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1)
  • “당신에게서 떠날 생각인 거냐고요. 제가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는데도…….”

    “그래. 불안했으니까.”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요?”

    짙은 크림슨 빛깔의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단지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아셀라의 몸이 작게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건 이상했다. 마치 눈동자 안에 갇힌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칼릭스는 단호히 답했다. 목이 칼칼했다. 누군가가 그의 목구멍을 날카로운 바늘로 쑤시는듯한 기분이었다.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좋은 남편이 되어주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

    아내는 새였지만 새장 안에서는 살 수 없는 새였다. 푸른 하늘을 날아야만 숨 쉴 수 있는 새였다. 그래서 그는 문을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오도록.

    그의 불안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세상의 빛나는 모습에 반한 아내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래서 자꾸만 확인받고자 했다.

    밤이 되면 제 품에 날아들어 잠들 이 작은 새가, 그에게는 너무나 절실했다. 그래서 감히 기적을 바랐다.

    한데 그 기적조차 또 다른 이름의 덫이었나.

    설사 아내가 제 곁에 영원히 머무르길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 마음을 품는 순간 운명의 창이 새의 심장을 꿰뚫고 말 거였다.

    목이 졸리는듯한 기분에 악물린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팔뚝에 핏줄이 솟으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칼릭스, 당신…….”

    붉은 눈에 맺힌 감정은 이제 진하다 못해 처절한 빛을 띠었다.

    아셀라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던 남자가, 제 앞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란과 불안이 붉은 눈에 일렁였다.

    “당신이 날 떠날까 봐 미칠 것만 같았어.”

    불쑥, 물기 하나 없이 버썩 메마른 음성이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젠 내 잘못으로 당신을 잃을까 봐 겁이 나.”

    “칼릭스.”

    “두렵고 또 두려워져.”

    아셀라의 심장이 뻐근하게 죄어들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애달프고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당신을 놓아주지 못하겠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칼릭스가 입가에 설핏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도 너무 슬퍼 보여서 아셀라는 뜨거워지려는 눈을 급히 깜박거려야만 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그러쥐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자칫 잘못하면 깨지고 말 여리고 약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곤 한참이 지나도록 입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세상에 그녀 하나밖에 없다는 듯 오롯하게 꽂히는 시선에 아셀라가 숨을 삼켰다.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눈빛이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에 어떠한 단단한 결심이 어려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갑작스레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언가 생소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마치 이어질 말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리며 가파르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알아.”

    “칼릭-”

    “당신을 사랑하는 게 죄라는 것도.”

    그대로 그녀의 동작이 멈추었다.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그는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심장을 울리는 뜨거운 고백. 아셀라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36화

    이내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한때, 제 삶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눈이 잔뜩 쌓여 발이 푹푹 빠지고 제대로 된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차갑고 메마른 땅.

    자신이 선 곳도,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그 척박한 길을 걷고 또 걸어야만 했다. 어딘가에 있을 한 줌의 온기를 찾아서.

    그러다 외로움에 지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숨죽여 울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려 할 때.

    누군가가 저를 안아주었다.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주었다. 기꺼이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었다. 힘들고 아파할 때마다 보듬어주었다.

    기대도 희망도 놓았던 저가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칼릭스.”

    바로 당신이.

    어째서 몰랐을까. 당신의 사랑을 왜 몰라보았을까. 그렇게 아낌없이 마음을 쏟아부어 주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 왜 지금까지 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매일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잡고 입맞춤하고 싶었다. 그가 짓는 웃음에 설��다. 넓고 따스한 품에 안길 때마다 마음이 넉넉해지곤 했다.

    가랑비에 옷자락이 조금씩 젖는 것처럼, 그와 나누는 일상이 서서히 제 안에 스며들었다. 어느새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가 힘들어졌다.

    ‘실은 나도 당신을…….’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제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해져 버렸다.

    그를 향한 마음이 그릇을 가득 채워버리다 못해 바깥까지 넘쳐 흘렀다. 부인할 수 없는 이 감정의 이름은…….

    언제부턴가 시작된 눈물이 하얀 뺨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동그랗게 맺힌 방울이 연신 툭툭 떨어졌다.

    칼릭스의 얼굴에 짙은 죄책감이 어렸다. 아내의 눈물은 늘 그를 가슴 아프게 만들곤 했다.

    “이건 내 문제니까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보답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러니-”

    “사랑해요.”

    칼릭스의 동작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커다랗게 뜨인 적안에 충격과 놀라움이 여실히 드러났다.

    차양처럼 길게 드리운 검은 속눈썹이 미친 듯이 떨리고, 온갖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는 어지럽게 일렁였다.

    혼란스러웠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 아니, 그래선 안 돼. 당신은 날 사랑해서는-

    그러나 뜨겁고 보드라운 입술이 제게 닿은 순간, 생각은 그대로 멎어버렸다. 머릿속이 어찔해지며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영역표시를 하듯 제 것을 내리눌렀다. 그러곤 천천히 입술을 가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말랑한 혀가 그의 가지런한 치아를 톡톡 건드렸다.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듯한 수줍은 움직임에,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먹을 듯 덮쳤다.

    “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찌릿한 느낌에 아셀라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지체하지 않고 입술을 삼켰다.

    작은 틈도 없이 꽉 맞물린 두 입술 사이로 그가 뜨거운 혀를 강하게 밀어 넣었다. 이내 표적을 찾은 그가 그녀의 혀뿌리를 얽어 쭉 뽑아내듯 빨아들이자 아셀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혀가 농밀하게 뒤엉키면서 타액이 섞였다.

    서로의 입안을 거침없이 헤집고 숨을 빨아들였다. 습하고 축축한 소리가 부푼 입술 틈에서 연신 새어 나왔다.

    “하아…….”

    그러다 그녀의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그는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각도를 달리하며 밀어붙였다.

    서로를 갈구하는 움직임이 마치 약탈하는 무법자만큼이나 거침없었다. 황홀하고 짜릿한 감각이 둘의 머릿속을 휘저으며 남김없이 태웠다.

    마침내, 두 사람이 뜨거운 숨을 토하며 입술을 떼어냈다. 고요한 침실에는 가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다 그녀의 헐떡임이 가라앉고, 거칠게 오르내리던 그의 가슴도 잦아들자 흩어졌던 이성도 제자리를 찾았다.

    칼릭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드리운 건 그때였다.

    아내의 말이 진실이 아닐 거라는 괴로움, 반대로 진실이라면 그녀를 잃고 말리라는 두려움.

    그때, 그의 심장께를 아셀라의 손이 지그시 눌렀다.

    난데없는 행동에 의문을 품던 찰나, 아셀라가 그를 안심시키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힘이 터져 나왔다. 마치 한낮처럼 밝고도 찬란한 빛이었다.

    칼릭스는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빛의 향연 속에서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했다.

    ‘광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던 마족의 기운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약점 하나 없이 완벽했던 계약의 술식이 차례로 해체되며 조각조각 깨지기 시작한 거였다.

    그간 악랄하고 끈덕지게 눌어붙어 그를 괴롭혔던 광기와 충동이 찢겨져 나갔다.

    숨을 죽이며 숨어들어도 소용없었다. 그의 미세한 혈관 하나하나까지 번져나간 빛은 기어이 숨어 있는 악을 찾아내 처단했다.

    그렇게 수 대의 베네비토가 평생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저주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마침내, 핏줄에 새겨졌던 끔찍하고 지독한 계약이 완전히 사멸했다.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요가 찾아왔다.

    평온한 정적 속,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세상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아셀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달콤하게 간질였다.

    “칼릭스, 사랑해요.”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렁이며 요동쳤다.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원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기쁨을 도무지 드러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 눈에 그녀를 담고 또 담았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자 아셀라의 눈이 사르르 접히며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민망하게.”

    저를 향한 물빛 눈동자엔 온기가 가득했다. 그 눈빛에 그대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가슴이 벅차올랐다. 격동하는 심장은 이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칼릭스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힘주어 품에 끌어안았다.

    “윽…… 칼릭스, 숨 막혀요…….”

    “잠시만, 이대로 있어.”

    그는 품에 안긴 아내의 숨결과 옅은 꽃향기가 나는 체취, 그리고 몸에 닿는 감촉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이 순간을 영원히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답답함에 잠시 바르작대던 아셀라는 이내 포기했는지 그의 품에 몸을 내맡겼다. 그는 힘을 빼고 기대오는 아내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곧 침실에는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셀라, 그거 알아?”

    “뭘요?”

    칼릭스가 팔을 느슨히 풀며 묻자, 아셀라가 살짝 몸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수려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지나치게 근사한 미소였다.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신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었어.”

    그의 목소리가 마른 땅을 적시는 빗방울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아셀라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묵직한 저음이 그녀의 귓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당신은 내 전부야, 아셀라.”

    칼릭스가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두 사람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아셀라는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응시했다. 오직 저만이 오롯이 담긴 눈이었다.

    고작 그 사실 하나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녀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의 몸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사랑해, 진심으로.”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둘은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 * *

    동이 막 트는 새벽녘, 칼릭스가 눈을 떴다. 짧은 잠을 끝내고 몸을 일으킨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건 하나뿐인 아내였다.

    아셀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와 긴 밤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난밤을 떠올린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뜨겁고 황홀한 밤이었다. 사랑을 확인한 부부는 거침이 없었다. 매 순간순간이 열락이었다.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깊은 곳까지 닿을 때마다 기쁨이 휘몰아쳤다.

    ‘칼릭스……!’

    ‘지금 당신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하아……. 몰라요.’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몸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순히 고개를 내리자 귓가에 대고 가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어요.’

    ‘뭔데?’

    ‘당신이 멋있다는 거요.’

    ‘얼마나?’

    ‘세상에서 제일…….’

    ‘내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들지?’

    ‘얼굴도 잘생겼고 당신 몸도……. 다 좋아서 못 고르겠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또 저를 사랑해 주는 여자를 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단순한 쾌락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결합이었다. 저를 온전히 내던지고, 또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고 아득한 행복에 겨웠던 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게 해준 신께 감사했다.

    “으응…….”

    아셀라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꼬물거리며 파고들었다.

    칼릭스가 제 쪽의 이불을 끌어 찬 새벽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히 눌러 덮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의 불길이 거의 사윈 탓에 방의 공기가 제법 서늘해져 있었다.

    그는 불씨가 깜박거리는 벽난로 안에 마른 장작 몇 개를 던져넣어 불을 피우고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내 방에 훈기가 감돌았다. 아셀라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칼릭스는 아내의 희고 말간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동그란 이마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사랑해.”

    무슨 꿈을 꾸는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떠오르는 태양 빛이 방에 스며드는 내내, 그는 잠든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생을 통틀어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아침을 맞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37화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고소하고 향긋한 풍미가 물씬 느껴졌다. 맛있는 냄새. 아셀라는 홀리듯 그 향기를 찾았다. 자연히 감긴 눈이 스르르 뜨였다.

    “잘 잤어?”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온 목소리에 아셀라가 눈을 끔벅거렸다. 낮고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혼미했던 정신이 차차 맑아지며 눈동자에 누군가의 상이 맺혔다. 남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칼릭스.”

    그가 그녀의 뺨에 짧게 입 맞추자, 아셀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꿈을 꿨어요.”

    “그래? 어떤 꿈이었는데?”

    “음, 당신이랑 여행을 갔어요. 단둘이서요.”

    “어디로 갔는데?”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요. 정말로 여행 가게 되면요.”

    “궁금해 죽기 전에 서둘러 여행 계획을 세워야겠군.”

    농담같이 돌아온 대답에 아셀라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가 따라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아내를 부축했다. 침대 머리맡에 그녀를 기대어 앉히고는 가장 먼저 시장기를 살폈다.

    “아침 먹어야지.”

    아셀라는 그제야 침대 옆에 바짝 붙은 테이블을 발견했다.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이걸 다 준비하셨어요?”

    “준비랄 게 있나. 요리장이 바빴겠지.”

    “그래도 일찍 일어나셨을 거 아녜요.”

    “글쎄. 동이 틀 즈음이었나.”

    아셀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게 조금밖에 안 자고도 괜찮아요?”

    “원래 잠이 그다지 필요치 않은 몸이라 문제없어.”

    애초에 반은 마족이나 다름없는 몸이다. 타고난 신체가 강인했고 웬만한 병이나 독에도 자유로웠다. 깊은 상처를 입더라도 회복 속도가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베네비토의 힘은 들을수록 신기하고 놀라워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칼릭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셀라를 응시했다. 따뜻한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에 아셀라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당신의 이능이야말로 내겐 기적이니까.”

    어젯밤 아셀라의 빛은 그의 피에서 계약의 대가를 제거했다. 그러나 혈족 대대로 내려오는 힘과 능력은 고스란히 남았다.

    필요한 힘만 남기고 부작용만 없앤 것이다.

    “감히 당신의 이능과 비교할 수도 없지. 이런 타락한 힘 따윌-”

    “타락한 힘이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 힘은 처음부터 초대 베네비토 대공의 거였어요.”

    “마족의 능력이 아니었다고?”

    어제 이능을 쓴 직후만 해도 반신반의했으나, 그의 힘이 안정된 지금은 확실해졌다.

    “마족이 그분을 속이고 가짜 계약을 맺은 거예요.”

    그랬기에 마족의 힘을 파괴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은 거였다. 황망함에 칼릭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은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불공정 계약이 따로 없었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고는 조금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실은 받은 만큼 돌려주려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돌려주려 했다고?”

    칼릭스의 적안이 크게 뜨였다.

    “아직도 그 마족이 세상에 현존한다는 의미야?”

    “네.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굉장히 희미한 기운이었던 걸 보면 힘이 몹시 약해진 것 같지만요. 그래서 역으로 이능을 불어넣어 공격하려 했는데…….”

    아셀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연결이 너무 약해진 탓인지 도중에 끊어져 버렸어요.”

    ‘마족이 아직도 소멸하지 않았다는 건가.’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조합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어떤 가능성 하나를 찾아냈다. 아셀라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제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황제의 흑마법 말이에요, 본인의 능력만으로 힘을 얻는 게 가능했을까요?”

    “접근이 쉽진 않지. 흑마법은 제국의 금기 중 금기니까. 타고난 마력이 월등했다지만 페르난데는 당시 일개 황자였고.”

    고대에 사용됐다는 흑마법의 기록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소실된 상태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황제가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얻고 습득했는지 의구심이 일었다.

    “누군가의 조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마족과 흑마법이라,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지.”

    칼릭스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전쟁터에서 적을 베어낼 때와 유사한 눈빛이었다.

    “황제가 마족의 힘을 빌렸을 거예요.”

    “혹은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마족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거나.”

    결론은 명확했다.

    “칼릭스, 베로니카 황녀가 선대공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하셨죠?”

    그는 물음의 의미를 곧바로 읽어냈다.

    “그 베로니카 황녀는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고.”

    “황녀의 나이가 스물이에요. 그간 언급 한 번 없다가 갑자기 데뷔탕트라니,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해요.”

    베로니카 황녀의 이야기는 귀족 사회에서 유명했다. 황제는 자식이 여럿 있었으나 유독 베로니카에게 매정했다.

    성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못한 황녀. 오죽하면 ‘황제의 내놓은 자식’이라는 오명까지 나돌 정도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황녀의 입지란 뻔했다. 귀족들은 대놓고 그녀를 괄시했다.

    그런데 돌연, 건국제 연회를 앞두고 황녀의 데뷔탕트가 대대적으로 공표됐다.

    “페르난데의 변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황녀가 선대공 전하의 죽음을 목격한 사실을 황제도 알아차렸을까요?”

    “눈치채지 못할 리가. 의문인 건 왜 황제가 황녀의 입막음을 시도하지 않았느냐는 거야.”

    증인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베로니카를 제거하려 들었을 터. 자식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년 시절부터 박대하던 황녀였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을 터다.

    “황제에게 황녀를 살려두어야만 할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황녀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지는 몰라도, 황제에게 쓸모를 증명했을 것이다.

    “확실친 않지만 성배와 관련이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황제만 출입한다는 황궁의 비밀 장소가 그 예배당일 테고, 거기서 일을 꾸미고 있겠지.”

    황궁에 잠입한 권속들로부터 지금껏 보고받은 내용과 영상 속 예배당의 위치가 딱 들어맞았다.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난데의 계획이 뭔지 서둘러 밝혀내야겠군.”

    “신중해야 해요, 칼릭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게 꼼꼼히 준비해야 하고요.”

    아셀라가 침착하게 말했다.

    건국제 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의 뒤에 마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일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셀라.”

    칼릭스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아내의 이마에 다정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피부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퍼뜩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칼릭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 남편 그렇게 허술하지 않으니까.”

    “그래도요.”

    망설임이 담긴 대답에 그가 다시 그녀의 뺨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떼며 짓궂게 물었다.

    “혹시, 날 못 믿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셀라가 황급히 외쳤다. 웃음을 흘리는 칼릭스를 보고서야 그의 장난임을 눈치챈 그녀가 발끈했다.

    “이렇게 놀리기예요?”

    “어쩔 수가 없었어.”

    “핑계 댈 생각은 말아요. 넘어가 주지 않을 테니까.”

    아셀라가 한껏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내에게 푹 빠진 사내에겐 예쁘기만 했다.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어져.”

    “아…….”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스치더니 순식간에 둘의 입술이 맞붙었다.

    쪽, 입술을 머금듯 한번 빨아들인 그가 그녀를 놓아주곤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킬 거야. 날 믿어.”

    중저음의 진중한 목소리에 내심 남아 있던 일말의 걱정마저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부터 누구보다 신뢰하게 된 남편이었다. 간밤의 일로 둘 사이의 믿음은 더 견고해졌다.

    “……당신을 믿어요. 고마워요.”

    “그건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아내를 생각하면 뜨거운 애정과 함께 깊은 행복감이 일었다.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곁에 있어 주어서, 마음을 받아주어서, 저를 믿고 의지해 주어서.

    아니,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고마워, 아셀라.”

    그녀가 갓 봉오리를 열어젖힌 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살짝 발그레해진 뺨이 사랑스러웠다. 당장에라도 이 어여쁜 여자를 품고 싶어 그는 몸이 달았다.

    들끓는 열망에 아내를 향해 막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그녀의 배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릭스는 동작을 멈추었고, 아셀라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아, 저, 이, 이건…….”

    아셀라가 말을 더듬었다. 하필이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쩜 좋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