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기에 아셀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수들을 처리하는 대로 대공성으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신경 쓰지 마. 별일 아니야.”
“아니잖아요.”
“…….”
“카단 경이 말해줬어요. 한두 시간만 약을 마시는 게 늦어져도 당신 몸에 크게 무리가 온다고요.”
거기까지 전부 들었던가. 칼릭스는 걱정이 깃든 아내의 푸른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더불어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광포하게 날뛰며 호시탐탐 뛰쳐나오려는 광기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그건 차로 힘을 억누른다고 하여 느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차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몸에서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으니까.
‘그런데도 전혀 몰랐다.’
이상하게도 몸이 잠잠했다. 고통은커녕 평소에도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전혀 없었다.
칼릭스는 가만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피부를 뚫고 혈관을 파고들자 쥐죽은 듯 조용히 흐르는 힘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두려워 극도로 몸을 사리며 저를 드러내지 않으려 숨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 탐욕스럽고 흉포한 것이 어찌하여 갑자기 이러나. 무엇이 저것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나.
대체 뭐가 달라졌지?
순간, 그의 정수리를 타고 깨달음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아셀라.’
그랬나, 그랬었나.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어떤 격한 감정에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검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 당장 성으로 돌아왔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미안해요, 지금 나가서 카단 경을 불러올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사이 전전긍긍하던 아셀라가 칼릭스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그녀를 붙들었다.
“칼릭스?”
“정말로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가 눈을 떴다. 자연히 시선이 품에 안긴 아내에게로 향했다.
동그랗고 순한 눈매가 의문을 품고 커다래져 있었다.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이젠 제 구원이나 다름없어진 존재.
그는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입 맞췄다.
도주하는 대공비 121화
아셀라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뇌가 설탕물에 절여지는 것처럼 달콤하고 찐득찐득한 키스였다. 짙은 고양감 속에서 정신없이 입술을 맞대고 숨을 빨아들였다.
그렇게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났을 때는 어느새 칼릭스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였다.
목덜미며 뺨이며 죄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그의 가슴께를 콩콩 쳐댔다.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당신도 싫진 않았잖아.”
그녀는 부정하지 못했다.
오감이 다 열리는 듯한 시간이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입술을 탐하면서도 상냥하고 부드럽게 몸 곳곳을 매만졌다.
절로 정신이 몽롱해지며 그대로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감각에, 그녀는 내내 저항하지 못했다.
“……얄미워.”
볼을 한껏 부풀려 툴툴거린 아셀라가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사로잡은 아내를 쉬이 놓아줄 칼릭스가 아니었다.
열심히 바둥대 보았지만, 도무지 품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내 허락 없이 감히 누가?”
의미 없는 항의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해본 말은 여지없이 반박당했다.
결국, 벗어나길 포기한 그녀가 대신 아까 마무리하지 못한 질문을 재차 했다.
“아직 대답 안 해주셨어요. 왜 약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당신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저 때문이라고요?”
그는 눈이 동그래진 그녀의 이마에 낙인을 찍듯 입술을 대었다 떼곤 입을 열었다.
“설명해 줄게.”
낮고 차분한 음성이 이어질수록 아셀라의 입술이 점점 더 벌어졌다.
“제 이능이…… 당신의 광기를 억누른다고요?”
“그래. 이렇게 쥐죽은 듯 잠잠한 건 처음이야.”
칼릭스가 다시금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여전히 핏줄 속에서 살아 숨 쉬고는 있었다. 그러나 마치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날뛰며 그를 집어삼키려 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연일지도 몰라요, 칼릭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아니, 아셀라. 이 현상은 당신 이능이 아니면 설명이 안 돼.”
그토록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광기가 잠재워졌다. 애초에 통제하고 제어하는 게 가능이나 했던가. 어떤 마법이나 치료조차 듣질 않는 힘이었다.
“켈튼산의 마수를 단숨에 소멸시키고 페르난데의 흑마법까지 찾았던 사람이 당신이야.”
“그렇긴 한데…… 실은 말이에요.”
아셀라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전 아직 제 이능이 뭔지 몰라요. 힘이 발현되는 조건도요.”
“모른다니?”
“그냥 어떤 상황이 닥치면 순간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돼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해요.”
칼릭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눈부신 이능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던 그였다.
그토록 찬란하고 강대한 힘을 구사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이능의 종류조차 모른다니.
“……샤르투스의 이능은 알면 알수록 더 미궁 같군.”
“그러니까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몰라요.”
“그렇진 않을 거야.”
그는 확신했다. 어떤 근거도 없는 믿음이었으나 자신할 수 있었다. 여태껏 이런 평화와 안온함은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광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여전히 당신 몸속에 피가 흐르고 있다고…….”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멸될지도 모르지.”
칼릭스가 아셀라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것을 얽었다.
“당신이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것을 감아왔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아릿해진 칼릭스가 다문 입술에 힘을 주며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 곁에 있을게요.”
꿀에 설탕을 더한 듯 지나치게 다디단 말이었다.
욕심내지 않기로 했었다. 지금보다 더한 기대는 품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저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의 아내로 있어만 준다면, 더는 제게서 도망치려 들지만 않는다면.
감히 마음까지는 바라지 않기로.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는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그의 모든 것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아내가 제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뒤흔들리며 전부 내주고 말았다.
마음까지도.
자꾸만 더한 것을 바라게 된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의 눈빛,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대하는 자신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칼릭스는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괜한 기대를 품었다가 그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자신이 과연 견뎌낼 수 있을는지.
그 두려움이 금방이라도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물음을 삼키게 만들었다.
“칼릭스, 어디 아파요?”
“……아니.”
새어 나온 목소리가 탁하다 못해 갈라져 있었다. 그는 마음속 치켜드는 열망의 불씨를 가라앉히며 애써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 못 믿겠어.”
“뭐예요?”
아셀라가 매섭게 눈을 떴다. 그러나 그 모양새마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저가 기어이 미쳤나 보다, 칼릭스는 생각했다. 깊고 진한 마음을 혼자서 삭이며 목소리를 짜내듯 답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해줘.”
간절하다 못해 갈급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저도 모르게 그녀가 눈치챘을까 얼굴을 살피고 말았다.
다행히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약지에 고리를 건다.
“좋아요.”
“…….”
“나 아셀라 베네비토는, 남편 칼릭스 베네비토 곁에 있겠다고 이 자리에서 다짐합니다.”
그녀가 맹세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새기듯 지켜보았다. 하나부터 다섯까지 숫자를 센 아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이제 됐지요?”
“……그래.”
“당신도 참, 갑자기 왜 안 하던 장난을 치고 그래요.”
장난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칼릭스는 안도감과 함께 왠지 모를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말없이 은빛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동작에서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카단 경인가 봐요!”
아셀라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재빠르기도 하지. 이럴 때면 날다람쥐가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제야 칼릭스의 얼굴이 풀어지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 *
급한 용무가 생겨 대공의 집무실을 찾은 라이젠은 주인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차를 드시지 않아도 된다니,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다.”
여유로이 답한 칼릭스가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 부부 사이엔 애틋함마저 느껴지는 다정함이 감돌았다.
그저 영문을 모르는 라이젠만이 이 이해 못 할 상황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난감해할 뿐이었다.
“칼릭스, 카단 경이 곤란해하잖아요.”
아셀라의 가벼운 타박이 있고서야 칼릭스는 제 보좌관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앞뒤가 싹둑 잘린 설명이었으나 라이젠은 재주껏 알아들었다.
격세 유전자의 압도적인 힘과 그간 주인이 겪어온 일을 아는 그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긴 했다.
그러나 그는 대공이 켈튼산으로 출병하던 날, 안주인과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샤르투스의 이능. 그 미지의 힘이라면 불가능하다고만 여겼던 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정말이지……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사실이다. 실제로 약을 먹은 지 스물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잖은가.”
확실히 라이젠이 보기에도 주인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래도 칼릭스,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약을 보관해 두는 편이 좋겠어요.”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는 표정이 잠깐 얼굴에 떠올랐으나 칼릭스는 이내 동의했다.
“그러지.”
그러고는 라이젠이 금반 위에 받쳐 든 무언가를 쳐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서신인가?”
“아! 예, 전하. 황궁에서 건국제 연회의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칼릭스가 초대장을 집어 들고는 턱짓으로 라이젠을 물렸다.
잠깐 열렸던 집무실의 문이 닫힌 뒤, 그는 밀봉된 실링을 떼고 편지를 꺼냈다. 내용을 빠르게 훑은 그가 그녀에게 초대장을 건네며 말했다.
“일주일 내로 참석자 명단과 수행 인원까지 결정해 통보해 달라는군.”
아셀라가 차분히 편지를 읽어내렸다. 잠시 뒤 한껏 진지해진 얼굴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국제 연회는 따로 참석 통보를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의도가 명확하네요.”
“빤히 보이지.”
어떻게든 대공성에서 그녀들을 끌어내려는 수작. 두 자매를 해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는 황제가 건국제 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돼. 누구도 당신의 참석을 강제하지 못해.”
그러나 아셀라는 며칠 전부터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일찌감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에요.”
“공국과 달리 수도는 안전하지 않아. 게다가 황궁은 페르난데에게 가장 유리한 전쟁터고.”
“하지만 칼릭스,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순 없는 거잖아요.”
그녀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응시했다. 정갈한 얼굴에 굳은 각오가 서리고 온화하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황제는 계속 저와 메리엘을 노릴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약점을 쥐고 앞으로도 흔들려 할 테고요. 아셀라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간 계속 생각했어요. 황제는 애초에 왜 샤르투스를 노렸을까. 어째서 샤르투스의 이능자를 전부 해치려 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
“그걸 알아내려면 그자를 만나지 않으면 안 돼요.”
아셀라의 음성에 단호함이 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그녀의 눈빛에, 칼릭스가 마침내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을 못 가게 하고 싶어. 당신이 위험할 어떤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아.”
“칼릭스.”
“하지만 아무리 말려도 고집 센 내 아내께선 기어이 가겠다 하시겠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리던 아셀라가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속 타는 남편 마음은 안중에도 없지.”
“아녜요.”
아셀라가 고맙고도 미안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뜻을 존중해 주는 남편이 고마웠고, 저를 걱정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면서도 바람을 들어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22화
“사실은 저도 걱정되고 두려워요.”
“그런데 왜 가려고 해.”
“숨어서 웅크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당신 동생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물론이고 마탑 역시 영애를 보호할 테니.”
아셀라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칼릭스의 눈이 의문을 품었다.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고 난 끝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칼릭스, 당신도 잃고 싶지 않아요.’
아셀라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간신히 삼켰다.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번 연회에 참석하려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 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가서 반드시 성물을 찾겠어.’
어디에 있는지도,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황궁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성물이 있으면 칼릭스의 광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길어야 삼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그의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아낼는지도 몰랐다.
속내를 숨긴 아셀라가 남편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저와 함께 수도에 가주시겠어요?”
순간, 칼릭스는 멈칫하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간절해서였다. 도저히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절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능숙하게 제 동요를 감추곤, 대신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당연히.”
“고마워요.”
그제야 아셀라의 얼굴이 풀리며 은은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건국제 연회가 삼 주 후니까 이동 기간을 고려하면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네요. 준비하려면 빠듯하겠어요.”
큰 연회를 앞둔 귀족가에선 이르면 두어 달 전부터, 늦어도 한 달 전에는 준비를 시작했다.
드레스나 구두, 장신구 따위를 맞추고 제작하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곤 했으니까.
“아,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네?”
“마고가 지금쯤이면 대략적인 준비를 다 마쳐 두었을 테니까.”
“로메인 부인이요?”
아셀라가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건국제 연회에 참석할지, 않을지 모르셨잖아요?”
“주인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보좌관의 일이야. 그 정도 일도 못 해서야 베네비토의 가신이라 할 수 있겠나?”
아셀라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상관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준비를 시켰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남편이지만 어쩐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묘해지자 칼릭스가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물었다.
“왜?”
“그냥…… 대공가의 가신으로 사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의미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셀라가 어물거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칼릭스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보좌관이라뇨? 로메인 부인은 제가 적응할 때까지만 임시로 여기서 지낸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아직 마고가 말을 안 하던가? 앞으로도 계속 머무르면서 당신을 도울 거야.”
“영지는 어쩌고요?”
“여기서 로메인 가문의 일도 함께 처리하도록 조치해 두었어.”
“로메인 부인이 그걸 받아들였어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인의 명에 반하는 가신이 가당키나 한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반응에 아셀라가 혀를 내둘렀다.
안주인의 권한을 받아 내성의 일을 처리하면서 그간의 자료를 살폈었다.
적은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성내 시스템이 놀랍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도 남편에게 혹사당하고 있을 베네비토의 가신들을 생각하자 어쩐지 안쓰러움이 일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칼릭스가 가볍게 혀를 차며 답했다.
“염려할 거 없어. 기여하는 만큼 합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있으니까.”
“정말로요?”
“사용인의 임금을 봤다면 당신도 알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아셀라가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귀족가의 다섯 배가 넘던 사용인의 임금을 생각하면, 마고나 다른 가신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마세요. 아셨죠?”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업주라도 되는 줄 알겠어.”
“그렇게까진 말 안 했어요.”
아셀라가 민망한 듯 콧잔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로메인 부인하고 이야기해서 잘 준비해 볼게요. 일정이 잡혀 있다면 보름 정도로도 충분히…… 아!”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친 그녀가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번쩍 일으켰다.
“어떻게 해!”
아셀라가 울상이 되어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급기야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하자, 그가 몸을 일으켜 아내의 어깨를 붙잡곤 차분히 말을 건넸다.
“아셀라, 무슨 일이지?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봐.”
“메리엘의 생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어쩜 좋아!”
너무 정신이 없던 탓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깐, 당신 동생 생일이라고?”
“아직은 메리엘이 자기 진짜 생일을 몰라요.”
아셀라는 메리엘에게 선대 후작 부부가 출생일을 바꾼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가 받을 충격을 염려한 탓이었다.
그걸 일러주면 당연히 부모님이 생일을 속인 이유를 궁금해할 테고, 아버지가 동생을 대신해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밝힐 수밖에 없었으니까.
상황을 이해한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이로군.”
“이전까지는 생일 때도 만나질 못해서 선물만 보내주곤 했었어요. 그래서 이번만큼은 잘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으니 그 어린것이 얼마나 실망했을까.”
미안함에 아셀라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 밑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칼릭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다독였다.
“내일이라면 아직 늦지는 않았어. 지금이라도 물어보면 되지 않겠나.”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일 줄 알고요. 생일이 당장 내일인데…… 구할 수 없는 거일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들어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아셀라가 진짜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칼릭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남편 그 정도 능력은 있어.”
그새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위아래로 팔랑거렸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야.’
너무도 든든하고 믿음직한 사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의지해 버리게 된 사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허공에서 내려와 마침내 단단한 땅을 디딘 기분이었다.
“칼릭스.”
아셀라가 그의 허리를 감고는 가슴께에 몸을 기댔다. 커다란 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등을 덮으며 마주 안았다.
익숙해져 버린 특유의 달큼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훅 끼쳤다. 널따란 품은 아늑하기만 했다. 계속해서 이대로 안겨 있고 싶을 만큼.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가 전해주는 모든 감각을 받아들였다.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마음과 몸이 흠뻑 적셔질 때까지.
“……고마워요.”
자그마한 속삭임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기다릴 테니 다녀와.”
“금방 올게요.”
“천천히 다녀와도 돼.”
농담 같은 말에 아셀라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는 아내의 미소 띤 얼굴에 잘게 입 맞췄다. 이마며 눈꺼풀, 콧잔등과 뺨에 차례로 입술을 눌렀다 떼었다.
그러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을 앞두곤 동작을 멈추었다.
잔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감겼던 눈꺼풀이 사르르 열리자,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며 말했다.
“여긴 다녀온 뒤에.”
“아무래도 서둘러야겠네요.”
“날 말려 죽일 셈이 아니라면.”
두 사람의 입술 새로 살포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야 막 아장아장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신혼부부는 다시 서로를 꼭 껴안았다.
늘 서릿발처럼 냉랭한 공기만이 감돌던 대공의 집무실이, 따뜻하고 온화한 기류로 가득해졌다.
* * *
“미안해, 메리엘. 언니가 너무 무심했지?”
“아냐. 아직 생일이 지난 것도 아닌데 뭐!”
메리엘이 따끈한 코코아가 든 컵을 양손으로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언니가 안 물어보면 내가 먼저 말해주려고 했어!”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씩씩했다. 아셀라는 어른스럽고 속 깊은 동생의 대답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는 메리엘의 모습을 보며, 아셀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갖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일 있어? 언니가 뭐든 들어줄게.”
“정말? 뭐든 다?”
메리엘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리자 아셀라가 순간 멈칫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교묘한 함정에 발을 디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동생의 생일을 까맣게 잊은 죄가 있는 언니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네 소원이 뭔데?”
“음…… 내 소원은…….”
메리엘이 검지로 턱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고민하는 모습이 귀여워 아셀라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천천히 생각해.”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데, 메리엘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조카가 생겼으면 좋겠어!”
아셀라는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어, 언니! 괜찮아?”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메리엘이 다급히 곁으로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침은 멎었으나 벌게진 얼굴만은 수습하지 못했다.
생일선물로 조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그, 그래.”
동생의 당부에, 그녀가 어색하게 답했다.
도로 자리로 돌아간 메리엘이 식탁 위에 두 팔꿈치를 대곤 깍지를 껴 턱을 괴었다.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흔들거리며 꿈꾸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아기를 낳으면 내가 많이 예뻐해 줄 텐데. 같이 놀아주고, 책도 읽어주고, 정원 산책도 하고…….”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신이 나는 듯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손도 잡고 꼭 안아주기도 해야지! 맞아, 볼에 뽀뽀도 해줄 거야!”
이젠 눈에서 광선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동생의 눈에, 아셀라는 무어라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언니, 전하랑 친해지고 있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