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71)

* * *

아셀라의 소식에 칼릭스는 곧장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찾았다.

방문을 열어젖힌 그의 눈에 비친 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의식을 잃은 아내의 모습이었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그녀를 끌어안은 그가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라 소리쳤다.

주인의 호출에 의사는 눈에 낀 눈곱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려와야 했다.

“분명 건강에 문제가 없다 하지 않았나!”

대공은 진노했다. 주치의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주인 앞에 납작 엎드려 대공비를 진찰할 기회를 달라 사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주치의의 목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때맞춰 잠옷 바람으로 내려온 유디트 일행 덕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열이 오르는 게 말이 되나, 의식조차 없이!”

“진정해, 대공. 금방 치유될 테니까.”

유디트가 즉시 농도 높은 신성력을 뿜어냈다. 지켜보던 이들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공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곧 사태가 진정되리라 여겼다.

잠시 후, 유디트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신성력을 퍼부어도 병세는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알렌과 로샨도 시도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바깥의 소란에 잠에서 깬 메리엘은 언니의 소식을 듣곤 마고의 품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대공성의 모두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디트 일행을 제외한, 방의 모든 이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열을 내릴 방도를 찾아.”

숨이 막힐 듯한 살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금방이라도 산채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흉흉한 시선이 꿇어앉은 이들을 향했다.

“만일 아셀라가 잘못된다면…….”

뒷말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칼릭스가 아셀라를 직접 제 침실로 옮긴 이후, 온갖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셀라의 병세를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불덩이처럼 아셀라의 온몸에 열이 올랐다. 그러면서도 추위에 몸을 떨었다. 새파란 입술을 바들거리며 밭은 숨만 겨우 토해냈다.

함께 있는 이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벽난로의 불을 지피고, 시녀들이 몇 차례나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혔으나 소용없었다.

차도가 있기는커녕 정신도 차리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무용함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만 하루가 꼬박 지나자, 마침내 칼릭스는 인내의 끈을 놓아버렸다.

“나가라. 내 명이 있을 때까지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

어느 한 사람도 대공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심지어 유디트조차.

내내 부산했던 침실에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를 내보낸 칼릭스가 걸친 것을 벗었다. 가벼운 로브 가운 차림이 된 그가 침구를 걷곤 아셀라가 누운 자리 옆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가냘픈 몸을 조심스레 제게로 끌어당겨 품에 껴안았다. 빠르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아셀라.”

칼릭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전하.’

아셀라가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을 때, 사실 그는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서글픈 얼굴 때문에.

괜찮다고 했으나 괜찮았을 리 없다. 고통스럽고 괴로웠을 터다.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을 보지 않았던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곁에 있었어야 했다.

제 잘못이다. 저 때문에 그녀가 이리되었다.

칼릭스의 심장 한구석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늘을 천천히 밀어 넣는 듯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셀라.”

아내의 여윈 뺨을 쓸며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어쩐지 혓바닥이 까끌까끌했다.

“눈을 떠.”

흰 피부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파리한 입술은 혈색 없이 시퍼렇기만 했다. 숨결이 지나치게 희미하여 제대로 호흡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눈처럼 새하얀 뺨과 여린 눈꺼풀, 작은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이 애틋하기만 했다.

“어서.”

욱신거리던 심장은 이제 죄어들 듯 통증을 유발했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며 비트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을 잘게 저며내는 듯한 이 아픔을 도무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

그러나 아내에게선 끝내 어떤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스친 생각에 칼릭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영영 아내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잠들어버린다면.

갑작스레 밀어닥친 격통에 칼릭스가 참지 못하고 신음성을 토했다.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건 그의 삶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두려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몹시 생경하면서도 또 극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녀가 이대로 그를 떠나리라는 공포.

상상하는 순간 숨이 막혔다. 산 채로 심장이 파먹히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이 그를 휩쌌다.

‘안 돼.’

칼릭스가 품에 안은 아셀라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처절하리만치 절박한 몸짓이었다. 그는 제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이 온기가 부디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제발.’

그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배운 밤은 길고도 길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98화

눈을 뜬 칼릭스는 제일 먼저 품 안의 아셀라를 살폈다.

여전히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는 그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보송한 새것으로 갈아입혔던 나이트 드레스가 밤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나마 입술의 혈색만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아셀라.”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여전히 아내는 미동도 없었다. 몸을 일으킨 칼릭스가 마른 수건에 물을 적셔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 손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며 읊조리듯 말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당신이 깨어나 있길 바라.”

마음 같아서는 곁에서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만일 아내가 눈을 뜬다면 제일 처음 보는 사람은 그가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공국의 주인이었고 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었다.

내내 아셀라와 함께 있던 칼릭스가 집무실로 들어선 시각은 평소보다 반 시각쯤 늦은 시각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를 기다리던 유디트가 몸을 일으켰다. 아셀라의 상태를 물어보려던 그녀는 대공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디트의 옆을 저벅저벅 지나간 그가 저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 탓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칼릭스의 주변에 일렁이는 기류는 그가 얼마나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짐작게 했다. 그의 차가운 분노에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아직도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나?”

알았다면 유디트가 먼저 대공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칼릭스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병의 원인이 황제의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했었지.”

“아마 그럴 거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프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게 아니고선 신성력과 치료마법이 듣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대답을 들은 칼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살벌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가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히.’

차마 아까워 손도 대지 못하는 아내에게.

언제부터인진 기억나지 않았다. 깨달았을 땐 이미 아셀라를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이후로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과 멀리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감정에 시달리곤 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지독한 광기의 피가 언제 폭주할지 몰랐으니까.

기록된 역대 베네비토의 격세 유전자는 단 세 명.

초대 베네비토 대공의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들은 태생적으로 핏줄의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러나 거기엔 대가가 따랐다.

힘을 쓸 때마다 그들은 인간에서 멀어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저주받은 피가 그들을 기어이 저들의 세계로 끌어가고자 했다.

그렇게 마족의 힘에 잠식당하고 나면 인간으로의 삶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었다.

지난 세 명의 대공 모두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네 번째 격세 유전자였다.

칼릭스는 탄생부터가 축복받지 못했다. 그 귀하다는 격세 유전자는 어미를 잡아먹고 세상에 나왔다.

제 아내만은 끔찍이도 위했던 선대공은 그녀를 잃게 만든 아들을 끝내 용서치 못했다.

그것이 딱히 서럽다거나 불만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이미 그는 반쯤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만큼 무척이나 메마른 존재였다.

매일 차를 마신다고 한들 한계가 있었고 때가 되면 끝나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힘을 사용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망설여졌다. 그 힘이 그녀를 해치게 될까 봐, 손목을 쥔 것만으로도 멍이 드는 연약한 몸에 또 상처를 입힐까 봐.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지난 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핏빛의 눈동자에 선득한 살기가 어렸다.

“성녀, 흑마법의 시전자가 죽을 경우엔 기존의 주술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알려진 바 없어. 애초에 흑마법사가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무심결에 답하던 유디트가 순간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대공, 황제를…… 아니지?”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묘한 불길함에 유디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일었다.

칼릭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 *

아셀라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은 온통 잿빛 색채였다. 황폐한 땅과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나무들만이 가득했고, 그 외엔 어떤 것도 없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물기 하나 없이 버석한 땅을 지르밟으며 아셀라가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서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구, 여기 누구 없나요?”

아셀라가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메아리칠 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언제부터 이 장소를 헤매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대답해 주세요!”

“아셀라.”

“……어머니?”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아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분명 아무것도 기억하는 게 없었는데도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우뚝 멈추어 서서는 고개를 휙휙 돌렸다.

“어, 어디에 계세요?”

“아셀라, 여기란다.”

“아버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아셀라가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잊어본 적이 없던 두 분의 목소리였다. 꿈에서도…….

‘꿈?’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 때쯤 그녀 앞에 두 인영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애타게 부르며 따라가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부모님의 걸음이 분명 저보다 느린데도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아셀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앞서가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았다. 그리운 얼굴을 마주한 그녀가 그들을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제가 곧 갈게요. 제가 금방 그쪽으로…….”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거리가 좁혀들었다. 아셀라가 팔을 한껏 펼쳐 나란히 선 부모님을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사무치는 그리움에 목메는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그런 아셀라의 등을 두 사람의 손이 도닥였다. 그 온기에 응어리졌던 아픔과 슬픔이 죄 씻겨 내려갔다.

아셀라가 팔등으로 눈가를 쓱쓱 닦아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왜 두 분이 여기 계시는 거예요?”

“네가 길을 잃어버렸잖니.”

“방향을 일러주려고 왔단다.”

아델과 클라우드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번갈아 답했다. 아셀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델이 말을 이었다.

“아직 넌 여기 오면 안 된단다. 때가 되지 않았거든.”

“싫어요! 이젠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아셀라가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이제 우리 가족 다 모였잖아요. 같이 행복하게 지내면 되잖아요. 이대로 같이 살아요, 네?”

“하지만 아셀라, 그럼 메리엘은?”

“……메리엘?”

아셀라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잊고 있었던 어린 동생의 존재가 생각났다. 동시에 잃어버렸던 기억이 하나둘씩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델이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그 얼굴에서 슬픔이 느껴져, 아셀라는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딸, 이제 눈을 떠야 한단다. 시간이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잠깐만…….”

“눈을 뜨렴, 아셀라.”

눈을 떠, 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머릿속이 빙빙 회전하듯 요동쳤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머리부터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셀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

“아셀라, 눈을 떠.”

‘이 목소리는……!’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음성에 아셀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순간 거대한 기억의 해일이 그녀를 덮쳤다.

동시에 아셀라의 몸에 새겨지듯 박혀 있던 어둠들이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19. 변화

아셀라가 동그란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천천히 팔을 들어 제 심장께를 매만졌다. 늘 무언가 얹힌 것만 같던 불편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던 몸이 개운해지고 머리도 맑았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돌아왔어.’

그녀에게 덮어 씌워졌던 가짜 기억이 벗겨졌다. 그녀를 한동안 힘들게 했던 악몽도 모두 조작된 환상에 불과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으나 느껴졌다. 흑주술이 완전히 깨졌다는 사실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꿈속에 찾아와 주었던 부모님께 짧은 감사를 올린 아셀라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얇은 침구가 허리로 스르르 떨어졌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여기가 대공의 침실임을 깨달았다.

‘내 침실에서 잠들었었는데.’

게다가 묘하게도, 한쪽 손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지금껏 죽 잡고 있었던 것처럼.

“어……?”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괜한 호기심이 인 아셀라가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틀었다. 슬리퍼는 없지만 러그가 깔려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몸이 건강해진 것 같아.’

평소보다 배는 활력이 느껴졌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쿡쿡 웃은 그녀가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차분히 걸음을 내디뎠다.

널따란 방을 가로지르던 아셀라의 눈에 대공의 책상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먼지 하나 없이 윤기가 도는 책상 위에 흰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아셀라가 홀린 듯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건…….”

서재에서 떨어뜨렸던 손수건이었다. 그런데 아래쪽에 겹쳐진 손수건이 하나 더 있었다.

조심스레 끄트머리를 잡고 손수건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혹여나 하여 손수건을 펼쳤으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내 손수건이야!’

저가 놓았던 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연회는 그녀도 기억했다. 그렇게 추운 날에 열렸던 큰 연회는 한 번뿐이었으니까.

“이걸 어떻게 전하께서…….”

“아셀라!”

저를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린 아셀라가 칼릭스를 발견한 순간,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전하, 잠깐만……!”

칼릭스의 품에 갇힌 아셀라가 당황하여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꽉 껴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99화

왠지 모르게 그의 행동에서 절박함마저 느껴져, 아셀라가 가만히 힘을 빼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아팠었어. 아주 많이.”

정신을 잃기 직전, 몸에 열이 오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긴 꿈을 꾸는 동안 몸에 변화가 일며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었다.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응시하는 사내의 적안이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채 일렁이고 있었다.

“……절 걱정하셨나요?”

“걱정했어.”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쥐듯 잡으며 말했다. 그제야 아셀라는 유독 한쪽 손이 따스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계속 곁에 있어 주신 건가요?”

“시간이 날 때마다.”

아셀라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팔을 천천히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쥐고 있던 손수건이 드러나자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려준다는 게 늦었어.”

“제 것인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 그대가 흘린 걸 봤으니까.”

칼릭스가 그녀에게 과거의 일을 털어놓았다. 말이 이어질수록 아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이후엔 한동안 잊어버렸어. 당신이 흘린 두 번째 손수건을 발견하기 전까지.”

“왜…… 보관하셨던 거예요?”

칼릭스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붉은 눈이 깊고 무겁게 침잠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솔직하게 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늘 무미건조하기만 하던 눈에 작지만 분명한 파문이 일자, 아셀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싫지 않아.’

제 마음속에 이는 감정이었다.

사람 마음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간사한 것일까.

한때는 그가 싫어 도망쳤었다. 그가 무섭고 두려워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었다. 피하려고만 들었다.

그런데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자꾸만 떠오르는 건, 그가 저에게 했던 다정한 행동들이었다.

남자가 내민 손길과 친절에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저에게만 향하는 온기 어린 눈빛을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전하께서 비전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의미가 아닐는지요.’

잔뜩 메말라 버석거리던 심장이 젖어 들기 시작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 이끌리게 된 건, 믿게 된 건, 어느새 기대게 된 건, 저도 모르게 미래를 꿈꾸게 된 건.

피할 수 없는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든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왜…… 저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그럼에도 묻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방어였다.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었다.

설사 돌아오는 대답이 저를 기만하는 것이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손에 닿는 지독하리만치 따뜻한 체온만은 진짜였으니까.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신이 내 아내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요?”

아셀라의 달싹거리는 입술 새로 잔뜩 갈라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다른 이유는…… 없으신 거예요?”

물어놓고서는 갑자기 그의 대답이 두려워져, 눈을 질끈 감았다.

실은 아니었으니까. 거짓된 마음은 바라지 않았으니까. 제 몸에 닿아오는 온기처럼 그의 마음도 진심이길 바랐으니까.

저 자신의 마음도 모르면서 비겁하게도. 그렇지만 그마저도 그녀의 진심이었다.

“아셀라.”

아셀라는 부름에 눈을 뜨지 못했다. 남자의 손이 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걸 느끼면서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꺼풀에 생경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아.’

뜨겁고, 또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이상하고도 기묘한 감각. 본능적으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사내의 숨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뜨거웠다.

아셀라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동시에 저를 향해 달려드는 칼릭스의 눈을 마주했다. 늘 차갑고 비정하게만 느껴지던 핏빛의 보석이 지금은 마치 열렬하게 타오르는 홍염 같았다.

굳게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이 소중해졌어.”

순간, 아셀라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까마득한 천공에서 날개를 잃고 땅으로 추락하는 새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칼릭스가 흔들리는 아셀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졌어.”

중저음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셀라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르겠어요.”

너무도 희미하여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여 아셀라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저는 아직…… 제 마음을 몰라요. 이 감정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칼릭스가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푸른 눈에 담긴 혼란한 감정들을 읽어냈다.

고요한 바다 같은 눈동자 안에 약간의 불안과 기대감, 갈망 따위가 뒤엉켜 거센 풍랑이 일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하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기뻤다면…… 믿어주시겠어요?”

질문을 받은 사내의 눈빛이 깊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그의 검은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며 눈가에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아셀라.”

커다란 두 손이 하얀 뺨을 완전히 덮을 듯 감쌌다. 그의 엄지가 마른 입술을 쓸었다. 아주 느리고 섬세한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그가 이 손길을 거두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면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난 당신을 믿을 테니, 당신은 당신 느낌을 믿어.”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아셀라가 작게 숨을 헐떡였다. 떨리는 시선이 칼릭스를 향했다.

잠시 뒤, 그의 몸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기울었다.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저 귓가에 스미듯 남자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코끝을 스치던 꽃내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특유의 달큼한 향만이 주변을 맴돌았다.

선홍빛 눈에 비친 제 얼굴이 너무나 가깝고 선명하여 아셀라가 숨을 죽였다. 벌어질 일을 예감한 심장만이 미친 듯이 팔딱였다.

“처음부터 알아가는 거라고.”

아셀라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면서도 밀어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얼굴에 내려앉는 숨결이 지나치게 뜨겁다고 느껴지던 순간 손가락과는 다른, 훨씬 뜨겁고도 말캉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

정수리에 무언가가 꽂힌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입술을 타고 번지며 몸이 파득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