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71)

“얼른 외워야 할 텐데. 눈에 익을 때까지 읽다 보면 될는지…….”

아셀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렇게 노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칼릭스.”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였으니까. 지금이라도 조금씩 나아가보고 싶었으니까.

입맞춤을 나누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몸에서 열이 나곤 했다.

함께 침실을 공유하는 건 조금은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되어준 것도 사실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아셀라는 조금씩 칼릭스와 함께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칼릭스는 정말로 그녀에게 잘해주었다. 결혼식 날 보았던 그와 지금의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전하, 이건 정말이라니까요!’

‘믿으셔도 돼요. 전하께서…….’

꼭 시녀들의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자신에게만큼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준다는 걸. 사소한 말에도 귀 기울여주고, 항상 마음을 헤아려주려고 노력한다는 걸.

‘……내가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용기를 냈었더라면. 두려움과 눈에 낀 편견을 걷어내고 그를 온전히 바라보았더라면. 한 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렇게 어려운 길을 빙빙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아셀라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 해내고 싶었다. 그가 저를 위해 해주는 만큼 자신도 노력하고 싶었다.

‘난 좋은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겠지.’

‘하지만 당신이 허락해 준다면, 당신에게만은 좋은 남편이 되고 싶어.’

어젯밤 잠들기 전 그가 했던 고백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었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쿵쿵 뛰는 바람에 말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도주하는 대공비 104화

답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오롯이 느껴졌었다.

그렇게 하나씩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갑자기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아셀라가 손바닥으로 급히 부채질했다. 어쩐지 목이 타서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음료 외에도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간식이 눈에 띄었다.

그 어마어마한 양을 보며 아셀라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그녀는 딱히 음식을 가리지는 않았다. 고기의 감칠맛도, 생선의 담백함도, 디저트의 달콤함도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의 시간마다 새로운 간식이 들어오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식사를 걸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맛있고 훌륭한 음식도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리는 법이어서, 결국 그녀는 먹기를 포기하고 저리 쌓아두고 있었다.

“잘 먹고 있다는 데도 꼭…….”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칼릭스의 유난스러움 탓이었다.

그는 그녀가 너무 가냘프다고 걱정하면서, 그 이유가 지금껏 제대로 못 먹은 탓이라 단정 지었다.

‘이렇게 부러질 것처럼 몸이 가늘어서야 조금만 힘들어도 아플 수밖에 없지. 당신은 많이 먹어야 해.’

‘다들 잘 챙겨주어서 꼬박꼬박 먹고 있는걸요.’

‘이 정도론 어림도 없어. 지금보다 배는 먹도록 해.’

그렇게 볼 때마다 그녀에게 먹이려 들었다.

‘정원을 산책하는데 무슨 호위 인원을 이렇게 많이…….’

‘기왕이면 안전하게 다니는 게 좋지 않나.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덕분에 사람들을 주렁주렁 뒤에 달고 다녀야 했다. 누가 보더라도 지나친 과보호였다.

“세 살 아이한테도 그러진 않을 텐데.”

아셀라가 작게 툴툴댔지만 몽글몽글해지는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끔 일과 중에 시간이 날 때면, 칼릭스는 여지없이 그녀를 찾았다. 처음엔 침묵 속에서 차를 마시는 게 고작이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짤막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면 그는 세상에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경청해 주곤 했다.

그래서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나중에서야 그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다는 걸 깨닫고 멈추곤 했다.

‘어쩌죠?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은…….’

‘시간은 충분하니 걱정할 거 없어. 자,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지?’

그럴 때마다 칼릭스는 신경 쓰지 말라며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덕분에 이젠 아셀라도 그에게 곧잘 말을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일상은 꽤 평화로운 편이었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면.

잠들 즈음의 칼릭스는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별다른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접촉해 온다거나 특별히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샤워를 마친 그가 가운을 느슨하게 걸치고 반쯤 젖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나올 때마다,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곤 했다.

‘좋은 꿈 꾸길.’

미등만이 켜진 침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몸을 굽혀 그리 속삭일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이상하게도 기대 비스름한 것이 생겨나곤 했다.

칼릭스의 약속대로, 둘은 한 침대를 쓰면서도 지금껏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기이하게도 드문드문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아셀라가 길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걷힌 커튼 사이로 어둠이 짙게 깔린 바깥이 보였다. 그가 돌아올 시간이 지나있었다.

“평소보다 늦는 것 같아.”

아셀라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 시간쯤이면 칼릭스가 오기를 자연스레 기다리곤 했다.

시계를 몇 번씩 힐끗거리고 하던 일도 잘 집중하지 못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씻고 나서…….”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딸린 욕실이 하나뿐인지라 아셀라는 늘 칼릭스가 돌아오기 전에 미리 샤워를 마쳐두곤 했다.

서둘러 몸을 씻고 나온 그녀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벽장 한쪽에 나이트 드레스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순간 아셀라는 고민에 빠졌다.

평소에는 늘 소매와 치맛자락이 긴 두께감 있는 나이트 드레스를 고르곤 했다.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예쁜 걸 입어보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몸을 둘둘 감싼 타월의 여밈을 한 손으로 꾹 눌러 쥐고는 잠옷 하나하나를 살피는 눈길이 신중하기만 했다.

그렇게 잠시 뒤, 아셀라가 조금 어색한 모양새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늘하늘하고 미끈한 재질의 옷감이 움직일 때마다 몸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아셀라로서는 처음 시도해 보는 종류였다.

어쩐지 적응이 되질 않아서 결국은 몸을 죄 가리는 가운을 위에 걸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아셀라는 물기로 젖은 머리를 타월로 톡톡 두드리며 도로 침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벽난로의 타오르는 불꽃 덕에 침실은 훈기로 가득했지만 어쩐지 썰렁한 느낌을 주었다.

“……아직 안 왔네.”

아셀라는 아쉬워지려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바쁜 일이 있는지 오늘은 종일 칼릭스를 보지 못했다.

물론 찾아간다면 반겨줄 테지만, 그녀는 일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힘이 쭉 빠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무룩해진 아셀라가 덜 말린 머리를 그대로 두고 소파에 자리했다.

왜 이렇게 실망이 이는 건지. 어째서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건지.

‘아니야. 이제 금방 올 거야.’

칼릭스는 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했지만 아셀라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이 민망해서였고, 그다음에는 미안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싶어졌다.

낮 동안 서류와 씨름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나와서인지 몸이 나른했다. 눈이 끔뻑끔뻑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길 반복했다.

‘자면 안 되는데…….’

쏟아지는 졸음에 아셀라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수마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몸이 서서히 기울더니 소파 팔걸이에 머리가 닿았다. 스르르 감긴 눈꺼풀이 다시 뜨이지 않았다.

고른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에 맴돌기 시작할 때쯤, 방문이 열렸다.

* * *

아셀라가 막 샤워하던 시각, 칼릭스는 집무실에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칼같이 업무를 마무리해 온 그였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날아온 보고 탓이었다. 켈튼 산과 이어진 공국의 경계에서 마수가 출몰한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지크와 그의 부대가 해당 장소로 막 출발한 참이었다.

“페르난데가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 모양이군.”

지금은 마수의 수면기였다. 가끔 때를 잘못 알고 깨어난 마수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렇게 출몰 빈도가 높을 수는 없었다.

“마수들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 들쑤시고 다니다 보니 인근 마을의 불안이 큰 모양입니다.”

“지크가 확인하는 대로 추가 병력을 보내. 경계를 강화하고 별도의 수색 인원을 뽑아 켈튼 산을 샅샅이 뒤져라. 이참에 마수의 둥지를 찾아 제대로 정리해야겠어.”

명을 내린 칼릭스가 성가신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사람을 해치는 악수가 제 영토에서 깔짝거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네비토의 비기를 써서 능력을 반쯤 차단해 두었는데도 이렇게 발악할 수 있을 정도라.”

“흑마법을 쓰는 자인지라 보통 사람보다도 마수를 부리기는 더 쉬울 겁니다.”

“허투루 볼 자는 아니다. 만일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흑마법을 썼다면, 그 비밀을 지금껏 유지해 왔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자다.”

“명심하겠습니다.”

업무를 마무리한 칼릭스가 시계를 확인하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저녁 식사를 함께 못할 거라는 연락을 미리 보내긴 했다. 그러나 하루 내내 아셀라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칼릭스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전하!”

아셀라를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아이가 문밖에서 생기발랄하게 인사했다. 손에는 손잡이가 달린 천 주머니를 든 채였다.

“손님이 있었군. 오래 기다렸나?”

“아뇨! 저도 조금 전에 막 왔어요.”

“들어오도록.”

총총걸음으로 들어온 메리엘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라이젠을 향해 냉큼 말했다.

“다과는 없어도 돼요. 조금 전까지 잔뜩 먹고 왔거든요!”

“알겠습니다, 영애.”

가볍게 미소 지은 라이젠이 칼릭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칼릭스가 메리엘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마법 연습은 잘 되어가나?”

“네! 공터가 넓어서 이것저것 시도하기 편해요.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됐군. 더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 말해.”

“그럴게요.”

메리엘이 생글생글 웃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칼릭스 역시 메리엘의 방문이 내심 달가웠다.

아셀라가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메리엘이 정보원 역할을 아주 쏠쏠히 해주고 있어서였다.

아셀라의 취향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관심사 같은 건 마고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핵심 정보는 메리엘이 다 쥐고 있었다.

‘언니가 낯을 가리고 말을 잘 안 하는 건 필립 때문이에요. 항상 말대꾸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거든요. 다른 사람도 못 만나게 했고요. 하지만 실은 대화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저랑 이야기할 때는 안 그러거든요.’

메리엘만이 아는 이야기는 지금의 칼릭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정보였다.

카르마가 관리하는 길드에서 수집하는 모든 정보를 다해도 이 조그마한 아이가 가진 정보의 가치만 못했다.

칼릭스는 메리엘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두었다가, 아셀라와 가까워지는데 살뜰하게 써먹고 있었다.

물론 칼릭스와 마찬가지로 메리엘에게도 나름의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다.

‘언니가 여기서 대공 전하랑 함께 살기로 했으니까.’

칼릭스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자 아셀라도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메리엘은 부부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기로 했다. 더는 두 사람이 엇갈리거나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 않도록.

‘무조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윽박지르거나 하면 안 돼요.’

‘언니는 힘들어도 말을 잘 안 해요. 그러니까 눈이 빨갛거나 표정이 안 좋으면 꼭 무슨 일인지 살펴봐 주세요.’

사실상 정보를 빙자한 당부였다.

처음 대공을 찾아왔을 때는 반신반의하며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외로 무척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듣던 도중 더 알고 싶은 게 생기면 질문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공성의 사용인들을 통해서 대공 부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뿌듯해졌다.

그러다 어제, 그녀는 시녀들끼리 속닥거리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그중에서도 메리엘의 귀에 확 꽂힌 이야기가 있었다.

‘두 분이 매일 같은 침실을 쓰시잖아.’

‘맞아. 전하께서 그렇게 비전하를 애지중지하시는데…… 이제 시간문제일걸?’

‘내년 이맘때쯤이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꺅, 시녀들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발을 동동 굴렀다. 비전하를 닮았다면 분명 사랑스러운 아기일 거라며 꺄악거렸다.

아기?

그게 바로 오늘 메리엘이 대공을 찾은 목적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05화

“오늘은 무슨 용건이지, 영애?”

“아, 실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메리엘이 두 손에 깍지를 끼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감이 어린 눈빛에 칼릭스가 멈칫했을 정도였다.

“무엇이 궁금하지?”

“전하랑 우리 언니는 진짜 부부예요?”

“뭐?”

“아직 진짜 부부는 아니에요?”

뜬금없는 말에 칼릭스가 미간을 설핏 좁혔다.

부부면 부부지 진짜 부부는 또 뭐란 말인가. 칼릭스가 의아한 얼굴로 메리엘을 쳐다보았다.

메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에트망 부인 말로는 진짜 부부가 되면 아기가 생긴다고 했는데…….”

오. 그런 의미였군. 단박에 알아챈 칼릭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영애는 나와 아셀라가 진짜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나?”

“그럼요! 그럼 예쁜 아기가 생기잖아요.”

해맑게 웃으며 답한 메리엘이 이상하다는 듯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런데 낮에는 자주 손잡으시면서 왜 밤에는 손 안 잡고 주무셨던 거예요? 손을 꼭 잡고 자야 진짜 부부가 되는 건데.”

엘븐의 별장에서 지내던 시절, 가정교사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아이가 물었다.

눈높이에 맞춰서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아이의 모습에서 순진함이 묻어나왔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칼릭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셀라가 손잡는 걸 피해.”

“정말요? 이상하네. 우리 언니 손 잡는 거 좋아하는데.”

메리엘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은 무섭고 떨려서 그런가?”

“무서워?”

“네. 에트망 부인이 아기를 처음 가졌을 때 무척 기쁘고 행복했지만 그만큼 떨리고 무서웠대요. 생명이 찾아오는 거잖아요.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고, 그래서 두려웠다고 했어요.”

소중한 존재. 지켜주고 싶은 존재. 잃을까 봐 두려워지는 존재.

칼릭스는 아셀라를 떠올렸다. 그리고 언젠가의 미래에 태어날지 모를 그들의 아이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도 그러할까.

아셀라는, 아내는, 그의 아이를 품고 싶어 할까. 둘 사이의 아이를 바라고 있을까.

‘아이를 원해요…….’

과거 그녀가 했던 말은 그의 겁박에 못 이겨 내뱉은 것이었다. 강압적으로 구는 제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토해낸 거짓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칼릭스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치만 전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칼릭스의 굳은 얼굴을 본 메리엘이 냉큼 덧붙였다.

“언니는 아이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전하도요.”

“뭐?”

“언니가 전하를 좋아해요.”

“그럴 리가.”

칼릭스가 헛숨을 토했다. 그대로 속아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말이었지만 아이의 빤한 거짓말에 넘어갈 그는 아니었다.

아셀라가 그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깊어진 건 아니었다.

“진짠데.”

메리엘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차, 하며 손뼉을 쳤다.

“전하께 드릴 게 있어요!”

그러더니 가져왔던 천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내용물의 정체를 가늠하는 칼릭스를 향해 메리엘이 눈을 찡긋했다.

“이게 있으면 언니랑 더 친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메리엘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 * *

처음 계획보다도 훨씬 늦게 침실로 돌아온 칼릭스가 본 건,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아셀라였다.

‘기다리지 말래도.’

먼저 잠드는 건 미안하다며 이렇게 늘 기다리곤 했다.

소파로 걸어간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어 자세를 낮추곤 나직한 음성으로 아내를 불렀다.

“아셀라.”

아셀라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칭얼댔다. 차마 아내를 깨울 수가 없어진 칼릭스가 테이블에 메리엘이 건네준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이런.”

말리지 않은 축축한 머리칼이 그의 소맷자락을 적셨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막 몸을 씻고 나와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피곤했을 터다. 요즘 그녀는 무척이나 의욕 있게 일하고 있었으니까.

머리를 말려주는 게 좋겠지, 생각한 칼릭스가 아셀라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칼릭스……?”

그새 깨어난 아셀라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몸이 허공에 들려 있는 걸 알고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려고 했는데…….”

“괜찮아.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덜 말랐군.”

칼릭스가 그녀의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 촉촉하게 젖은 은발이 손끝에 닿아 가닥가닥 펴졌다.

“칼릭스.”

아셀라가 말간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칼릭스는 또다시 감돌기 시작한 갈증을 어렵사리 내리눌러야 했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머리 말리는 걸 도와줄게.”

그가 그녀를 화장대 앞 의자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들 주위로 가벼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거울을 통해 흩날리는 머리칼을 본 아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을 쓰실 줄 아세요?”

“아니.”

짤막하게 대꾸한 칼릭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검기를 바람으로 변형한 거야. 영 쓸모없는 기술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유용했군.”

“이런 건 처음 봤어요. 신기해요.”

“별거 아니야.”

칼릭스가 만들어낸 바람은 딱 적당한 훈기를 품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금세 보송보송해졌다. 아셀라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편리할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약간 달라진 어조에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 비치는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 역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능력도 있어.”

“그게…… 전하의 능력이란 말씀인가요?”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겠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쉬이 대꾸하기 힘든 분위기에 아셀라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달칵, 화장대의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앗, 잠시만……!”

“엉키면 곤란하잖아.”

어느새 살이 촘촘하게 난 빗을 꺼내든 칼릭스가, 잔바람에 흐트러져있던 그녀의 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제가 할게요.”

“내가 해줄게.”

아셀라가 급히 빗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칼릭스는 가볍게 팔 한 번 들어 올린 것으로 여유롭게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그거 아세요? 진짜 고집 센 분은 전하세요.”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야. 아직까지 날 그렇게 부르는 걸 보면.”

칼릭스가 거울 속의 그녀와 눈을 맞추며 답했다. 아셀라는 그가 빗질할 때마다 점점 가지런해지는 윤기 고운 머리칼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녜요. 아직 입에 익지 않아서 그랬어요.”

“알아.”

머리를 다 빗어 내린 칼릭스가 화장대의 거울을 가리며 아셀라 앞에 섰다.

“그러니 생각날 때라도 자주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어.”

“……칼릭스.”

“그래.”

“칼릭스.”

그의 입가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수줍어하고 망설이면서도 또 이렇게 막상 거부하진 않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칼릭스는 왠지 모를 기대를 품게 되곤 했다.

‘언니가 전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처음엔 곁에 둘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마음까지 바라게 되고 말았다.

언젠가는. 미래에는.

“그런데 칼릭스, 저 병은 뭐예요?”

아셀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못 보던 병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떼던 그녀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조용히 곁으로 다가온 칼릭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더군.”

아셀라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집어 들었다. 가장자리를 더듬듯 매만지는 손이 잘게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칼릭스의 머릿속에 메리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병 안에 담긴 건 뭐지?’

‘과일을 얇게 썰어 꿀에 재운 건데,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아셀라가?’

‘필립이 만들지도, 먹지도 못하게 해서 언니도 엄청 오랜만에 보는 걸 거예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답한 메리엘이 덧붙였다.

‘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 아빠가 살아계실 적에 종종 만들어주셨던 거래요.’

아셀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을 여러 차례 깜빡여도 물기가 가시질 않았다.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다 뭉클했다.

그와 저 사이에 남았던 마지막 벽마저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가슴 한구석에서 일기 시작했던 낯선 울렁거림은 이제 선명한 형태와 색채를 띠고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칼릭스.”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걸 어떻게……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당신 동생이 전해주더군.”

“메리엘이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칼릭스가 시종을 불러 뜨거운 물과 찻잔을 가져오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