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1)

“어?”

“전하랑 밤에 매일 손 잡고 자기로 했잖아.”

“내, 내가……?”

“그래! 기억 안 나?”

저가 그런 약속을 했던가?

그러나 묻는 메리엘은 당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얼굴은 열띤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23화

동생을 실망하게 만들 수 없었던 아셀라는 짧은 고민 끝에 메리엘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야 말았다.

“기억나.”

“전하랑 이제 친해졌어?”

“으응…….”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요즘은 부쩍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스킨십도 잦았다.

그와 자주 잠자리를 갖는 것도 사실이었다.

따로 피임약을 복용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먹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가 그녀에게 피임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언제 아이를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어쩌면…….’

그동안은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어쩐지 먼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제 상황이 실감 나지 않기도 했다.

자신이 처했던 모든 상황과 그간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뒤집혔으니까.

그래서인지 어쩌다 메리엘이 이야기를 꺼낼 때도 의도적으로 그 생각을 피하려고만 했었다.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나와 칼릭스의 아이.’

그녀는 오늘에서야 이 문제를 더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 사이의 아이를.

그의 흑요석 같은 머리칼과 루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쏙 빼닮았을,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 작은 존재를 생각하자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얼른 언니가 아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메리엘이 기대감이 역력한 얼굴로 제 통통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여자아이여도 남자아이여도 많이 사랑해 줄 거야.”

“……그래 줄 거니?”

“응! 언니가 날 사랑해 준 것처럼 나도 그럴 거야.”

순간 아셀라의 코끝이 찡해졌다. 목이 멘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졌다.

한없이 부족하고 못났었던 저를 그래도 언니라고 따라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동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 마음마저 알아주니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다른 소원은 없어?”

꽉 막힌 것 같은 목을 뚫고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물음에 메리엘이 미간을 긁적였다.

“하나 더 있긴 한데, 이건 언니가 안 된다고 말할 거 같아서.”

“뭔데?”

“언니가 건국제 연회에 갈 때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아셀라의 얼굴에 곧바로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메리엘이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궁에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야. 수도 구경이 하고 싶어서 그래.”

“수도 구경?”

“건국제 시즌이 되면 거리가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바뀌잖아. 번화가에 가면 재미있는 볼거리도 많고 신기한 음식도 잔뜩 판댔어. 언니도 알겠지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고.”

“하지만…….”

위험했다. 비단 황궁뿐만이 아니더라도 수도는 여러 위험 요소가 많았다.

칼릭스가 그녀를 걱정했던 것처럼, 아셀라 역시 동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금껏 제대로 세상을 볼 기회가 없었던 메리엘이 가여워 그 소망을 들어주고 싶기도 했다.

“내가 간다고 하면 알렌도 함께 가줄 거야. 밖에 나갈 땐 알렌이랑 호위기사들하고 항상 같이 다닐게. 응?”

투정 부리며 막무가내로 조를 만도 한데, 제 나름대로 언니를 안심시킬 방도를 생각하는 걸 보니 안쓰러웠다.

‘영민한 아이니 대책 없이 경솔한 일은 벌이지 않을 거야.’

생각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전하와 상의해 볼게.”

꺅, 메리엘이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으나 개의치 않았다.

조르르 뛰어와 아셀라의 목을 그러안고는 콩콩 뛰어댔다.

‘그리도 좋을까.’

혹시라도 동생이 크게 기대했다 실망하게 될까 봐 아셀라가 덧붙였다.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도 않았는걸. 전하께서 안 된다고 하실지도 몰라.”

“음, 내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될 거야.”

“뭐?”

메리엘이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언니가 말하기만 하면 전하께선 다 들어주실걸?”

“그런 게 어딨어.”

아셀라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짠데!’ 순간 붕어 입이 된 메리엘이 항변하려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언니의 마음이 바뀌면 안 되어서였다.

잔뜩 부풀렸던 볼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들더니,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방긋 웃었다.

“알겠어. 그럼 전하께 물어보고 나한테 꼭 알려주는 거다?”

“그럴게.”

물론 결과가 어찌 될지는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메리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21. 덫과 덫

“폐하, 켈튼산의 실험장이 붕괴했다는 소식입니다.”

던컨의 갑작스러운 보고에 페르난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붕괴 시점은 일주일 뒤가 아니었나? 왜 이렇게 서둘렀지?”

“대공이 실험장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던컨이 마법 영상구 하나를 공중에 띄웠다. 침입자를 감시할 목적으로 동굴 근처에 설치해 둔 것이었다.

떠오른 화면 속에는 마수와 전투를 벌이는 칼릭스와 대공가의 병사들이 있었다.

팽팽하던 대치상황이 이어지던 와중, 갑자기 화면이 새하얗게 물들며 꺼져버리자 페르난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녹화된 장면은 여기까지입니다.”

“조금 전 빛은 뭐였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무언가가 폭발했고, 동시에 마법구의 기록도 끊겼습니다.”

“마수들은? 배양에 성공해 수만 마리를 거기에 깔아두지 않았나!”

황제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던컨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답했다.

“……생체 반응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모두 죽었단 말이냐?”

페르난데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가 거칠게 손을 휘저어 다시 영상구를 재생했다. 그러다 빛이 터지기 직전,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화면을 정지시켰다.

화면의 구석진 부분을 끌어와 엄지와 검지로 넓게 펼치자, 던컨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인은…… 베네비토 대공비가 아닙니까?”

페르난데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갑자기 숲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공비. 그리고 이어진 빛의 격동.

“기어이 그 계집이 각성했군.”

페르난데가 이를 갈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심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확인받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류가 심상치 않자, 던컨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페르난데의 잇새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분노에 찬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깟 예언이 뭐였든 그것들을 전부 죽여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일이 꼬이지도 않았을 것을.”

행여나 예언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샤르투스의 핏줄 하나라도 남겨놓고자 했던 게 이 사단을 만들었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밀이 유출되지는 않았겠지?”

“예, 폐하. 입구 쪽의 침입자 감지 후 몇 분 만에 동굴이 무너졌습니다. 게다가 일주일 후 폐쇄를 앞두고 있었던지라 남은 자료는 전부 폐기된 상태였습니다.”

육각성의 흑주술로 침입자를 방지하는 결계까지 걸어두었으니 비밀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봐도 무방했다.

“하나 근처에 매장된 시신을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상관없어. 어차피 시체로는 뭘 했는지 알아내지 못하니까.”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 많던 마수를 일시에 없앨 정도의 힘이라. 생각보다 강한 이능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겠어.”

던컨이 조용히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곰곰이 무언가를 가늠하던 페르난데가 입을 열었다.

“신전에 남은 실험체의 동조율은 얼마나 되지?”

“살아 있는 다섯 명 모두 최근 절반 이상의 동조율을 보입니다.”

“좋은 소식이군.”

페르난데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보아라. 제 명줄이 경각에 달리니 어떻게든 해내지 않느냐?”

“…….”

“진즉 가두어야 했는데.”

고대 예배당 지하실에 갇힌 황녀 베로니카는 악착같이 약을 만들어냈다. 효과는 이전보다 월등했다.

물론, 실험체가 신관이었기에 약의 힘을 버티는 거였다.

그간 실험에 사용했던 다른 인간과 달리 동조율 자체도 높았고 정신이 망가지지도 않았다. 힘을 이식받고도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신전에서는 따로 실험‘장’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되는대로 동조율을 끌어올려 보다가 죽으면 실험이 종료되는 거였으니까.

성배의 강력한 힘이 흑마법마저 감추어 주었으니 이보다 완벽한 실험체는 없었다.

일 년 전, 새로 바뀐 성녀가 무언가 눈치를 채고선 신전을 샅샅이 뒤지는데도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건 그래서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많은 신관에게 주술을 심어놓을 것을.”

신관의 높은 동조율을 알게 된 건 최근 일이 년 사이의 일이었다.

페르난데는 예언이 새어나가는 걸 막고자 수년 전에 신전의 모든 예언 신관에게 흑마법을 걸어 조종해 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한 명을 실험에 사용했다가 비약적으로 높아진 동조율을 발견했다.

그 이후, 그는 주술에 걸린 예언 신관들을 효율적인 정보원이자 약의 실험 재료로 살뜰히 써먹었다.

덕분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험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그 외의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의 힘은 점점 축적되며 강해졌고, 앞길에 방해될 만한 인물도 거의 제거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머지않았다고 여겼다.

그가 평생 열망해왔던 것을 손에 쥐는 날이.

그런데 샤르투스의 둘째에 이어 첫째마저 이능을 각성해 버렸다. 이는 너무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페르난데는 날이 갈수록 극도의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이 없어.’

황궁을 걷다가도, 식사하다가도, 잠자리에 들려다가도 불현듯 미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고는 했다.

“약 투여량을 더 늘려라.”

절반의 동조율로는 아직 이식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안전한 수치라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려면 더 끌어올려야 했다.

“폐하, 실은 약과 관련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던컨이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황녀가 지하실에서 내보내 주지 않으면 더는 약을 만들지 않겠다 버티고 있습니다. 곧 건국제이니 연회 준비도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던컨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짜악, 찢어질 듯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 쓸모없는!”

사정없이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이 마치 성난 악마처럼 괴이했다.

“그깟 계집애 하나 제대로 다루질 못해 내게 그따위 말을 전한단 말이냐?”

분기탱천한 페르난데의 손찌검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두꺼운 손바닥으로 내려쳐진 뺨이 화끈거리며 터진 입안에 피가 고였으나 던컨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곤 입술이 하얗게 셀 정도로 강하게 짓이기며 버텨냈다.

한참이나 분을 쏟아내며 콧김을 내뿜던 황제가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렇게나 소원이라니 꺼내주어라. 대신 제대로 일러주도록 해.”

페르난데가 입술을 비틀며 잔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온기라고는 한 점 없는 섬뜩한 웃음에 등골이 쭈뼛해진 던컨이 마른 침을 삼켰다.

“건국제까지 충분한 동조율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저와 제 어미 모두 찢어 죽이겠다고.”

도주하는 대공비 124화

칼릭스가 이제 막 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아내를 맞이했다. 그녀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여. 대화는 잘 나누었고?”

“네. 그런데…….”

아셀라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칼릭스가 이내 흔쾌히 답했다.

“영애가 항상 호위를 대동하겠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안 될 건 없어.”

“정말 괜찮겠어요?”

“당신도 동생과 함께 가고 싶은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에 칼릭스가 속으로 웃으며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 다른 건?”

“어, 없어요.”

“없다고?”

아셀라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죽어도 말 못 해.’

조카를 만들어달라니, 사실대로 말했다간 남편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했다.

집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메리엘이 그 외엔 딱히 바라는 게 없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필요한 건 다 있다고 괜찮다고 하는데, 그래도 뭐라도 좀 해주고 싶어요.”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나뿐인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시무룩해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칼릭스가 먼저 제안했다.

“내일 작은 파티라도 열어주면 어떻겠나?”

“파티요?”

깜짝 놀란 아셀라가 되물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던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생일 파티의 경험이 거의 없는 그녀였지만, 당장 내일까지 파티를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같이 나가지.”

“어, 어딜 나가요?”

“파티엔 선물이 필요하잖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느새 해가 한껏 기울고 정원수가 긴 그림자를 땅 위에 내려뜨리는 늦은 오후였다. 이제 머지않아 어둠이 대지에 깔릴 것이다.

“우리가 갈 때까지 문을 연 상점이 있을까요?”

“건국제가 곧이잖나. 수도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지금쯤 거리가 축제 분위기로 한창일 거야. 오히려 해가 진 뒤가 진짜지.”

축제. 아셀라는 입안에서 작게 단어를 굴렸다. 단지 그뿐인데도 심장이 쿵쿵대고 설레기 시작했다.

“메리엘이 축제 구경하고 싶다고 했는데.”

“당신 동생하고는 수도에서 또 가면 돼. 게다가 선물을 사는데 같이 나가면 기대감이 덜하지 않겠나.”

“그렇긴 한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을 잡았다.

“너무 늦게 돌아오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어요. 저번에 나갈 때 보니 번화가까지 마차로 반 시간이 넘게 걸리더라고요.”

“아, 그보다는 빠를 거야.”

“그래요?”

“마차를 타지 않을 거니까.”

“그럼 어떻게 번화가까지 가요?”

깨끗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예쁜 색깔의 눈이 의문을 품고 저를 향하자, 사내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칼릭스?”

“기대해.”

남자의 커다란 손이 아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순순히 제 손을 내주면서도 여전히 당혹해하는 그녀를 향해 칼릭스가 나직이 답했다.

“당신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

* * *

한껏 높아진 시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몸, 수시로 얼굴에 휘감기는 긴 머리칼,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세찬 바람까지.

아셀라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땅을 짓치며 무섭게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더는 견디지 못한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칼릭스, 잠깐, 너무 빨라요!”

“달리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었어.”

“하지만……!”

미칠 것 같은 흔들림과 진동에 눈앞이 핑핑 도는 저와 달리 남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늦어서 상점 문이 닫힐까 봐 걱정했잖나. 이대로라면 금방 도착할 수 있어.”

아셀라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무리 그가 등 뒤에 함께 앉아 있다 한들, 그녀는 이제야 말을 다시 타기 시작한 초보였다.

몸이 위로 통통 튀어 오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떠, 떨어질 것 같아요! 칼릭스!”

급기야 그녀가 울먹거리며 이름을 외치고 나서야 그가 반응했다.

단단한 팔이 한 줌도 되지 않을듯한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으며 고삐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히힝, 말이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속도를 줄였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고 얼굴을 때리던 세찬 바람이 미풍으로 변했다.

놀라 펄떡이던 심장이 점점 가라앉고 호흡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아셀라가 스르르 눈을 떴다.

완전히 말이 멈춘 걸 확인한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고개를 홱 돌려 칼릭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막상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많이 놀랐나?”

너무도 다정한 목소리에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했다. 칼릭스가 크고 따뜻한 손으로 뺨을 감싸며 다시 물었다.

“무서웠어?”

“……이젠 괜찮아요.”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아셀라가 눈을 내리깔며 황급히 답했다.

“아셀라, 저길 봐.”

칼릭스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간 그녀의 푸른 눈에 최후의 빛을 흩뿌리며 서서히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이 보였다.

“일몰이야.”

고운 오렌지빛 석양이 지평선과 맞닿은 서녘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붉은빛의 반투명한 장막을 덧씌운 것처럼 태양의 색채를 덧입고 반짝였다.

장관이었다. 그녀가 넋 놓은 듯 중얼거렸다.

“아름다워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고개를 끄덕인 아셀라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울어지는 해가 조금씩 제 모습을 지워갔다. 손톱만큼 남았다 싶더니 이윽고 지평선과 맞닿았다.

동시에 태양의 황금빛이 하늘과 대지를 뒤덮었다. 일렁이는 무수한 빛이 다채로운 색을 만들며 마지막을 찬란히 밝혔다.

마치 마법의 한 장면처럼 황홀했던 일몰이 지나고 마침내 어둠이 내려앉았다.

내내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던 아셀라가 긴 숨을 내뱉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등에 맞닿은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자 칼릭스가 바짝 허리를 끌어당겼다. 넓고 따뜻한 품이 아늑했다.

“마음에 들었어?”

그녀는 말없이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몸을 붙인 채 가만히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널따란 들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뒤 완전히 해가 진 하늘에는 별이 총총 뜨고, 고요한 밤 속 풀벌레 소리만이 찌르르 울렸다.

칼릭스가 그녀의 팔을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물었다.

“춥진 않아?”

“네. 당신은요?”

“전혀.”

그러더니 한 손에 고삐를 쥔 채로, 그녀의 몸을 훌쩍 들어 제 쪽으로 돌려 앉혔다.

“……칼릭스?”

물음에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아셀라는 당혹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남편의 얼굴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주변이 온통 어둠으로 깔려 제대로 사물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

물론 베네비토의 혈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칼릭스의 적안이 어둠을 뚫고 제 얼굴을 오롯이 담은 아내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길쭉하고 모양 좋은 손가락을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에 가져다 대자 움찔거렸다. 가볍게 문질러 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드러이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하다 만 거, 마저 해야지.”

“아…….”

혹여나 거부하면 어찌 참을까 했으나 헛된 걱정이었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가 팔을 뻗었다.

처음엔 가슴에 내려앉았던 손끝이 위치를 가늠하듯 잠깐 머물렀다가 피부를 타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쇄골을 지나 어깨와 목 사이의 우묵한 홈을 매만졌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손끝이 닿는 부분이 새 부리로 얕게 콕콕대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이내 위치를 찾은 손이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마침내 아셀라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꼭 맞붙어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기다렸던 허락의 순간, 칼릭스는 그새 뜨겁게 달아오른 제 입술을 망설임 없이 겹쳤다.

* * *

번화가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축제 느낌이 물씬 났다.

“이 골목만 돌면 본격적인 축제 거리의 시작이야.”

아셀라가 망토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이마 앞쪽으로 죽 잡아당겼다.

서늘한 밤공기를 막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방지하고자 입은 것이었다. 그녀가 가진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은 제국에서도 흔치 않았다.

“내가 도와줄게.”

마찬가지로 카키색의 망토를 걸친 칼릭스가 그녀의 앞섶을 손수 단단히 여며주었다.

“불편하진 않아?”

“폭이 넓어서 괜찮아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가 거추장스러울 법도 하건만, 그녀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들뜬 아이처럼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럼 갈까?”

“네.”

아셀라가 화사하게 웃었다. 남편이 내민 손을 맞잡는 아내의 행동에는 더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제 손깍지 정도는 당연해진 부부가 발걸음을 맞춰 골목을 돌았다.

아셀라의 눈이 부모님을 따라 처음 시장에 나온 아이처럼 휘둥그레졌다.

“와아…….”

큰길부터 작은 골목에 이르기까지 온갖 색깔의 등불로 거리가 환했다. 완전히 해가 졌으나 낮처럼 밝게 느껴졌다.

저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리엔 사람으로 가득했다. 인파로 곳곳이 북적이며 활기가 넘쳤다.

즐거움이 한껏 묻어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아셀라의 마음이 절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처음인 그녀에겐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화려하고 번쩍거렸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보는 강아지처럼 동동거리며 구경하는 그녀를, 칼릭스는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보며 곁에 있어 주었다.

“오늘 아침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물건입니다! 구경하세요!”

가게마다 매대를 길게 빼놓고 물건을 파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인들이 목청을 높여 호객하는 소리가 분위기를 돋우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거리를 걷던 아셀라가 어느 오르골을 파는 상점에서 멈추어 섰다. 매대를 유심히 살피던 그녀가 손을 뻗어 손바닥만 한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메리엘 생일선물로 이 오르골 어때 보여요?”

“괜찮군.”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별로인가 싶어 아셀라가 고민하다 다른 걸 골랐다.

“그럼 이건요?”

“그것도 좋아 보이고.”

몇 번 더 비슷한 질문이 이어진 끝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다 좋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칼릭스가 시치미를 뚝 뗐다.

도주하는 대공비 125화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아셀라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다시 오르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칼릭스는 일부러 제 생각을 얹지 않았다. 가능하면 아내가 직접 고르고 선택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지금껏 그럴 만한 기회와 경험이 적었으니까.

“어떤 걸 사지…… 메리엘이 제일 좋아할 모양이 뭘까.”

칼릭스는 후드 속에서 슬그머니 입매를 당겼다.

누군가에겐 이런 모습이 우유부단하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그에게는 검지를 맞부딪히며 고민하는 모습이 그저 어여쁘기만 했다.

“이걸로 할래요.”

마침내 아셀라가 오르골을 골랐다.

토끼와 강아지, 고양이, 병아리 등 작은 동물들이 한데 모여 회전하는 오르골이었다. 저마다 행운을 상징하는 장신구를 머리에 달고 있었다.

“예쁘군. 당신 동생이 무척 좋아하겠어.”

“정말요?”

“내 말을 믿어. 영애가 신이 나서 방방 뛰는 걸 보게 될 테니까.”

조금 전까지 고민에 잠겨 있던 게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아셀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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