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을 망연히 바라보던 아셀라가 허리에 감겨드는 익숙한 팔에 숨을 훅 들이켰다.
그녀의 등에 그의 단단한 상체가 밀착되듯 달라붙었다.
“아셀라.”
제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다. 귓가에 닿는 습하고 뜨거운 숨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말려들면 안 돼.’
아셀라가 얼른 몸을 돌려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제 나름대로는 한껏 엄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이젠 초야도 끝났잖아요.”
“그게 이유가 되진 못해.”
“계속 약속하셨어요. 초야가 끝나면 쉬게 해주시겠다고.”
이건 이유가 되었다. 할 말이 없어진 칼릭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 기세를 몰아 아셀라가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댔다.
“초야가 일주일씩이나 된다고 말도 안 해주고…….”
“…….”
“그뿐이에요? 한 번만이라고 해놓고 새벽까지 계속 괴롭히고…… 그럼 거짓말한 거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도저히 멈출 수가-”
“변명하지 말아요.”
아셀라가 칼릭스의 항변을 딱 잘랐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법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어쨌거나, 그래서 안 돼요.”
“아셀라, 우린 신혼이야. 그리고 신혼부부는 원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칼릭스가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 했으나 그녀는 결심은 확고했다.
이제 막 신혼의 단꿈에 빠진 사내에게는 가혹하기만 한 처사였다. 그는 애가 달았다.
“아셀라,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풀겠어?”
“화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전하께서 하신 약속이니, 그걸 지켜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칼릭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지난 이레간 그녀의 불신이 말도 못 하게 깊어진 모양이었다.
초야라는 명분으로 저가 적잖이 아셀라를 괴롭힌 건 사실이었다. 기절하듯 잠이 들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계속 그의 품에 있었으니까.
울먹거리는 아내를 한 번이라도 더 탐하고 싶어 초야가 끝나면 쉴 수 있다며 달랬었다.
그 말이 이렇게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칼릭스가 저답지 않게 변명을 꺼냈다.
“그 약속은 상황상-”
“둘러댔던 말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지요?”
정곡을 찔러온 아셀라의 질문에 칼릭스의 말문이 막혔다.
“설마 그 말씀마저 거짓말이었던 거라면 정말 실망할 거예요.”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러다가 아내가 완전히 인간 불신, 아니, 남편 불신에 빠지기 전에 칼릭스는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
“무슨 이유인데요?”
“당신 동생이 부탁한 게 있었거든.”
“……메리엘이요?”
아셀라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무슨 말이 나올지 아는 사람처럼.
칼릭스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뜸을 들였다. 아셀라가 그의 말을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즐겼다.
이제 주도권은 제게 넘어왔다.
“알고 싶나? 당신 동생이 내게 어떤 부탁을 해왔는지.”
아셀라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 아니에요. 메리엘이 당신에게 따로 말한 거라면 제가 몰랐으면 하는 걸 테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모습조차도 귀여울 수가 있는지, 칼릭스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손잡고 잘까?”
“손이요?”
사슴 같은 눈망울이 파르르 떨리자 또다시 가학심과 독점욕이 일었지만 칼릭스는 잠시 참기로 했다.
정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내하는 건 그의 특기였다.
컴컴하고 질척한 음심을 능숙하게 감춘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정말로 손만 잡자는 이야기야.”
“……진짜로요?”
“그럼.”
그제야 한껏 긴장해있던 그녀의 얼굴이 풀렸다. ‘네’ 고개를 끄덕인 아셀라가 안도하듯 웃음 지었다.
남편의 속내를 짐작조차 못 하는 아내는 또다시 그를 믿고 말았다.
* * *
칼릭스는 제 잘못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제 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아침이 되자마자 아셀라는 그에게 선전포고했다.
그러고는 그가 집무실에서 일하는 사이, 정말로 제 짐을 다 빼내어 대공비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식을 듣고 온 칼릭스가 침실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방이 휑했다.
그는 곧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아셀라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셀라, 문 좀 열어봐.”
“…….”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응?”
문 앞을 지키던 시녀와 기사들은 잠자코, 그러나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치상황을 관전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대공비의 승리를 기원한 건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저 순한 안주인이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면 모든 죄는 대공에게서 비롯된 거였을 테니까.
“아셀라, 일단 문만 열어.”
“…….”
빌어먹을. 칼릭스가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간밤에 저가 아내를 속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신 황홀한 밤을 보내게 해주지 않았나. 몇 번이나 열락의 무아경에 빠지게 해주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셀라-”
달칵, 문이 열렸다.
작은 틈 사이로 문손잡이가 생명줄인 양 꼭 붙든 그녀가 보였다. 칼릭스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려다 아셀라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잔뜩 골이 나 있을 줄 알았더니 되레 겁먹은 표정이었다.
칼릭스는 그제야 제가 뭔갈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정말 이야기만…….”
“그래.”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
그러자 아셀라가 문을 열었다.
칼릭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서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화가 난 거야?”
아셀라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에 칼릭스는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결국,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던 단어를 내뱉었다. 사과의 말이었다.
“미안해.”
“괜찮아요.”
그의 사과를 담백하게, 그것도 너무나 쉽게 받아준 아셀라가 그의 팔을 붙잡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는 계속 여기서 지낼 거예요. 이젠 정말 안 돼요.”
그러고는 칼릭스가 무어라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아프단 말이에요.”
“뭐? 아프다니, 어디가…….”
곧이어 칼릭스의 얼굴이 허예졌다.
‘미친 새끼.’
그러곤 저를 향해 말 못 할 욕설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정염에 눈이 멀어 아내의 몸을 혹사시켰다. 저가 좋으니 아내도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가녀리고 약한 몸이라는 걸 알면서도 욕망에 취해 제 좋을 대로 굴었다.
그래놓고는 아내가 화가 나서 저를 밀어낸다는 멍청한 착각 따위나 한 거였다.
겁이 났을 거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테니 혼자 끙끙 앓았을 터다. 주치의를 부를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이다. 아내에겐 그 방법밖엔 없었을 테니까.
칼릭스는 제 뺨을 세게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해.”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칼릭스의 양 뺨을 자그마한 손으로 감싸고는 제 쪽으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가 순순히 따르자,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쪽, 소리가 나게 그의 뺨에 입 맞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스킨십이었다. 칼릭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셀라.”
심지어 그녀가 그의 등허리를 와락 껴안기까지 하자 주체할 수 없는 감격마저 밀려들었다.
“괜찮아요, 칼릭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아셀라가 그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릭스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그녀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겠다고 맹세하는 것뿐이었다.
* * *
아셀라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마고에게 말했다.
“로메인 부인 덕분이에요. 부인이 알려준 대로 했더니 정말 그렇게 됐지 뭐예요?”
“비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마고가 생긋 웃으며 아셀라의 이부자리를 점검했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은 아셀라가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그런데 부인은 어떻게 아셨어요? 전하께서 그렇게 나오실 거라는 걸요.”
“그거야…….”
“아차, 제가 뻔한 걸 물었네요. 오랫동안 가신으로 계셨으니 전하를 잘 아실 수밖에 없는데…….”
아셀라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하자, 마고는 하려던 말을 도로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무릇 제 아내가 귀한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마고의 작품이었다.
지켜보자니 이래서야 안주인의 몸이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대공의 체력을 당해낼 인간이 있을 리가.
좋은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안쓰러웠다.
그래서 대공비에게 일러주었다.
저 절륜한 남편의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더불어 어떻게 하면 대공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을지도.
‘정말 그걸로 될까요?’
‘밑져야 본전이라지 않습니까. 일단 한번 해보세요, 비전하.’
대공비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배운 대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그녀는 대공에게서 확실한 약속을 받아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니. 안달 좀 나시겠어.’
마고의 입가에 웃음기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지금쯤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내며 속을 태울 공국의 주인을 생각하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전하께서 부인에게 비전하의 보좌관이 되어달라 청하셨습니다.’
‘카단 경, 죄송하지만 그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군요.’
‘실은 청이 아닌 명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부인께 선택권은 없습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산더미 같은 일감을 던져준 대공을 향한 마고의 완벽한 복수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111화
20. 이능
황궁에 심어놓았던 카르마로부터 저녁 늦게 새로운 정보가 도착했다. 라이젠의 보고에 칼릭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황제궁의 정원과 연결된 비밀 구역이 있다?”
“예. 황제의 개가 철통같이 지킨다고 합니다. 경비가 삼엄하고 이중 삼중으로 함정이 설치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정보였습니다.”
“냄새가 나는군. 계속 접근을 시도하라.”
때마침 마법 전서구 한 마리가 창문을 통과해 날아들었다. 켈튼산으로 마수 둥지를 수색하러 나갔던 지크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칼릭스가 미간을 좁혔다. 라이젠은 좋지 않은 소식임을 짐작했다.
“둥지를 찾지 못했다는군.”
“예? 단 하나도 못 찾았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말이 되질 않지.”
칼릭스가 얼굴을 냉랭하게 굳혔다.
켈튼산에서는 해마다 마수가 발견됐다. 특히 마수 범람기에는 자주 출몰하여 공국과 수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곤 했다. 이 때문에 해마다 한 번씩은 카르마를 이끌고 켈튼산 마수의 개체 수를 조절해 왔다.
“수면기인 마수가 곳곳에 출몰하는 것도 모자라 둥지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라…….”
성가신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칼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내와 마침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크를 비롯한 카르마가 찾지 못했다면 추가로 병력을 보낸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이 문제에 황제가 관련된 거라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그가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내가 켈튼산으로 가겠다.”
“전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내일 새벽에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라이젠, 너는 성에 남도록.”
항상 주인을 곁에서 보좌해 왔던 대공의 충복은 놀란 눈을 했다. 정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칼릭스는 항상 그를 대동했었다.
“전하, 하오시면 약은…….”
“내가 시간 맞춰 마시겠다. 번거롭긴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니.”
“외람되오나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없었던 명령에 라이젠이 답지 않게 질문했다.
칼릭스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아셀라가 성에 있으니까.”
라이젠은 그제야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전과 지금의 대공 사이에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를. 더불어 그 변화가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도.
주인에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안전과 건강을 염려하는 존재가 생겼다.
아셀라 베네비토.
칼릭스는 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이를 라이젠에게 맡기려는 거였다.
“내가 성을 비웠다는 사실을 알면 페르난데가 여길 노릴 거다. 그렇게 되면 아셀라가 위험해져. 마탑주가 있다고는 하나, 너도 함께 있는 편이 그녀에게 안전할 테지.”
어쩌면 이는 칼릭스를 성에서 끌어내려는 황제의 계략일 수도 있었다.
성의 방비는 여느 때보다도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칼릭스는 어떤 작은 위험의 소지도 남겨놓을 생각이 없었다. 충복인 라이젠을 아내에게 붙여주는 건 그래서였다.
“라이젠 카단.”
“예, 전하.”
“대공비를 책임지고 보호하라.”
“존명.”
라이젠이 주인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 * *
아셀라는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 있었다.
‘꿈속이야.’
이젠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 꿈이 저에게 무얼 보여주려 하는 걸까. 긴장이 일었으나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보이는 정보만으로는 장소가 숲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빠르게 정답을 찾아냈다.
‘혹시 켈튼산일까?’
지금껏 꾸었던 꿈은 어떻게든 그녀의 현실과 경험을 기반으로 했다. 심지어 조작되었던 악몽조차도.
지금껏 지나치는 길목으로나마 가본 적 있는 산은 켈튼산뿐이었다.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봐.’
추리를 마친 아셀라가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숲속, 그녀는 가만히 서서 방향을 가늠했다.
‘저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신기하게도 어떤 느낌이 그녀를 이끌었다. 누가 길을 일러주지도 않았건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젖은 땅에서 짙은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질척거리는 발밑에 천천히 썩어가는 낙엽과 나뭇가지, 죽은 풀 따위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미끄러져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아셀라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치맛단이 방해되지 않도록 대충 자락을 쥐어 잡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별안간 앞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등골이 섬�해졌다.
“크아아아악!”
지축을 뒤흔드는 포효였다.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마수가 있어!’
머리론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째서인지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아셀라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희한하게도 빼곡하게 자란 나무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마치 나뭇가지들이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도착한 곳은 산 중턱의 동굴이었다.
입구가 꽤 컸으나 주변의 나무가 교묘하게 가리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가까이 와서 보기 전까지는 발견하기 힘들게 숨겨져 있었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다니.’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굴 안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오더니, 잠시 뒤 커다란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아셀라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나쳐 달려가는 마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동굴이 마수의 둥지인 걸까?’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에서 마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습격을 받았을 때의 마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다.
‘대체 이 많은 마수가 어떻게 동굴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수한 숫자였다.
동굴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저 개체 수를 수용하려면 굉장히 깊고 넓을 터.
그때, 마수 한 마리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크르르르…….”
인간을 향한 살욕으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에 아셀라의 심장이 선득해지던 순간.
몸이 붕 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가 잠에서 깼다.
“……칼릭스?”
남자가 아내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안락의자에서 책을 보다 깜박 잠들어버린 그녀를 침대로 옮겨주던 참이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데. 요즘 일한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아녜요.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데다 방이 따뜻해서 그만 졸았나 봐요.”
“힘들면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정말이에요. 한숨 자고 일어나선지 지금은 머리도 몸도 개운해요.”
“못 말리겠군.”
칼릭스가 피식 웃고는 아셀라의 등이 침대 등받이에 닿도록 내려놓았다. 베개를 허리에 받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침대맡에 앉았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그래.”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감싸듯 덮고는 말문을 열었다.
“일주일 정도 대공 성을 비울 예정이야. 상황에 따라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아셀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미리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웠다.
“놀랐나?”
“조금요.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거든요.
“방금 정한 사안이야. 결정을 내리자마자 당신에게 온 거고. 이제 막 명이 하달되고 있을 거야.”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별일은 아니야. 조금 성가신 일을 처리해야 할 뿐이지.”
아셀라는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어쩐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꿈을 꾸진 않았을 것 같았다.
“혹시 켈튼산의 마수와 관련이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일순 멈칫한 그가 이내 알았다는 듯 답했다.
“꿈을 꾼 모양이군.”
“네. 조금 전에요.”
아셀라가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켈튼산 중턱에 커다란 동굴이 있었어요.”
“동굴이라.”
켈튼산에 동굴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칼릭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주변의 나무가 입구를 교묘히 가리고 있어서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면 발견하기가 힘들어 보였어요. 전하께서도 모르셨나요?”
“지금껏 동굴의 존재는 보고받은 바 없어. 당신 말대로라면 그 동굴이 숨겨져 있던 마수의 본 둥지겠군.”
칼릭스를 위시한 카르마가 해마다 마수의 둥지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해왔으나, 개체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지금껏 찾아내 없애 왔던 수많은 둥지는 마수가 눈속임을 위해 만들어놓은 가짜 둥지였다.
아셀라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굴이 아주 깊어 보였어요. 안에서 마수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공국으로 오던 길에 마주쳤던 늑대 형상의 마수였어요. 그때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고요.”
파충류처럼 쭉 찢어진 동공과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던 노란 안광이 아직도 섬뜩했다.
마치 어떠한 광기에 취한듯하던 커다란 동공. 그녀들을 죽이려 들던 괴물이 뿜어내던 살기를 떠올리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때 공격이 황제의 짓이었던 걸 보면, 이번 일도 황제와 관련된 게 아닐까요?”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야. 없던 동굴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닐 테고, 기존에 숨겨져 있던 동굴을 페르난데가 발견하여 마수의 둥지로 삼았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칼릭스가 동의했다.
“이참에 본 둥지를 찾아서 완전히 없애야겠어. 더불어 수면기에 마수가 활동하는 이상 현상을 조사할 필요도 있고.”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렸다. 제 손등을 덮은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보였다.
‘일주일이 넘게 성을 비울 거라고…….’
한동안 그의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을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침울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바빠도 늘 하루 한 번은 그녀를 찾아왔던 칼릭스였다. 당분간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대화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칼릭스는 어두워진 아셀라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황제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여긴 것이다.
“라이젠을 성에 두고 갈 테니 안심하고 평소처럼 지내면 돼. 여기 있는 한, 페르난데는 당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칼릭스.”
그녀가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뒤집어 손가락을 얽었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모양새가 되자, 칼릭스가 눈을 치떴다.
도주하는 대공비 112화
“아셀라?”
그녀는 잠시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결심이 굳어지자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 혼자 가시는 건가요?”
칼릭스는 아셀라의 애매한 질문에 담긴 진짜 물음을 눈치챘다. 동시에 순수하게 놀라고 말았다.
오랜 시간 학대와 저주에 시달렸던 아내는 이제야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며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중이었다.
다만 워낙 모진 일을 겪었던 탓에 아직도 그때 만들어진 습관이 남아 있었다.
일례로 그녀는 제 욕구를 표출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원하거나 바라는 게 있어도 말하길 주저하곤 했다.
그랬던 아셀라가 솔직하게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되나요?”
그것도 그와 같이 켈튼산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메말라 쩍쩍 갈라진 내면에 촉촉한 빗물이 스며들며 작은 새싹 하나를 틔우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먹먹함과 함께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소한 감정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러자고 하고 싶었다. 자신 역시 한시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칼릭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위험한 곳이야.”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전 동굴을 봤으니까 가서 위치를 금방 찾을 수 있을 테고요.”
간절한 눈빛이 이어졌으나 칼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셀라의 꿈이 사실이라면 현재 켈튼산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위험했다. 아내를 그 어떤 위험에도 노출 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다정하지만 단호한 답변이었다.
아셀라는 입술을 꾹 말아 붙였다. 이로 깨물지는 못하게 하니 새로이 들인 습관이었다.
그가 저를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아는데도, 어쩐지 조금 슬퍼지고 말았다.
“아셀라.”
걱정스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얼른 표정을 지우고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어요. 언제 출발하세요?”
그러나 아셀라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리는 걸 놓칠 칼릭스가 아니었다.
‘같이 갈 수 없다 하여 실망한 걸 테지.’
미안한 낯으로 그가 답했다.
“내일 새벽에.”
“그렇게…… 일찍이요?”
“그래서 미리 온 거야. 당신이 잠들어 있을 시각이라 제대로 인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무슨 말씀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