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71)
  • ‘베로니카의 데뷔탕트를 구실로 연회를 더 성대하게 열어야겠어.’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귀족가의 아이들도 참석할 수 있게끔, 소규모 파티를 별도로 열어주어도 좋을 것이다.

    이를 빌미로 메리엘 록트린까지 불러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자식을 이용할 생각을 하면서도, 페르난데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더 알차게 써먹을 방법을 떠올리고는 레티샤를 향해 미소 지었다. 뱀이 온몸을 훑는 듯한 감각에, 그녀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내게 정중하게 빌어봐. 혹시 아나? 무릎 꿇고 사정하면 네 부탁을 들어줄지.”

    레티샤의 몸이 굳었다. 잠시 후, 밀려드는 모멸감에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그런……!”

    “싫으면 말고.”

    페르난데가 비웃음을 흘렸다. 짓밟힌 자존심에 레티샤가 피가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했다. 베로니카가 사라진 지가 벌써 일주일이었다.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굴욕쯤은 참아 내야만 했다.

    레티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턱 끝을 바로 세운 그녀가 페르난데를 마주 보며 서늘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렇게 해 드리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열린 문 사이로 걸어 나오는 레티샤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마디마다 희게 불거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놈이 나와 내 딸에게 한 짓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일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제물이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한 시간 가까이 꿇어앉아야 했던 다리는 온전치 못했다. 그녀가 크게 비틀거렸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문밖에 서 있던 던컨이 놀란 나머지 그녀를 부축하려 들었으나, 레티샤가 가차 없이 그의 손을 쳐냈다.

    “놓아라!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댄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던컨이 곧바로 뒤로 물러서며 사죄했다. 고개 숙인 사내의 얼굴 혈색이 파리했다.

    수모당한 건 자신이건만. 정작 그의 상태가 더 나빠 보이는 건 어째서인지.

    그래서 이 남자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까 같은 제 모습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레티샤가 마음속으로 자조했다. 겉으로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음 가면을 두른 그녀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또다시 이런 무도한 짓을 했다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짓씹은 입술 안쪽에서 비릿한 혈향이 났다.

    * * *

    날이 밝고 대공의 침실 문이 열리자 대기하던 이들은 모두 긴장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대공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은 흉흉해져만 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칼릭스의 얼굴에, 그들 모두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소화가 잘되는 부드럽고 담백한 음식으로 아침을 준비해. 건더기가 많은 고기 수프 정도가 좋겠군. 아, 식사가 끝나는 대로 진찰할 수 있도록 주치의도 대기시켜.”

    “전하, 진찰받으실 분이 누구…….”

    “아셀라가 깨어났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안도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작게 터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102화

    아셀라가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성내의 사용인들은 점점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특히나 대공비를 가까이서 모셨던 이들은 대공의 경고를 되새기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일부는 가족에게 마지막 연락까지 마쳤을 정도였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대공비가 의식을 찾은 것이다.

    지옥문 앞에서 지상으로 끌어 올려진 그들에겐 아셀라가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음식이 놓인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시종이 칼릭스에게 물었다.

    “전하, 테이블을 준비할까요?”

    “이쪽으로 가져와.”

    수석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따뜻한 수프에서는 연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향긋한 풍미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잠시 뒤, 사용인들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장면을 목도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손등으로 눈을 비벼도 보고, 제 뺨을 쳐보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도 보았다.

    그러나 거듭 확인해도 눈앞의 장면은 똑같았다.

    “제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몸도 좋지 않으면서, 무슨.”

    “손은 멀쩡한걸요.”

    “얼마 남지도 않았어. 몇 번만 더 먹으면 돼.”

    아셀라의 소심한 항의를 일축한 칼릭스가 스푼으로 수프를 떴다. 제 입김으로 뜨거운 수프를 적당히 식힌 뒤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셀라는 그녀 주위의 수많은 눈 때문에 민망해하면서도, 칼릭스가 스푼을 가까이 가져다 댈 때마다 아기 새처럼 입술을 벌렸다.

    “이렇게 잘 먹으니까 보기 좋잖나.”

    “모르셔서 그렇지 원래도 잘 먹는 편이었어요.”

    “새 모이만큼이나 먹던데, 무슨.”

    “이렇게 많이 먹는 새가 어디 있어요.”

    말도 곧잘 주고받았다. 심지어는.

    “그런데 칼릭스, 당신은 언제 아침 드시려고요?”

    그녀의 입에서 대공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도대체 지난 밤에 대공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바쁘게 시선들이 오갔으나 알 턱이 없었다.

    다만 그간 대공이 헌신적일 만큼 아픈 대공비를 돌보았으니, 그러던 와중 가까워진 게 아니겠냐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셀라가 후딱 수프 한 그릇을 해치웠을 때쯤이었다.

    “언니!”

    소식을 들은 메리엘이 달려왔다. 아이가 아셀라를 끌어안고는 펑펑 우는 바람에 잠시 짧은 소란이 일었으나 곧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하던 대공성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특히 유디트 일행은 주술이 깨졌다는 희소식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정말 흑마법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잖아? 깨끗해!”

    유디트가 아셀라의 몸에 새겨졌던 흑마법이 소멸했음을 확인하고는 흥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아델 님의 마법은 고스란히 남기면서 흑주술만을 파괴하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수가…….”

    로샨은 무척이나 감격했고 알렌도 담백하게 축하를 건넸다. 애써 의연한 척 굴던 유디트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슬쩍 훔치며 물었다.

    “비전하,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실은…….”

    칼릭스는 아셀라가 말하는 내내 그녀의 손을 꼭 깍지껴 잡고 있다가, 설명이 끝나자마자 이마에 짧게 입맞춤했다.

    유디트가 살벌한 눈총을 보냈으나 당연히 못 본 척했다.

    로샨이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크게 앓았던 건 주술 소멸을 위한 일종의 명현 반응이었던 것 같아요. 몸에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과정이었던 거죠.”

    “몸속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했어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했었는데 정말 잘 됐어요. 이제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어요.”

    “벌써 떠나시려고요?”

    “신전의 일을 더는 미룰 수 없기도 하고 예언 신관들을 예의 주시할 필요도 있어서요.”

    로샨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유디트가 칼릭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더불어 황제의 흑마법과 관련된 사건이 더 없는지 파헤칠 예정이야. 그자의 목적과 앞으로의 계획을 밝혀내야 하니까.”

    칼릭스가 수긍하듯 답했다.

    “이쪽에서도 움직이고는 있지만 조사 인원이 많을수록 좋겠지.”

    “우리가 실마리를 더 빨리 잡을 가능성도 있어. 황제가 계속해서 예언 신관에게 접촉하려 들 테니까.”

    “그럴지도. 최근 페르난데가 주변 경계를 강화했다는 권속들의 보고가 있었다.”

    듣고 있던 알렌이 조심스레 끼어든 건 그때였다.

    “저는 아무래도 대공성에 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봐라,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날카로운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지내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록트린 영애가 능숙하게 이능을 사용할 때까지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건 저절로 습득한다지만 도움을 받는다면 더 수월해질 테니까요. 저나 원로 정도가 아니면 영애를 가르치기 어렵습니다.”

    합당한 이유였지만 칼릭스는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알렌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정 폐가 된다면 마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록트린 영애도 함께 가야 하기에…….”

    “메리엘이 다시 떠나야 한다고요?”

    아셀라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마자 칼릭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아니, 아셀라. 그렇지 않아.”

    곧바로 칼릭스의 허락이 떨어졌다.

    “마탑주가 머무를 방을 마련해. 시중들 인원도 두 명가량 배치하고.”

    정확히 알렌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 * *

    그리고 며칠 뒤, 유디트와 로샨이 대공성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유디트는 출발 직전까지도 아셀라의 손을 붙잡고는 신신당부했다. 대공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비전하. 제 말을 꼭 기억하셔야 해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 항상 조심하시고요.”

    “그럴게요.”

    “아니,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혹시라도 대공이-”

    “그만하면 됐어, 유디트. 비전하께서 어련히 잘하실까.”

    보다 못한 로샨이 그녀를 말렸을 정도였다.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칼릭스가 그 실랑이를 보곤 미간을 구기며 한마디를 던졌다.

    “아직도 안 떠났나?”

    당연히 유디트는 발끈했다. 그녀가 성문을 나설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한동안 성이 시끌벅적해졌다.

    “성하, 진정하십시오!”

    “그걸 부서뜨리시면……!”

    더불어 대공성의 사용인들은 헤뷔움의 군주가 얼마나 성격이 괴팍한 인물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었다.

    * * *

    라이젠이 슬쩍 눈을 굴려 주인을 살폈다. 대공이 자꾸만 창가를 힐끗거리는 탓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평소와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칼릭스가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얼 저리도 보고 계시는가.’

    라이젠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창 너머를 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오후의 햇빛이 정원의 싱그러운 초목을 비출 뿐이었다.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주인의 중얼거림이 귀에 꽂혔다.

    “오늘은 정원 산책을 하지 않는 건가.”

    ‘비전하를 기다리시는구나!’

    라이젠이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이맘때쯤이면 산책하는 대공비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으니 주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라이젠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칼릭스를 불렀다.

    “전하, 어쩌면 오늘은 비전하께서 산책하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다음 달 내성에서 사용될 예산을 점검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라 바쁘실 겁니다.”

    “며칠 더 쉬라고 했는데도.”

    칼릭스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디트와 로샨이 떠나자마자, 아셀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제가 너무 한심하게 굴었잖아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 몫을 하고 싶어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시작해. 당신 탓도 아니었잖아.’

    ‘제가 부족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노력할 테니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당신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야. 너무 급하게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야.’

    그러나 이어진 아셀라의 고백에 더는 반대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전하께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찼던 이유는, 그녀가 저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점차 변하리라는 희망이 있어서일 것이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 그는, 제 감정을 숨기며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칼릭스라고 부르라니까.’

    ‘알겠어요, 칼릭스.’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하던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그때를 떠올린 칼릭스의 눈매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미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라이젠이 주인의 걱정을 덜고자 말을 덧붙였다.

    “로메인 부인이 곁에서 비전하를 돕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마고는 이제 메리엘의 아카데미 수업을 할 필요가 없었고, 다시 대공성의 시녀장 역할로 돌아갔다.

    그 말에 칼릭스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아예 마고 로메인을 아셀라 곁에 두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대공비에게도 보좌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렇지 않나?”

    칼릭스의 생각을 눈치챈 라이젠이 냉큼 답했다.

    “하오나 전하, 로메인 부인은 언젠가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경을 방비하는 남편 탓에 마고가 로메인 백작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아셀라의 시녀가 된 건 어디까지나 대공의 요청에 따라 임시로 맡은 일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투로 라이젠을 쳐다보았다.

    “너도 카단가의 가주를 겸하고 있지 않나. 병행하면 될 일이다.”

    남더러 일을 두 배로 하라는 소리를 하면서도 칼릭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일 복이 터진 자의 설움을 전하께서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라는 말이 라이젠의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노련하고 유능한 대공의 보좌관은 그걸 티 내지 않고 도로 집어넣는 기술도 탁월했다.

    “로메인 부인에게 전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제안하는 게 아니다. 명령이지.”

    당연하지만 그의 주인에겐 난데없이 일감을 떠맡을 이의 상황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칼릭스의 머릿속엔 내성의 일을 맡아 힘들어할 아내의 걱정만이 가득했다.

    “마고 로메인에게 제대로 통보해.”

    “명 받듭니다.”

    라이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될 마고와 고달플 그녀의 미래를 향해, 마음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도주하는 대공비 103화

    한편, 마고는 자신을 두고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부인, 여길 좀 볼래요?”

    서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아셀라가 그녀를 불렀다.

    “품목의 수량을 조절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땔감은 여분도 있는데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될듯하고, 반면 광목천은 부족해 보여요.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아셀라와 함께 일하면서, 마고는 안주인에 대해 자신이 그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공비가 아랫사람의 실수에 관대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린 시녀들이 입방정을 떨어대도 유하게 넘어가 주곤 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물렀다.

    그렇기에 일할 때도 야무지지 못하고 설렁설렁하지 않을까 어림짐작했었다.

    그러나 그건 마고의 오해였다.

    아셀라는 일 하나를 처리하면서도 무척이나 꼼꼼하게 짚고는 했다. 특히 놀라웠던 점은 그녀의 태도였다.

    서류를 보다가 모르는 것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질문했다. 쉬이 결정하기 어려운 사항이 생기면 조언을 구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자존심도, 콧대도 높은 귀족들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나 아랫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일을 보통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아셀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로메인 부인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셀라가 밝게 미소 지으며 마무리한 서류를 넘겼다. 마고의 입매도 절로 휘어졌다.

    요즘의 대공비는 웃는 때가 많았다. 저가 보기에도 정말 예쁜 미소라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처음 비전하를 뵈었을 때가 생각나네.’

    마고는 대공으로부터 성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수도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대공과 관련된 소문은 결이 비슷했다.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일설이 함께 전해지곤 했다.

    마고는 누가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의 옆자리에 서게 될지 궁금했다.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벌벌 떨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을 남편으로 감당하려면 보통의 강단으로는 불가능할 터. 적어도 일반적인 인물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그렇게 대강 새 대공비의 이미지를 그리며 성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처음 아셀라를 만났을 때, 마고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안주인이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비전하를 마음에 두게 되신 걸지도 몰라. 그래도 두 분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건만.’

    마고와 라이젠을 비롯해 대공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들은 진즉부터 칼릭스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감히 주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해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잠자코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공비의 반응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남편을 두려워했고, 겁에 질려 숨으려고만 들었다.

    둘의 관계는 전혀 가망이 없을 정도로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은 대공비가 동생과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잡혀 온 그녀가 급기야 자해까지 하려 들면서 대공성이 발칵 뒤집혔다.

    그랬던 그들 사이에 변화가 인 건, 대공비가 대공의 침실에 머무르면서부터였다.

    몸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건 매일같이 대공의 침실에 출입하는 마고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다 아셀라가 크게 열병을 앓다 깨어난 이후, 대공 부부는 급격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당장 그날 아침부터 그랬다.

    문이 열리자마자 목도한 충격적인 장면은 뇌리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직접 수프를 식혀 아내에게 한입씩 떠먹여 주던 대공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음에도 그걸 다 받아먹던 대공비.

    라이젠마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 얼빠진 얼굴을 떠올린 마고가 소리 없이 웃었다.

    부부란 어찌 될지 모르는 사이라더니. 함께 지내며 무언가 큰 계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고는 굳이 주인의 사생활까지 알려고 들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덕분에 요즘은 대공 성내에 훈기가 다 감돌았다.

    대공의 실무진들은 기분이 좋아진 주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챘다.

    ‘평소 같았으면 탈탈 털렸을 텐데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해 보라며 조언까지 해주시더이다.’

    부쩍 너그러워진 대공 탓에 실무진들이 여기저기서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이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기에, 그들은 그간 대공에게 보고하기 두려워 미뤄왔던 곤란한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대공성은 이전보다 배는 더 바빠지고 있었다.

    탁탁, 책상에 무언가가 마찰하는 소리에 마고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을 마친 아셀라가 서류를 모아 책상에 치며 갈무리하는 소리였다.

    “다 마무리되셨습니까?”

    “네. 이 서류를 건네줘요. 물건 검수는 부인에게 부탁할게요.”

    “물론입니다, 비전하.”

    마고가 자연스레 옆구리에 서류를 끼며 답했다. 아카데미 학생이던 시절, 책을 끼고 다니던 습관 탓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잠시 그 모양새를 유심히 보던 아셀라가 이내 시선을 떼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요. 아, 메리엘은 지금 마탑주와 함께 있나요?”

    “예. 지금은 연습 시간이니 두 분 다 공터에 계실 듯합니다.”

    마법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칼릭스가 저택 뒤편의 드넓은 공터를 내주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연습하곤 했다.

    아셀라는 일이 끝난 김에 잠시 공터에 들러볼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녀가 가봐야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메리엘 그 어린애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아셀라가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쌓인 서류 더미로 눈길을 돌렸다. 내일 치의 분량이었다.

    하도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칼릭스 탓에, 하루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일하고 있었다.

    ‘나도 노력해야 해.’

    부끄럽지 않은 대공비가 되고 싶다며 그에게 당당하게 말했던 자신이었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시행착오가 있지만 하면 할수록 더 나아질 터. 가능하면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었다.

    아셀라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떠올랐다. 몸을 일으켜 책상 끄트머리에서 서류 묶음을 가운데로 끌어왔다.

    마고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비전하, 그건 내일 보실 서류입니다.”

    “시간이 남아서요. 미리 좀 해두는 게 어떨까 싶은데.”

    “오늘 처리하신 일도 적지 않습니다. 신속히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니 차분히 일정에 맞춰 진행하셔도 됩니다.”

    마고가 합리적인 이유를 들며 막아섰다.

    “부인만 비밀을 지켜주면 전하께선 모르실 거예요.”

    “정녕 모르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마고의 반문에 아셀라의 입이 다물렸다.

    칼릭스가 눈치채지 못하리라 믿는 건 믿음이라기보단 그렇게 되길 바라는 희망에 가까웠다. 그것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전하께서 아시는 날엔 아마 두 번 다시 절 보시지 못할 겁니다. 이번에는 절 감옥에서 영영 안 꺼내주실 테니까요.”

    아셀라는 부인하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화가 나면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특별한 말과 행동 없이도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젠 전하께서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셨는데…….”

    그래도 왠지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 아셀라가 더듬더듬 칼릭스를 위한 변명을 했다.

    마고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나. 대공비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냉혹하고 가차 없는 대공의 본모습을.

    그러나 이제야 겨우 찾아온 대공성의 평화를 굳이 깨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대공비가 이대로 남편의 좋은 모습만 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고는 아셀라의 귀가 솔깃해질 만한 다른 제안을 했다.

    “차라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미리 익혀두심은 어떠실지요?”

    * * *

    그 후로 며칠이 더 흘렀다.

    아셀라는 여전히 칼릭스의 침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집이 세다고 말했지만, 아셀라가 생각하기에 칼릭스야 말로 보통 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빠져나갈 작은 구멍 하나 주지 않았다.

    ‘이제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보는 눈도 있고요.’

    ‘누가 감히 당신에게 눈치를 주던가?’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계속 지내면 당신도 불편하잖아요.’

    ‘난 하나도 안 불편해.’

    게다가 저와 지내는 게 싫은 거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기까지 하니, 도저히 어떻게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침실에서 함께 침대를 쓰게 된 지, 어느덧 이 주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봤나. 눈이 피로하네.’

    아셀라가 뻑뻑해진 눈을 매만지며 책을 내려놓았다.

    저녁 식사 이후로 계속 책을 읽었던지라 몸이 찌뿌둥했다. 몸을 파묻고 있던 안락의자에서 살짝 허리를 세우곤 짧은 스트레칭을 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읽었던 책은 제국의 귀족일람이었다.

    마고가 대공비인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권해준 책이었는데, 사교계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그녀에겐 꽤 유용한 정보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베네비토 대공가와 관련된 부분부터 먼저 읽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인 만큼 가신들도 적지 않았다. 공국의 영토는 대공이 직접 다스리는 거대한 직할령 외에도 각 가신 가문에 부여된 영지까지 광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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