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1)
  • 아셀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잠에서 깨기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칼릭스가 투명하리만치 얇은 눈꺼풀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아직 반쯤은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아셀라가 잠꼬대하듯 푸스스 웃었다.

    그가 다시 반대쪽 눈꺼풀에 키스했다. 그제야 감겼던 눈이 스르르 열리며 사파이어 같은 영롱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릭스가 나긋한 음성으로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좋은 낮이야, 아셀라.”

    “……칼릭스…….”

    아직도 잠에 취한 목소리로 그녀가 그를 불렀다.

    칼릭스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내의 얼굴 윤곽을 더듬듯 쓸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 더 자도 돼.”

    아셀라가 눈을 느릿하게 끔벅거렸다. 불을 켜지 않은 침실 안은 어둑어둑했다. 그러나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환한 빛줄기는 이미 한낮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윽!”

    몸을 일으키려던 아셀라가 갑자기 온몸에 밀려드는 둔통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칼릭스가 다급히 그녀의 몸을 부축하고는 베개를 등에 받쳐주었다.

    “조심해야지. 지난밤에 적잖이 힘들었을 텐데.”

    그 말에 아셀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젯밤의 일. 아니, 정확히는 동이 트는 새벽녘까지도 계속되었던 일.

    열락의 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각이 해일처럼 치고 들어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벼락 맞은 듯 온몸이 찌릿해지며 시야가 점멸했다. 몸의 말단부까지 저릿저릿해졌다. 쾌락에 반응하는 몸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전 가보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했다.

    입맞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뜨겁고, 농밀했던 결합이었다. 두려울 정도로 아찔했던 쾌락은 동시에 달콤했다.

    그는 그녀를 격렬하게 밀어붙이다 지독한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몇 번이나.

    그러다 흰 물감이 번지듯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허리가 뻐근하진 않나?”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셀라가 황급히 표정을 감추려 시선을 내리뜨렸다. 그러자 시트 하나로 겨우 가려진 제 몸이 보였다.

    “앗!”

    그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급히 시트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커다란 눈을 굴려 칼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말했잖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살살 쓸었다. 원 없이 물고 빤 덕분에 퉁퉁 부어 예쁜 색을 띠고 있었다.

    지난밤 제게 안겨 오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며 절로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턱밑까지 끌어당긴 시트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하얀 목덜미에 자신이 남긴 붉은 흔적들을 보자 주체할 수 없는 만족감이 일었다.

    그가 농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벌써 다 보았으니까. 그것도 남김없이 속속들이.”

    “그, 그건…….”

    아셀라의 얼굴이 이제는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묘한 가학심이 일며 칼릭스의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도 꼭 저런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겼다. 연신 쾌락에 흐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칼릭스, 이젠, 이젠, 더는 못하겠어요…… 그만…….’

    ‘쉬이, 착하지.’

    그는 그녀를 달래가며 욕심껏 안고 또 안았다. 그 증거로 아셀라의 온몸에는 그가 피워낸 수많은 붉은 꽃이 가득했다.

    “배가 고프진 않나?”

    칼릭스가 치솟는 갈증을 내리누르며 말을 건넸다. 어차피 밤은 또 올 테니까.

    “먼저 씻고 나서…… 그다음에 먹을게요.”

    이런. 그러나 아내는 그의 배려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 발로 덫을 향해 걸어오려는 그녀를 향해 칼릭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기 칼릭스, 가운 좀 주워주시겠어요?”

    아셀라가 시트로 가린 앞섶을 꾹 누르며 작게 말했다.

    “기꺼이.”

    칼릭스가 어제 자신이 마저 벗겨내 멀찌감치 던져버린 그녀의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팔랑거리며 빠져나왔다.

    “쪽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낚아챈 그가 쪽지를 펼쳤다.

    “자, 잠깐만요, 칼릭스! 보면 안 되는데……!”

    뒤늦게 안 아셀라가 황급히 외쳤지만 이미 쪽지 안의 문장을 읽은 뒤였다.

    ‘따로 보답이라도 해줘야겠군.’

    그 작은 아이가 이리도 도움이 될 줄은. 메리엘을 성으로 데려온 건 신의 한 수였다.

    쪽지를 협탁에 올려놓은 칼릭스가 유일한 보호막인 양 시트를 말아쥔 아셀라에게 다가갔다. 가운을 직접 입혀주는 동안,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거부하진 않았다.

    허리를 고정하는 끈을 야무지게 묶은 칼릭스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아셀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

    “걷기 힘들 텐데.”

    “괜찮아요. 욕실까진 몇 걸음 되지도 않는걸요.”

    자신만만하게 답한 아셀라가 일어났다. 정확히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넘어질 뻔하고 말았다.

    다리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그가 재빨리 감으며 속삭였다.

    “그러게 안 될 거라고 했잖나.”

    그러고는 그녀가 거절하기 전에 번쩍 안아 들었다.

    “지금껏 내내 침실을 함께 썼는데도 함께 욕실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로군.”

    무언가 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아셀라는 그제야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식사를 하겠다고, 말을 정정하려 했으나 이미 욕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감미로운 향이 풍겼다.

    “향기가 마음에 드나? 당신이 좋아하는 입욕제로 준비했어.”

    뜨거운 김이 오르는 욕조 위에 둥둥 떠 있는 장미 꽃잎을 본 순간, 아셀라는 제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다급히 벗어나려 바르작댔으나 때는 늦은 뒤였다.

    칼릭스가 그녀를 안은 채로 제 로브를 거침없이 풀어제꼈다.

    그런 뒤 아셀라의 가운 자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부드러운 허벅지를 쥐었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몸을 튕기자 그가 입꼬리를 올려 낮게 웃었다.

    아셀라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흣…… 칼릭스, 안 돼요…….”

    “당신 동생이 쪽지로 말하지 않던가.”

    타오르는 홍염 같은 붉은 눈동자가 짙은 욕망으로 물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어서 친해져서 예쁜 아기가 생기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뜨겁고 찌릿한 감촉에 아셀라가 몸을 잘게 떨며 발끝을 오므렸다.

    하얀 살결에 새로 붉은 자국이 새겨지자, 흡족해진 칼릭스가 입매를 팽팽하게 당겼다.

    “하, 하지만 칼릭스, 지금은 아침인걸요. 이렇게 환한데…… 게다가 여긴 욕실이고…….”

    아셀라의 말은 곧바로 이어진 격정적인 키스에 막혔다.

    순식간에 아셀라의 몸에 미열이 일며 푸른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지난밤 몸에 새겨진 기억은 그녀를 금세 열띤 쾌락으로 밀어 넣었다.

    “씻겨줄게.”

    그녀의 가운을 벗겨 내리며 그가 속삭였다.

    * * *

    칼릭스가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아셀라를 품에 안고 욕실을 나섰다.

    정성껏 씻겨 물기를 닦아내고 보송한 새 나이트 드레스를 꺼내 입혀줄 때까지, 아셀라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열기를 품은 숨만 색색 쉬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정신없이 몰아치는 쾌락 속에서 아셀라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것뿐이었다.

    발갛게 물든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쓰는 칼릭스의 얼굴엔 만족감이 가득했다.

    “아셀라, 이제 식사해야지.”

    “……자고 싶어요.”

    “일단 먹고 자.”

    칼릭스가 그녀를 안은 채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가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과 고기가 들어간 따끈따끈한 수프, 상큼한 과일이 들어간 샐러드와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소시지, 적당히 구워져 먹기 좋게 잘린 스테이크까지.

    음식에서 솔솔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아셀라가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 피로해 잠들고만 싶었는데, 막상 눈앞에 음식을 두자 식욕이 돌았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댄 아셀라를 위해 칼릭스가 손수 하나하나 먹여주었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도 먹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다정히 말을 건넸다.

    “입맛에 맞나?”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먹도록 해. 그래야…….”

    칼릭스가 뒷말을 삼켰다. 그의 적안에 음험한 빛이 어렸다.

    그들의 초야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대공의 침실이 열린 건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예고도 없이 초야에 돌입한 대공 탓에, 처음엔 대공성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이내 소란은 가라앉았다. 그간 대공 부부의 변화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일이었다.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온 대공성은 초야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문제없이 굴러갔다.

    다만 그들은 내심 적잖이 우려했다.

    매일같이 교체하는 침구에선 매번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닫힌 문 너머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야 뻔했고, 그들은 내내 쉼 없이 시달리고 있을 대공비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긴 시간 동안 만족스러우리만치 아내를 품은 칼릭스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라이젠이 물은 건 대공이 아니라 대공비의 안전이었다.

    “전하, 비전하께서는……?”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잠들었으니 깨우지 말라.”

    그러고는 마고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녀가 재빨리 침실 안으로 들어가 안주인을 살폈다.

    아셀라와 직접 관련된 일은 대공이 도맡아 한 탓에, 그녀는 지난 초야 기간 유일하게 침실에 드나들었음에도 대공비의 얼굴 한번을 보지 못했다.

    우려와는 달리 곤히 잠든 아셀라의 혈색은 생각보다 좋았다.

    ‘다행이네.’

    그러나 안도도 잠시, 대공비의 온몸에 남아 있는 울긋불긋한 자국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세상에, 이게 다…….’

    나이트 드레스로 가려지지 않는 목과 쇄골 윗부분, 소매 사이로 언뜻 비친 손목 등엔 온통 대공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대체 전하께서는……!’

    보이는 부위도 이 정도일진대 옷에 가려진 부분은 오죽할까 싶었다. 대공이 제 욕심이란 욕심은 다 채운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비전하를 얼마나 힘들게 하신 거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마고가 흥분하여 험한 말을 쏟아냈다.

    물론 그녀의 주인은 결코 들을 수 없을 마음의 소리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109화

    황궁의 정원 깊숙한 장소. 페르난데는 이른 아침부터 던컨 만을 대동한 채 나와 있었다.

    산책한다기엔 바쁜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그가,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휙 틀어 길도 나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가장 외진 곳.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버려진 구역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숲처럼 잡목이 우거지고 곳곳에 멋대로 자란 덤불이 가득했다. 인적이 없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실제로는 이 구역을 지키는 그의 개들이 혹시 모를 침입자를 소리 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그마한 예배당 하나가 나타났다.

    세월의 흐름으로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흉해지고 외벽도 부서져 있었으나, 처음의 형태를 가늠할 정도는 되었다.

    처음 제국이 세워질 적, 초대 황제는 여신의 부름으로 이 고대 예배당 근처에 황궁을 세웠다.

    초창기에는 황족들이 여기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지만,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제국에 영광이 도래하자 여신의 이름은 금세 퇴색되었다.

    지금은 예배당이 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 잊힌 장소였다.

    “다녀오십시오, 폐하.”

    던컨이 잘 훈련된 개처럼 예배당 앞에서 멈추어 섰다. 패르난데는 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배당 내부는 더 처참했다.

    양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굵은 기둥은 곳곳이 부서지고 파였다. 바닥은 금이 가고 갈라져 볼썽사나웠다. 그 사이로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풀이 돋아 있었다.

    한때 이 공간을 꾸몄을 화려한 조각과 아름다운 천장 벽화는 이제 닳고 헤져 엉망이었다.

    페르난데가 제단 뒤쪽에 다다랐다.

    바닥의 검은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벽도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마치 좁은 동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지하 특유의 눅눅한 습기가 몸에 늘어 붙듯 달라붙었다. 풍겨오는 곰팡내에 페르난데가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나는군.’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성물은 오로지 예배당 안에서만 작동했으니까.

    마침내 페르난데의 발걸음이 마지막 계단에 닿았다. 안쪽의 누군가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음에도 황녀, 베로니카는 문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반항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없이 아래쪽이 둥근 병에 조금 전까지 추출한 액체를 담았다.

    “약 제조는 어찌 되어가고 있지?”

    “…….”

    베로니카는 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페르난데의 응징이 이어졌다.

    “내가 묻는 말이 안 들리나?”

    그녀는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노, 노력하고 있어요.”

    고통에 굴복하는 스스로가 역겨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제 몸에 박힌 흑주술이 그의 명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공은 황제가 성물을 작동시켜 가루약을 만든다고 알고 있었으나, 사실 진짜 성물을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녀였다.

    우연히 예배당에 왔다가 페르난데에게 들켰던 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베로니카는 아버지인 황제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대공의 약을 만드느라 늦어진다고 핑계를 대더니, 아직도인 것이냐?”

    그나마 황녀궁과 예배당을 오고 가며 작업했던 이전과는 달리, 보름 전부터는 아예 예배당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동조율이 높아지지 않자 그녀가 일부러 어설픈 약을 만든다고 의심한 페르난데가, 약을 만들어내라며 그녀를 압박하는 거였다.

    ‘내보내 주세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그러니 네가 서둘러 약을 만들어내면 될 게 아니냐. 지금이라도 속임수 따위는 집어치우고.’

    처음엔 애원하며 사정했다. 화내고 소리쳐도 보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까운 시간만을 흘려보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동조율을 높여야 해.’

    그래야 이 케케묵은 예배당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베로니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힘을 억제하는 약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이식하는 약은 그보다 훨씬 어려워요.”

    페르난데의 기류가 점차 사나워지더니 그가 소리를 질렀다.

    “매번 변명 하나는 잘도 지껄이는구나! 네년 때문에 쓸 만한 실험체를 몇이나 잃었는지 아느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성배의 힘을 다루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아세요?”

    황녀가 참지 못하고 받아치자 페르난데가 손을 올렸다. 후려쳐진 뺨이 얼얼했다. 베로니카가 이를 악물며 치미는 분노를 억눌렀다.

    “대들지 마라. 네 어미가 안전하길 바란다면.”

    모후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까.

    한 줌 객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베로니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반항해 봤자 너만 힘들어질 거다.”

    페르난데가 선반 위의, 투명하여 속이 다 비치는 네모난 케이스 위로 몸을 숙였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투박한 흙 그릇 하나가 있었다.

    페르난데가 선대공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초대 대공이 훗날 태어날 격세 유전자의 광기를 제어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성물. 정확히는 성배.

    그 안에 심장 하나가 미끌미끌하고 반투명한 액체와 함께 담겨있었다.

    “실험체를 좀 더 확보해 놓았으니 어떻게든 동조율을 끌어올릴 약을 만들어.”

    황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추악하고도 더러운 인간이었다. 자신이 저 악랄한 자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녀가 황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성배에 담긴 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혈족이 아닌 인간에게 ‘그’ 유전자를 이식하는 건 쉽지 않아요. 성배의 힘을 빌린다 해도요.”

    동조 자체도 쉽지 않았으나 동조 이후에도 강력한 유전자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그나마 신관을 실험체로 사용하면서부터는 동조율이 높아졌다고 들었건만,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언제쯤 이 끔찍한 실험이 끝날까.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모두가 제 탓이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뜨고 잠드는 매분 매초, 죄악감에 시달리며 후회했다.

    사 년 전 예배당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황제의 끔찍한 범죄를 목도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고 도망쳤더라면.

    하다못해 잠들어 있던 성배를 깨우지만 않았더라면.

    ‘하지만 내가 성배를 작동시키지 못했다면 나를 죽였겠지.’

    베로니카는 자조했다.

    그나마 사람에게 약을 주입하는 일만은 제게 시키지 않았다. 황궁까지 실험체를 들이기엔 위험했기에 부득이하게 내려진 결정이었다.

    아마 그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면 진즉 미쳐버렸을 것이다.

    어딘가의 비밀 공간에서 죽어갈 희생자를 생각하면 혀를 깨물고 자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겨질 모후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베로니카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신전에서도 눈치챌 거예요. 신관에게 흑마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걸요. 어쩌면 이미 알아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페르난데가 피식 웃었다. 비어져 나온 웃음에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누구의 짓인지도 모를 텐데 무슨 상관이냐. 죽은 이후에 남은 흔적으로는 증거를 찾을 수도 없는데 그것들이 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설사 성녀라고 한들 실험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눈치챌 수 없었다.

    동조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강력한 성배의 힘이 흑주술의 흔적을 말끔하게 가려줄 테니까.

    실험이 끝났다는 건, 실험체가 이식된 유전자의 능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는 걸 뜻했다.

    “너는 그냥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해. 보름 내로 동조율을 절반 이상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레티샤가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다.”

    황후에게도 주술을 걸겠다는 협박.

    베로니카의 말아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부릅뜬 눈을 마주 보며 페르난데가 빈정거렸다.

    “레티샤는 네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며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던데, 넌 고작 이런 일로 화를 참지 못해서야 되겠나?”

    “지, 지금 뭐라고…….”

    “알아들었으면 제대로 하라는 소리야.”

    페르난데가 싸늘하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기 직전 잠깐 멈춰선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말을 덧붙였다.

    “실험에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언제든 던컨에게 말해.”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왔다.

    예배당 밖으로 나온 황제를 향해 기다리던 던컨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족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페르난데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닮았단 말이지.’

    소름 끼치리만치 차가운 비소였다.

    * * *

    일주일 만에 언니를 찾아온 메리엘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아셀라가 병에서 과일 꿀차를 손수 타서는 동생 앞에 내려놓았다. 메리엘이 주었던 차였다.

    “굉장히 맛있게 마시고 있어. 매일 조금씩 아껴서 먹을 정도로. 너도 한번 마셔보렴.”

    그새 입안에 쿠키를 두 개나 밀어 넣은 메리엘이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과일 꿀차는 어떻게 구한 거야?”

    그간 궁금했던 점이었다. 메리엘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요리장한테 부탁했어! 언니한테 들었던 모양이랑 맛을 설명하니까 만들어줬어!”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똑 부러지고 당찬 동생이 기특하고 예뻤다. 아셀라가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였다.

    “언니, 그런데 대공 전하랑 얼마나 친해졌어? 우리 엄마 아빠처럼 가까워졌어?”

    “응?”

    아셀라가 동그란 토끼 눈을 했다.

    ‘전하와 나는…….’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막 초야를 치른 부부였고, 아직도 그녀는 그를 잘 알지는 못했다.

    ‘전하가 잘 대해주시지만…….’

    아셀라는 순간 어떤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절절하고 애끓는 감정을 뜻하는 말.

    궁금했고 경험하고도 싶었지만,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아셀라도 기대하지는 않았다.

    칼릭스도 그녀에게 그 말을 해주진 않았으니까. 여러 날 동안 수없이 몸을 나누고 입을 맞추었음에도.

    그가 자신에게 다정하고 또 따뜻하게 대해주는 건, 아마도 그녀가 그의 아내이기에 배우자로서 아끼고 배려해주는 것일 터.

    하지만 아셀라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했다.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정을 붙이고 살아가는 부부가 많다고 했다.

    그는 그녀가 소중하다고 했다. 지켜주고 싶다고도 했다. 좋은 남편이 되겠다 말해주었다.

    ‘그러니 충분해…….’

    욕심내서는 안 되는 거다. 제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의 사랑까지 바라는 건 이기적인 거였다.

    그렇게 아셀라가 막 마음을 다스렸을 때였다.

    “그럼 이제 진짜 부부가 된 거야?”

    “진짜 부부?”

    “아기는 생겼어?”

    풉, 하마터면 아셀라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을 뻔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손잡고 잔 거 아니었어? 그거 전하랑 언니랑 손잡고 자라고 준 건데.”

    아셀라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당혹스럽고 난감했지만 순수한 아이의 환상을 깨뜨릴 순 없었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답했다.

    “소, 손잡고 잤어.”

    “진짜?”

    메리엘이 두 손을 꼭 모아쥐고는 아셀라를 향해 몸을 쭉 내밀었다. 그녀와 똑 닮은 파란 눈동자가 잔물결에 부서지는 빛처럼 반짝거렸다.

    “그럼 아기도 생긴 거야? 여자아이야, 남자아이야?”

    “그, 그건 아직 몰라.”

    “앞으론 매일매일 잡고 자. 그러면 아기가 빨리 찾아올 테니까.”

    “매일…… 이라니…….”

    아셀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메리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닐 테지만, 찔리는 게 많은 언니는 태연하지가 못했다.

    “그거 좋은 말이로군, 영애.”

    도주하는 대공비 110화

    갑자기 문 쪽에서 들려온 음성에 아셀라가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

    그녀의 남편이 문가에 기대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메리엘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인사했다. 시계를 확인한 아셀라가 약간 당혹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늦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일찍 끝냈어. 오늘 하루도 잘 보냈나?”

    이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칼릭스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빨개진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메, 메리엘이 보고 있는데…….”

    “아냐, 언니. 난 신경 쓰지 마!”

    메리엘이 접시에 남은 쿠키를 마저 양손에 쓸어 담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난 그만 자러 가볼게! 그럼 다음에 또 봐! 전하, 안녕히 계세요!”

    “잠깐, 메리엘……!”

    아셀라가 다급히 메리엘을 불렀으나 매정한 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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