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71)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멀쩡하게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서 벗어나거나 달아나려 들면 가차 없었다. 그때마다 밀실은 다시 열렸다.

    견디다 못해 다른 방도를 찾는 대공비도 없잖아 있었으나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대공들은 아내의 크고 작은 약점을 손아귀에 틀어쥐고선 감히 제게서 죽음으로 벗어나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아내의 가족, 친우, 그 외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목숨을 두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기어이 날개를 완전히 꺾어 제품에서만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야 비로소 만족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파국이었다.

    대공비들은 모두 남편보다 일찍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다양했으나 정확한 속사정은 남편인 대공 외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아내를 잃은 대공들은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그랬던 자들이 하나같이 아내를 다른 곳에 묻어주었다는 게.”

    마치 뒤늦게나마 자유롭게 놓아주려는 것처럼. 마침내 죽음으로 저를 떠난 이에게 마지막 선물이라도 하듯이.

    “내 어머니 또한, 나를 밀실에서 낳았어.”

    그리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기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선대공은 죽은 아내를 보존 마법이 걸린 유리관에 안치하고 한동안 그 곁을 지켰다. 장례조차 미뤄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눈을 뜨기만을, 창백해진 혈색이 돌아오기만을, 다시 숨을 쉬기만을.

    그렇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토록 바라던 이는 돌아오지 않고, 곁에 남은 건 아내의 숨을 거두며 생을 얻은 아들이었다.

    불쑥불쑥 치미는 분노에 선대공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갓난아기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결국 숨통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아내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기에.

    “……아이를 낳으면 밀실에서 꺼내주겠다고 약속했나 보더군.”

    딱 한 번, 칼릭스는 흐트러진 선대공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술에 취한 채였다.

    남자는 벽에 걸린 아내의 초상화 아래에 쓰러지듯 엎드려 흐느꼈다.

    늘 씌워두었던 흰 천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숨이 끊어져 가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비슷한 처절한 울음이 이어졌다.

    그날은 그녀의 열 번째 기일이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어. 그렇게까지 어머니를 소유해야만 했던 맹목적인 욕망을, 나를 향한 끝없는 증오를. 날 그토록 미워하면서도 정작 손찌검 한 번 않는 그 모순을.”

    “……칼릭스.”

    그가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았다. 반쯤 뜨인 눈이 어떠한 체념으로 깊게 침잠했다.

    찰나의 시간, 지독한 망설임과 번민 끝에 그가 제 치부를 드러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같은 짓을 하고 있더군.”

    아셀라가 제게서 도망쳤을 때의 분노를 기억한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고 심장이 차게 얼어붙는 듯하던 절망을 기억한다.

    영원히 경험할 리 없으리라 호언장담했던 자신이 무색하게도, 그는 격렬한 감정의 격동에 사로잡혔다.

    기어이 잡아 왔고 제게서 떠나려 하자 가두었다. 그녀의 약점인 동생의 안위를 쥐고 다시는 제게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잠든 아내를 밀실에 데려다 놓고 지켜보던 때의 미칠 듯한 희열이 아직도 생생했다.

    만일 그때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꺼내 달라는 간청을 외면했다면.

    조금만 삐끗했어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운명의 외나무다리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아니, 어찌 살아남았다 확신하나?

    그녀가 제게서 도망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나?

    그는 제 안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인지했다.

    동시에 진심으로 이해했다. 상대를 망가뜨려서라도 가져야만 했던 선대공들의 지독했던 집착의 근원을.

    불안과 공포.

    그토록 간절히 소유하고 싶은 존재를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매번 같은 비극을 만들어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녀가 저를 버리고 또다시 도주한다면 선대와 똑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날 원치 않았을 거야.”

    던지듯 툭 꺼낸 이야기에 아셀라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뜸 들이듯 잠시간 말이 없던 칼릭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머니는 망국의 공주였어.”

    놀란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버지가 직접 멸망시킨 왕국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이었지.”

    그가 자조하듯 쓴웃음을 흘렸다.

    “어릴 때부터 신전에 바쳐져 신녀로 길러졌던 모양이야. 그 탓에 왕궁이 함락되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다더군.”

    칼릭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왕족은 남김없이 처형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어. 신전에 귀의했으니 왕족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살려서 제국까지 데려와 결혼했지. 신분을 세탁하고 정식으로 황제의 인가까지 받아가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그걸 위해 황제의 관을 바꾸었어.”

    아셀라가 충격으로 눈을 홉떴다. 벌어진 입술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현 황제 페르난데가 제위를 계승하는 데 선대공의 도움이 적잖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 이후에도 베네비토는 한동안 황가의 검으로 활약했다.

    그 속내에 어떤 구체적인 거래가 오고 갔는지는 오직 황제와 선대공 만이 알았다.

    “그, 그럼…… 선대공비께선…….”

    “가족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와 결혼한 셈이지. 강제로.”

    “…….”

    “두렵고 증오하는 사내에게 안겨 아이까지 품어야 했을 테니 끔찍했을 거야.”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를 잠시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제 피에 섞인 더러운 마족의 힘과 광기, 선대공 부부의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충격받지 않을 리가.

    가능하다면 평생 비밀로 하고 싶었으나 그 바람마저 사치였다.

    그의 입술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스스로를 향한 조소였다.

    “어쩌면 저주받은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 태어날 때부터 어미를 잡아먹었으니.”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

    아셀라가 다급히 부정했으나 칼릭스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비트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피의 대가가 눈앞에 선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 대공이 마족에게 계약의 대가로 지불한 것.

    그건 피를 들끓게 하는 광기나 환청도, 지독한 욕망도, 힘을 거부할 때의 고통도 아니었다.

    격세 유전자의 혈통 따위가 다 무엇인가. 그깟 마족의 강대한 힘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대가로, 진심으로 원하는 단 한 사람의 마음만은 끝끝내 얻을 수가 없는데.

    마족과의 계약은 마치 이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처럼 작용했다.

    아무리 방향을 비틀어보려 해도 잔혹한 운명이 기어이 원래대로 되돌려 버렸다.

    역대 어떤 대공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들처럼 한때 칼릭스도 자신했던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정을 준 적 없으니 앞으로도 그러리라 확신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그 찰나의 어리석은 감정 따위에 매몰될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오만이었다.

    반복되는 저주, 그리고 되풀이되는 운명.

    자신은 평생 갈구하고 또 갈구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었다.

    항상 불안했다. 가녀린 몸을 바스러뜨릴 듯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박아 머리에 새기듯 향을 들이켜고, 입맞춤을 나누고, 격렬하게 몸을 탐하는 순간조차 문득문득 두려움이 일곤 했다.

    찬란한 햇빛을 마주하면 사라지는 아침 이슬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저를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영원히 제 곁에 두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걸 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역시 밀실을 열어야만 하는가.

    짙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체념과 함께 위험한 생각이 막 떠오르려던 때였다.

    “칼릭스.”

    다정한 목소리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뺨을 감싸더니, 이내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나 칼릭스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랬다간 저의 더럽고 질척한 감정을 낱낱이 들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상상도 못 할, 고이고 썩어 문드러져 시궁창과 같은 늪을 연상시키는, 이 저주받은 광기와 욕망.

    차마 아내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영영 몰랐으면 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28화

    “칼릭스.”

    어쩐지 물기가 어린 듯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허벅지에 무게가 실렸다.

    아내의 체향이 훅 끼치는 듯하더니 뜨겁게마저 느껴지는 몸이 맞닿았다. 이내 메마른 입술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마치 눈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한 입술이.

    ‘……!’

    칼릭스가 눈을 떴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울고 있는 아내가 비쳤다.

    푸른 눈망울 밑에 그렁그렁 어린 물방울이 뺨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려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아내의 눈물은 늘 그를 어찌할 바 모르게 만들곤 했지만, 이번에는 목이 메었다.

    사막 한복판에서 모래바람을 들이켠 것처럼 목구멍이 칼칼했다. 그의 목에서 다 쉬어버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울어.”

    “모르겠어요.”

    “…….”

    “그냥 자꾸 눈물이 나요.”

    아셀라가 손등으로 물기를 얼른 훔쳤다. 그런데도 자꾸만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금세 무용한 짓이 되고 말았다.

    “울지 마.”

    이번에는 칼릭스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커다란 손에 뺨이며 귀까지 죄 덮인 채로 아셀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순수하고 예쁜 눈망울이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해서,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일었다.

    ‘이런 여자를…….’

    순간 칼릭스의 머릿속을 헤집던 위험한 생각이 단번에 지워졌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어.

    그는 이 끔찍한 운명을 반복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제 대에서 끊어내야만 했다.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순간 아셀라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사과라니, 어떤…….”

    당신을 으르며 협박하고, 가두고, 뜻대로 휘두르고자 겁을 주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당신에게 심하게 굴었었잖아.”

    그녀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인걸요.”

    “그래도.”

    푸른빛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용서해 주겠어?”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했으나 사실 두려웠다.

    아내가 그를 경멸하고 역겨워할까 봐. 저주받은 자신을 전처럼 피하려 들까 봐. 영영 제게서 도주해 버릴까 봐.

    아셀라는 대답을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칼릭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니면 날 떠날 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절망에 속내를 입 밖으로 토해내고야 말았다.

    “내게서 다시 도망칠 생각인가?”

    심장을 잘게 저미는 것만 같았다. 이능까지 각성한 그녀가 저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칼릭스는 치미는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어떤 대답이든 감내하겠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던 그때.

    “아뇨. 떠나지 않아요. 도망치지도 않고요.”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며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칼릭스의 눈이 확연할 정도로 커졌다.

    “당신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아셀라.”

    “제가 당신의 하나뿐인 아내라고 하셨죠. 그래서 소중하고, 지켜주고 싶다고.”

    “……그래.”

    “전 당신을 믿어요. 그러니까…….”

    아, 칼릭스는 언젠가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당신을 믿을 테니, 당신은 당신 느낌을 믿어.’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알아가는 거라고.’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살짝 열어 보였던 그날의 대화를. 뜨겁게 나누었던 첫 입맞춤을.

    아셀라의 작은 손이 칼릭스의 양 볼에 닿았다. 서로의 뺨을 감싼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당신은 당신 느낌을 믿으세요.”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알아가는 것처럼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웃음이 터졌다. 긴장으로 팽팽하던 주변 기류가 그 웃음 하나에 맥없이 흩어져버렸다.

    “칼릭스, 눈 감아 보세요.”

    그는 아내의 대범한 도발에 기꺼이 응했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를 말캉한 무언가가 부드럽게 노크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침입자였다. 맞아들이기가 무섭게 안쪽으로 쑥 밀려 들어왔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가, 이내 서툴지만 열심히 그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가지런한 치열도, 잇몸도, 매끄럽고 부드러운 안쪽 입천장도, 혀 아래의 여린 살점과 말랑한 볼 안쪽의 살도.

    작은 틈새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하게 더듬었다. 혀로 콕콕 찔러보고 비비고 문지르다가 어설프게 휘감아보기도 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놀림이었으나 칼릭스에겐 어떤 것보다도 자극적이었다.

    오히려 감질나고 애가 탔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듯한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렇게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운 입맞춤이 끝날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움직였다.

    어느새 칼릭스의 손이 단단히 아셀라의 허리와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붉고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비비고 핥았다.

    그러다 혀를 한껏 밀어 넣어 깊게 숨을 빨아들이자, 가냘픈 몸이 반응하여 살짝 튀어 올랐다.

    “읏…… 칼릭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살짝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는 목소리가 묘하게 야살스러웠다.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길이 다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능수능란하게 조금씩 그녀를 허물어갔다.

    간지럽히듯 부드럽게 안쪽을 문지르다가 어느 순간에는 힘껏 혀를 얽으며 죽 당겼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연신 질척거리며 적나라한 소리를 냈다.

    정신없이 뒤엉키는 숨결 속 서로를 옭아매듯 탐하던 두 사람의 입술이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칼릭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품에 가만히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밤 한가운데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달이 한 뼘 정도 더 기울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몸을 일으키려는 아셀라를 칼릭스가 붙들었다.

    “왜요?”

    “예배당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저 때문에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거긴 나중에 가도 되고요.”

    “실은 어떤 모습일지 나도 궁금했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거든.”

    선대공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으면서도 한 번도 칼릭스와 함께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들이 이곳에 발을 디디는 걸 금했다.

    그 역시 개의치 않았다. 기억조차 없는 어미나, 냉정하고 잔인한 아비에게 어떠한 미련이나 애정도 없었다.

    가족이라는 말은 활자 속에서나 존재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선대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셀라, 아내를 잃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허옇게 물들고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산채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도려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발겨지는 것만 같은 환상통이 일었다.

    저 또한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게 식어버린 아내의 옆에서 목청 높여 우는 작은 존재를 살려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의 생명을 대가로 아내를 되돌려 받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했으리라.

    칼릭스는 마침내 직시하기로 했다.

    그토록 떨쳐내려 했음에도 저를 끊임없이 옭아매었던 과거를.

    “나와 같이 가주겠나?”

    하늘에 뜬 달처럼 하얀 얼굴이 저를 향했다. 달빛처럼 고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이내 짓궂은 빛을 띠었다.

    “그럼 절 안 데려갈 생각이었어요?”

    “……아니.”

    “당연히 함께 가야죠.”

    “진심인가?”

    “제가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서요?”

    “아니.”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저가 바보 같았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끌려가는 대화는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와 말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참,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요.”

    “무슨?”

    “아까 당신이 했던 질문 말이에요. 제가 아직 대답을 안 했잖아요.”

    그의 심장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이윽고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펄떡이기 시작했다.

    “제 대답은요.”

    그녀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손을 감았다. 칼릭스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깍지낀 손에 힘을 주었다.

    생을 통틀어 이토록 긴장되었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아셀라가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새의 노랫소리 같은 속삭임이 고막을 타고 흐르는 순간, 남자의 적안이 요동쳤다.

    “……아셀라.”

    “그러니 안심하세요. 아셨죠?”

    그녀가 봄볕에 갓 움튼 연둣빛 새싹처럼 환하고 투명하게 웃었다.

    * * *

    유독 희고 깨끗한 묘였다. 석판에는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이 정갈한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힐데 베네비토.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던 선대공비였다.

    그리고 어느새 같은 나이가 된 장성한 아들이 처음으로 그녀의 묘지 앞에 섰다. 제 아내와 함께.

    ‘안녕하세요. 너무 늦게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아셀라는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어쩐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마지막까지 어린 딸들을 걱정하며 세상을 떴던 어머니처럼, 여기 볕 잘 드는 공원에 평온과 안식을 찾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덤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꽃은 완전히 제 색깔을 잃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아내를 매번 찾았을 이의 마음만은 전혀 빛바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옆의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탓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태연해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엔 거센 태풍이 불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도 용서해 주세요. 여기까지 오는데 용기가 필요했을 거예요.’

    선대공비의 절망과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녀의 삶이 안타까웠다.

    아셀라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땅에 무릎을 대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새하얀 무덤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렇게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다가, 무심결에 꽃다발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

    순식간에 꽃이 바스러지더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셀라는 당황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

    밀실이었다.

    일전에 아셀라가 갇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화려한 공간 속, 널따란 침대에 여인이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윤기 나는 긴 갈색 머리칼에 여름날의 녹음을 연상시키는 녹안을 지닌 미인이었다.

    아셀라는 그녀가 선대공비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슬퍼하고 있어.’

    아셀라에게 저절로 여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원치 않는 아기 때문에 슬퍼하는 걸까?

    그러나 곧 궁금증이 풀렸다.

    “……미안하구나, 아가야.”

    다정한 목소리였다. 크게 부풀어 오른 배를 매만지는 여인의 손끝에서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엄만 아무래도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한참이나 제 배를 내려다보던 여인의 눈 밑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거든…….”

    도주하는 대공비 129화

    아셀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지금은 네가 날 지켜주고 있지만…… 네가 태어나자마자 베네비토의 계약이 발동되겠지.”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눈동자엔 배 속의 아기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네 얼굴이라도 보고 떠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이를 갖는 것과 동시에 여인에게 남아 있던 작은 신성력은 완전히 사멸해 버렸다. 그 미약한 힘으로는 베네비토의 피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족의 계약을 잠시 지연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그 가여운 사람한테…… 내 마음을 고백할 몇 분만이라도 주어졌으면…….”

    마침내 진실을 깨달은 아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번개처럼 강타한 충격에 몸이 휘청였다.

    칼릭스는 잘못 알고 있었다. 힐데는,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원해서 낳았다.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일 만큼 아기를 애틋하게 여겼다.

    선대공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서. 그래서 둘 사이의 아이도 소중해져서.

    “아셀라!”

    갑자기 귀를 후벼 파듯 들려온 외침에 아셀라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칼릭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눈이 저를 향하자, 그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뱉어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렇게 넋을 놓고, 눈물까지 다 흘리고.”

    손을 든 아셀라가 제 뺨을 쓸자 물기가 흥건히 느껴졌다. 힐데의 감정에 동화된 탓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어쩌면 선대공비가 오해한 걸 수도 있어.’

    믿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건 대가라기엔 너무나 가혹한 저주였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아셀라의 시선이 자연히 무덤의 비석을 향했다.

    힐데 베네비토. 묘비에 쓰인 이름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핏덩이 같은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 그녀가 가여웠다. 사랑하는 이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했을 마음이 애달프기만 했다.

    아셀라가 고개를 젖혀 남편을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당신을…….’

    아셀라는 보이지 않는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꾹 깨물었다.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 자체의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어쩐지 그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아셀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거야?”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마족과의 계약 말이에요. 알려주신 것 말고 다른 대가도 있나요?”

    찰나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아셀라는 멈칫했다. 그러나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워졌다.

    잘못 본 걸까. 그녀가 다문 입술에 힘을 주는데, 칼릭스의 나직한 대답이 들렸다.

    “광기와 폭주. 그 외엔 없어.”

    “……정말로요?”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오히려 질문이 돌아왔다. 당황한 아셀라는 말을 수습하여 화제를 돌리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이건 그들 사이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엇보다 남편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아직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그녀 역시 알아야만 했다.

    아셀라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심지 곧은 그녀의 눈이 그를 향했다.

    “칼릭스, 메리엘의 생일 파티가 끝나면 시간 좀 내주실래요?”

    * * *

    칼릭스 베네비토의 이름으로 보내온 서신이 황궁에 도착했다. 대공 부부가 함께 건국제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연락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페르난데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렇게 기회가 오잖느냐?”

    지리하게 오래 끌었다. 그러나 승자는 자신이 될 거였다.

    “덫은 제대로 준비해 두었겠지?”

    “예.”

    고개를 숙인 채 답하는 던컨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러나 오래간만의 희소식에 기분이 좋았던 페르난데는 수하의 낯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 적당한 때를 보아 계획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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