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71)
  • 이제 이능자가 된 대공비는 페르난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마법 영상구에 비쳤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제 동생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녔을 가능성이 컸다.

    “하나 아무리 대단한 이능이라 한들, 실험만 성공하면 끝이다.”

    동조율이 조금만 더 오르면 힘을 이식할 예정이었다. 이제 머지않았다.

    “어쩌면 메리엘 록트린도 수도에 함께 데려올지 모르겠군.”

    제 남편에게 청해 공국으로 데려갔을 정도로 끔찍이 동생을 아끼는 계집이었다. 여간해서는 둘이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보내온 명단에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연회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함께 수도에 올 공산이 컸다.

    “수도 성벽 근처에 개들을 풀어라. 대공 일행에 누가 포함되었는지 건국제 연회 시작 전까지 확실하게 파악해.”

    지금껏 손대지 못했던 공국과는 달리, 수도는 그에게 훨씬 유리한 놀이터였다. 얼마든지 유리하게 판을 짤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내내 발치에 걸리적거렸던 샤르투스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이었다.

    “반드시 죽여 없애라.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묘하게 공백이 있는 던컨의 대답에 페르난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리석은 것. 이제는 제대로 표정도 숨기지 못하는군.’

    그간 남겨둔 재미있는 유흥거리가 있어 던컨을 살려두었건만, 이 일이 끝나면 아무래도 폐기해야 할 성싶었다.

    “그 외 주요한 참석자는 누가 있지?”

    “성녀와 마탑주가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의외의 소식에 페르난데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두 사람은 지금껏 황궁의 어떤 행사에도 참석한 전적이 없었다. 특히나 마탑주는 신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성녀야 그렇다 치고서라도 마탑주가 연회에 온다 했다는 말이냐?”

    그간 수차례의 행사에도 얼굴을 비친 적 없던 이들의 갑작스러운 참석 통보.

    “던컨,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씀이신지요?”

    “이 일이 과연 우연일까?”

    페르난데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벌레들이 무슨 재미난 일을 벌이려 드나. 조금은 시시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일이 대번에 흥미로워졌다.

    “재미있군.”

    “…….”

    “그렇다면 지금부터 정성껏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않겠나.”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던컨이 황후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만의 방문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딸의 데뷔탕트이니 마땅히 아비 된 도리로 신경 써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소름 끼칠 정도로 잔악한 기만이었다. 사람을 제 좋을 대로 가지고 노는 게 취미인 황제다. 자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나 대상이 페르난데에게 약점 잡힌 황녀, 베로니카라면.

    어찌 되었거나 건국제와 황녀의 데뷔탕트 준비는 차질없이 이뤄져야 했다. 황후궁에 있을 이를 만날 생각에 모르는 새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리사크 경.”

    그렇게 막 궁에 다다랐을 때쯤 던컨은 베로니카와 마주쳤다.

    며칠 전 가까스로 예배당 지하실에서 풀려난 그녀는 그때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황녀를 마주한 그가 허리를 숙였다.

    “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어머니를 뵈러 왔나요?”

    “예.”

    베로니카가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던컨에게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다. 그는 황제의 개였다. 아비의 주술에 속박된 저와 비슷한 신세였다.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다 언젠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될 삶.

    “황녀 저하도 곧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데뷔탕트와 관련해 몇 가지 폐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베로니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아시겠지만 어머니 앞에선 각별히 언행을 조심하세요. 눈치가 빠른 분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던컨은 내심 감탄했다.

    그는 황제의 주술에 당한 이들을 여럿 보았다. 대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아가 흐려지며 정신이 망가졌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수년 간 황제에게 속박당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냈다.

    겉으로는 겁 많고 소심한 척, 어미의 치마폭에 싸인 우둔한 황족인 양 행세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던컨은 황녀가 다른 이들 앞에서 실제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을 때의 영특함은 오히려 독이다.

    겉으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은 가히 놀라웠다.

    던컨은 이를 알면서도 부러 모른 척했다. 이유는 저도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머니는 다음에 찾아 뵈어야겠군요.”

    “아닙니다, 저하. 시급한 사안은 아니니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뇨. 리사크 경이 황후궁에 직접 올 정도의 일이라면 필시 황제 폐하의 명이겠지요. 들어가 보세요.”

    던컨은 황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베로니카는 여러모로 아비인 황제를 닮지 않았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강직하고 올곧은 성정 역시 그러했다.

    여간한 일에는 이골이 난 던컨이었으나 베로니카 황녀만큼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황제의 소모품으로 쓰이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외모가 어머니를 빼닮아서일지도 몰랐다.

    “리사크 경!”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후 레티샤가 그들을 향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니를 발견한 베로니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머니!”

    레티샤는 딸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은 뒤, 던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웃음기가 사라진 냉랭한 얼굴이었다.

    * * *

    베로니카가 나중을 기약하며 황후궁을 나섰다.

    시녀들을 죄 물린 응접실, 문이 단단히 닫힌 걸 확인한 레티샤가 던컨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비수처럼 차가운 말이 날아갔다.

    “베로니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습나?”

    “아닙니다.”

    말도 걸지 말고, 되도록 마주치지도 말라던 말. 던컨도 기억했다.

    그러나 황녀가 페르난데에게 이용당하는 이상,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황후 폐하를 찾아뵈려다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다.”

    “우연이다?”

    “예.”

    그의 진심을 가늠하듯 레티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젊은 날의 빛나던 그녀처럼 여전히 생생한 눈빛에 던컨의 심장이 저릿해졌다.

    한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살피던 레티샤가 나직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전할 말이 뭐지?”

    도주하는 대공비 130화

    던컨이 나간 후, 레티샤는 테이블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엇이지?’

    ‘뮤텐 지방의 메리골드 찻잎입니다.’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나?’

    ‘좋아하셨던 것이기에…….’

    차가운 물음에 던컨은 고개를 떨구었다.

    바보 같은 남자. 그래서 저보다 불쌍한 남자. 그깟 스치듯 흘러버린 과거의 정이 다 무엇이라고.

    저를 살리려 인생을 내던진 사내가 가여워 생각지 않으려고 해도 불쑥불쑥 옛 감정이 고개를 들곤 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짓 마세요. 알겠나요?’

    꺼멓게 죽은 눈빛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받고 말았다.

    “뜨거운 물을 내오거라.”

    “네, 황후 폐하.”

    홀로 남은 레티샤는 조용히 찻잎을 우렸다. 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노란 꽃잎이 물 위로 둥실 떠올랐다.

    지난 일을 회상하는 눈동자에 서서히 그리움이 차올랐다.

    ‘던컨, 메리골드 꽃말이 뭔지 알아?’

    물기를 머금은 꽃잎이 하나둘씩 바닥에 가라앉으며 예쁜 색깔을 냈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야.’

    과거의 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미래를 꿈꾸던 때의 일이었다.

    레티샤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찻물을 머금자 특유의 향이 입안에 물씬 퍼졌다.

    ‘그래, 언젠가는 반드시.’

    달칵,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그녀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 * *

    메리엘의 생일 파티를 맞아 손님이 찾아왔다. 유디트와 로샨이었다.

    칼릭스로부터 미리 두 사람의 방문을 전해 들었던 아셀라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메리엘은 예기치 못한 초대 손님에 놀라워하며 기뻐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정원에 완벽한 야외 파티장이 완성되었다. 대공비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위해 사용인들이 밤새워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보는데도 믿어지지 않네.’

    메리엘을 기다리는 동안, 유디트와 로샨은 대공 부부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메리엘과 알렌에게서 미리 귀띔받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다.

    ‘이제 언니랑 전하는 진짜 부부가 됐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그간 두 분 전하 사이가 무척 가까워지셨어요.’

    그 말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어느새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아셀라야 원래도 성격이 온화하다 못해 물러터질 정도라지만…….’

    충격적인 대공의 모습에 유디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내를 에스코트하여 정원으로 나올 때부터, 칼릭스는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아셀라, 돌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걸어.’

    ‘그럴게요.’

    ‘거기 바닥이 파였어. 이쪽으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깨질세라 애지중지하는 게 보였다. 건네는 말 한마디, 대하는 행동마다 꿀에 설탕을 섞은 것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에서 그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단순한 동작마저 애틋했다.

    아셀라는 수줍어하면서도 남편의 손길을 마다치 않았다. 행복하게 웃는 얼굴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람 특유의 빛이 났다.

    이를 지켜보는 유디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잘됐어.’

    아셀라가 온전히 마음을 열기 전에 대공이 제 감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을지 걱정했었다.

    여린 아셀라가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끌려다니게 될까 봐 적잖이 우려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기우였다.

    누구보다도 아셀라의 행복을 바랐던 성녀는 안심했다.

    ‘그런데 서로의 마음을 모른다고……?’

    저렇게 티가 나는데.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데. 그러나 메리엘은 분명 그렇다고 장담했다.

    ‘진짜예요. 언니는 전하가 아내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기한테 잘해준다고 생각해요. 전하도 언니가 자길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요.’

    ‘네가 귀띔 좀 해주지 그랬어.’

    ‘살짝 말해줬는데…… 둘 다 안 믿던데요?’

    ‘뭐어?’

    ‘언니랑 전하는 바보야. 그쵸?’

    유디트가 대공 부부를 힐끗거렸다.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알콩달콩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매일 저러고 있으면서도 둘 다 모르고 있다는 게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있나. 아셀라야 그렇다 치고서라도 칼릭스는 의외였다.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치밀한 사내가 아니었던가.

    유디트는 대공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일부 수정했다.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인간 같으니.’

    물론, 좋은 평은 아니었다.

    “저기 메리엘이 오네요.”

    때마침 동생을 발견한 아셀라가 반갑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한껏 멋을 부린 메리엘을 꼭 안아주며 축하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메리엘.”

    “고마워, 언니.”

    “어서 이리 와 앉으렴.”

    주인공이 도착하자 파티가 열렸다. 규모는 작지만 알찬 생일 파티였다. 널찍한 식탁에는 온갖 화려한 식기와 풍성한 음식으로 가득했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할 즈음, 유디트가 품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들며 말했다.

    “자, 이건 내 선물!”

    유디트의 선물을 시작으로 메리엘의 앞에 다섯 개의 상자가 놓였다. 싱글벙글해진 아이가 아셀라에게 물었다.

    “열어봐도 돼?”

    “그럼.”

    신이 난 메리엘이 하나씩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축복이 담긴 팔찌를, 로샨은 만년필을, 알렌은 마법서를 선물했다. 선물을 확인할 때마다 메리엘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다음은 칼릭스의 선물이었다. 무언지 짐작이 가질 않는 납작한 상자였다.

    “……어?”

    상자 뚜껑을 연 메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의 반응에 다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메리엘 쪽으로 턱을 까닥였다.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였다.

    아이가 맨 위에 적혀있던 글씨를 천천히 읽었다.

    “……매매계약서?”

    “뭐?”

    놀란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엘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그녀가 상자에서 발견한 건 두툼한 서류 한 묶음이었다.

    토지와 건물, 그리고 건물에 딸린 가게의 소유주가 전부 메리엘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가게 이름이 익숙했다.

    “영애가 그 가게의 디저트를 좋아한다 들었어.”

    “딸기 밀푀유!”

    눈치 하면 둘째 가라도 서러울 메리엘이 소리쳤다.

    “앞으로 마음껏 먹도록.”

    “고맙습니다!”

    칼릭스가 입매를 당기며 낮게 웃었다. 그제야 남편이 벌인 일을 눈치챈 아셀라의 입이 벌어졌다.

    “칼릭스, 이건…….”

    너무 과해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올해는 당신 동생이 이능을 각성한 특별한 해잖아.”

    아셀라는 난감해졌다.

    ‘아무리 생일이라지만 열 살 아이에겐 너무 큰 선물이야.’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손님도 있고 사용인들도 지켜보고 있어. 그이를 곤란하게 만들 순 없어.’

    파티는 물론이거니와 동생의 선물까지 준비해 준 남편이었다. 자칫 잘못 말을 했다간 그의 성의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아셀라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칼릭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단지 저는…….”

    “아셀라.”

    몸을 일으킨 그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의 허리를 감으며 다정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 동생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고 싶다며.”

    이 남자가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접촉에 아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메리엘은 아직 어린애인걸요.”

    “동시에 록트린의 차기 가주이기도 하지. 실은 이보다 더한 걸 하고 싶었는데 참은 거야. 당신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당신도 참.”

    아셀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항복 선언이었다.

    빙그레 웃은 칼릭스가 그녀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도로 자리로 돌아온 그가 메리엘에게 말을 건넸다.

    “마지막 선물도 열어봐야지.”

    “아, 맞아요! 이제 언니 것만 남았네!”

    아셀라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메리엘의 작달막한 손가락이 리본을 푸는 걸 지켜보았다.

    제 선물이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동생이 실망하진 않을지 노파심이 일었다.

    “우와!”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아이는 태엽을 도르륵 감아 오르골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그러고는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다다 달려와 폭 안겼다.

    “정말 최고야!”

    “마음에 들어?”

    “응! 언니 선물이 제일 좋아!”

    메리엘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아셀라의 뺨에 뽀뽀했다. 그러고는 큰 목소리로 외치듯 물었다.

    “언니, 그런데 내가 부탁했던 건 혹시 어떻게 됐어?”

    “아.”

    아셀라가 칼릭스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동생의 머리를 쓸며 답했다.

    “같이 수도에 갈 수 있게 됐어.”

    “정말?”

    “응. 대신 정말 조심해야 해. 어딜 가든 기사를 대동하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이가 기쁨에 찬 탄성을 터뜨렸다. 아셀라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게 끝이면 좋았으련만, 메리엘이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다른 소원은?”

    “……어?”

    순간 튀어나온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아셀라는 제때 반응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소원이라니?”

    그 틈을 타 칼릭스가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멍해진 아내의 얼굴을 보며 그가 다시금 질문했다.

    “영애가 원하던 선물이 더 있었나?”

    “아, 아니에요. 메리엘이 잠깐 착각을-”

    “아닌데! 내가 언니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내 소원은 조…… 읍!”

    아셀라가 동생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다급히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말하면 안 된다고.

    순간 메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눈치 빠른 아이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셀라가 손에서 힘을 뺐다. 풀려난 메리엘이 얼른 내뱉은 말을 수습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제가 잠깐 착각해서 실수한 거예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칼릭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옆에서는 아셀라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다 보였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실수라.”

    아셀라가 다시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태가 얼굴에 역력했다.

    너무나 훤히 보여서 속아주려야 속아줄 수가 없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31화

    아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칼릭스는 그녀가 저가 모르는 비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밤에 그녀를 안으며 물어봐야 하나.

    그가 주는 자극과 쾌락에 약한 아내였다. 정신없이 몰아붙이다 절정의 문턱에서 물으면 저도 모르게 대답할지도.

    칼릭스가 그렇게 진실을 실토하게 할 온갖 음험한 방법을 떠올릴 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메리엘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눈 한쪽을 찡긋했다. 종달새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따로 말씀드릴게요.’

    입술 모양을 읽은 칼릭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한 정보원이 어디 있을까.

    아셀라는 동생에게 너무 과한 선물이라고 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저 자그마한 꼬마가 해준 일을 생각하면 몇 채든 더 사줄 수 있었다.

    “그래. 영애가 착각한 모양이군.”

    칼릭스가 느른한 말투로 말하자 그제야 아셀라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안심하는 아내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끌어당겼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에 피어올랐다.

    * * *

    메리엘의 첫 생일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하루 내내 대공성에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껏 뛰노느라 지친 메리엘이 이른 잠에 빠진 저녁, 칼릭스의 집무실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였다.

    메리엘의 생일 파티와는 별개로, 처음부터 유디트와 로샨의 방문은 예정된 일이었다. 켈튼 산에서 발견한 마수 떼와 의문의 동굴 때문이었다.

    칼릭스가 보낸 은밀한 연락을 받은 유디트는 곧바로 대공성을 찾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알렌이 방 한쪽을 쳐다보며 콧잔등을 매만졌다.

    “비전하께서 놀라시겠는데요.”

    “어쩌겠어. 잘나신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가 걱정하는 건 싫으시다는데. 어차피 말해줘야 하는데 굳이 번거롭게 말이야.”

    유디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무실 문이 열렸다.

    “다 와계셨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셀라가 칼릭스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문이 닫히자마자, 눈에 비친 희한한 광경에 멈칫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죠?”

    집무실에 낯선 이들이 있었다.

    반듯한 자세로 누운 다섯 명의 사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입은 옷이 원체 특이하여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분들은 신관 아닌가요?”

    모두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고 몸은 미동도 없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칼릭스가 유디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고개를 까닥인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짐작하신 바대로 이들은 신관이에요. 정확히는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은 예언 신관이죠.”

    “네? 하지만 이들을 어떻게…….”

    신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죽은 이의 몸에선 황제의 흑주술이 발견되었다. 그들 모두는 예언 신관이었다.

    “나머지 예언 신관도 흑주술에 걸려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하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는데…….”

    아셀라가 말끝을 흐리며 칼릭스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디트의 답이 이어졌다.

    “맞아요. 신전 곳곳에 황제의 눈과 귀가 있어 상황이 여의치 않았죠.”

    신전 내부에 적이 많아 피아 식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칼릭스가 은밀히 카르마를 신전에 보냈다고 했었다. 예언 신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분들에겐 흑주술이 걸리지 않았던 건가요?”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모두 흑주술에 걸려 있어요.”

    “뭐라고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아셀라가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주술의 속박 때문에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 줄 알았는데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더라고요.”

    “예외요?”

    “의식이 없는 동안에는 주술의 영향력이 줄어들어요. 기껏해야 꿈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지 잠든 육체까지는 건드리지 못하죠.”

    “그렇다면…….”

    아셀라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로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전하. 이들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습니다. 몸에 있는 신성력은 물론이고 흑주술과도 반발 작용이 일어나선 안 됐기에, 신중하게 준비해야 했어요.”

    “실수하는 즉시 황제가 알아챌 테니까요.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성공했죠.”

    유디트가 그간의 고행을 짐작게 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곤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첩자의 눈을 따돌리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어.”

    “보고는 받았다.”

    “신전에 그렇게 많은 첩자가 들어와 있을 줄 몰랐어. 설마하니 신관의 일 할이 첩자일 줄은…….”

    그간 침대 머리맡에 화약고를 두고 지내왔던 셈이었다. 신전 여기저기에 함정이 설치되어 멀쩡한 공간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대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을 몰래 빼내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알렌도 고생 많았어.”

    “제가 뭘요. 모두가 전하 덕분이지요.”

    알렌이 손사래를 치며 겸양의 말을 했다.

    성 밖에 포털을 만들 적당한 위치를 고르고, 혹시 모를 눈을 피해 상당한 거리까지 경비를 세웠다.

    포털이 열리는 동안이 가장 방어에 취약했다. 와선 안 될 이들이 포털을 타고 넘어올 수도 있었다.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이를 위해 대공성 내 모든 전투 인력이 움직였다. 비상 전투태세로 성의 방비를 견고히 했다.

    준비가 끝나자마자 알렌이 포털을 열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신전의 좌표를 찾아내 연결하고 신관들을 이동시킨 뒤, 포털의 폐쇄까지 마무리했다.

    듣고 있던 아셀라가 놀란 눈으로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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