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71)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일어난 지 좀 지난 터라 슬슬 출출해지던 차였지만 이렇게 곧바로 신호를 보낼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이로군.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도 못하게 했으니.”

칼릭스가 낮게 웃으며 음식이 놓인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뜨거웠던 수프는 마침 먹기 좋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그가 적당히 온도를 가늠하며 말했다.

“아, 해봐.”

“네?”

물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고, 입술 앞의 스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도 고팠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부끄러움은 시작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칼릭스는 작정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낯뜨거운 말을 던져댔다.

“당신은 먹는 모습도 예쁘군.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야.”

“그, 그런 말 하지…… 읏……!”

그러다 아셀라가 항의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처음엔 가벼웠던 입맞춤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농염해졌다.

결국, 아셀라는 귀가 새빨개질 정도로 낯부끄러운 남편의 애정표현을 식사 내내 들어야만 했다.

“잘 먹네. 착하게도.”

아내의 식사 시중을 끝낸 칼릭스가 비워진 접시들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셀라는 그제야 그가 저를 챙기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식이 다 식어 버려서 안 되겠어요. 시종을 부를게요. 지금이라도 주방에 말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아니야.”

칼릭스가 호출구를 향해 손을 뻗는 그녀를 만류했다.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으니까.”

“네?”

아셀라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지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아내의 어깨를 붙잡아 천천히 그녀의 몸을 뒤로 눕혔다. 아셀라가 미처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칼릭스의 몸이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를 가두었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힌 순간, 아셀라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시선만으로도 단단히 옭아매지는 듯한 느낌.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빛이었다. 그의 이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이제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저인가요?”

나른하게 내리뜬 적안이 일순 번뜩이더니 그의 입꼬리가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정답이었다.

“당신을 탐하는 걸 허락해줘.”

어느새 탁해진 음성엔 해갈되지 않은 진한 정염이 묻어났다.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제 모습에, 아셀라는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남자가 저를 절실히 원한다는 게 기뻤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38화

23. 폭풍전야

다섯의 예언 신관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에게 걸어두었던 흑주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다시 잡아들일 수도 없었다. 황제는 분노했다.

신관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황제의 개들은 황궁으로 끌려왔다. 임무를 망친 죄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직접 그들의 숨을 거두고 나서도, 황제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 겨우 실험체 하나 잡아두는 것도 제대로 못 해!”

페르난데가 집무실 책상 위를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놓여 있던 서류며 집기들이 죄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던컨은 제 옆의 베로니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정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아비인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갈수록 예민해졌다.

하루에도 불쑥불쑥 화를 내기가 부지기수였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이성을 잃고 물건을 부수거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던컨과 베로니카를 불러 세워놓곤 닦달을 해댔다.

그러던 와중 신관들의 흑주술이 풀리고 그들이 종적을 감추면서, 그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식식대며 분풀이를 해대던 페르난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광기로 이글거리는 잿빛 눈이 두 사람을 향했다.

“당장 실험체를 마련해. 얼마가 되든, 무슨 수를 써서든-”

“소용없을 거예요.”

“뭐?”

베로니카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시잖아요. 평범한 인간은 베네비토 혈족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요. 신성력을 지닌 신관도 여간해서는 버티지 못할 정도니까요.”

페르난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잇새로 까득,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베네비토의 핏줄을 타고 대대로 전해지는 격세유전의 힘.

비록 능력이 발현된 혈족은 개중 몇 명에 불과했으나, 혈족 모두가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손댈 수 없었던 칼릭스 베네비토 대신 킬리언을 택했다.

그렇게 성배도, 선대공의 심장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성배는 자신을 만들어낸 이의 의지를 따라 그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아무리 마력을 쏟아도 작동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물거품이 될 뻔했던 계획이 계속될 수 있었던 건 때마침 우연히 예배당 지하에 들어왔던 베로니카 덕분이었다.

비밀이 새어나갈 걸 우려한 페르난데가 베로니카를 제거하려던 순간, 성배가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성배를 이용해 선대공의 심장에서 베네비토 혈족의 힘을 뽑아냈다.

그러나 막상 그 단계까지 가자,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약을 주입해 봤자 이전처럼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사망하겠죠. 이식에 성공하더라도 동조율이 형편없이 낮을 테고요.”

“그래서, 지금 와서 그만두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페르난데의 눈이 흉포한 짐승처럼 번득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이용가치를 판단하는 눈빛이었다.

여기서 황제에게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폐기 처분될 미래가 보였다. 베로니카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 평범한 인간을 대상으론 실험이 의미 없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니까요.”

그제야 페르난데의 매섭던 기세가 잠잠해졌다. 탁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정 평범한 인간으론 불가능하다면…….”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해 낸 그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기괴하리만치 비틀린 표정에 베로니카와 던컨은 흠칫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실험체로 이능자는 어떻겠나?”

순간 베로니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표정을 감추며 안쪽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지. 써먹을 데가 있다면 이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허공을 바라보는 페르난데의 잿빛 눈이 묘한 희열로 번들거렸다.

* * *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연회가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날 대공 부부가 수도로 출발할 예정이었기에 대공성은 무척이나 부산했다. 누구 하나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건 아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과를 마친 그녀는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수틀을 잡았다. 마고가 그녀의 체력을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 않고요.”

“출발 전까지는 완성하고 싶어서요.”

수틀에는 칼릭스에게 선물했던 손수건이 고정되어 있었다. 지난번 시간이 부족해 세 귀퉁이밖에 수를 놓지 못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성으로 돌아오고 난 뒤 바로 그에게서 손수건을 받아두었으나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 틈틈이 수를 놓았으나 벌써 내일이 수도로 떠나는 출발일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조금만 더 하면 돼요.”

“그래도 내일 일찍 출발하시려면 일찍 주무시는 게 좋습니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해요. 마무리하는 대로 잘게요.”

안주인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마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이부자리를 정리해 드리러 오겠습니다. 차 한 잔 올릴까요?”

“고마워요.”

아셀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홀로 침실에 남은 아셀라는 바늘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목에 완성된 손수건을 묶어 줄 상상을 하자 마음이 설��다.

‘이미 한번 해봤으면서.’

켈튼산으로 출병하는 칼릭스의 무운을 빌며 손수건을 묶어주었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성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손수건을 풀지 않았다.

전통대로 침실로 돌아와 키스를 나눈 뒤, 아셀라가 풀어주었다.

“갑갑하면 풀어도 괜찮았는데…….”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란히 걷던 산길도, 그의 품에 안겨 달려나가던 빗줄기 속도, 그리고 온기로 그득했던 막사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격렬한 시간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셀라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야.’

오늘은 꼭 완성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셀라가 바늘을 천에 밀어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몰입했다. 수놓는 건 평소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칼릭스, 사랑하는 남편에게 무언갈 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절로 입이 벌어지며 흥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신이 나서인지 손놀림도 빨라졌다.

그녀의 바늘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검은 천을 색색으로 물들였다.

“……비전하?”

덕분에 마고가 다시 아셀라의 침실에 들어섰을 땐, 이미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협탁에 그녀가 수놓은 손수건만이 곱게 개켜져 놓여 있었다.

* * *

수도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연회 당일 아침 수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일부러 이동 일정을 빠듯하게 잡은 건 칼릭스의 뜻이었다. 일찍 수도에 도착해 보아야 황제에게 시간을 더 줄 뿐이었으니까.

막 바깥으로 나온 아셀라가 다른 마차에 타려는 메리엘을 발견하곤 불러세웠다.

“메리엘, 네가 탈 마차는 여기야.”

“아냐! 언니는 전하랑 같이 마차 타. 나는 로메인 부인이랑 탈래.”

그러고는 아셀라가 말릴 틈도 없이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물론 아셀라는 메리엘과 칼릭스 사이에 모종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녀가 당혹해하며 동생을 데리고 나오려 했으나 마고가 말렸다.

“괜찮습니다, 비전하.”

“아녜요. 일주일이나 되는 길인데 폐를 끼칠 순 없어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영애를 돌보는 건 제 일이기도 합니다.”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유디트와 알렌도 말을 거들었다.

“저희도 있으니 심려 마세요.”

“하지만…….”

“겸사겸사 영애와 마법 연습도 하면 됩니다.”

계속된 설득을 이기지 못했다.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혹여 아이가 힘들게 하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한편 아셀라가 막 마차에 오르던 그 시각, 칼릭스는 집무실에서 출발 전 마지막 보고를 받았다.

황제가 제 수족을 수도 곳곳에 깔아두었으리라는 건 쉽게 예상 가능했다.

간단하게는 그들 일행의 구성원을 알아내기 위한 정찰부터, 가능하다면 빈틈을 엿본 공격까지도 준비하고 있을 터.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라이젠이 이끌던 카르마를 먼저 수도에 보냈다. 아셀라와 동행하는 길이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제1의 카르마 전원이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곧 인원을 나누어 성문부터 수도의 대공저, 황궁에 이르는 길목마다 배치될 예정입니다.”

“빈틈이 있어선 안 된다. 안전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예, 전하.”

충직한 보좌관의 대답을 들은 칼릭스의 눈이 옆의 지크에게로 향했다. 주인의 시선을 받은 청년이 호기롭게 외쳤다.

“저희도 준비는 완벽합니다. 걱정마십쇼!”

그러자 칼릭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지크, 네가 가장 우선해야 할 이가 누군가.”

“당연히 전하시죠!”

친우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들으며 라이젠이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나. 아니나 다를까 주인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제야 지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흠칫했다. 그의 목이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아가더니 라이젠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또 말실수했냐?’

‘어.’

그걸 이제야 알았냐. 라이젠은 이제 지크의 뇌가 퇴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지크는 칼릭스가 한쪽 입매를 비틀며 짓는 서늘한 미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릿속에서 위기 경보가 울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이 땡땡 굳어버린 뇌를 움직였다.

생존 본능 하나만큼은 탁월한 지크가, 머리를 열심히 굴린 끝에 간신히 답을 쥐어짰다.

“그, 그럼…… 혹시 비전하……?”

후우, 그제야 라이젠이 소리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크는 눈동자만 굴려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칼릭스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심하라.”

라이젠과 지크의 고개가 비스듬히 숙여졌다.

“만일 비상상황이 벌어졌을 시, 너희가 제일 먼저 보호해야 할 이는 내 비다.”

경고하듯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에 무게가 있다면 아마도 몸이 내리눌렸을 것이다.

둘은 주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으로 감히 거스르지 못할 압박감을 느꼈다.

“적이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게 해선 안 될 것이다.”

“존명.”

대공의 두 수하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성내의 사용인과 기사들이 저택의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칼릭스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노집사 파비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크고 호화로운 마차 문을 열었다.

“비전하께선 안에 계십니다.”

칼릭스는 마차에 타려다 문득 멈춰 섰다. 몸을 돌린 그가 잠시 대공가 가솔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수고하도록.”

나와 있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껏 주인을 모시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어서였다.

그들의 주인은 관대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처벌도 가차 없었다. 반면 일을 잘하더라도 칭찬 같은 건 기대를 말아야 했다.

그랬던 대공이, 지금 그들을 무려 격려한 거였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파비안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모두를 대표해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전하.”

그제야 다들 정신을 차리곤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칼릭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내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마차에 점점 속도가 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점처럼 작아졌다.

그제야 노집사는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멀어지는 행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주하는 대공비 139화

여정은 순조로웠다.

아셀라는 혹시 모를 습격 등을 내심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작은 사고 하나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메리엘도 힘든 내색 없이 마차 여행하듯 즐거워했다.

그녀로서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칼릭스는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다가도 동생과 시간을 보내라며 곧잘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럴 때면 아셀라는 창을 통해 그의 모습을 내다보곤 했다.

흑마를 탄 남편은 너무 근사하고 멋있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들이 지금 수도에 간다는 것, 그리고 곧 황궁 연회에 참석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우리만치 평온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이레째의 아침이 밝았다.

“언니, 저기 봐! 수도야!”

메리엘이 바깥을 가리키며 외쳤다. 높다란 성벽과 함께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수도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성문을 통과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으나 검문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대공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을 미리 연락받았던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대공 부부 일행을 맞이했다.

칼릭스가 마차에서 내리는 아셀라를 에스코트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약간의 긴장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수도에 온 걸 환영해, 나의 레이디.”

“가, 갑자기…….”

묘하게 낯부끄러워지는 말에 아셀라의 뺨이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밝게 답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공님.”

그녀에게서 긴장이 허물어지자 칼릭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제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잘생긴 남편이었다. 무표정할 때도 수려한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미소까지 머금으니 탄성이 나올 정도로 빛나 보였다.

“왜, 내 얼굴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네.”

짓궂은 말에 아셀라가 태연히 응수하자, 이번에 당황한 건 칼릭스였다. 순간 크게 뜨인 그의 적안을 보며 그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당신한텐 못 당하겠어.”

그러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렇게 손을 잡은 부부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일행 역시 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섰다.

“영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나중에 봐, 언니!”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일행을 각각 준비된 방으로 안내했다. 건국제 연회가 열리는 저녁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서둘러야 했다.

아셀라는 칼릭스와 함께 대공비의 방으로 들어섰다.

“잠깐 물러가 있도록 해요.”

“예, 비전하.”

마고와 시녀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은 침대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아셀라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칼릭스가 팔로 그녀의 몸을 꼭 감쌌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들떴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고, 방 안에 진지한 기류가 흘렀다.

“당신, 지금 떨고 있는 거 알아?”

“조금…… 긴장이 되어서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걱정이 담겼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혹시 마음이 바뀐 거라면 말만 해.”

“아니에요.”

아셀라가 차분한 음색으로 답했다. 작지만 또렷한 음성에는 단호함마저 묻어났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 칼릭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당신은 여기에 안전히 있었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알아. 그래서 이렇게 참고 있고.”

칼릭스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황제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목숨을 빼앗는 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황제가 곳곳에 뿌려두었던 악을 세상에 밝히고 아내가 빼앗긴 것을 되찾게 하려면 다른 계획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지금껏 준비해 왔다.

완전히 뿌리 뽑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리라. 그의 눈빛이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워지던 때였다.

“칼릭스, 다 잘 될 거예요.”

아내의 목소리에 그의 살벌하던 기세가 금세 누그러졌다.

“아차,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줄 게 있었는데.”

아셀라가 품에서 공들여 완성한 손수건을 꺼냈다. 네 귀퉁이에 베네비토의 문장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수 놓여 있었다.

“바빴을 텐데 언제 이걸 다 한 거야.”

“틈틈이요.”

배시시 웃은 그녀가 그의 손목을 제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모양을 잡아 손수건을 묶고는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이 손수건이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아셀라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칼릭스는 손수건이 묶인 손목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셀라, 잠깐 눈 감아 보겠어?”

“눈을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머리칼과 귓가를 스치는 듯싶더니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목 근처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칼릭스, 이건…….”

그녀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비쳤다. 목걸이였다. 얇은 줄 한가운데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걸려있었다.

“내 어머니의 유품이야.”

아셀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가 신녀였을 때 사용했던 목걸이라더군. 지금까지 신력이 남아 있진 않겠지만,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

“이렇게 소중한 물건을…… 제게 주셔도 되는 거예요?”

“내겐 당신이 가장 소중하니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너무나 행복해서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당신과 함께 갈 곳이 있어.”

“거기가…… 어딘데요?”

“샤르투스 후작저.”

아셀라의 눈이 거센 풍랑이 이는 것처럼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택은 당신 앞으로 돌려두었어. 원래 당신 거니까.”

황제와의 거래로 샤르투스를 멸문시키면서 샤르투스가 소유했던 막대한 부도 황가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수도의 후작저만큼은 약속대로 황제에게서 받아내 베네비토의 소유로 만들었다.

정확히는 베네비토 대공비의 명의로.

그땐 저 자신도 그 일을 고집했던 이유를 몰랐으나 이젠 알았다. 마음을 깨닫고 보니 명확해졌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곳. 어렸을 때의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

어쩌면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를 아내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였다.

“더 일찍 말해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꼬리에는 대롱대롱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마워요.”

목소리엔 물기가 가득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밀려드는 감동과 고마움 때문이었다.

칼릭스는 제게 안겨드는 아내의 몸을 끌어안았다. 가냘픈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는 아내의 등을 도닥이며 그녀의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다.

“이젠 당신이 잃은 모든 걸 되찾게 될 거야.”

* * *

“비전하,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마고의 지시에 따라 시녀들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서 아셀라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황제를 만나면…….’

어머니를 죽이고 비틀린 웃음을 짓던 그를 생각하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흥분해선 안 됐다.

그녀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곤 오늘 할 일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렇게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치마 끝단을 정리한 마고가 몸을 일으켰다.

“다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대기하던 라이젠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는 마탑주와 함께 조금 전 먼저 황궁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알고 있어요.”

아셀라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마차 앞에서 유디트와 메리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셀라가 살짝 무릎을 굽혀 동생과 시선을 맞추었다. 메리엘이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감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 조심해서 다녀와. 기다릴게.”

아셀라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겠노라 약속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히 마고에게로 향했다.

“부인, 메리엘을 부탁할게요.”

“염려 놓으십시오, 비전하.”

마고의 뒤로 로샨과 다섯 신관이 보였다. 인자한 얼굴에는 응원하듯 따뜻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로샨이 앞으로 걸어 나와 아셀라의 머리 위에 축복의 기운을 쏟았다.

긴장이 풀리고 기력이 차올랐다. 무언가가 가슴 가득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요.”

“아녜요. 덕분에 기운이 나요.”

아셀라의 화답에 빙그레 웃은 로샨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스스로를, 그리고 전하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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