목에서 꾸역꾸역 대답을 쥐어 짜냈다. 섬뜩한 대답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두 번 다시는 즐길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잖나?”

아셀라가 훅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가 선득해지며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낯을 유지했다.

“이따 보지.”

그제야 잡혔던 손이 놓였다. 아셀라는 너무 빠르게 손을 거둬들이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의 붉은 입술 위에 싸늘한 비소가 스쳤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은 그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러게요. 듣던 것과는 다르네요.”

보통의 귀족가와 다르지 않은 대공 부부의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다시 우아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에 연회장이 시끄러워졌다.

아셀라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진정해야 해.’

그 방식이 최악이었을 뿐, 남자의 접근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차갑게 식히고 상황을 파악했다.

‘곧 황족들이 들어올 거야.’

그녀의 예상대로 몇 분 뒤 시종이 입장을 알렸다.

황족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아셀라는 그들 틈에서 황후를 쏙 빼닮은 여자를 찾아냈다.

‘저 사람이 베로니카 황녀구나.’

데뷔탕트 연회임이 무색하게도, 그녀에겐 파트너인 카발리에조차 없었다. 다른 남성 황족이 여럿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처사였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두 인물,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의아함이 섞인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안 오시려는 거 아닐까요?”

“설마요.”

그러나 잠시 후 시종이 외친 말은 귀족들의 추측을 현실로 만들었다.

“오늘 연회에 두 분 폐하께서는 참석지 못하신다는 전갈입니다.”

시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천 개의 눈동자가 한곳으로 향했다.

시선이 모인 그곳에 황녀 베로니카가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녀의 충격을 짐작게 했다. 데뷔탕트를 맞아 준비했을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재빨리 이 상황을 파악했다.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을 적나라한 홀대. 버려진 자식이라는 오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실례하겠어요.”

자리를 피하려는 황녀를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연회장을 가로지르던 때였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베로니카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엉망으로 바닥에 짓눌리며 몸이 처박혔다. 누군가가 발을 건 것이다.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졌다. 베로니카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훑었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었다.

베로니카가 밀려드는 모멸감과 수치심에 이를 악물던 찰나, 어디선가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 저하, 괜찮으신지요?”

베로니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찰랑거리는 긴 은발을 정갈하게 틀어 올린 푸른 눈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기다렸던 인물이었다.

‘베네비토 대공비.’

혹시나 걸려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제물이 미끼를 물었다. 황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일어나실 수 있겠나요?”

“네.”

그렇게 베로니카가 아셀라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그녀가 충격으로 눈을 홉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주술이……!’

황녀는 제 손과 대공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셀라는 베로니카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요.”

베로니카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뒤, 두 사람이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주변의 귀족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아셀라는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연회장 내부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다음 일을 벌이려 움직이는 거야. 황족들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틈을 타서 나갔겠지.’

그녀를 에스코트해 연회장까지 데려왔던 사내는 칼릭스가 아니었다. 아무리 겉모습을 똑같이 흉내 냈다 한들 결코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했다.

저를 바라보던 눈빛,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달랐다. 못 알아챌 수가 없었다.

간교한 황제가 칼릭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접근했다.

남편인 척하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구토가 치밀었다. 아셀라는 황제의 손을 잡았을 때의 소름 끼치는 감각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칼릭스는 괜찮을 거야.’

스멀거리는 불안감을 그 믿음 하나로 억눌렀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편은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약속한 걸 잊지 않았듯이.

아셀라가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선대공비의 유품이자 그의 사랑과 믿음을 의미하는 증표.

그녀는 칼릭스를 향한 걱정으로 흔들리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지금부턴 내 몫을 해내야 해.’

굳게 닫혔던 연회장 문이 바깥을 향해 열렸다.

* * *

연회장을 벗어나 아무도 없는 통로에 다다랐다.

베로니카는 커다란 기둥 뒤에 몸을 바짝 붙이며 섰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제 궁으로 가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어요.”

“확실한가요?”

질문은 짧았으나 의미는 명확했다. 감시자가 없느냐는 뜻이었다. 황궁 전체가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지금 대화도 누군가가 듣고 있을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대공비와 황녀가 함께 연회장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황제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눈은 가릴 수 있겠죠.”

고민은 짧았다.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여 황녀의 제안에 응했다.

그녀는 베로니카를 따라가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상하리만치 인적이 드물어서였다. 황녀궁의 복도를 걸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녀 한 명이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황녀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창마다 커튼이 쳐져 있어 방이 깜깜했다. 베로니카는 곧바로 문을 걸어 잠그곤 말했다.

“불을 켤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어둠에 익숙한 듯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테이블에 놓인 등에 불을 붙였다. 사물을 식별할 정도의 작은 불빛이 일었다.

“실은 아까 비전하께서 제 손을 잡았을 때…….”

“잠깐만요.”

아셀라가 베로니카의 말을 가로막으며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이었다.

부욱, 찢기는 소리와 함께 스크롤이 반으로 갈리자 그들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베로니카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방음 결계예요. 우리 말고는 누구도 대화를 들을 수 없죠.”

짧은 설명을 마친 아셀라가 베로니카를 직시했다.

“내가 대신 말할게요.”

그녀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황녀의 몸에 있던 황제의 주술이 파괴됐죠?”

도주하는 대공비 141화

베로니카는 크게 당황했다.

“알고…… 있었나요?”

“황제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묻는 거라면, 그래요. 알고 있었어요.”

아셀라가 황녀의 제비꽃색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했다. 단호하고도 강단 있는 눈빛이었다. 베로니카의 가슴께가 크게 오르내렸다.

“흑주술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주술에 당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요. 설사 눈치를 채더라도 주술의 시행자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요. 그런데도 알아냈다는 건…… 역시 비전하의 이능과 관련된 건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아셀라의 대답에 황녀가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꽤 많이요. 적어도 황녀가 대공 전하의 광기를 억제하기 위한 약을 만들었으리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황제가 베네비토 가문에 내려오는 격세유전의 능력을 탐낸다는 것도 알겠군요.”

“그 힘을 얻으려고 선대공 전하를 살해한 것까지도요.”

베로니카의 눈이 커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본론부터 말할게요.”

아셀라는 황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황제를 막으려 해요.”

“…….”

“그걸 위해선 황제가 정확히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무얼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왔는지 알아야 해요.”

“…….”

“황녀의 도움이 필요해요.”

베로니카의 얼굴에 복잡하고 혼란한 감정이 떠올랐다.

‘기회가 온 건 확실해.’

성공한다면 이 치욕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의 손에 목줄 잡힌 개처럼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녀의 목숨만으론 끝나지 않으리라.

어느새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게 불거질 만큼 튀어나왔다.

‘생각해, 베로니카. 이 기회를 잡을지 말지.’

언젠가 황제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는 여겼다. 단지 그 시기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지 몰랐을 뿐.

“우리 계획이 성공할지는, 황녀의 결단에 달렸어요.”

마치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제 앞의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사파이어처럼 반짝거리는 푸른 눈은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황제인가, 아니면 대공비인가.

내민 손길이 저를 위한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나. 혹 타 죽을 줄도 모르고 불길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되는 건 아닌가.

분명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제 전부를 걸고서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무수한 고민이 스쳤다. 마침내 내려진 결론은 간결했다.

‘더는 도망치지 않아.’

베로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강한 집념이 느껴지는 황녀의 얼굴엔 어떠한 결의가 차올라 있었다.

“계획을 말해줘요.”

* * *

잠시 뒤, 아셀라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잠깐만요, 문 좀 닫고요.”

베로니카가 돌벽의 장치를 손으로 누르자 옆으로 밀려났던 장식장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입구를 가렸다.

이제 황녀의 응접실은 여느 평범한 방이 되어 있을 거였다.

“곧 불이 켜질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부가 밝아졌다. 문이 닫히면 작동하는 마법 불빛 덕이었다. 아셀라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신기하네요.”

“더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여긴 도청과 감시가 불가능해요.”

“그래요?”

“네. 추측하기론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고대 마법이 걸린 것 같아요. 예배당과 마찬가지로요.”

지금 그들이 들어온 곳은 황궁의 예배당과 이어지는 지하 통로였다.

계단은 길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죽 뻗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아셀라가 말문을 열었다.

“아까 거기, 황녀궁은 아니었죠?”

앞에서 걷던 베로니카가 크게 움찔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눈치채셨군요.”

“아무리 건국제 연회 중이라지만 궁인이 한 명도 없는 건 이상하잖아요. 분위기도 그렇고요. 황궁이라기보다는 기도원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셀라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황녀의 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누군가가 항상 머무르는 공간은 온기가 있어요. 하지만 아까 그 방은 아니었어요. 마치 손님방처럼요.”

“…….”

“잠깐 시간을 보내는 장소거나 혹은 눈속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정확히 보셨네요.”

잠시 곤혹스러워하던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과거엔 황족들의 기도실이었대요. 지금은 폐궁이나 다름없고요. 저도 황제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방과 통로를 알려준 사람이 황제였나요?”

“네. 예배당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선 안 됐으니까요. 물론 제가 예배당을 드나든다는 사실도요.”

베로니카는 황제를 아버지라 칭하지 않았다. 한 번도 아비라 생각한 적 없으니 당연했다. 그녀에게 황제는 어머니의 목숨을 약점 잡아 자신을 이용하는 원수에 불과했다.

“황제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길 원했어요. 누군가 의문이라도 품을라치면 여지없이 제거되었죠. 덕분에 남들 눈엔 아둔한 황녀가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거로 보였을 거예요.”

베로니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까요?”

“충분히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눈앞에 지상까지 이어진 돌계단이 보였다.

“다 왔어요. 올라가면 바로 예배당 안이죠.”

“황제가 먼저 와 있을까요?”

“아뇨. 당신이 확실히 덫에 걸리기를 기다렸다가 나타날 거예요.”

베로니카가 뭔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황제가 비전하께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네. 이보다도 확실한 증거를 만들 방법은 없어요.”

아셀라가 드레스 가슴께에 달린 수많은 보석 중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보석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실은 보석이 아닌 마법 영상구였다.

“황녀, 난 준비 됐어요.”

베로니카가 긴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천장에 손바닥을 받쳐 위로 힘껏 올렸다.

보이지 않던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안으로 쏟아졌다. 예배당의 중앙홀이었다.

베로니카가 도로 문을 닫는 동안, 지상에 발을 디딘 아셀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몹시 낡은 예배당 내부는 오랜 세월을 짐작게 했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이 침착해지고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거리를 헤매다 집에 막 도착한 듯한 평온함이 일었다.

그녀의 시선이 제단을 향했다. 새하얀 대리석 제단 위에 놓인 투박한 흙 그릇이 보였다.

“성배인가요?”

베로니카가 아셀라의 짧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선대공 전하의 심장이 담겨 있고요?”

“맞아요. 성배의 힘을 빌려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내려오는 격세유전의 힘을 이식하는 실험을 했죠.”

고작 힘을 좇는 황제의 욕망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성배를 응시하는 아셀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제단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

그때였다.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일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살이 에일 듯한 짙은 살기가 등 뒤에서 느껴졌다.

아셀라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뒤를 돌았다.

“아셀라, 먼저 와 있었군.”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지?”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말을 이었다.

“기다리던 남편이 아닌가. 드디어 찾아와 줬으니 냉큼 와서 안기며 살갑게 애교라도 떨어야 하지 않겠나?”

“당신은…… 칼릭스가 아니야.”

아셀라가 이를 악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의 모습을 하고 역겨운 말을 하는 걸 듣고 있자니 토기가 치밀었다.

“이런, 그래도 눈치가 영 없진 않았던 모양이야.”

검은 연기가 남자의 몸을 감쌌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황제가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셀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가오지 마.”

그녀가 그를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물리려 했다.

갑자기 굳어버린 것처럼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곳이라곤 어깨 위의 머리뿐이었다.

“수고했다, 베로니카.”

“네.”

“황녀?”

아셀라가 놀란 얼굴로 베로니카를 쳐다보았다.

“설마, 날 속인 건가요?”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푸른 눈이 요동쳤다. 베로니카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계획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됐어. 성배는 파괴할 수 없으니까.”

“무슨 말이죠?”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성배를 만든 자가 누군지 모르나 보군.”

아셀라는 전신에 훅 끼치는 검은 기류에 숨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황제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초대 샤르투스 후작이야.”

“윽……!”

그가 뿜어낸 기운이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아셀라가 뿌리치려 들었으나 구속된 몸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신의 이능을 잠깐 가졌을 때 만들어낸 것이지.”

“이거 놔!”

“그러니 네가 아무리 이능자라 한들,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성배를 깨뜨리진 못한다는 의미야.”

붙잡힌 고개가 아래로 홱 내려갔다. 발밑에서 검게 피어오르는 마법진이 보였다.

“발밑에 새겨진 마법진도 눈치채지 못한 너 따위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지.”

황제가 다시 아셀라의 고개를 바로 세웠다. 잿빛 눈이 물건을 품평하듯 얼굴과 몸을 훑었다.

아셀라는 치욕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쓸 만한 실험체가 되겠어.”

남자의 눈이 잔악하게 빛나며 입매가 팽팽해졌다.

생기가 넘치는 눈빛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가지고 놀다 망가뜨리는 재미가 있을듯했다. 저 눈이 절망으로 물들 상상을 하자 짜릿해졌다.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린 황제가 눈동자만 돌려 베로니카에게 명령했다.

“약을 먹여.”

“네.”

아셀라가 몸을 비틀어 반항했으나 강제로 입술이 벌려졌다. 베로니카가 알약을 그녀의 목구멍에 깊숙이 밀어 넣어 삼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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