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71)

잠시 후, 그녀의 손에는 곱게 포장된 자그마한 선물상자가 놓였다. 어딘가에서 흥겨운 음악이 들린 건 그때였다.

아셀라가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리더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칼릭스,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그들이 향한 곳은 중앙 광장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칼릭스는 어렵지 않게 아내를 맨 앞쪽 줄까지 이끌어 주었다.

그의 눈빛 한 번에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물러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엔 꽤 널찍한 간격마저 생겨났다.

물론 아셀라는 그저 구경할 생각에 들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앞에 춤을 추는 이들이 보였다.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되는 노랫소리와 신나는 춤사위에 그녀는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연신 작은 감탄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한편, 공연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남자도 있었다. 옆에 선 아내에게 시선을 고정하다시피 박은 사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칼릭스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시선을 내린 칼릭스가 제 앞으로 내민 장미꽃 한 송이를 보고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열다섯 남짓이나 되었을까, 붉은 장미 꽃다발을 한 아름 든 소년이 서 있었다.

하필이면 광장의 수많은 사람 중 칼릭스를 고른 소년은, 저를 향한 냉랭한 눈빛에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이젠 물러설 데가 없었다.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야말로 팔지 못하면 내일도 쫄쫄 굶어야 하니까……!’

대목이라는 축제 기간인데도 단 한 송이의 꽃도 팔지 못했다. 숫기 없는 성격 탓에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해서였다.

침을 꿀꺽 삼킨 소년이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괘, 괜찮으시다면 꽃 사지 않으실래요?”

그러나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고 말았다. 사내의 핏빛 눈이 번뜩이기 시작해서였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며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나보고 꽃을 사라고?”

나직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는 지배자 특유의 오만함을 품고 있었다. 외양이나 행동거지에서 부유한 사람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제 보니 단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고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

‘……귀족이야!’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지금에서 무어라 발뺌할 수도 없었다. 완전히 긴장해 버린 그의 입에서 횡설수설 말이 튀어 나갔다.

“그, 그게……! 여, 연인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면 사이가 깊어지고, 인연이 계속되고…….”

나중에는 저가 무어라 말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영원히 헤어짐 없이……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충만해지고…….”

“얼마지?”

“예?”

예상 못 한 물음에, 소년이 눈을 홉떴다.

“얼마냐고 물었다.”

힐끗, 여전히 구경에 여념이 없는 옆의 여인에게 살짝 눈길을 주었던 남자가 도로 그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사내의 시선을 따라 여인을 훔쳐보았다가, 순간 흉흉한 시선이 얼굴에 꽂히자 얼른 눈을 떼고는 답했다.

“도, 동화 한 닢입니다! 몇 송이 드릴까요?”

“전부.”

“이, 이걸 전부 다요?”

소년이 처음 들고나온 장미는 정확히 백 송이였다. 거기에서 한 송이도 팔지 못했으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황한 손바닥 위에, 은화 다섯 개가 떨어졌다.

동화 백 개가 은화 하나였으니 다섯 배의 값을 더 쳐준 셈이었다.

“네가 한 말의 대가인 셈 쳐라.”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을 향해, 칼릭스가 짤막하게 답했다.

* * *

사람들의 환호,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공연이 끝났다.

아셀라는 다른 관객이 하는 모양새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제 앞을 지나가는 악단의 모자 안에 동전 몇 개를 넣었다.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어요!”

그녀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 건 처음 봤다며 흥분하는 모습에, 남자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그로서도 처음이었으니까.

봄볕처럼 환한 웃음이 심장이 죄어들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칼릭스가 제 마음을 감추며 등 뒤에 숨겨두었던 손을 꺼냈다. 동시에 아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장미꽃이잖아요?”

“당신한테 주는 선물이야.”

“저한테요?”

아셀라가 주춤거리다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가시 없이 말끔히 손질된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 품에 안기자,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흠뻑 들이킨 그녀가 감동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 꽃다발까지 사셨어요.”

“조금 전에. 마음에 드나?”

“그럼요.”

장미 꽃다발의 의미를 아는 그녀가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어느새 발그레해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감에 차올랐다.

‘장미 백 송이의 의미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며 꾸벅 절하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오르자 더 흡족해졌다.

망토 밖으로 비어져 나온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안쪽으로 정리해 주며 그가 말을 건넸다.

“온실 근처에 장미 정원을 만들어줄게. 당신이 산책할 때마다 볼 수 있도록.”

꽃보다는 수목이 주된 베네비토의 정원은 정갈하고 푸르른 느낌은 있었으나 화려한 맛은 없었다.

그나마 유리온실이 다채로운 꽃을 구경할 만한 공간이었고, 그래서인지 아내는 온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매일같이 산책하며 온실에 들를 정도로.

“거절은 안 돼.”

거절은 불가하다며 못을 박는 남편의 말에 아셀라가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 이내 꽃망울이 움트듯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뒤, 수많은 인파로 가득한 광장 한복판을 다정히 팔짱을 낀 부부가 걷고 있었다.

* * *

아셀라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칼릭스, 이거 창가에 달아놓으면 예쁠 것 같지 않아요?”

그녀가 긴 막대에 줄지어 대롱대롱 걸린 썬캐처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당신 눈엔 뭐가 더 나아 보여요? 왼쪽? 오른쪽? 왼쪽 건 색이 예쁜데 오른쪽은 여기 끄트머리에 달린 장식이 귀여워요.”

그러나 그녀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칼릭스가 곧바로 상인을 돌아보았다.

“이것들 전부 사지.”

“예?”

상인의 눈이 놀란 나머지 툭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녀가 다급히 남편을 말렸다.

“칼릭스, 아니에요!

“겨우 이런 거로 고민할 필요 없어.”

아내가 동생의 선물을 살 때는 지켜만 보았던 사내가, 이번에는 망설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의아하게 여길 태도였으나 사실 칼릭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는 메리엘이 가질 물건이었고 이번엔 아내 본인이 원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무얼 살까 고민할 필요 없이 다 사면 되질 않나. 그녀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한 아름 안겨주고 싶었다.

저 자그마한 품에 안긴 장미 꽃다발처럼.

“이 많은 걸 어떻게…… 창가엔 하나씩만 달아두면 된다고요.”

“매일 종류를 바꿔서 달라고 일러두지.”

칼릭스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금화 주머니를 꺼내려 들었다. 아셀라가 황급히 그의 손을 제지했다.

“그럼 이 두 개만요.”

“그걸로 되겠어?”

“충분해요. 당신 방이랑 제 방에 하나씩 달아요. 여기 온 기념으로요.”

“그럼 많을수록 좋지 않나.”

“아니요. 오히려 하나니까 특별한 거예요. 제 남편이 당신뿐인 것처럼요.”

순간 칼릭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살짝 찌푸려진 듯하기도 하고 무언가 복잡해도 보이는, 알쏭달쏭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빨리 선수를 쳐서 상인에게 두 개 값을 셈했다.

그러곤 하나뿐인 그의 남편에게 하나를 건넸다.

“자요, 칼릭스. 이건 당신에게 주는 제 선물이에요.”

당신이 준 내탕금으로 산 거긴 하지만요. 아셀라가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그가 제 손바닥 위의 작은 썬캐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칼릭스?”

아까부터 어쩐지 멍해 보이는 남편이 이상해, 그녀가 남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칼릭스가 정신을 차렸다.

“고마워. 창가에 걸어두고 매일 볼게.”

“정말이죠? 꼭이에요.”

아셀라가 뿌듯하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셀라는 뭔가 자꾸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물건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칼릭스는 눈을 번뜩이며 전부 사주겠다고 달려들었다.

나중에는 급기야 가게를 통째로 매입하려 들 정도였다.

‘두 배를 쳐주지.’

‘예에?’

‘원한다면 그 이상도 줄 수 있어.’

아셀라는 기겁하면서 그를 만류했으나 칼릭스는 막무가내였다.

고집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남편의 팔을 애타게 잡아끌면, 그제야 그는 이렇게 물어왔다.

“하나라서 특별한 건가? 당신 남편이 나뿐인 것처럼?”

그때마다 아셀라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그렇다고 설명해야 했다.

그러면 칼릭스는 무척이나 흐뭇한 얼굴로 딱 두 개를 사서는 그녀와 저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126화

그런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자, 아셀라는 기운이 쏙 빠지고 말았다.

아내의 몸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칼릭스가 물었다.

“아셀라, 힘들면 안아줄까?”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아, 아니에요. 보는 사람도 많은데…….”

“남들 눈은 생각하지 말고.”

아내가 저 아닌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안아 들 태세를 취했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셀라가 칼릭스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 이 많은 인파 속을 남편의 품에 안겨서 다닐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럼 내게 기대면서 걸어.”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팔짱을 꼈다. 낮게 웃은 칼릭스가 화답하듯 몸을 바짝 붙였다.

잠시 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고 나서야 아셀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큰길에서 벗어나자 먹거리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물론 가판 위의 음식을 내려다보는 칼릭스의 시선은 건조하기만 했다.

대공성에서도 아내의 입에 들어갈 간식 하나까지 세심히 살피라 명한 그였다.

사용된 식자재도 위생도 믿을 수 없는 이런 음식을…….

“칼릭스, 이거 먹어보고 싶어요!”

그러나 아셀라의 눈이 반짝거리는 순간, 그는 값을 치르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셀라가 딸기 잼과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와플을 왕 베어 물었다.

‘맛있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맛과 전신으로 퍼지는 에너지에 그녀가 행복한 듯 눈을 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군.”

아셀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안 드세요?”

“단 음식은 싫어해.”

“아쉽다. 맛있는데.”

흐응, 아셀라가 작게 콧소리까지 내며 와플을 오물거렸다.

아내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사내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녀가 마지막 와플 조각을 입에 넣기 무섭게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대었다.

쪽 하는 찐득한 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입술이 떨어지자 아셀라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혹여나 본 사람이 있을까 봐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다행히 온갖 눈요깃거리로 정신없는 거리에서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칼릭스……!”

“입술에 생크림이 묻었길래.”

“닦으라고 말해주면 되잖아요!”

“아주 달아.”

일부러 동문서답하며 딴청을 피우는 남편의 모습에 아셀라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직도 남았군.”

화들짝 놀란 그녀가 냉큼 손등으로 입가를 슥슥 닦아냈다.

하지만 묻어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분하다는 듯 외쳤다.

“이러기예요?”

그러나 칼릭스의 이어진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 하게 되고 말았다.

“당신 입술만 보면 키스하고 싶은데, 난들 어쩌겠나.”

“뭐, 뭐, 그, 그게 뭐예요…….”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아셀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깐 양 뻔뻔하기 그지없는 남자는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그가 생크림의 기름기가 남아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그녀의 입술을 훔치듯 쓸었다.

“이 예쁜 입술에 하얀 크림까지 묻혀놓았으니 빼앗지 않고 배길까.”

그 잠깐 사이 붉은 눈에 정염이 일기 시작했다.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 아셀라가 흠칫했다.

‘말려들면 안 돼.’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흔들고는, 시도 때도 없이 못된 짓을 하려는 남편의 손을 매섭게 탁, 쳤다.

“당신 자꾸 이러면…… 어?”

순간, 무언가를 발견한 아셀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걷던 이들이 저마다 고개를 한껏 젖히며 탄성을 터뜨렸다.

“불꽃놀이를 하나 봐!”

“벌써 시간이…… 어쩐지 길에 사람이 적어졌다 했더니!”

“어서 광장으로 가자고!”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금세 텅 비어버린 거리에 그녀가 눈을 끔벅거렸다.

‘이미 늦은 거 같긴 한데…….’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봐야 하나 잠깐 고민할 때였다.

“근처에 좋은 장소가 있어.”

칼릭스가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 * *

그가 그녀를 이끈 곳은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공원이었다.

인적이 전혀 없었다. 번화가 근처에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공원을 관리하는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하곤 뛰쳐나왔으나 칼릭스를 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물러섰다.

두 사람은 꽤 넓은 부지의 공원을 가로질렀다. 오르막길이었으나 아셀라는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군데군데 자리한 마정석 등이 주변을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밝히고 있어 길이 어둑했다.

그러나 칼릭스에게 어둠은 조금도 방해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명당을 찾아냈다.

묘하게 눈에 띄지 않아서 공원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든 자리였다.

앞쪽은 탁 트여 있었다. 지대가 높았기에 발아래로 도시 곳곳이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엔 널따란 광장이 있었다.

나란히 선 부부의 시선이 함께 광장으로 향했다. 칼릭스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자, 아셀라가 자연히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손엔 저마다 폭죽이 들려 있었다. 종류도 크기도 다양했다. 기대감 어린 얼굴이 죄 밝았다.

피융, 폭죽 하나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더니 어느 지점에서 탁 터졌다.

무수한 붉은 빛줄기가 칠흑 같던 밤하늘을 밝혔다.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옆 사람이 폭죽에 불을 붙이면 근처에 있던 이들은 잠시 기다리곤 했다. 다른 사람이 터뜨리는 폭죽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간격을 두며 이곳저곳에서 빛이 터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빛의 향연에 아셀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름다워…….’

매해 제국에서는 두 번의 큰 행사가 벌어졌다. 신년 축제와 건국제였다.

행사의 피날레는 불꽃놀이로 완성되었다.

축제 마지막 날 저녁, 밤이 깊어지면 황궁과 수도 중앙광장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그러나 아셀라는 아주 어릴 때 이후론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필립이 늘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시간보다 일찍 그녀를 저택으로 돌려보낸 까닭이었다.

넋을 잃고 쳐다보는 그녀에게 칼릭스가 말을 건넸다.

“아셀라.”

“……네?”

“당신도 직접 해 봐.”

그의 손에 들린 폭죽을 본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폭죽도 샀어요?”

“혹시나 하고. 자, 여기 손잡이를 잡아.”

아셀라가 얼떨결에 길쭉하고 얇은 막대기 모양의 폭죽을 받아 들었다.

손잡이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자 타닥타닥 흰 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닿아도 뜨겁지 않다더군.”

칼릭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아셀라는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아기처럼 반짝이는 불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폭죽은 타오를수록 길이가 줄어들었다. 반짝거리는 불티가 주변에 어지러울 정도로 흩날리며 깜박거리다 사그라들었다.

“마음에 드나?”

“네. 정말로…….”

황홀한 광경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아셀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말간 눈동자에 비치는 불꽃이 찬란한 빛깔을 내며 반짝거렸다.

“……예뻐요.”

이윽고 새하얀 불꽃이 폭죽 손잡이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꺼졌다.

아쉬운 듯 막대를 가볍게 흔들자 칼릭스가 막대 폭죽을 더 꺼내 들었다.

“몇 개 더 있어.”

“이번에는 같이 해요.”

그렇게 두 개의 폭죽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허공에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듯 그림을 그렸다. 별, 하트 따위의 문양이었다.

반면 그는 제 손에 들린 폭죽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친듯한 속도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아셀라 베네비토. 그의 아내가.

새삼 그는 그녀의 이름 끝에 저와 같은 성이 달렸다는 사실이 몸이 떨릴 만큼 만족스러워졌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그의 유일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가족이라.’

칼릭스는 조용히 그 단어를 혀로 굴렸다.

그간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단어가 오늘따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피를 나눈 혈족에게조차 느껴본 적 없었던 애틋함이 그녀를 볼 때면 사르르 피어오르곤 했다.

“아……!”

그때, 아셀라가 들고 있던 마지막 폭죽의 불꽃이 사위었다.

“벌써 다 끝나버렸네. 아쉬워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불이 꺼진 막대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칼릭스는 무의식적으로 아내의 뺨에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순간 커졌던 물빛 눈동자가 이내 예쁘게 휘었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칼릭스.”

“좋았나?”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솔직했다. 말랑거리는 볼의 감촉이 손바닥에 비벼지자 그의 입매가 절로 팽팽해졌다.

이 어여쁜 여자를 만지고 느끼고 탐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칼릭스가 얼굴을 어루만지는 내내, 아셀라는 가만히 그의 다정한 손길을 느꼈다.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광장엔 사람이 훨씬 줄어 있었다. 하나둘씩 문을 닫는 상점도 있었다.

아셀라가 공원 너머, 언덕배기 사이로 희끗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칼릭스, 저기 보이는 게 뭔 줄 아세요?”

그의 시선이 무심결에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낡은 회벽의 건물을 발견한 칼릭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그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엄습하는 불안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칼릭스?”

그를 부르는 아셀라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조심스러운 물음이 뒤따랐다.

“혹시 제가 물어선 안 될 걸 여쭈었나요?”

“아니야.”

칼릭스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찌릿한 감각을 자아냈다.

그녀에게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숨길 수만 있다면 영원히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언제까지고 모르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는 고백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예배당이야.”

“정말요? 우리 한번 가 봐요!”

아셀라가 들떠서 외쳤다. 그러나 이어진 칼릭스의 말에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정확히는 베네비토 가문의 묘지고.”

도주하는 대공비 127화

“묘지…… 라고요?”

아셀라의 눈동자가 거센 해일이 이는 바다처럼 동요했다.

“역대 대공비들이 저기 잠들어 있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무어라 감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이 공원 전체가 베네비토의 사유지야.”

아셀라는 삼엄하리만치 공원을 지키던 병사들을 떠올렸다. 공원에 아무도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보통은 저택의 후원에 가족 묘지를 만들잖아요.”

“일반적으론 그렇지. 당신 말대로 선대 베네비토 대공들은 대공 성내에 묻혀 있어.”

“그런데 왜 대공비는…….”

아셀라가 말끝을 흐렸다.

남편과 아내를 서로 다른 장소에 매장한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샤르투스의 가족 묘지에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평소보다 짙어진 눈과 어쩐지 그늘진 얼굴을 보자 쉬이 캐물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곤란하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물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아셀라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나와 칼릭스도 죽으면 서로 다른 곳에 묻히게 되는 걸까.’

어차피 세상을 떠난 이후의 일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함께 잠들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지고 말았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셀라.”

“네, 칼릭스.”

그의 부름에 그녀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재빨리 눈에 어리는 물기를 지워내고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마도 눈치 빠른 그는 금방 알아차리고 말았을 것이다.

“잠시 앉아서 이야기할까.”

근처에 다섯 사람은 족히 앉을 벤치가 있었다. 아셀라는 착잡한 마음을 그러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나무가 벤치를 감싸듯 아늑하게 등 뒤를 가려주었다.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깐 그가 아내를 그 위에 앉혔다.

부부가 나란히 앉았다. 쉬이 깨뜨리기 어려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아셀라는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습관 정도는 꿰고 있는 칼릭스는, 그녀가 표정을 숨기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등을 제 커다란 손으로 덮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한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칼릭스의 묵직한 목소리가 밤을 가르며 나직하게 울렸다.

“고작 본능을 절제하지 못해 파멸하는 선대 대공들을 어리석다 여겼었지.”

베네비토의 핏줄에게 있어 가장 큰 욕망은 소유욕.

제 아내를 향한 역대 대공들의 집착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저 시기와 계기만이 달랐을 뿐, 지금껏 밀실을 열지 않았던 대공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가두고 길들여 완전히 제 것이 되었음을 거듭 확인하고 난 후에야 아내를 꺼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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