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나비가 내려앉듯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숨결에 아셀라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밀착된 입술이 지그시 눌리며 납작해지다가 이내 입술 사이의 젖은 피부가 혀로 느리게 쓸렸다. 연하고 얇은 피부는 그 작은 자극마저도 민감하게 인식했다.
너무나도 이상한 감각이었다.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칼릭스의 가운을 붙들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품에 바싹 끌어당겼다. 다른 손은 자연히 그녀의 귀 뒤로 뻗어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이자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긴장으로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칼릭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갈랐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침입이었으나 놀란 아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칼릭스의 얇은 가운에 주름이 졌다.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간 혀가 준비할 시간을 주듯 가지런한 치열을 쓸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아셀라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달래듯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상냥하기만 했다.
떨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다시 느리고 집요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치아의 뒷면을 더듬듯 훑어내리다 입천장을 꾹꾹 누른 뒤 뺨 안쪽의 여린 살을 문질렀다. 그러다 그녀의 혀끝을 찾아 쿡 찔렀다. 놀라 도망치듯 뒤로 물러나는 것을 재빨리 붙잡아 얽어맸다.
“……흐읏!”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침입자는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지만 명백히 탐욕스럽게 그녀의 안을 헤집으며 탐했다.
타액이 섞이며 질척하고도 노골적인 소리가 맞붙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러자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아찔한 감각에 아셀라의 시야가 점멸했다.
몸의 감각 하나하나가 민감하게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던 찰나, 맞붙었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몰아쉬는 숨이 다급했다. 아셀라의 가슴이 가쁘게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부족한 산소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처음인 건 같은데도 한쪽만이 서툴렀다. 제때 숨을 쉬는 걸 잊을 정도로.
“아셀라.”
잔뜩 흐려진 벽안이 사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모습에 칼릭스는 치밀어 오르는 갈증을 애써 외면했다.
겨우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뗀 아내였다.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아셀라가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느낌을, 믿으라고, 하셨죠.”
벅찬 숨에 말이 끊겼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가 두 팔을 뻗어 칼릭스의 뺨을 감쌌다.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행동에 그의 눈이 동요했다.
“제 느낌은…….”
아셀라가 천천히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당황했던 칼릭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상체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 * *
정신없던 입맞춤이 끝났을 때는 아셀라의 등이 침대에 반쯤 눕혀져 있었다.
“코로 숨을 쉬라니까.”
칼릭스가 마지못해 입술을 떼며 말했다. 아셀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만 가까스로 몰아쉬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더 집요하게 탐하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했음에도 물고 빨린 아내의 여린 입술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반질거리는 입술이 어여뻤다. 그가 헐떡이느라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갑자기 아셀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후다닥 침대 끄트머리로 몸을 피했다. 침대 시트를 목 아래까지 잡아챈 건 물론이었다.
칼릭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왜, 왜, 왜, 그런 옷을 입고 계세요?”
이제 그녀의 얼굴은 예쁜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칼릭스가 제 가운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앞섶이 보였으나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아내인데 상관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는 제 몸에 자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더 보여줄 생각도 얼마든지 있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00화
“아까부터 이랬었는데 몰랐나?”
“모, 몰랐어요.”
“막 샤워를 하고 나오던 참이었어.”
“샤워요……?”
아셀라의 눈이 데구루루 굴렀다. 살짝 물기 젖은 칠흑 같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녀는 저가 막 깨어났을 때 들렸던 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럼 그 물소리가…….”
뭔가 하여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걷던 도중 손수건을 발견했고, 그다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태였다.
“왜 여기서 샤워를 하셨어요?”
“내 침실이잖나.”
아셀라가 눈을 끔벅거렸다. 물론 그의 말이 맞긴 맞았다.
하지만 일전의 그는 그녀더러 사용하라며 침실을 비워주었었다.
“하지만 제가 전하의 침대를 쓰고 있으니까…….”
“아.”
칼릭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함께 침대를 공유했지.”
그가 ‘공유’라는 단어에 굳이 강세를 넣어 말하자 아셀라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떴다. 당황한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가, 같이, 치, 침대에서요……? 서, 설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이었다. 저러다 홍당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보이는 피부가 죄 붉어져 있었다.
칼릭스는 가여운 아내를 위해 이쯤에서 놀리는 걸 그만두기로 �g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저, 정말이시죠?”
“그래.”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풀렸다. 너무 대놓고 안도하는 아셀라의 모습에 칼릭스는 왠지 미묘한 심술이 일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우린 부부잖나.”
아셀라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녀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들 부부의 상황이야말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결혼한 지 벌써 두 달 가까이가 되도록 초야를 치르지 않았으니까.
‘그럼 혹시 오늘…….’
아셀라가 겁먹은 얼굴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내내 아프다가 이제 막 깨어난 사람한테 그런 짓은 안 해.”
그제야 아셀라의 표정이 확연할 정도로 밝아졌다.
물론 그녀는 칼릭스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조금만 더 기다린 뒤에…….’
아셀라가 그녀의 남편에게 홀랑 잡아먹히고 말 거라며 걱정했던 유디트의 혜안은 아델의 예지력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럼…… 일단 오늘은 제 방으로 돌아갈게요.”
“이 시각에? 자정이 넘었어.”
칼릭스가 커튼을 들춰 창밖을 보여주었다.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다. 새벽이 오려면 한참은 남은 한밤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아셀라가 쩔쩔맸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잘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방을 차지하고선 차마 나가라고 염치없는 말을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아내 때문에 속이 탄 건 칼릭스였다.
입맞춤까지 나눈 사이가 아닌가. 게다가 한 번은 그녀가 먼저 입맞춤을 해오기도 했다. 반쯤은 분위기에 휩쓸려 한 행동 같았으나 상관없었다.
아내의 마음이 열린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아예 이 여세를 몰아 확 나아가버릴 참이었다. 아직 몸 상태로 봐선 잠자리까진 무리겠지만 그 전 단계까지는 확실히 진도를 밟아 둘 생각이었다.
아셀라가 고열에 시달렸던 며칠간, 칼릭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었었다.
따뜻한 몸과 부드러운 살결, 특유의 몸 내음.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젠 방긋거리며 웃어주기도 할 것 아닌가.
같은 침실, 한 침대에 누워 저를 향해 미소 지을 그녀를 상상하자 벌써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몸으로도 정이 드는 부부가 있다 했던가.
세간에 떠도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녀가 제게 푹 빠지도록 만들 수 있었다. 매일같이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원한다면 낮에라도 얼마든지.
그의 음험한 생각을 순진한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 기겁할 테지만 이건 자신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문제는 그 단계까지 도달하기 위한 적당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
칼릭스의 추진력이 빛을 발하며 좋은 묘수 하나가 떠올랐다.
“아셀라, 당신이 침대에서 자.”
“그럼 전하는요?”
커다란 담요 하나를 대충 집어 든 칼릭스가 소파로 걸어가며 태연하게 말했다.
“난 여기서 잘 테니.”
힐끗 아셀라를 쳐다보자 그새 말간 얼굴이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소파는 불편할 텐데…….”
그가 조용히 입매를 당겼다. 승리를 확신한 자의 미소였다.
“어쩔 수 없잖나.”
마음이 여린 아내가 곧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그러시면, 침대가 넓으니까, 각자 끄트머리에서 자면…….”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혼자 침대에서 자도록 해. 편하게.”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이제 아셀라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 몰라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여기서 확실하게 쐐기를 박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고는 팔짱을 낀 채 그대로 눈을 감은 것이다.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였다.
눈을 감은 채로도 아셀라가 발을 작게 동동 구르며 망설이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잠시 뒤, 그녀가 그에게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칼릭스는 일부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코끝에 그녀의 향이 스쳤다. 닿을 듯 말 듯하던 손가락이 마침내 그의 어깨를 작게 톡톡 두드렸다.
“전하.”
“칼릭스.”
“네?”
그제야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린 칼릭스가 제 앞에 엉거주춤 선 아셀라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남편 이름이야.”
“전하의 성함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전하라고 부를 생각이야?”
아셀라가 눈을 끔벅이다가 잠시 뒤엔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하며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렸다.
“이름을 부르는 건 연인들 사이에서나…….”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그런 얄팍한 관계보다 우리가 더 가까운 사이 아닌가?”
칼릭스에겐 무적의 무기가 있었다. 아셀라가 무슨 수로도 방어하지 못할.
“부부니까.”
제가 쥔 무기를 아낌없이 휘두르는 칼릭스 앞에서, 아셀라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셀라.”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제 손을 잡는 것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셀라의 모습에 그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나는 이렇게 당신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데, 당신은 그러지 못하는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저는 그다지…… 그렇게까지는 여기지 않았어요. 전하께선 제국의 대공이시니까…….”
“내겐 불공평해. 무척이나.”
머뭇거리는 아셀라의 말을 칼릭스가 딱 잘랐다.
“나는 당신이 아니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잖아. 그런데 당신마저 그래 버리면 내 이름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로군. 종이 쪼가리에 서명을 끄적일 때나 사용하는.”
대공으로서 처리해야 할 수많은 서류가 한낱 종이 쪼가리로나 폄하되는 순간이었다. 아셀라가 당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러 봐.”
“하지만…….”
“어서.”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은 팔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아셀라가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무릎에 아셀라의 치맛자락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잠깐만요, 전하-”
“잘못 불렀어.”
칼릭스가 곧바로 아셀라의 양 허리춤을 붙잡더니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졸지에 말을 타듯 그의 위에 올라탄 아셀라가 다급히 무릎에 힘을 주며 몸을 들어 올리려 했다.
“전하, 이 자세는 너무……!”
당황한 아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거 아나? 당신 생각보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야.”
칼릭스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와 등을 감싸며 몸을 옭아매듯 끌어안자, 도로 주저앉혀졌다.
“전하!”
둔부와 안쪽 허벅지의 여린 살에 사내의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느껴졌다. 아셀라의 얼굴이 그야말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더 알려줘야, 내 비께서 부탁을 들어줄까.”
“이, 일단 내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이야기해요.”
“당신부터 먼저 말해.”
칼릭스가 단호히 답했다. 아셀라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오늘 확실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나중에 아이들 앞에서도 날 전하라 호칭할 생각인가?”
“아, 아이들이요?”
“그래. 당신과 나, 우리 아이들.”
딸꾹!
아무런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말에 놀란 아셀라가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주며 칼릭스가 작게 혀를 찼다.
“그렇게 놀라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자신이 입을 맞추길 했나, 아니면 몸을 더듬길 했나. 하다못해 손깍지라도 꼈으면 또 모를까.
그저 한 거라곤 그녀를 제 위에 앉힌 것뿐이었다. 서서 이야기하려면 다리도 아프고 힘들 테니까.
물론 약간의 사심이 들어 있기야 했지만.
칼릭스는 뻔뻔하게 저를 위한 변명을 만들어냈다. 오히려 아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서운할 정도였다.
차라리 뭐라도 일을 저지르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것이다.
“이름 한 번 듣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칼릭스.”
그대로 칼릭스의 동작이 정지했다.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혹시 잘못 듣고 착각한 게 아닌가? 하도 다그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헛소리가 다 들리나 싶어 피식 헛웃음을 칠 때였다.
“칼릭스.”
다시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건 절대 잘못 들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아셀라가 슬그머니 굽혔던 무릎을 펴며 몸을 세우는데도 말리질 못했다.
칼릭스의 양어깨에 두 손이 얹어졌다. 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천천히 위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아셀라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자 기대감에 칼릭스의 사내다운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이제 내려줘요, 칼릭스.”
귓가에 마약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감겨들었다. 그대로 고막이 녹아내려 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아찔한 감각이었다. 그대로 사고가 정지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저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 끝없이 듣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깨를 살포시 쥐는 손길은 또 어떠한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랬기에 더 자극적이었다.
칼릭스가 탁하다 못해 완전히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내려갈 준비는 벌써 다 해놓고선.”
“그래도요.”
뒤로 폴짝 뛰어내린 아셀라가 살짝 무릎을 굽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냅다 돌발 발언을 내뱉었다.
“침대에서 같이 자요.”
“뭐?”
“그러니까 침대만 같이 쓰자는…… 아까 전하가 말씀하셨던 공유 말이에요. 소파는 너무 불편하잖아요.”
“…….”
“어서요, 칼릭스.”
손을 잡아끌며 생긋 웃는 얼굴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뻐서, 칼릭스는 하마터면 그대로 넋을 놓을 뻔했다.
‘완전히 말려들었군.’
이 순간, 칼릭스는 제 미래를 예감했다.
어쩌면 영영 아내를 당해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01화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저마다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페르난데의 표정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잠자코 몸을 사려야 한다.’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제국의 정치판에서 평생을 살아남은 그들이었다.
이럴 때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괜히 잘못 찍혔다간 다음번 숙청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게 될 테니까.
노회한 황제는 각 귀족 가문의 행보를 늘 예의주시하며 온갖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다.”
그랬기에 페르난데의 이 말이 모두에게는 구원과도 같았다.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굽신거리며 재빨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던컨만이 회의실 벽 한쪽에 서서 주인 곁을 지켰다. 마치 정물처럼 조용하게.
주변이 조용해지자, 페르난데는 며칠 전 일어났던 일을 곱씹었다.
흑주술의 붕괴 도중 기절했던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깨어났다.
그러나 이미 반쯤 파괴된 주술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조각으로 재구축을 시도해 보았으나 되려 주술이 불안정해지고 몸에 부담만 가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더니 급기야는 지난 밤 주술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혹여라도 그 계집이 각성이라도 한 것이라면…….’
메리엘 록트린의 각성만으로도 위기였다. 두 명의 이능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제거해야 했다.
차라리 다른 일이라도 잘 풀리면 나을 텐데 그쪽도 지지부진하기만 하니 초조함만 커졌다.
“던컨, 신전의 실험실에서는 별다른 진척이 없느냐? 아직도 동조율이 그 상태 그대로냔 말이다.”
“거의 변동이 없습니다.”
“그나마 켈튼 산의 실험실보다는 낫다 했더니…… 신관도 그 힘을 버티지 못한다면 다른 실험체들은 의미가 없잖느냐.”
페르난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동조에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 기점부터 더는 동조율이 높아지지 않았다.
전체의 반의반도 되지 못하는 동조율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턱없이 부족해.”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명령했다.
“베로니카에게 전해. 어떻게든 약의 효율성을 높이라고.”
“황녀 전하께서도 노력 중이실 겁니다.”
“지금 감히 내 앞에서 그 애의 역성을 드는 것이냐?”
“……아닙니다.”
던컨의 대답이 묘하게 늦었다. 신경이 거슬린 페르난데가 탁, 소리 나게 펜을 놓는데 문밖에서 시종장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황후가 찾아왔다고?”
우두커니 서 있던 던컨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황후가 황제를 찾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빠르게 표정을 숨긴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안색을 누구보다도 잘 읽는 페르난데였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기어이 눈치를 챈 모양이군.”
그녀의 방문 이유를 짐작한 페르난데가 피식 비소하며 답했다.
“들어오라 해.”
문이 열리고 찰랑거리는 금발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황후 레티샤였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꼿꼿한 자세로 걸어들어오던 그녀가 던컨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던컨이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페르난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만 나가 봐.”
던컨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페르난데는 예의상 앉으라는 말도 없이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물었다.
“그래. 황후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가.”
“베로니카는 어디 있죠?”
“황녀 궁에 있겠지.”
“없으니 찾아온 거예요. 며칠째 보이질 않고 있다고요.”
“잠시 궁 밖에 놀러 나간 모양이지. 애초에 그 아이를 왜 내게 와서 찾는지 모르겠군.”
페르난데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몸을 기울어뜨렸다.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내게 말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애가 아니에요.”
“내가 황녀를 숨기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아니면 감금이던가요.”
“말조심해.”
페르난데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스무 살 생일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어미가 품에 끼고 다니니 제구실도 못 하는 게 아닌가.”
“적통 황녀의 데뷔탕트도 치러주지 않은 폐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
레티샤가 주먹을 꽉 쥐며 받아쳤다.
“다른 황녀, 황자들은 전부 열여덟이 되기 전에 데뷔탕트를 마쳤어요. 베로니카만 제외하고요.”
레티샤가 황제와 결혼할 때 그녀는 세 번째 황후였다.
첫 번째 황후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두 번째는 병으로 사망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도 다섯이었다.
“그거야 당연하잖나?”
페르난데가 입술을 비틀었다. 빈정거리는 투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애들은 ‘결격 사유’가 없거든.”
레티샤가 이를 꽉 깨물었다.
페르난데를 마주할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지독한 패배감과 치욕을 경험해야 했다.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폐하의 핏줄입니다!”
“반역자의 더러운 피가 섞인 핏줄이지.”
이 말만큼은 표정 관리가 불가능했다. 레티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로니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폐하시잖아요.”
“내가? 그대 아비의 어리석음 때문이지, 그게 왜 내 탓이지?”
“정녕 모르셔서 물으세요?”
비극의 시작은 당시 공녀였던 레티샤에게 황제가 청혼하면서부터였다. 혼인을 거부하자 황제는 가문을 압박했다.
공작가에서는 어떻게든 딸을 지켜보려 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고 다른 귀족들이 등을 돌렸다. 사업은 줄줄이 도산했다. 급기야 영지에 기근과 전염병마저 돌기 시작했다.
결국, 레티샤는 황제와의 결혼으로 가문을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공작가는 반역죄로 멸문당했다. 방계마저 숙청당하고 남은 건 레티샤 하나뿐이었다.
“제 아비는 반역을 사주한 적이 없어요. 폐하께서 아시다시피요.”
“내가 억울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말하는군.”
맞지 않냐며, 레티샤는 되물을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인내심을 끌어모아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난 일을 들추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내 딸이 있는 장소만 말해요. 어디 있죠?”
“모른다고 했을 텐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진 레티샤가 소리를 질렀다.
“그 애를 어디에 가둔 거예요! 대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베로니카를 데려다 놔!”
레티샤는 황제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바락바락 덤벼들었다.
“황후의 관을 쓴 여자가 이렇게 악다구니처럼 굴어서야 원.”
페르난데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어진 레티샤의 말에, 그의 여유롭던 표정에 금이 갔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악마도 당신보다는 나을 거야.”
“적당히 하라고 했어, 레티샤 마르테.”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페르난데가 그녀를 협박했다.
“황후 자리를 보존해 주는 것도, 네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것도 결국 나니까.”
레티샤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그녀의 결혼 전 성씨로 이름을 부르는 건, 마지막 경고라는 의미였다.
“내게 부탁하러 왔다는 걸 그새 잊어버렸나?”
레티샤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황녀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건국제 연회가 머지않았어요. 그때 미뤘던 데뷔탕트를 치를 예정이고요. 아무리 홀대받는 황녀라지만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어요?”
일순 페르난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래, 건국제가 있었어!’
건국제는 신년 축제와 함께 제국의 가장 큰 행사였고 황실에서도 해마다 연회를 열었다.
여간해서는 모습을 비치는 법이 없는 대공이었지만 결혼 이후 처음으로 맞는 황실의 행사인 만큼 부부가 함께 참석할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