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71)

아셀라의 얼굴에 기어이 섭섭한 감정이 떠올랐다.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임을 안다. 하지만 제 배웅을 기대하지 않는듯한 말이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전하를 배웅하지 않으면 누가 해요.”

남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데 내다보지도 않는 아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셀라가 결국은 서운함을 내비치며 말끝을 흐렸다.

“아셀라.”

뒤늦게 저가 실수했음을 깨달은 칼릭스가 팔을 뻗어 아셀라의 어깨를 감쌌다.

자연히 그의 품으로 안겨든 그녀가 너른 등에 조심스레 제 팔을 감았다.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신이 나와준다면 정말로 기쁠 거야.”

“……알아요.”

아셀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도 모르게 속상해지는 바람에 그만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뭐라도 당신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못난 모습을 보였어요. 괘념치 마세요.”

“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당신이 들려준 꿈 이야기만 해도 적잖은 도움이 될 텐데.”

“정확한 위치를 알려드린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정말일지는 가봐야 아는 거니까…….”

그녀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순간 벌어진 일에 아셀라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의 입술 감촉이 아직도 볼에서 느껴졌다. 마치 낙인을 찍은 듯 뺨이 홧홧해졌다.

“당신이 이렇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해.”

“칼릭스…….”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줘.”

그의 말 한마디에 서운했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설핏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그러자 칼릭스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곱게 접혔다.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다정한 미소에 그녀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 아내는 어찌 이리 예쁜 말만 하는지 모르겠어.”

순식간에 칼릭스의 눈빛이 짙어졌다. 사내의 팔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그녀가 그의 품에 결박되듯 갇혔다.

“칼릭…… 으흣!”

채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그는 이 순간만을 노렸던 사람처럼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커다란 손으로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 쪽 팔론 허리를 감아 바투 끌어당겼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온 은빛 머리칼이 출렁이듯 아래로 흘러내렸다.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피하려던 아셀라는, 이내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응하기 시작했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금세 작은 틈도 없이 꽉 맞물렸다. 길고 풍성한 그녀의 속눈썹이 나비가 날갯짓하듯 파르르 진동했다.

“으응…….”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겹쳐진 입술과 얽어오는 사내의 혀는 데일 듯 뜨거웠으나 놀라우리만치 상냥했다.

말캉한 혀가 입안을 유영하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는 여유로이 그녀의 입술 안쪽, 여린 살결을 잠식해나갔다.

능숙하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면서도 손끝으론 연신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며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마치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 작품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칼릭스의 따뜻한 손길이 몸의 예민한 부분을 스칠 때마다 아셀라가 잘게 몸을 떨었다.

커스터드 크림을 녹인 것처럼 달콤한 키스는 두 사람의 뜨거운 한숨과 함께 끝났다.

한껏 달아올랐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아셀라가 살짝 주먹 쥔 손으로 칼릭스의 가슴께를 콩 쳤다.

열기가 느껴지는 발그스름한 뺨을 손바닥으로 감추며 타박하듯 말했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요.”

“한 번만 넘어가 줘. 내일부턴 한동안 못 볼 텐데.”

“이번만이에요.”

아셀라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릭스, 건강히 다녀오세요.”

“그럴게.”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아프지 마세요. 어디 다치셔도 안 되고요.”

계속 이어지는 당부.

칼릭스는 가슴에서 자꾸만 어른거리는 낯선 느낌을 새삼스레 인지했다. 뭔가 아릿하면서도 깊은 충족감을 주는 감정. 그러나 무엇인지 쉬이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쩐지 목이 탔다. 간신히 입을 연 그의 목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여간해선 다치지 않아. 아프지도 않고.”

“그래도요.”

“……내가 걱정되나?”

“그럼요. 당신은 제 남편인걸요.”

그가 그녀를 고요히 응시했다. 타인을 대할 때는 늘 칼날처럼 날카로이 벼려져 있던 눈빛은, 이제 한 사람을 향할 때만은 달랐다.

“이젠 내가 무섭지 않나?”

아셀라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칼릭스.’

예전에는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 피하곤 했었다. 선연한 붉은 색채가 마치 진득한 피를 머금은 것처럼 느껴져 공포에 떨었던 때가 있었다.

“네.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더는 아니었다.

서늘하고 무자비하다고만 여겼던 눈빛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알았으니까. 온기를 품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녹아내릴 만큼 따뜻하기만 했다.

“……예뻐요. 꼭 루비 같아.”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선홍빛으로 반짝이는 예쁜 보석 같았다.

“…….”

반쯤 내리깔린 검은 속눈썹이 잘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그가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미치겠군.”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일었다.

“……칼릭스.”

끓어오르는 열기를 억누르려는 거친 숨이 연신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셀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정염 가득한 탁한 목소리엔 짙은 갈망마저 배어 있었다. 칼릭스가 허락을 구하듯 아셀라의 손등에 입술을 찍어누르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아셀라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희고 가녀린 손가락이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을 헤치고 그의 이마에 닿았다.

그렇게 천천히 칼릭스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반듯한 눈썹과 크림슨색의 보석을 품은 눈가를 지나 깊게 음영이 드리운 날렵한 콧대를 차례로 어루만졌다. 뺨에 잠시 머물렀던 손이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로 내려갔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낸 그녀가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떠나기 전까지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메마른 땅에 쏟아지는 단비와도 같은 허락이었다.

* * *

출병 직전, 대공 부부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칼릭스, 잠시만 손목을 보여주시겠어요?”

그는 아내의 난데없는 부탁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셀라가 소맷자락에서 검은 천 하나를 꺼냈다.

“일전에 제게 빌려주셨던 손수건이에요.”

공국으로 오던 도중 마수에게 상처 입은 그녀를 치료하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라며 건네주었던 손수건이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

“돌려드리기로 약속했었잖아요.”

그러나 그때와는 조금 모양새가 달랐다. 손수건의 세 귀퉁이에 베네비토의 문장이 또렷하게 수놓여 있었다.

그의 손목에 손수건을 감아 예쁘게 매듭지은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칼릭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정성 가득한 자수를 매만졌다.

제국에서는 사냥이나 전쟁을 앞둔 연인의 무운을 빌며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손목에 묶어주는 전통이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고개를 든 그를 향해, 아셀라가 사르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다 완성되면 돌려드릴 생각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서두를 걸 그랬어요.”

“…….”

“돌아오시면 나머지 귀퉁이도 마저 완성해 드릴게요.”

말을 마친 아셀라가 다시 천천히 칼릭스에게 다가가서는 그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가슴에 고개를 파묻듯 숙이고는 속삭였다.

“그러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떼어냈다. 자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허리를 단숨에 휘감았다.

“아셀라.”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는 속삭였다.

“다녀올게.”

도주하는 대공비 113화

칼릭스를 위시한 병사들이 대공성을 빠져나갔다.

아셀라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뒤에야 몸을 돌렸다. 마고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며 말을 건넸다.

“비전하, 들어가셔서 더 쉬시지요. 너무 늦지 않게 깨워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아침을 맞이한 안주인이었다. 게다가 대공과 함께 밤을 보냈으니 적잖이 피곤할 터.

“그래요.”

아셀라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막 발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마법구에 담긴 영상을 재생하듯, 갑자기 그녀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아셀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마고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곤 그녀를 불렀다.

“비전하?”

아셀라는 다가오려는 마고를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 스치듯 휙휙 장면이 지나가더니, 금세 끝이 났다.

그러나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걸 맞닥뜨린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비전하, 괜찮으십니까?”

새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과 불안하게 떨리는 푸른 눈. 마고가 걱정스레 안주인을 쳐다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아셀라.’

아셀라가 손을 있는 힘껏 말아쥐고는 천천히 호흡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음을 굳게 먹고 제대로 판단을 내려. 네가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 생각해.’

아셀라의 얼굴이 평소보다 진지해지며 푸른 눈이 심해처럼 깊어졌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녀가 뒤를 따르던 사용인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아냈다.

“카단 경.”

“예, 비전하.”

라이젠이 몇 걸음 나와 그녀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아셀라가 말문을 열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문하십시오.”

“아니요. 여기선 안 돼요.”

묘한 냉기마저 도는 그녀의 태도에, 주변인들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라이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안주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리를 마치는 대로 전하의 집무실로 오세요.”

그녀가 짤막한 명을 내렸다.

* * *

라이젠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결계가 가동되며 바깥과 안쪽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평소에도 대공의 집무실에는 도청을 방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이는 단순히 말이 새어 나가는 걸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라이젠의 말아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남아 있던 안일함은 그새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아셀라가 입술을 떼었다.

“메리엘에게 결계를 쳐달라 부탁했어요. 혹시 놀랐나요?”

“아닙니다.”

대답하는 라이젠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났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카단 경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죠.”

라이젠은 크게 당혹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공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던 대공비가 갑자기 돌변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면에서 그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다. 안주인의 행동에는 분명 연유가 있을 터.

“비전하, 이러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릭스의 책상으로 다가가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라이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가 필기구가 담긴 통에서 붉은색 펜촉을 찾아 책상 안쪽 다리의 홈에 꽂아 넣자, 눈을 홉떴다.

“마지막으로.”

그를 힐끗 쳐다본 아셀라가 왼쪽 벽의 책장으로 유유히 걸어가 얇은 책을 쭉 뽑아냈다.

어디선가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라이젠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책상 뒤쪽 바닥, 사물함처럼 열린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책상 위에 반짝이는 은제 케이스가 놓였다.

“지금부터 카단 경이 할 일은, 이게 뭔지 내게 설명하는 거예요.”

라이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안주인이 저 비밀 공간의 위치를 어떻게 아는 것이며, 잠금장치를 여는 방법은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전하께서 알려주셨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라이젠이 곧바로 그 가정을 지워버렸다.

주인의 성정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대공의 약점이기도 했고, 사실을 알게 된 대공비가 걱정하는 건 더더욱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비전하께서 스스로 알아내신 거다.’

하지만 어떻게?

“카단 경, 내가 묻고 있어요.”

아셀라의 재촉이 떨어졌다. 라이젠은 바짝 긴장했다. 식은땀이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상황 대처도 빠른 그였지만 지금 닥친 일 만큼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할 순 없어.’

결론을 내린 그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전하께서 사용하시는 개인 비밀 공간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요?”

“예.”

“그렇다면 내가 말할게요.”

책상에 놓인 은제 케이스를 바라보는 아셀라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에는 검은색 가루가 들어 있을 거예요. 이 가루를 뜨거운 물에 녹여 차처럼 마시지요.”

“……!”

“경이 전하께 차를 만들어 드릴 테고요. 내 말이 틀렸나요?”

라이젠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안의 내용물과 복용 방법까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전하께서 이능을 각성하셨다고 했었다. 그 힘으로 알아내신 건가.’

그는 샤르투스 가문의 이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추측하기론 대공비의 이능은 예지 혹은 독심술에 가까운 힘인 듯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더 두려움을 자아냈다.

어떤 이능인지 모른다는 건, 다시 말해 어떤 이능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다시 질문할게요. 전하께서 드시는 이 차, 정체가 뭐지요?”

말투는 날 선 데 없이 온화하기만 했다. 그러나 라이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했다.

작은 몸집에 가냘프게만 보이던 그녀가 무서우리만치 단단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입안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저는 알지 못합니다.”

베네비토의 가신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였다. 주인의 비밀을 토설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설사 대상이 대공비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이젠 카단.”

그때, 서늘한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감히 나를 기만할 셈인가요?”

그의 눈에 완전히 굳은 얼굴의 대공비가 비쳤다. 싸늘하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 음성으로 그녀가 질문했다.

“하나 묻죠. 내가 누구지요?”

라이젠이 멈칫했다. 그가 간과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녀 역시 베네비토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대공께서 안 계신 지금, 이 성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비전하이십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경이 모셔야 할 사람이 누구지요?”

“비전하이십니다.”

“그런 내게 거짓으로 일관하는 네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아셀라의 목소리가 비할 데 없이 낮아졌다.

안주인의 기세에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나 서늘한 예기가 감도는지, 그를 둘러싼 공기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가 아교를 발라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답했다.

“왜 제가 거짓을 고한다고 여기시는지요. 저는…….”

“카단 경.”

아셀라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단호히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어요. 나는 카단 경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기어이 마지막 통첩이 떨어졌다.

거짓을 간파하고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어쩌면 비전하께서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대공비는 이능자였다. 어머니였던 아델이 역사상 손꼽히는 강력한 힘을 지녔던 점을 고려하면, 딸인 그녀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 물음은 단지 확인 절차에 불과할 터.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을 아는 그녀에게 숨기려 들어봤자 제 거짓말이 고스란히 들통날 뿐이었다.

판단을 마친 라이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설명하겠습니다.”

* * *

라이젠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아셀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치마를 꽉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광택 좋은 매끈한 치마가 엉망이 되도록 구겨졌다.

너무 충격적이라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동화를 듣는 기분이었다.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대대로 전해진다는 특유의 힘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워낙 강대하고 놀라운 능력인 탓에 사람들이 떠들기 좋아하는 이야깃거리였으니까.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능력도 있어.’

마족의 힘. 그리고 몇 세대를 거쳐서 한 번씩 나타난다는, 순혈에 가까운 격세 유전자. 힘을 사용할 때마다 누적되는 광기와 폭주.

폭주한 칼릭스가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아를 잃고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셀라의 떨리는 손이 책상 위의 은제 케이스를 향했다. 잠금장치를 풀자 뚜껑이 열리며 안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새카만 가루.

“이 가루가 그이를 지켜준다고요.”

“예, 효력이 하루 정도 지속되기에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드십니다.”

이따금 칼릭스가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 비슷한 시각이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라이젠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질 않아요. 베네비토의 격세 유전자를 제어하는 성물이 왜 황제의 손에 있는 거죠?”

“황가의 보물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전하께서도 의아하게 여기셨던지라 조사를 했으나 대공성엔 성물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요?”

“예. 선대공께서 전하께 따로 언질 하시지도 않았기에 황제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판단하셨습니다.”

아셀라가 잠시 침묵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라이젠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중요한 퍼즐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가 만들었다는 가루에 신뢰가 가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만일 약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요?”

도주하는 대공비 114화

“역대 격세 유전자들은 모두 스물다섯의 나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누가 머리를 해머로 세게 강타한 듯한 충격이 일었다. 아셀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스물다섯이라고요?”

“당시엔 안타깝게도 성물을 작동시키는 능력자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연함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라이젠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하께서 결혼을 서두르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약을 먹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전하께 남은 시간이 길어야 삼 년 정도일 테니까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어졌다.

“만일 전하께서 후계자 없이 승하하실 경우, 베네비토의 혈통은 여기서 끊기게 됩니다.”

라이젠의 말이 벌이 윙윙대는 것처럼 귓가에 어지러이 들려왔으나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흥분하여 전전긍긍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약을 먹어도 괜찮은 게 확실한가요?”

섬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가루가 칼릭스의 수명을 연장해 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가 만들어 주기적으로 보내온다니 의심스럽기만 했다.

“예. 전하께서 실제로 여러 차례 이 약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칼릭스는 대공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전쟁터를 떠나지 못했다.

생과 사가 갈리는 공간은 광기가 발현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호시탐탐 몸을 잠식할 기회만을 노리는 악의 피가 칼릭스를 충동질하며 끝을 보고자 했다.

성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약이 없었더라면 진즉 광기가 폭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루를 만들 수는 없나요?”

“성물을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뭅니다. 지금으로선 황제가 유일합니다. 전하께서 표면적으로는 황제에게 협조하는 이유도 가루를 대가로 거래했기 때문입니다.”

라이젠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가 덧붙였다.

“전하께서 직접 샤르투스를 멸문하신 까닭도 그래섭니다. 두 분의 결혼이 있기 몇 년 전부터 황제와 합의된 내용이었으니까요.”

일순, 아셀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샤르투스의 멸문이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단 말인가요?”

“예. 멸문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황제가 전하께는 필립 부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고 들었습니다만, 비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가문 전부가 몰살당했겠지요.”

아셀라가 그의 말을 받아 답했다.

황제는 오래전부터 그녀와 메리엘을 노렸다. 이능을 가진 샤르투스의 핏줄을 제거하고 명맥을 끊으려 했다.

“제가 만일 전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살아 있지 못했겠군요.”

샤르투스 저택의 사람들과 함께 그녀들도 목숨을 잃었으리라. 아셀라가 부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처음에 전하께 메리엘 아가씨의 안전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아셀라의 눈이 치켜 뜨였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마음을 바꾸시곤 메리엘 아가씨의 탈적을 지시하셨습니다. 더불어 록트린 가문으로의 입적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카단 경, 그 말씀은…….”

푸른 시선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라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전하의 의중을 짐작하여 입에 올리기는 조심스러우나, 비전하께서 아가씨를 아끼신다는 걸 아시고 결정을 바꾸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셀라의 머릿속에 결혼식 날의 일이 떠올랐다.

안토니의 폭력에 속절없이 내던져졌던 그녀를 어디선가 나타난 그가 구해주었다.

‘그대 동생을 데려가는 게 좋을 거야.’

‘메리엘 샤르투스는 그대와 함께 있는 편이 나아.’

‘동생의 안전이 걱정되는 건가?’

저를 구해준 남자가 건네던 말. 마치 그녀를 설득하는 듯하던 사내의 이상한 태도.

‘칼릭스는 그때 이미…… 메리엘을 구해줄 생각이었던 거야.’

어쩐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북받쳤다.

‘왜 몰랐을까. 어떻게 바보처럼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녀가 다친 걸 보자마자, 칼릭스는 마치 제 일처럼 분노하며 안토니를 응징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손수 베일을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녀가 사과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메리엘을 데려가 아카데미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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