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직접 뚜껑을 열어 걸쭉한 액체를 덜어내고는 뜨거운 물을 부어 녹였다. 스푼으로 휘휘 저을 때마다 예쁜 색깔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돌아갔다.
딱 좋을 정도로 풀어진 차를 확인한 그가 그녀에게 내밀었다.
“뜨겁진 않을 거야.”
아셀라는 말없이 잔을 받아 감싸 쥐었다. 뜨끈뜨끈한 차 덕분에 찻잔 표면이 따뜻했다. 무척이나 향긋한 향은 늘 그리웠던 이의 기억처럼 달콤했다.
아셀라가 조심스레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맛있어.’
과일 특유의 상큼함에 꿀의 달콤함이 더해져 오묘한 맛이 났다.
그녀는 칼릭스가 저를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차를 홀짝거렸다. 순식간에 컵 안의 내용물이 죄 떨어졌다.
어쩐지 아쉬워지고 말았다.
“아셀라.”
칼릭스가 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아셀라는 무심결에 그를 향해 빈 컵을 내밀었다가 아차 하며 팔을 뒤로 뺐다.
“당신 생각이 맞아.”
칼릭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컵을 쥐었다. 손이 큰 탓에 그녀의 손등을 반쯤은 덮는 모양새가 되었다.
“더 만들어줄게.”
“아녜요. 당신도 아직 안 드셨잖아요. 이번엔 제가 해 드릴게요.”
도리질 치며 냉큼 병을 집어 든 아셀라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이게 뭐죠?”
병 바닥에 쪽지 하나가 붙어있었다. 자그마하긴 해도 밀랍으로 야무지게 봉해놓은 편지였다. 가운데에 찍힌 인장 문양을 확인한 아셀라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피어올랐다.
“메리엘이 편지를 썼나 봐요.”
아셀라가 밀랍 봉인을 떼어내고는 쪽지를 펼쳤다.
잠시 뒤, 그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06화
아셀라의 붉어진 얼굴을 귀신같이 알아챈 칼릭스가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기에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내용을 확인하려 들자 그녀가 황급히 쪽지를 접어 나이트가운의 주머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병의 내용물을 스푼으로 한가득 퍼 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칼릭스도 좀 마셔봐요.”
쪽지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으나, 칼릭스는 귀 끝이 빨개진 아내를 더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건 당신 거야. 양이 많지도 않으니 혼자 먹도록 해.”
그러곤 시종이 밀고 들어왔던 트레이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난 이거면 되니까.”
아래쪽이 둥글넓적하고 위쪽이 좁아지는 형태의 잔에 적황색의 액체가 담겼다. 영롱하고 예쁜 색깔의 술이었다.
잔을 가볍게 두어 번 돌린 그가 술을 입안으로 단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씻어야지.”
“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해도, 아마 당신은 안 그럴 테고.”
칼릭스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스치더니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칼릭스!”
아셀라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칼릭스가 입술에 작은 호선을 그렸다.
금세 침대로 걸어간 그가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칼릭스, 잠깐만요.”
“누워 있어.”
아셀라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칼릭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저지했다.
아셀라가 고집스레 말했다.
“아직 안 잘 거예요.”
“안 자도 돼. 그냥 누워 있기만 해.”
그녀의 남편 역시 고집스레 답했다. 그러고는 매일 밤 해주던 것처럼 아셀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서 미미한 알코올 향이 났다. 평소 풍기던 달큼한 향과 섞이며 독특한 체취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묘하게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금방 나올 테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붉은 눈동자에 열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아, 아셀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네.”
순순한 대답에 칼릭스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아셀라의 심장이 다시 쿵쿵거렸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변화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을 때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어댔다.
“어, 어서 다녀오세요.”
너무나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다 들릴 것만 같아, 아셀라가 황급히 칼릭스를 밀어냈다.
“이따가 봐.”
다정한 대답과 함께 칼릭스가 몸을 돌렸다. 그가 욕실로 들어선 뒤, 문 안쪽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제 그가 보이지 않으니 안도해야 할 텐데, 두근거림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어쩐지 자꾸만 떨렸다. 심장의 콩닥거림은 여전하기만 했다.
‘메리엘 그 녀석이 괜한 소리를 해서는.’
쪽지 내용을 떠올린 아셀라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도저히 안 되겠어.”
결국은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아셀라를 위해 칼릭스가 등의 조도를 한껏 낮춰놓은 탓에 방 안에는 희미한 빛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 아까 칼릭스와 마주 앉았던 소파로 돌아갔다. 눈에 그가 마셨던 술병과 잔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언젠가의 연회에서, 화제로 술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혹시 영애도 술을 마셔본 적이 있나요?’
‘아뇨, 아직은…….’
‘어머,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요? 굉장히 모범적인 아가씨였군요.’
까르르 웃던 부인들은 아셀라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작은 조언을 해주었다.
‘곧 성년이 되면 아시겠지만, 술은 마법의 약이나 다름없답니다.’
‘마법의 약이요?’
‘마시면 긴장도 풀리고 기분도 좋아지거든요. 처음엔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조금 더 홀짝거리다 보면 계속 들이켜고 싶어질 거예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아셀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긴장이 풀릴 거라고?’
마치 병이 난 것처럼 뛰는 그녀의 심장도 진정될지 몰랐다. 게다가 기분도 좋아진다니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필립 때문에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지만, 지금은 성년이고 결혼까지 했으니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셀라가 조금 전 칼릭스의 동작을 떠올리며 잔의 아랫부분에 술을 채웠다.
“이렇게 조금만 따라서…….”
몇 번 잔을 돌리자 안의 내용물이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선명한 색이 고왔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그렇지만 처음 맡는 향이 났다.
그녀는 살짝 잔을 기울여 입술을 축여보았다. 동시에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맛이 이상해.”
생전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다. 달콤한듯하다가도 쌉싸름한 맛이 나더니 혀끝이 알싸해졌다.
맛을 잘못 보았나 싶어 이번에는 입안에 머금다가 목 뒤로 넘겼다. 목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 인상을 썼다. 그녀의 입맛과는 맞지 않았다.
‘이미 따라버렸는데 어쩌지?’
아셀라가 칼릭스가 들어간 욕실 쪽을 힐끗거렸다. 얌전히 침대에서 기다리기로 약속했는데.
‘따라놓은 것만 마시자.’
눈대중으로 보아도 몇 모금 안 되는 양이었다. 연회장에서 만났던 부인의 말도 생각났다.
‘홀짝이다 보면 계속 마시고 싶어진다고 했었지.’
아셀라가 결연한 표정으로 술이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 * *
샤워를 마친 칼릭스는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대충 가운을 걸치고 황급히 침실로 걸어 나온 그는, 갑자기 제게 와락 안기는 아셀라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셀라?”
“칼릭스…… 이제 다 씻은 거예요?”
그를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어 올리는 아내의 표정이 묘했다. 칼릭스는 그녀에게서 나는 향에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셀라, 당신 뭘 마신 거야.”
“아, 아무것도 안 마셨어요.”
고개를 젓는 몸짓이 다급했다. 그러나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색색거리는 숨소리, 벌어진 입술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말하는 바는 확실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곧바로 테이블을 향했다. 병에 담겼던 술 높이가 그의 손톱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상상도 못 했던 아내의 돌발 행각에 기함했다.
“저게 얼마나 독한 술인데, 그걸 마시면 어떡하나!”
“술 안 마셨어요.”
아셀라가 격하게 도리질 치며 부정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엄한 눈빛에, 그녀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늘어뜨리고는 이실직고했다.
“실은 조금만 마셨어요…….”
그러더니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지 못한 아이를 달래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 응?”
줄어든 양을 보아하니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수가 높기도 했고 아내에겐 분명 술이 처음이었을 터. 알딸딸할 정도로는 취기가 돌 것이다.
아셀라가 우물쭈물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자꾸, 자꾸 심장이 뛰어서…….”
“심장이 뛰어?”
아셀라가 잔뜩 흐트러진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릭스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문득 몸이 더워지는 기분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전하를 보고 있으면…… 가끔 심장이 두근거려요. 아까도 그래서 진정하려고 일부러 마신 거였는데 아직도…….”
칼릭스가 그제야 둘의 몸이 맞닿은 가슴께로 시선을 내렸다.
아내의 심장이 쿵쿵대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맞추어 제 심장박동도 조금씩 속도가 붙는 게 느껴졌다.
고요한 방 가운데,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아셀라가 그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속삭였다.
“따뜻하다…….”
다시 밀려드는 아찔한 감각에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어느 정도 스킨십이 익숙해졌다고 여겼다.
아내는 그와 몸이 닿는 걸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용히 손깍지를 끼면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수줍게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녀와의 접촉에도 내성이 생긴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그런데 웬걸, 전혀 아니었다.
아셀라가 먼저 다가와 하는 접촉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을 주었다. 맨살을 비비지도 않는데 닿는 부위마다 털이 쭈뼛 솟고 몸 곳곳이 화끈거릴 정도로 찌릿찌릿했다.
이건 도무지 무뎌질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저를 꼭 끌어안는 그녀가 미치도록 좋아서, 이 부드러운 촉감이, 향기로운 체취가 뇌를 휘저을 정도로 강렬해서.
“칼릭스.”
귓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목소리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들끓는 욕망에 몸이 달아 눈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여기서 이성을 놓는 순간 저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셀라는 그저 술기운에 취했을 뿐이라고, 그런 그녀의 상황을 비겁하게 이용하려 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되새겼다.
칼릭스가 잔뜩 쉬어버린 것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뗐다.
“그만 자야지. 밤이 늦었는데.”
애써 입에 담은 말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전신을 달구는 욕망을 가까스로 내리누르고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다급하기만 했다.
그새 침대에 다다른 그가 아셀라를 눕혔다. 베개를 끄집어와 그녀의 머리에 받쳐주고는 엉클어진 침구를 제대로 덮어주었다.
오늘은 함께 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위험을 감지한 칼릭스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칼릭스, 어디 가요?”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아셀라가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칼릭스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문을 바라보며 답했다.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시, 밖에.”
“……가지 마세요.”
“가야 해.”
“왜요?”
그의 잇새로 짐승이 그르렁대는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신히 치미는 갈증을 억누른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타인에게는 무미건조하기만 하던 적안이 이제 숨길 수 없는 갈망을 품고 반짝였다. 맹수의 눈이 음험한 빛을 띠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더는 그를 자극하지 말라고.
그러나 아셀라는 전혀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순한 눈망울을 천천히 깜박였다. 선홍빛의 작은 입술이 벌어지며 또렷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가지 마세요.”
술에 취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완벽한 귀족적 악센트.
뺨은 여전히 발그스름했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눈만큼은 또렷하고 맑았다.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칼릭스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이윽고 붉은 눈에 숨길 수 없는 파문이 일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그러나 한 가닥 기대와 열망이 서린 얼굴이 아셀라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나온 목소리엔 약간의 떨림마저 일었다.
“아셀라, 그 말은 지금…….”
“전하의 진정한 아내가 되고 싶어요.”
아셀라가 눈꼬리를 살포시 접으며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도주하는 대공비 107화
칼릭스는 제 아래 누워 저를 올려다보는 아셀라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미친 듯이 약동하는 심장은 아플 정도로 팔딱였지만, 그 고통마저도 달콤했다.
“아셀라.”
그녀는 그의 손을 놓칠세라 아직도 꼭 쥐고 있었다. 칼릭스가 자연스럽게 손목을 돌려 아셀라의 손을 감쌌다.
“아셀라.”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어여쁜 손.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희고 섬약한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하듯 손가락 끝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의 뜨거운 숨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작게 움찔거렸다.
이윽고 칼릭스가 깍지 낀 손을 아셀라의 머리맡에 지그시 내리눌렀다. 다른 한 손으로는 새하얗고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반쯤 탁해진 눈동자로 그녀를 꿰뚫을 듯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시간은 많아, 아셀라.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그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한번 시작하면 못 멈춰. 멈춰줄 생각도 없고.”
칼릭스의 울대가 단단해지며 그가 낮게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열망으로 짙어진 눈빛은 명백히 위험을 경고했다.
무구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제 가운의 여밈을 풀어버렸다. 가운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안쪽의 나이트 드레스가 드러났다.
순간 칼릭스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갈 정도로 아찔해졌다.
그녀가 평소에 입던 종류의 옷이 아니었다.
차르르 떨어지는 실크 옷감이 몸에 맞춘 듯 달라붙어 굴곡이 죄 느껴질 정도였고, 소매 없이 얇은 어깨끈만 달려 있어 도자기처럼 새하얗고 뽀얀 피부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와 둥근 어깨, 움푹 파여 도드라진 쇄골이 미칠 듯이 선정적이었다.
상기된 뺨 아래, 잘 익은 과실처럼 탐스러운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그가 바라마지 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멈추지 마세요.”
묘하게 유혹적인 말에 칼릭스가 느른한 웃음을 지었다.
상체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머리를 둔하게 만들 정도로 달콤한 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이를 박아넣고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천천히.’
밤은 길었고 시간은 충분했다.
간신히 충동을 억누른 그가 고개를 틀어 그녀의 귀에 입을 바짝 가져다 댔다.
“바라시는 대로.”
꿀을 바른 것처럼 끈적이는 속삭임이 밀착되듯 달라붙었다. 귀에 닿는 더운 숨결에 아셀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칼릭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톰한 입술에 제 것을 포개었다.
아셀라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았다. 사슴 같은 목덜미를 큰 손으로 감싼 칼릭스가 뜨거운 혀를 거침없이 입술 틈새로 밀어 넣었다.
“읏…….”
지독했던 욕망이 해갈되는 입맞춤은 다소 거칠었다. 작은 틈 하나 남기지 않고 남김없이 흔적을 남기겠다는 듯 정신없이 입안의 여린 점막을 헤집어댔다.
깍지 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받듯, 한 줌 자비 없이 탐욕적으로 그녀의 숨을 탐했다.
타액이 섞이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올수록 연신 혀를 얽어댔다.
그러다 아셀라의 숨이 가빠지며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놓아 주었다.
두 입술 사이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은사가 길게 늘어졌다.
“하아…… 하아…….”
어느새 그녀의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색색거리는 숨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푸딩처럼 말랑거리는 아랫입술을 빨고 당기며 장난스럽게 지분거리자 촉촉한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몽롱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내의 모습에 칼릭스가 낮게 웃었다.
더는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이 벌써부터 지독한 포만감을 주었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킨 그가 그녀를 옭아매듯 샅샅이 훑었다.
살짝 흐트러진 표정, 은은한 살 내음, 보드랍고 고운 살결. 머리카락 한 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자극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저 단정한 여자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낱낱이 제 눈에 담고 싶었다. 쾌락에 잠긴 물빛 눈동자가 얼마나 어여쁘게 반짝일지 궁금했다. 자그마한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올 열락의 소리는 또 어떠할지 듣고 싶었다.
몸의 구석구석 모조리 탐할 것이다. 빠짐없이 제 흔적으로 가득 새겨넣을 것이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머리칼을 손에 한 움큼 쥐어 입을 맞추었다. 그 작은 동작에도 애정이 묻어났다.
다시 이마에, 눈꺼풀에,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셀라.”
그녀가 말없이 그의 로브 앞자락을 쥐곤 끌어당겼다. 고개를 한껏 들어 올려 제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칼릭스는 기꺼이 아내의 도발에 응했다.
* * *
아셀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이어진 입맞춤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언젠가부터는 세는 걸 포기했다.
사내의 단단한 몸이 그녀를 가두고 연신 입술을 빼앗았다. 그에게서 늘 느껴지던 달큼한 향은 이제 그녀의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짙어졌다.
적나라한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아셀라는 유일한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이 눈앞이 하얗게 물들면, 그때야 그가 입술을 떼어 시간을 주었다.
“이런, 숨을 쉬어야지.”
달래듯 말하고는 그 잠깐도 참기 힘들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며 쇄골, 어깨에 연신 입술을 맞대었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여린 살갗을 잠시 간지럽히다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이 조금 가라앉았다 싶으면 다시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정염으로 들끓던 붉은 눈동자가 완전히 탁하게 가라앉자 아셀라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칼릭스, 이제 그만…….”
“이미 늦었어, 아셀라.”
칼릭스가 제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입술을 휘었다. 농염한 미소가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러게 아까 기회를 줄 때 도망갔어야지.”
포식자의 느른한 웃음에 아셀라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대로 잡아먹힐 것만 같은 느낌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러나 떨림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기대감에 가까웠다. 낯설고 두려웠지만 묘하게 기다려졌다.
그가 제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칼릭스가 로브를 고정하던 허리끈을 단숨에 풀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아셀라가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쿵쿵대던 심장은 이제 방을 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눈을 떠.”
아셀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뜨지 않으면 밤새 괴롭혀 줄 텐데도?”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러이 쥐어 제 가슴께로 가져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생경한 감각에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뜨고 말았다. 동시에 그의 벗은 상체가 고스란히 눈으로 들어왔다.
칼릭스에게 이끌린 손이 천천히 그의 몸을 매만졌다.
떡 벌어진 어깨는 그 자체만으로도 짐승 같은 야성미를 자아냈다. 그 아래 단단한 쇄골 사이의 푹 꺼진 틈을 손가락이 천천히 쓸어냈다. 그다음 닿은 너른 가슴팍은 빈틈없이 탄탄하기만 했다.
불필요한 근육이라곤 없는 매끈한 몸이 마치 늘씬한 표범 같았다.
아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돌렸으나 시야에 들어온 건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팔뚝이었다.
어디에도 눈을 둘 데가 없어진 그녀의 시선이 결국 칼릭스의 얼굴로 향했다.
“잘 기억해, 아셀라. 앞으로 당신이 계속 알아가게 될 몸이니까.”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잘게 갈라진 복부의 근육에 손이 닿자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카, 칼릭스…….”
너무나 부끄러웠다. 자의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남자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만, 그만요.”
애원하듯 울먹거리며 도리질 치자 칼릭스가 잡고 있던 손목을 풀어주었다.
안도하기도 잠시, 그의 팔이 허리를 감으며 몸을 바짝 붙였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아셀라가 몸을 파드득 떨었다.
“긴장 풀어.”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깨와 등, 팔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몸이 홧홧해지며 뜨거우리만치 달아올랐다.
숨 막히는 열기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은 생소하면서도 아찔했다.
그러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쓸자, 참지 못한 신음이 벌어진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흐읏!”
제가 낸 소리에 놀란 아셀라가 급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칼릭스가 다시 입술을 겹쳐 말캉한 혀를 밀어 넣으며 그 행동을 저지했다.
“깨물지 말라는 데도. 피가 나잖나.”
“카, 칼릭스, 나…….”
“자연스러운 거야, 아셀라. 부끄러워할 거 없어.”
느른한 속삭임이 마치 데운 꿀처럼 끈적하면서도 달콤하기만 했다. 얇은 실크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사내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완전히 깊어진 그의 눈 아래로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어둑어둑한 방 안, 이제 보이는 거라곤 오직 저를 뚫어질 듯 주시하는 적안뿐이었다.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아셀라, 당신을 원해.”
묵직하고 낮은 남자의 음성이 귀를 적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셀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을 느꼈다.
오롯이 저 하나만을 담은 강렬한 붉은 색채가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잠깐의 충동일 수도 있었다. 내일 눈을 뜨고 나면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셀라는 이 순간의 감정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이 사내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제 남자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칼릭스.”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맞닿을듯한 입술 사이로 두 사람의 숨결이 뒤엉켰다.
아셀라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꽉 그러안았다.
칼릭스의 이성이 기어이 끊어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10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