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군.’
시신에서 기이하리만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꽤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접점을 가진 인간은 간단한 특징까지도 기억해 상대할 정도였다.
‘아는 자는 아니다.’
부패가 진행되고 있어 언뜻 얼굴을 잘못 보았나 했으나 확실했다. 그가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시신에 남아 있는 희미한 기운이 쉬이 발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얼마 후, 그는 여기 묻힌 모든 시신에서 같은 기운이 풍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주군! 그 시체 더미 안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요!”
지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크게 소리치자 칼릭스가 대답 없이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어쩐지 조금 굳어 있는 듯한 주인의 표정에, 지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거기서 뭐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특별한 건 없어 보였는데요.”
“아니다.”
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현장을 정리하라. 마수의 둥지를 파괴했으니 여기서 마무리하겠다.”
“더 찾지 않아도 됩니까?”
“기껏해야 이와 비슷한 시체를 더 발견할 뿐이겠지.”
그가 구덩이 쪽으로 힐끗 눈길을 던졌다가 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어라.”
“그러겠습니다.”
“신전에 은밀히 이 사실을 알려라. 중간에 말이 새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 주군!”
명을 내린 칼릭스가 몸을 돌렸다. 지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 *
막 잠에서 깬 아셀라가 부스스한 눈을 떴다.
어느새 해가 중천인지 막사 안이 훤했다. 바닥에는 어젯밤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점점 사위어가고 있었다. 칼릭스도 보이지 않았다.
‘또 늦잠 잤나 봐!’
서둘러 일어나려 침구를 막 걷었을 때였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황급히 다시 몸을 가렸다. 아예 눈만 꺼내놓은 채 침구 안으로 쏙 들어갔다.
욕망과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어쩜 좋아……!’
도르륵 눈을 굴리자 막사 한쪽에 걸린 제 옷이 보였다. 그새 보송보송하게 말려진 듯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저히 못 가져오겠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제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슬쩍 침구를 들추어 본 그녀가 온몸에 진하게 남겨진 울긋불긋한 흔적을 보고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낮부터 시작해 밤새도록 이어진 정사의 흔적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울어, 아셀라.’
그는 말 그대로 격렬하게 그녀를 탐했다. 온몸을 덮치는 폭풍처럼 속절없이 밀어닥치는 쾌락에 그녀는 정신없이 울고 또 울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조차 열락에 젖은 신음성을 감추어주지는 못했다.
그토록 뜨거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격정적이고 진득한 밤이었다. 그렇게 내내 칼릭스에게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야 기절하듯 잠들었다.
‘단단히 미쳤어, 아셀라. 네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런…….’
빗줄기가 쏟아지는 숲속,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사내의 품, 전해지던 다정한 온기, 모닥불로 훈훈해진 공기와 묘하게 무르익은 분위기까지.
그래서 멋대로 그런 짓을 벌여버렸다. 과거의 자신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몸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시트를 몸에 둘러 머리만 내밀었다.
흡사 하얀 애벌레처럼 된 그녀가 조심스레 바닥에 발을 디디곤 종종걸음으로 반쯤 막사 안을 가로질렀을 때였다.
“당신, 지금 뭐 하나?”
“아!”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나머지 그만 쥐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얇은 시트가 그대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칼릭스가 가볍게 혀를 차며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간밤으로는 부족했었나?”
도주하는 대공비 119화
“그게 아니라, 잠깐, 칼릭스, 잠깐만요……!”
황급히 시트를 집어 들었으나 그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녀는 결국 남편의 품에 달랑 안겨든 채 침대 위에 도로 앉혀졌다.
아셀라가 시트를 목까지 바짝 끌어당기곤 재빠르게 변명했다.
“오, 옷 입으려고 그런 거예요.”
검은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가며 붉은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노골적으로 못 믿겠다는 티를 내는 얼굴에 아셀라가 울상을 지었다.
“몸을 가릴 게 없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가리다가 말아.”
“그거야 당신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놀라서……!”
“아, 그랬나.”
칼릭스의 얼굴에 심술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못된 장난을 칠 계획을 세운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었다.
“난 당신이 유혹하려는 건 줄 알았지.”
“…….”
“어제처럼.”
아셀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입만 뻐끔거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는 잠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제게 꽂히는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킨 아셀라가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제는…….”
“잠시만 기다려. 옷 가져다줄 테니까.”
칼릭스가 재빨리 선수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내를 너무 심하게 괴롭혔다간 성에 돌아갔을 때 금욕의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몸을 생각하느라 참고 참아가며 안고 있는데 이보다 더 드물게는 안 됐다.
사실 그는 매일같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초야를 겨우 일주일이라고 말했던 과거를 후회하고 있을 정도로.
‘이 주일, 아니, 열흘 정도라 말했어도 되었을 것을.’
어쨌거나 지금 와서 초야를 또다시 치를 순 없었으니, 온갖 다양한 수단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생각과 함께 칼릭스가 걸려 있던 옷을 가져와 침대에 내려놓았다. 시트를 꼭 붙든 아셀라의 손을 쥐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입을게요.”
“입혀줄게.”
아셀라의 도리질이 거세졌다.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거였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다.
‘또 저번처럼…….’
성에서 지낼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욕실에서 막 나오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물기를 닦아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혼자 하겠다는데도 기어이 수건을 빼앗더니 아니나 다를까, 결국엔 다시 목욕해야만 했다. 그것도 완전히 힘이 빠진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가 씻겨주는 내내 몸을 내맡겨야 했다.
“괘, 괜찮아요.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나가고 싶지 않은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은밀해졌다.
달라진 기류에 당황한 그녀가 움찔거리는 순간, 그가 침대에 있던 옷을 도로 휙 잡아챘다. 아셀라가 다급히 잡으려 했으나 때는 늦은 뒤였다.
“결정해, 아셀라.”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으나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평소보다 짙어진 눈동자가 급기야 맹수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 입을 건지.”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야릇한 긴장감에 숨이 막히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니면 몇 시간 뒤에 입을 건지.”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시간’이라는 말을 할 때 그의 적안이 색스럽게 번뜩이는 걸 보고야 말았으니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칼릭스가 어떤 수치를 애매하게 표현할 때는 어느 경우든 그녀가 생각한 이상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몇 시간과 그의 칼릭스의 몇 시간은 매우 다를 것이다.
아셀라는 막사 입구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음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었지. 적어도 남편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을 눈치챈 칼릭스가 낮게 웃었다.
“그렇게 고민되면 내가 정해줄까?”
칼릭스의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지그시 눌렀다. 손가락을 미끄러뜨린 그가 턱과 목의 여린 살을 느릿하게 쓸어내리고 동그란 어깻죽지를 어루만졌다.
단지 그뿐인데도 아셀라는 눈앞이 번쩍하는 아찔함을 느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열감이 번져나갔다.
그녀는 위험을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그에게 냅다 잡아먹히고 말 거라는 걸.
하지만 남편이 이렇게 작정하고 유혹하면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어떤 기대감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지고 있었다.
칼릭스가 마지막 보호막인 양 붙잡고 있던 시트를 기어이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서늘한 공기에 냉큼 사내의 목을 그러안았다. 몇 시간은 안 돼. 필사적으로 그를 붙들고는 속삭였다.
“지금, 지금 입을게요. 칼릭스.”
남자의 얇은 입술이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의 느른한 웃음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커다란 손이 낭창한 허리를 옥죄듯 감아 힘껏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 *
화창한 오후였다. 어제 내내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폭우가 무색할 정도로 청명한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대공 부부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모두가 저택 밖으로 나와 주인을 맞을 준비를 했다. 예상보다는 이른 도착이었다.
폴짝폴짝 계단을 내려온 메리엘이 알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왜 갈 땐 이동 포털을 사용하지 않은 거야? 난 마법사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렌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포털로 돌아오시는 건 두 분 전하뿐이거든. 나머지 부대는 직접 이동해서 도착할 거래.”
“아, 그런 거였어? 하긴, 그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건 힘들겠구나.”
“힘든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지. 메리엘, 너처럼 재능을 타고난 마법사는 드물어.”
소년이 뛰느라 헝클어진 소녀의 은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주었다.
메리엘이 홱 몸을 돌리더니 그를 마주 보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알렌이 멈칫했다.
“내가 재능있어?”
푸른 눈이 깜박거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햇살처럼 부서지는 밝은 미소에 알렌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당연하지. 무엇보다 넌 샤르투스의 이능자잖아.”
“그럼 내가 나중에 마탑주 해도 돼?”
“뭐어?”
당돌한 물음에 알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반응을 내내 유심히 관찰하던 메리엘이 어안이 벙벙해진 소년의 표정에 빵 웃음을 터뜨렸다.
“알렌 얼굴 좀 봐! 바보 같아!”
깔깔거리는 소녀와 얼이 빠진 소년.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라이젠과 파비안도 입가의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마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메리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좋은 자세입니다, 영애. 자고로 가주가 되실 이는 야망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죠?”
메리엘이 씩 웃으며 알렌의 팔꿈치를 툭 쳤다.
“들었지? 그러니까 알렌도 긴장해. 나한테 마탑주 자리 뺏기지 않으려면.”
알렌이 황망한 얼굴로 소녀의 포부를 듣던 와중, 사용인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세웠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메리엘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언니다!”
쪼르르 달려가 대공비를 덥석 붙잡고는 꼭 껴안는 아이를 보며 모두가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드리웠다.
주인 없던 저택이 비로소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 * *
라이젠이 잔꽃이 그려진 찻주전자를 기울여 비어 있던 찻잔을 채웠다.
장미의 그윽한 향이 대공의 응접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소파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칼릭스가 동굴 근처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막 마친 탓이었다.
“어떻게 그런…….”
“발견한 구덩이는 하나였지만 아마 더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아셀라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알렌도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낯빛이 좋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무언가 생각하던 알렌이 입을 열었다.
“황제가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하는 듯합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요.”
“같은 생각이다.”
“혹 시신에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칼릭스가 잠깐 침묵했다.
마치 아는 사람인 양, 모든 시신에서 풍기던 한 가지 익숙한 기운. 그 이유 모를 이상한 느낌이 기이한 불쾌감을 일게 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던 때였다.
“칼릭스.”
아내의 목소리와 그의 손에 닿아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그래서 그는 무시하고 묻어버리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모든 시신에서 동일하게 특정 인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황제가 마법을 걸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황제는 아니다. 그건 확실해.”
페르난데, 그자의 기운을 모를 리가.
심지어 황제가 아셀라에게 걸었던 주술로 인해, 그가 가진 흑마법의 느낌까지도 모조리 꿰뚫고 있는 칼릭스였다.
“낯익은 기운이었다. 내가 아는 자의 것이거나 혹은 접점이 있는 자다.”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이상한 일이지. 익숙한데 정작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는 게.”
시니컬한 대답과 함께 칼릭스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곱씹을수록 불쾌감만 깊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셀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기운이 변형되어서가 아닐까요?”
“변형?”
“네. 당신이 익숙하다고 느낀 이유는 원래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누군지 모르겠는 건 처음과는 달라졌기 때문일 테고요.”
“일리가 있습니다.”
알렌이 맞장구쳤다.
“황제가 이용한 힘이 다른 대상에서 비롯된 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입니다. 사용할 수 있게 변형 과정이 필요할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힘을 이용한다?”
“예, 전하. 사악한 주술이긴 합니다만 강제로 능력을 추출하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어떻게? 칼릭스의 소리 없는 물음에 알렌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워낙 고대 마법인 데다 흑마법의 일종이라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대상자가 살아 있는 상태, 혹은 죽더라도 일정 시간 내에 심장을 뽑아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끔찍한 설명에 아셀라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의 불안과 두려움을 알아챈 칼릭스가 팔을 뻗어 작은 어깨를 감쌌다.
“그런데 누구의 힘을 이용하는 걸까요?”
알렌이 말을 하다 말고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능력을 이용하려 들 정도라면 상당한 힘의 소지자라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보통 사람은 아닐 테고…….”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소년의 제비꽃색 눈이 흔들렸다.
“혹시…….”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20화
‘설마.’
아셀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며 눈앞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누군가가 저를 통째로 집어 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으로 던져넣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붙잡혀 나락으로 잠겨 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득한 심해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던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야, 아셀라.”
순식간이었다. 강한 힘에 몸이 휩싸이는 듯하더니 단번에 지상으로 끌어 올려졌다.
뭍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그녀가 칼릭스의 품에서 파드득거렸다. 막혔던 숨을 가까스로 토해내며 가슴을 들썩였다.
“당신 어머니는 아니야.”
그가 아셀라를 끌어안고는 등을 도닥였다. 연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가느다랗게 떠는 아내에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아델의 기운은 나도 알아. 그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이었어.”
동시에 알렌에게로 살기 어린 시선이 꽂혔다.
‘감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는 의미를 담은 무시무시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아직 소년에 불과한 마탑주로서는 버티기 어려울 살벌하고 섬뜩한 표정이었다.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알렌이 허리를 반으로 굽히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경솔하고 미흡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을 울렸다.
일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망했다.’
알렌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필이면 거기서 그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딱 오 분만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가 허리를 접은 자세 그대로 침을 꼴깍 삼켰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못해 칼에 푹푹 찔리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몸을 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마탑주.”
땅속을 파고 들어갈 듯 낮게 깔린 목소리에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알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개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경칩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칼릭스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알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살짝 휘어진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대공이 정말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지를 찢어발길 듯한 날것의 살기가 정확히 저를 향해 있었다. 심장이 선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목 뒤가 뻣뻣해졌다.
그때, 칼릭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셀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팽팽하던 긴장이 일시에 풀어졌다.
조금 전 알렌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은 금세 부드러워져 아셀라를 향했다. 희고 말랑한 볼을 매만지며 아내의 얼굴을 살피는 모양새가 세심하기만 했다.
“괜찮나?”
“네. 미안해요, 칼릭스. 많이 걱정하셨나요?”
“겨우 이런 일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요. 제가 착각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인데요.”
“그럴 리가 있나.”
착각이라니. 마탑주가 같잖은 소리를 하며 아셀라를 쳐다보는 걸 분명히 보았는데.
매일 아내를 웃게만 해주어도 모자랄 판인데, 저 밤톨만 한 어린놈이 그녀를 울렸다.
‘감히.’
아내를 울려도 되는 건 자신뿐이다. 그것도 저와 밤을 보내며 열락의 끝에 다다랐을 때만. 행복에 겨워 짓는 눈물 외에 그녀가 우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작 저따위 것이.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며 잇새로 무언가가 으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붉은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핏빛으로 번뜩였다.
“칼릭스.”
그의 분노를 단숨에 잠재운 건, 하나뿐인 아내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제가 오해한 거라니까요.”
“굳이 저자를 감쌀 필요 없어.”
여전히 냉랭한 시선으로 알렌을 쏘아보는 칼릭스를 향해, 아셀라가 달래듯 덧붙였다.
“마탑주님도 잠깐 착각하신 걸 거예요.”
“놀라서 울어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가 아직도 그녀의 눈꼬리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방울을 엄지로 쓸어냈다. 놀란 토끼처럼 빨개진 눈을 하고선 괜찮은 척하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아셀라 앞만 아니었어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말이 없었다면 정말 그리했을 거였다.
“안 돼요, 칼릭스.”
“뭐?”
마치 그의 생각을 다 꿰뚫어 보는 양 아셀라가 싱긋 웃고는 알렌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마탑주님은 그만 나가보세요.”
그림자처럼 서 있던 라이젠에게도 눈짓했다. 눈치껏 알아들은 두 사람이 재빨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평소라면 이 도주 행각을 놓칠 칼릭스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아셀라가 그의 목을 꽉 그러안아 버린 것이다.
어이없게 알렌을 놓쳐버린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다고 내가 저놈을 가만둘 줄 아나?”
“어쩌시려고요?”
“그야 당연히-”
칼릭스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슴 같은 눈망울이 끔벅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어서였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마탑주는 수십 동강이 나 있었지만 그걸 차마 여린 아내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탑주가 떠날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성을 빠져나가는 대로 소리소문없이, 아니, 쉽게는 안 되었다. 그녀의 눈물값을 톡톡히 치르도록-
“그러지 마세요, 칼릭스.”
칼릭스의 생각이 뚝 끊겼다. 아셀라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나쁜 짓.”
티 내지 않을 생각이었건만 아무래도 눈치채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꼭 당신이 울지 않았더라도 마탑주의 행동은 무례했어. 더군다나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로 오해를 부추겼지.”
“저도 알아요. 그 점에 대해선 따로 사과를 따로 받을게요.”
칼릭스가 자꾸만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도대체가 이렇게 무르고 착해빠져서야.
이러니 품에 끼고 돌 수밖에 없는 거였다.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성품이니 곁에서 지켜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러니 이번 건은 제게 맡겨주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칼릭스.”
죄지은 놈은 따로 있는데 왜 그녀가 이리 애를 먹어야 하나. 간신히 삭였던 분노가 다시 치솟을 때였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에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셀라.”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멍하게 벌어진 입술에 재차 같은 감각이 내려앉았다. 새털처럼 부드럽고 지독하게 달콤한.
“화 풀어요, 네?”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다. 제 팔을 붙든 손길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화사하게 웃는 얼굴에. 제게 닿아오는 따뜻한 몸에.
모든 게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히 부정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자, 그럼 약속해 주시는 거예요?”
아셀라가 그의 새끼손가락에 제 것을 걸고는 꼭 감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눈을 감고 차례로 숫자를 센 그녀가 밝게 웃고는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젠 다 됐어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거니까 절대 어기면 안 돼요.”
어쩐지 또 말려든 기분이었으나 칼릭스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만족하니 되었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어?”
조금 전까지도 예쁘게 웃던 아셀라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의아해진 그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셀라, 왜 그러지?”
“어…… 방금 생각 난 건데…….”
아셀라가 투명한 창을 통해 노을 지는 바깥을 잠깐 내다보았다가 어쩜 좋으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칼릭스, 간밤에 약을 안 드시지 않았어요?”
그는 그제야 어제 마수와의 전투에서 박살 나 버린 케이스와 차 가루를 떠올렸다.
그걸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괜찮은 거예요? 그거…… 매일 같은 시각에 꼬박꼬박 마셔야 하는 거잖아요.”
“하루 정도는 상관없어.”
그녀가 걱정할까 봐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약 없이는 고작 몇 시간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족의 피가 자꾸만 경계를 넘어 인간의 의지를 잠식하려 들었다.
거부할수록 전신에서 피가 끓고 날붙이로 살갗을 저며대는 고통에 휩싸였다. 머릿속에서는 지독한 환청이 들리곤 했다. 포기하라고, 놓아버리면 편해질 거라는 사악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