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터진 입술을 부드럽게 쓸던 손가락의 촉감. 상처가 나니 깨물지 말라던 다정한 목소리.
어쩌면 그때도. 그때부터.
‘……절 걱정하셨나요?’
‘걱정했어.’
주술이 조작해 낸 헛된 기억에 매몰되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했다. 켜켜이 쌓여가는 오해를 풀 생각조차 않고 도망치려고만 들었다.
‘이 모든 일이 황제로부터 비롯되었어.’
아셀라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황제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 부모님도, 가문도, 자랑스러운 샤르투스의 이름도. 심지어 그녀의 생명을 옥죄어 미래마저 흔들려 했었다.
‘칼릭스.’
하지만 그녀에겐 그가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도 메리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술을 깨고 이능을 각성할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아셀라의 머릿속에 아까의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검은 차를 마시곤 피를 토하며 몸을 고꾸라뜨리던 칼릭스의 모습이.
마치 미래를 보여주듯 생생했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아.’
아셀라가 번쩍 눈을 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굳은 결심을 품고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더는 너 따위에게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겠어.’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이 시리도록 빛났다.
새장 속에 웅크리고만 있던 하얀 새가 마침내 날갯짓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칼릭스가 대공성을 비운 지도 어느덧 며칠이 지났다.
막 오후로 접어드는 한낮, 아셀라를 찾아온 라이젠이 대공의 소식을 알렸다.
“비전하. 조금 전 전서구가 성에 도착했습니다. 이건 전하께서 비전하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칼릭스가 편지를 보냈어요?”
아셀라가 냉큼 편지를 받아 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남편의 글씨를 오늘에서야 처음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힘 있고 강인한 필체.
그가 적은 제 이름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실링을 떼어내곤 편지를 펼쳤다. 적힌 내용을 살피는 눈길이 신중하기만 했다.
잠시 뒤, 아셀라가 손을 떨구었다. 입술 새로 탄식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더 늦어질 것 같다니…….”
그녀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마수의 행동 패턴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수색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곧 둥지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고마워요, 카단 경.”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라이젠이 나가고 홀로 남은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의 밝은 햇볕과 상쾌한 바람도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내가 이능을 다룰 수만 있었어도 함께 갔을 텐데.’
메리엘처럼 강력한 마법 이능이 아니더라도, 능력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분명 그를 도울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능의 종류도, 어떻게 해야 힘을 발현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자신이 따라가 보아야 짐 덩어리만 될 것 같아서 아셀라는 차마 같이 가자고 고집부리지 못했다.
손에 든 편지를 다시 한번 보고는 한숨을 내쉬는데, 메리엘이 찾아왔다.
“언니, 바빠?”
“아니. 어서 와.”
아셀라가 표정을 감추며 동생을 맞이했다.
그러나 메리엘은 금세 언니의 얼굴색이 좋지 못하다는 걸 눈치챘다. 어쩐지 조금 멍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주스로 대충 입을 축인 그녀가 얼른 말문을 열었다.
“오는 길에 카단 경이 나가는 걸 봤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전하께서 며칠 늦으실 거란 기별을 전해주러 온 거야.”
“상황이 많이 안 좋아?”
“그건 잘 모르겠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셀라가 착잡한 얼굴로 들고 있던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저 늦어진다는 연락이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걱정되는지 모르겠다.
메리엘이 눈을 도로록 굴리며 아셀라를 살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게 분명해.’
저번에도 라이젠과 할 말이 있다면서 전하의 집무실에 마법을 걸어 달라 부탁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언니, 솔직히 말해봐. 고민 있지?”
“어? 아니야.”
아셀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동생의 매서운 눈치를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메리엘이 손에 들고 있던 쿠키마저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아직도 내 이능이 뭔지 모르는 게 답답해서.”
나직한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너는 각성이 시작되자마자 이능을 사용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한참이 지났는데도 힘을 느낄 수조차 없는 걸까?”
“이상하긴 해.”
메리엘이 잠시 그녀의 심장께를 바라보다 얼굴을 찌푸렸다.
“나한텐 언니에게서 흘러나오는 이능이 느껴지거든. 내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강해서 눈에 보일 정도야. 그런데 도무지 무슨 이능인지 모르겠어.”
메리엘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이능과는 달라. 그건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 뭔가 평소와 달라진 거 없어?”
그 말에 아셀라가 멈칫했다. 메리엘이 반색하며 물었다.
“있구나? 뭔데?”
동생에게 이야기할지 말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실은 요즘에 꿈을 꾸거나 어떤 장면을 봐.”
“그래?”
메리엘이 토끼 눈을 하고는 크게 탄성을 터뜨렸다.
“역시 예지가 아닐까?”
“그럼 어머니의 마법은 그대로 남기면서 흑주술만 깨진 게 설명이 안 되는걸.”
“하긴 그건 그래.”
유디트는 단순히 이능 각성의 여파로 주술이 깨진 거라면 어머니의 마법도 함께 사라졌을 거라 했었다.
‘비전하가 가진 이능의 특성 때문에 아델 님의 마법이 유지된 거예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메리엘이 다른 가능성을 들었다.
“마법과 예지 둘 다인 건?”
“성녀님 말씀으로는 어머니의 기류와도 다르다고 했어.”
“그럼 대체 뭐지?”
메리엘이 표정을 잔뜩 구겼다. 다시 원점이었다.
아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답답한 사람은 그녀였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가 상심한 언니를 위로했다. 그러고는 손 우물을 만들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아셀라의 기류를 담았다.
“정말 독특하고 예뻐. 맑고 반짝거리고……. 분명 강력하고 아름다운 이능일 거야.”
“고마워.”
동생의 따뜻한 말과 다정한 미소에 아셀라의 굳었던 얼굴이 스르르 풀어졌을 때였다.
“그런데 언니가 봤다는 장면은 뭐였어?”
도주하는 대공비 115화
“그건…….”
칼릭스가 먹는 가루약을 이야기할 순 없었다. 그건 그의 비밀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셀라는 꿈에서 보았던 마수의 둥지만 설명했다.
“황제가 뭔가 사악한 짓을 벌이려는 것 같아.”
꿈속에서도 느껴지던 숨 막히는 답답함과 매캐한 죽음의 냄새. 그간 그녀를 괴롭혔던 흑주술에서 풍겨오던 감각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불길하게 느껴지던 검은 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황제를 막아야 해. 더는 끔찍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더불어 칼릭스를 도울 수 있다면. 그가 차를 마시지 않고도 광기에 잠식당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하지만 언니, 황제를 어떻게 막으려고?”
메리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황제는 강력한 흑마법사야. 알렌이 그러는데 황제가 마탑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댔어.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당해내?”
아셀라도 알았다. 아직 그녀로선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그녀들을 노리고 있었고 자칫 방심하다간 목숨도 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메리엘.”
칼릭스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들 부부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를 이능을 기다리며 얼마 되지 않는 귀한 시간을 허비해버릴 순 없었다.
“언니, 대체 어쩌려고…….”
“건국제가 머지않았어.”
메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야?”
“자연스럽게 황궁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나마 안전하기도 하고.”
“황제는 어떤 식으로든 언니한테 접근할 거야. 위험해.”
하지만 그게 아셀라가 바라는 거였다. 위험하지만 가야 한다는 직감이 자꾸만 일었다.
‘황제를 만나야 해.’
지금껏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 황제의 손에 있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아직도 많았다.
황제가 건재하는 한 메리엘은 여전히 안전하지 못했다. 샤르투스의 명예와 이름을 되찾아 부모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아야 했다. 칼릭스를 구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언니가 굳이 미끼가 될 필요는 없잖아.”
들려온 목소리에 아셀라가 놀란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마치 제 생각을 꿰뚫은 듯한 말이었다.
메리엘이 의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언제부터였는지 있는 힘껏 그러쥐고 있던 주먹 위에, 아이의 손이 내려앉았다.
“언니, 이제 가문이나 의무 같은 건 생각하지 마. 앞으로는 다른 사람 말고 언니 행복만 생각해.”
아셀라의 눈에 거센 동요가 일었다. 이 어린애가 어떻게 제 마음 까지 읽어냈을까.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입을 뗐다.
“샤르투스는 억울하게 멸문했어.”
반역 사건은 샤르투스를 짓밟기 위해 황제가 벌인 자작극이었다.
“부모님도 그자 때문에 돌아가셨고.”
전하가 아니었다면 너도 잃었을지 몰라. 뒷말은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간신히 삼켰다.
“나는 가문을 되찾을 거야. 부모님이 소중하게 여기셨던 샤르투스의 이름과 명예를 돌려받을 거야.”
그리고 널 지킬 거야. 칼릭스를 구할 거야. 그가 마족의 힘에 잠식당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낼 거야.
“언니…….”
아셀라가 메리엘을 껴안고는 자그마한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메리엘. 하지만 나는…… 흐윽!”
“언니?”
갑자기 아셀라가 눈을 치뜨며 숨을 훅 들이켰다.
또다시 켈튼산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장면은 꿈속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나빴다.
치열하고도 살벌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아셀라는 마수에게 뱅 둘러싸이다시피 한 누군가를 발견했다. 주변에는 이미 죽은 마수의 시체가 그득했다.
겹겹이 에워싸여 있던 틈이 아주 잠깐 벌어지며 드러난 얼굴에, 아셀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칼릭스!’
그가 한 번 손을 휘두를 때마다 마수의 몸이 검의 궤적을 따라 갈렸다.
그러나 하나를 베면 어디선가 또 둘이 나타났고, 둘을 베어내면 또 넷이 달라붙는 식이었다. 검 손잡이를 쥔 손이 그새 마수의 푸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렇게 장면이 끝나버리자, 아셀라가 가슴을 쥐어짜듯 앞섶을 붙잡고는 허리를 접었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마치 자신이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 같았다. 그녀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을 위해 힘겹게 입술을 뗐다.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그때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아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숲속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강대한 기류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 이능이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순도 높은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내가 가야 해.’
깨달음은 명확했다. 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예감은 확신에 가까웠다.
아셀라가 동생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메리엘, 네 도움이 필요해.”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아이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나를 칼릭스가 있는 곳으로 보내줘. 지금 당장.”
* * *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셀라는 켈튼산에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 지점이었다.
메리엘은 처음엔 그녀를 말렸다. 정 가야만 한다면 함께 가자고도 했다.
그러나 아셀라의 결심은 확고했고, 결국엔 그녀를 도와주었다.
‘도착하고자 하는 곳의 모습을 떠올려. 기억이 선명할수록 좋아.’
성 밖으로 나와 포털을 연 메리엘이 마지막으로 아셀라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언니, 몸조심해야 해.’
저를 걱정하는 어린 동생을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두고 켈튼산으로 향한 칼릭스의 마음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 내린 숲속의 서늘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셀라는 꿈에서처럼 가만히 서서 방향을 가늠했다.
‘이쪽이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젖은 풀잎과 잔가지가 발목에 스치며 빗방울의 물기가 스며들었다. 치맛자락 끝에 풀물이 들고 진흙 따위가 엉겼으나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점점 거리가 줄어드는 게 느껴지는데, 반면 초조함은 더해져만 갔다.
‘칼릭스, 어디 있는 거예요?’
서둘러 동굴을 찾아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숲을 헤쳐나가는 아셀라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칼릭스가 제 앞을 가로막은 마수의 어깻죽지부터 허리까지 비스듬히 갈랐다. 벼려진 검이 지나간 궤도를 따라 마수의 몸체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숨이 끊어지는 마수의 몸에서 푸른 피가 솟구쳤다.
베어도 또 베어도 끝이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숫자가 켈튼산에 둥지를 틀고 있었단 말인가.
이토록 급속한 번식은 자연적으론 불가능했다.
“키아아악! 키악!”
이번에는 마수의 목을 향해 칼릭스의 검이 쇄도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체가 주변에 쌓여갔다. 그러나 아직도 개미 떼처럼 남아 있는 마수가 동굴까지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나를 죽여야 한 걸음을 좁힐 수 있는 식이었다.
“전하, 마수의 숫자가 줄질 않습니다!”
“병사들이 점차 지쳐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크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제 앞을 가로막는 마수의 눈을 찌르며 그가 악을 썼다.
“젠장! 이 빌어먹을 짐승 새끼들이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건지!”
마수의 피로 흠뻑 젖은 지크가 조금 전 눈가에 튄 푸른 피를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주군, 이렇게는 얼마 못 버팁니다!”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마수를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일부러 닫아놓은 그의 힘을 개방하기만 한다면 이 근방에 뒤덮듯 깔린 마수를 단숨에 제거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시선이 바닥의 한 지점을 향했다.
라이젠이 챙겨주었던 은제 케이스가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안의 가루가 죄 쏟아져 버린 건 물론이었다.
그나마도 전투 과정에서 마수의 발에 어지럽게 짓밟힌 덕에 이제는 가루의 흔적도 찾기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마족의 힘을 개방했다가 만약 광기가 사그라지지 않는다면.
예전에는 그런 가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힘을 사용했다.
그때의 그는 자신이 오래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삶에 그다지 미련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이었다. 더는 아니었다.
‘칼릭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예뻐요. 꼭 루비 같아.’
이젠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생겼다. 그녀에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겠다 약속했다.
‘아셀라.’
칼릭스는 처음으로 생에 열망을 느꼈다. 인간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버티고 버텨서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반드시 아내에게 돌아갈 것이다.
‘집중해.’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이 명료해지며 상황을 가늠했다.
마수는 본능적으로 강한 자에게 몰려들었다. 그가 지나온 길마다 줄줄이 쌓인 시체가 이를 증명했다.
“물러나라.”
주인의 위압적인 명령에 지크가 재빨리 대열을 뒤로 물렸다.
붉은 안광이 형형해지며 섬뜩한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검 손잡이를 고쳐잡은 그가 검날에 검기를 불어넣기 시작하자 칼날 같은 예기가 검 전체를 뒤덮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마수가 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칼릭스가 싸늘한 비소를 입가에 두르며 칼을 높게 쳐들었다.
그때였다.
시선의 끝에,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의 모습이 비친 건.
“……!”
일순 칼릭스의 모든 동작이 정지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전하! 피하십시오!”
지크의 외침에 칼릭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마자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조금 전 그가 있었던 땅이 깊게 파였다.
곧바로 검을 횡으로 그어 달려드는 마수를 제거했으나, 문제는 그가 아니었다.
아셀라를 발견한 다른 마수가 그녀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셀라!”
칼릭스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아셀라의 커다래진 눈.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달려드는 마수의 송곳니와 치켜든 발톱. 이 모든 장면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안 돼!’
그녀를 잃을 순 없어.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어.
망설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검 끝으로 지체없이 제 손목을 찔렀다.
그렇게 마족의 힘을 개방하려던 순간.
더없이 찬연하고 눈부신 황금빛이 눈앞에서 번쩍거리며 터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116화
보는 이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태울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아셀라?’
빛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허공에는 황금빛 미세한 방울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잠시 목표물을 가늠하는 것처럼 진동하던 방울은, 이내 쏜살같이 날아가 마수의 몸 곳곳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러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카맣게 많던 마수가 일시에 빛으로 화하더니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땅을 뒤덮던 무수한 시체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크와 병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그녀의 손끝에서는 황금빛 방울이 퐁퐁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셀라!”
그사이에 땅을 박차듯 가로지른 사내가 제 아내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적셨다.
“칼릭스.”
보드라운 몸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의 여린 숨결이 닿자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아내는 무사했다. 살아 있었다.
천천히 몸을 떼어 낸 칼릭스가 아셀라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전혀요.”
마수는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칼릭스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아셀라가 걱정스럽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다른 병사들처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마수의 피로 손이며 옷이 흥건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칼릭스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셀라는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선 뭐든 알아서 해야 할 때가 많으니까.’
‘선대공께서 당시 소공자이던 지금의 대공 전하를 용병으로 보내버리셨거든요.’
전쟁터.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장소.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곳. 온갖 전장을 전전하며 살아남아야만 했을 한 소년.
아셀라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파동이 일었다.
안타깝고, 슬프고, 왠지 마음 아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마수의 피가 튄 그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끝에서 사르르 흘러나온 기운이 칼릭스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몸에 났던 잔 생채기며 마수의 피로 범벅된 옷가지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당신의 이능이로군.”
칼릭스가 뺨에 닿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마침내 개화한 그녀의 이능은 눈이 부셨다. 감히 인간의 힘이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신성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빛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를 대하듯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아셀라의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메리엘이 도와주었어요.”
대답한 아셀라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칼릭스. 기다리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아니야.”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끌어당기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껴안았다.
아셀라는 또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칼릭스가 빨아당기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꽃향기가 폐부를 채우자, 그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었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
나직하게 읊조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셀라의 귀를 파고들었다.
평온했다. 그의 품에서라면 저를 얽매는 걱정이나 고민거리도 전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요.”
“…….”
“당신이 언제 돌아올까 매일 기다렸어요.”
그녀의 말에 목덜미를 감돌던 야릇한 감촉이 사라졌다.
잠시 후,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강렬한 시선이 닫힌 눈꺼풀을 뚫고 느껴졌다.
“아셀라.”
지독히도 낮은 음성에 갈급한 열망이 묻어났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 위를 간질이자, 아셀라가 허락하듯 살짝 입술을 벌렸다.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재회한 연인의 키스였다.
* * *
아셀라와 칼릭스, 지크를 비롯한 병사들이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한낮인데도 입구 쪽을 제외하면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시커멓기만 한 구멍이 마치 악마의 아가리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동굴 앞에 선 그녀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꿈에서 봤던 그 동굴이에요.”
“당신 말대로 이 안에서 마수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어. 미리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크게 피해 볼 뻔했지.”
다행히 그녀의 예측 덕분에 병력 손실이 거의 없었다. 칼릭스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깊은 동굴 속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마수의 움직임이 기묘하더군.”
“어떻게요?”
고개를 돌린 그가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답했다.
“마수에겐 크게 살육과 생존이라는 두 가지 본능이 있어. 인간을 발견하면 죽이려 들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도망치는 게 마수의 기본 행동 패턴이야. 그런데 조금 전 마수들은 달랐어.”
그가 힐끗 뒤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주인의 시선을 받은 지크가 냉큼 답했다.
“예, 예! 맞습니다! 동굴로 진입하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었습니다!”
“마치 특정 장소를 지키려 드는 것처럼.”
두 사람의 설명에 그녀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금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동굴 안에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