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71)

“아마도 황제와 관련된 걸 테고.”

아셀라가 다시 동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 불길하고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조심해야 해.’

그녀는 신중한 눈길로 동굴을 살폈다. 그사이 칼릭스가 조용히 뒤를 돌아 명령했다.

“지금부터 수색을 시작한다. 날이 저물기 전까지 끝내도록.”

“예!”

“맡겨주십쇼!”

그렇게 지크와 무장한 병사들이 막 동굴 안으로 진입하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그때까지도 말없이 동굴만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아셀라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동굴의 입구에 바짝 다가서서는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셀라, 왜 그러지?”

“뭔가가 이상해서요.”

그녀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그를 향해 물었다.

“혹시 장식 하나만 떼어주실 수 있나요?”

칼릭스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갑옷에 망토를 고정하던 어깨 장식을 떼어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그녀가 몇 발짝 뒤로 물렀다가 팔을 크게 휘둘러 동굴 안으로 던졌다.

금속 장식이 바닥에 여러 차례 튕기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순간 동굴 주변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 같은 침묵이 그들을 휘감던 그 순간.

“……!”

끼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칼날이 동굴 벽면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지면까지 박혔다.

하도 촘촘하여 칼날이 아니라 마치 그물 같았다. 어떤 날렵한 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함정이었다.

길쭉하고 예리한 칼날이 바깥의 햇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반짝였다.

지크가 경악에 차서 외쳤다.

“대, 대체 이게 다 뭡니까!”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동굴에 들어가려 했던 그였다.

대공비가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저 칼날에 꿰인 꼬치 신세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에 털이 비죽 솟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지크의 뒤쪽에 있던 병사들도 저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동요하는 눈동자 속에 희미한 두려움이 배어났다.

동굴 벽을 뚫고 나와 땅을 깊숙이 꿰뚫은 수천수만의 칼날이 주는 공포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황제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이가 딱 한 사람 있었다.

지독히 무표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동굴 안을 향했다.

“페르난데가 꽤 쓸 만한 함정을 설치해 놨군.”

칼릭스의 적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수를 풀어 입구를 지키게 하는 거로도 모자라 덫까지 놓았다.

이래서야 우연히 동굴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한편, 아셀라는 무릎을 접어 앉고는 손바닥으로 땅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찾는 게 있나?”

“아, 네.”

사뭇 진지해진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황제가 설치한 흑마법의 진원지가 느껴져서요. 이쯤 어딘가인 것 같은데…… 아!”

선홍빛 입술 사이로 별안간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셀라의 시선을 따라간 그는 어느새 그녀의 손끝에서 몽글몽글 만들어지는 금빛 방울을 발견했다.

비눗방울처럼 안쪽이 반투명하게 비쳤다. 그러나 만지거나 어딘가에 닿아도 터지지 않았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른 무수한 방울이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땅에 물감으로 그림이 그려지듯 검은 선들이 죽죽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주술이 새겨진 마법진이었다.

‘이게 황제의 흑마법……!’

지켜보던 병사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굴 주변을 에워싸듯 그려진 마법진은 육각성을 연상케 했다. 의미가 불분명한 온갖 기기묘묘한 도형과 문양이 안쪽에 빼곡했다.

안에 깃든 진득한 살기가 여과 없이 흘러나오자,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아셀라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법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전하!”

지크가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쳤다. 다급히 대공비를 만류하려던 그는 이내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녀의 손끝이 닿자마자 마법진이 쩍쩍 갈라졌다. 눈을 몇 번 깜박이는 사이에 완전히 조각나 버리더니 마침내 산산이 부서졌다.

공중에 흩뿌려진 검은 가루는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그대로 쓸려가 버렸다.

날고 기는 카르마의 일원들조차도 공포를 느끼게 했던 흑마법이 허무하리만치 파훼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아까 대공비가 펼쳐 보였던 능력이 더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소심하고 유약하다고만 여겼던 안주인이 처음으로 달리 보였다.

병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동안, 아셀라가 흙이 묻은 손가락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다 됐어요, 칼릭스. 이젠 동굴에 들어가도 안전할 거예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애를 먹었겠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걸요?”

생긋 웃으며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자 사내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까지도 꼼꼼히 살펴 흙과 먼지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과 함께 올 걸 그랬-”

그 순간, 동굴 안쪽에서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굉음이 났다.

도주하는 대공비 117화

홱 고개를 틀어 안의 상황을 살핀 그녀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안쪽에서부터 동굴이 무너지고 있어요!”

지체 없이 동굴로 뛰어 들어간 칼릭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바깥으로 나왔다. 아셀라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마법진을 파훼하면 동굴이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었나 봐요. 제대로 확인한 뒤에 파괴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어차피 마법진을 없애지 않았다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침울해하는 그녀를 달랬다.

“페르난데의 방식이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바에야 아예 망가뜨려 버리는 식이지.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어.”

그러고는 지크를 불러내 명령했다.

“동굴 주변을 수색하라. 페르난데가 흘린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주의 깊게 살피도록. 수색을 마치는 대로 여길 정리한다.”

“예, 주군!”

지크가 제 부하들 쪽으로 날쌔게 뛰어갔다. 곧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이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셀라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건…….’

눈에 익은 은제 케이스가 엉망으로 구겨진 채 땅에 처박혀 있었다. 주변으로 검은 가루의 흔적이 간간이 보였다.

허리를 굽혀 케이스를 집어 든 그녀 곁으로 칼릭스가 다가왔다.

아셀라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칼릭스,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야.”

그가 근처의 병사를 불러 짤막이 무언가를 지시하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걸으며 이야기할까?”

아셀라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긍정의 의미였다.

칼릭스는 아내가 빗물로 치덕치덕해진 땅을 잘못 밟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끌었다.

고요한 숲길을 부부가 나란히 걸었다.

그가 그녀의 반대쪽 손에 들린 케이스에 한번 눈길을 던졌다가 말문을 열었다.

“알고 있었나?”

“며칠 전에요.”

아셀라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가 떠난 뒤 별안간 눈 앞에 펼쳐지던 장면, 실제로 집무실에서 발견한 가루약, 그리고 라이젠을 불러 사실을 확인한 일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칼릭스가 담백하게 답했다.

“그랬군.”

“제가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불쾌하진 않나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물음이 이어졌다. 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불쾌하다? 아니 전혀.

가만히 제 생각을 가늠하던 그가 이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불쾌할 일이 뭐 있겠어. 오히려 당신에게 진즉 말해주지 못했으니 내가 미안해할 일이지.”

“그래도요.”

“당신이야말로 내게 실망하지는 않았나?”

걸음을 멈추곤 몸을 돌렸다. 희고 말랑거리는 고운 뺨을 자유로운 한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을 서두른 이유를 들었을 테니까.”

베네비토의 핏줄을 유지하고 이어나가기 위한 정략혼. 이를 위해 청혼부터 결혼식까지 단 한 달 만에 끝내버렸다.

“……전하께선 가주시잖아요. 후계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걸요.”

돌아온 대답에 칼릭스는 묘한 감상을 느꼈다. 후계, 자식, 아이.

사실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칼릭스는 제 가문에 특별한 애정이 있지 않았고, 오히려 힘을 좇아 마족의 피를 섞은 초대 대공을 경멸했다.

문득 저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지곤 했다.

필요하니 가문을 이용하는 것뿐, 저가 죽고 난 뒤의 베네비토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와의 결혼을 서둘렀다. 성년이 되자마자 혼담을 넣으라 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할 것처럼.

‘어째서.’

후계자를 낳을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여자로 그녀를 택했었다. 약혼하고도 결혼 전까지 그녀를 위해 어떠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어차피 대공비의 자리에 잠시 앉혀둘 여자에게 가당찮은 배려라 여겼으니까.

그만큼 아무런 낭만도, 꿈도 없는 결합이었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던가.

칼릭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셀라가 그를 위해 베네비토의 문장을 수놓아 감아준 손수건이 흐트러짐 없이 묶여있었다.

동시에 어느 추운 겨울날 흰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사라졌던 앳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긴 한숨 끝에 피어오르던 하얀 입김과 처연한 얼굴, 작고 가냘픈 몸까지 생생하리만치 제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랬었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날 법한 평범한 일이었다. 인연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울 정도로 잠깐 스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수건을 가져와 서랍의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 그녀의 생일을 알아냈다.

수많은 귀족 가의 혼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게 무색하게도,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마치, 그녀와의 결혼을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처럼.

마침내, 칼릭스는 제 모든 이해할 수 없었던 결정과 납득하기 힘든 행동의 이유를 찾아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전부터 품고 있었을 감정.

깨닫고 나니 그 어떤 것보다도 선명한 색채로 도드라져 보였다.

지금까지 몰랐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존재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설원처럼 새하얀 눈이 깔린 황궁 정원.

그 한가운데 홀로 떨고 있던 자그마한 새 같은 여자를 지켜주고 싶었었다. 오래전부터.

오만하고 냉정하기만 하던 사내는, 이제야 비로소 제 감정을 인정했다.

“칼릭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에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는 존재는 저의 아내였다.

풍성한 은빛 속눈썹이 박힌 눈꺼풀이 깜박거릴 때마다 사파이어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당신 생각.”

풋, 아셀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눈매를 곱게 휘고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농담도 하시는 분인 줄은 몰랐어요.”

“농담 아니야.”

“그럼 제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생글생글 웃으며 물어오는 얼굴에 칼릭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감정을 자각한 사내는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져 버린 여자 앞에서 이제 한없는 약자가 되고 말았다.

“아셀라.”

“네, 칼릭스.”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나?”

그의 얼굴을 담고 있던 새파란 눈동자가 일순 커다래졌다. 새 부리 처럼 작은 입술 사이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당신은 나와 결혼하길 원치 않아 했으니까.”

제 감정은 일방적이었다. 그녀가 그를 남편으로 여기고 있다고는 하나, 결혼을 물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일 터다.

아내의 선택이 바꿀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것뿐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혹시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다면, 그녀는 그를 떠나길 원하는 건 아닐까.

제게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도망칠 날만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후회 안 해요.”

그랬기에 들려온 단호한 대답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마음속 바람이 지나치다 못해 헛것이 들리나보다 했다.

“당신이 제 남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재차 들려온 말은 여전히 같았다. 그의 적안이 거세게 요동치며 그녀를 응시했다.

오롯이 저를 쳐다보는 푸른 눈망울에 숨이 막혔다.

아, 칼릭스는 작게 탄식했다.

자신은 절대로 그녀를 놓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만을 평생 갈구할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셀라, 나는-”

쏴아,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부터 하늘이 구물거리는가 싶더니 변덕스러운 산 날씨가 기어이 땅에 비를 뿌리기 시작한 거였다.

칼릭스가 재빨리 아셀라를 품에 껴안고는 근처의 큰 나무 아래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친 듯이 퍼붓는 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비 맞은 몸으로 차가운 산 공기까지 맞닥뜨리면 심한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가 세찬 빗소리를 뚫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근처에 진지가 있어. 몇 분이면 도착할 거야.”

“거기로 가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가 제 망토를 거칠게 뜯어내고는 그녀의 머리부터 망토를 덮어씌워 비를 막았다.

“괜찮은데…….”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브로치를 떼었다. 가느다란 목 아래쪽으로 단단히 망토를 여미어 브로치로 고정하고는 가벼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셀라가 망토 자락 안에서 잠시 꼬물거리다 고개를 빼꼼 내밀곤 그를 쳐다보았다.

“쓰고 있지 않고.”

“겨우 머리에 조금 맞는 것뿐인데요.”

그러면서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갑옷을 입은 탓에 거의 감촉을 느낄 수 없었음에도 생생하게 닿아오는 듯했다. 옅은 입김조차 상상될 정도였다.

“비가 차.”

비가 내려 세상이 온통 축축한데도 나온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흘러내린 망토를 도로 끄집어올려 머리까지 덮었다.

아셀라가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다 작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고집쟁이.”

그러고는 다시 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고집이라면 당신도 만만찮아.”

피식 웃으며 말을 되돌려준 그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 *

칼릭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얇은 망토는 세찬 빗줄기를 막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비에 쫄딱 젖고 말았다.

까딱하다 약한 아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기에 칼릭스는 서둘러 진지에 도착했다.

막사 입구의 천을 급히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셀라가 내부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도 젖지 않았네요?”

“방수 처리가 되어 있어. 바닥 가장자리엔 물이 좀 스미겠지만.”

그녀를 카우치에 내려놓은 그가 막사 한쪽에서 마른 장작 몇 개를 집어 들었다.

타다만 장작을 헤집어 불씨를 살리자 불길이 옮겨붙으며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셀라가 몸을 일으켜 모닥불 근처로 다가섰다. 그가 조심하라 이르며 덧붙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따뜻해질 거야.”

“네.”

대답과 함께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가 손을 뻗어 차가워진 손을 녹였다.

타오르는 붉은 불꽃이 함께 밤을 보낼 때의 칼릭스의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홍염처럼 열렬한 시선이 저를 향할 때마다 마음이 설레곤 했다.

“……쓸 만한 게 하나도 없군.”

들려온 혼잣말에 아셀라가 고개를 슬쩍 빼 들었다. 커다란 나무 상자 뚜껑을 열곤 미간을 문지르는 남편이 보였다.

“젖은 옷을 그대로 입게 할 수도 없고.”

도주하는 대공비 118화

“칼릭스?”

난감해진 얼굴로 그가 뒤돌아보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켜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뭐 하고 있었어요?”

상자 속을 들여다보니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모두 남편의 옷이었다. 그의 고민을 알아챈 그녀가 씩 웃으며 커다란 셔츠 하나를 쑥 꺼내 들었다.

“이걸로 할게요.”

“당신에겐 맞지 않을 텐데.”

“어차피 옷이 마를 때까지만 임시로 입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칼릭스는 수긍했다. 다행히 담요도 있고 장작도 충분하니 어찌어찌 옷이 마를 때까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당신이 입기엔 천이 거칠어. 이게 나을 거야.”

상자에서 그나마 괜찮은 옷을 골라준 칼릭스가 막사 밖으로 막 나서려던 때였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당신 옷 갈아입어야지.”

고개를 갸웃거린 아셀라가 사뿐사뿐하게 걸어가 그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밖에 비 오잖아요.”

“그래.”

“저는 당신이 비 맞는 거 싫어요.”

그러더니 잡은 손목을 살짝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저뿐만 아니라 당신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건 매한가지고요.”

“……괜찮겠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뭐 어때요. 부부인데.”

순간 칼릭스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달빛처럼 흰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가 너무도 고와서. 으스러지도록 품에 껴안고 싶을 만큼 어여뻐서. 당장 온몸에 제 흔적을 새겨넣고 싶어질 정도로 열망을 들끓게 해서.

“여기서 같이 갈아입어요.”

정말이지 미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저렇게 순수한 눈망울을 하고서, 아내는 잘도 저런 말을 하곤 했다. 이제 와 변명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를 밤마다 쉼 없이 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시시때때로 자극해대니 혈기왕성한 젊은 사내에겐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네?”

아셀라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바짝 다가왔다. 젖은 몸이 엉겨 붙듯 밀착되며 꽃향기 같은 특유의 체취가 훅 끼쳤다.

비에 젖어 물비린내가 섞인 체향이 끈적거리듯 코에 달라붙었다. 묘하게 자극적이다. 칼릭스가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돌겠군.’

눈빛이 탁해진 건 순식간이었다. 고열이 이는 것처럼 단숨에 몸이 들끓었다. 가까스로 욕망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이럴 때마다, 날 유혹하려고 작정한 사람 같은 거 아나?”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에 뜨거운 정염이 묻어났다.

기다란 손가락을 뻗은 그가 그녀의 뺨을 애무하듯 매만졌다. 그릇에 가득 찬 물처럼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한 아슬아슬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순진하게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칼릭스는 제 손바닥에 닿아오는 말랑한 뺨의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아셀라가 볼을 부빈 거였다. 그 작은 행동조차 열망에 불을 지폈다.

잠시 뒤, 손등 위로 작은 손 하나가 겹쳐지더니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렇게 몸을 빼낸 그녀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한 뒷걸음질이 아니었다.

‘……!’

칼릭스의 눈이 홉 뜨이며 그가 숨을 훅 들이켰다.

툭.

아셀라의 몸에서 젖은 옷가지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겨진 옷이 차례로 낙하했다.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투명하리만치 흰 살결이 조금씩 더 드러났다.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행동.

칼릭스는 그 아찔한 광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가 침대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어 있었다.

도자기처럼 뽀얗고 새하얀 피부가 채 마르지 않은 물기로 매끄럽게 빛났다.

미칠 듯이 선정적이고 야한 모습에 칼릭스가 침음을 삼켰다.

빗물에 젖어 반질거리는 붉은 입술이 살그머니 벌어졌다. 곧이어 그의 이성을 끊어놓는 말이 흘러나왔다.

“……유혹하면 안 되나요?”

“아니.”

칼릭스의 얼굴에서 완전히 여유가 사라졌다.

단숨에 다가가 아셀라의 허리를 휘감고는 곧바로 작은 입술을 덮쳤다.

조금은 성마르고 조급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혀가 수줍게 그를 맞이하자 혀뿌리를 강하게 얽어매며 있는 힘껏 숨을 빨아들였다.

“……읏!”

거침없는 입맞춤에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잡아먹을 듯 구석구석 남김없이 휘저으며 손으로는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

격렬한 입맞춤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렇게 여러 번 일러주어도 아내는 입을 맞출 때마다 제대로 숨을 쉬질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쉬운 듯 입술을 떼어냈다.

아셀라가 그의 품에 몸을 늘어뜨린 채 숨을 할딱거렸다. 칼릭스는 그새 발갛게 물든 아내의 눈가에 맺힌 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물기에 젖어 흐려진 눈동자가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내가 말했던가?”

“……하아, 뭐, 를요?”

“내 막사엔 방음 마법이 걸려 있다고.”

아, 아셀라가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 목소리조차도 색정적이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지그시 물었다 떼며 속삭였다.

“그러니 마음껏 울어, 아셀라.”

* * *

다음 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수색에서 지크의 부대가 단서를 건졌다.

“주군! 이쪽입니다!”

보고를 받고 직접 상황을 확인하러 온 칼릭스는 반쯤 파내진 구덩이 속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완전히 살점이 삭아 없어진 허연 뼈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이 한데 뒤섞여 묻혀 있었다.

“총 몇 구나 되지?”

“대략 열다섯 구 정도 됩니다. 그런데 구덩이가 이거 하나만 있겠습니까?”

지크가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어댔다.

“대체 황제 놈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우글우글한 마수 떼를 풀어놓질 않나, 멀쩡한 동굴에 별 희한한 짓을 해놓질 않나. 게다가 이 시체들은 또 뭐고요!”

칼릭스는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지크를 내버려 둔 채 구덩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메마른 시선이 죽은 이들의 흔적을 건조하게 훑어내렸다. 그의 눈이 가장 최근 숨진 것으로 보이는 시신으로 향했다.

‘…….’

죽은 이를 보는 건 지겨우리만치 익숙했다.

전쟁터에선 항상 죽음이 따라다녔고 산 자만큼이나 죽은 자들로 넘쳐났다.

드넓은 평원이 한때 사람이었던 이들의 피로 붉게 물들고 강의 물줄기가 핏물이 되어 흐르는 광경도 보았다.

그런데 고통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 탓이었을까, 유독 이들의 모습이 참혹하게 느껴졌다.

칼릭스가 조금 더 가까이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무언가를 감지해 낸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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