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71)
  •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필립도…….”

    선하고 온화한 양아버지의 얼굴로 그녀들을 대했었다.

    그래서 그의 가면에 속아 어머니가 결혼했던 거라 여겼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탓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 구는 필립에게 방심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당신 자매는 모르게 해달라는 것 정도가 그나마 아델이 제시할 수 있었을 거래의 조건이었을 거야. 황제가 밀어붙였으니 결혼 자체는 피할 수 없었을 테고.”

    “아무리 그렇다고 바라지도 않는 결혼을…….”

    망연하게 중얼거리던 아셀라의 얼굴에 어떤 깨달음이 스쳤다.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다물렸다.

    원치 않는 결혼.

    그녀 역시 같은 선택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다.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아셀라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칼릭스와의 결혼을 받아들였듯, 어머니 역시 같은 이유로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맞닥뜨린 진실에 아셀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쩐지!”

    유디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우리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아델 님이 기어이 그 개자식하고 재혼하는 게 이상하다 했어. 황제가 협박한 거였구나! 어떻게 아이의 목숨을 가지고!”

    유디트가 울분을 터뜨렸다.

    아연해진 아셀라의 머릿속으로도 생각이 흘렀다. 더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있었다.

    흑마법에 걸려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했을 자신. 어떻게든 저를 구해보려 했으나 보호 마법을 덧씌우는 것 외엔 방법을 찾지 못했을 어머니.

    그랬기에 황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채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어떤 심정으로 그 선택을 내렸을지를 생각하자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것처럼 눈앞이 희게 물들며 현기증이 일었다.

    “아셀라, 천천히 숨을 쉬어.”

    가냘픈 몸의 휘청임을 느낀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받치듯 감싸고는 제게 기대게 했다. 아셀라가 숨을 가쁘게 쉬며 할딱거렸다.

    그녀가 안정을 찾기까지 모두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아셀라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뽀얀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희어진 채였다.

    “힘들면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저으며 칼릭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결의에 찬 눈엔 어느새 단단한 결심마저 어려 있었다.

    “제가 모르는 게 있다면 들려주세요. 알고 싶어요. 빠짐없이 전부요.”

    나직한 숨을 내뱉은 칼릭스가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중간에 말을 멈추어 가며 그녀가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샤르투스 저택에서 찾은 게 있어.”

    대공의 부름에 라이젠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가죽 표지의 책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샤르투스의 가계도였다.

    책이 펼쳐지고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자 다들 깜짝 놀랐다. 로샨마저 깊은 탄식을 흘렸다.

    “선대 후작이 생일을 속인 이유는 아마 당신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거야. 페르난데가 이능 각성을 주시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셀라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지키려 했는지 깨닫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그나마 아버지가 메리엘을 한 번이라도 안아 보고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돼주었다.

    그때, 유디트의 머릿속에 어떤 의문이 스쳤다.

    “그런데 황제는 왜 메리엘에겐 흑마법을 쓰지 못했을까? 아델 님까지 그렇게…… 되신 데다 후작가가 넘어갔으니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까지 구석에서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던 알렌이 입을 뗐다. 제게 이목이 쏠리자 슬쩍 얼굴을 붉힌 소년이 말문을 열었다.

    “마탑에서 원로분들과 함께 록트린 영애의 마력과 잠재력을 측정하던 도중에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었습니다.”

    “특이점이라니?”

    “방어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걸로는 설명이 안 돼.”

    유디트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알렌의 말에 반박했다.

    “애초에 그 정도로 흑마법을 막을 수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아델 님의 마법으로도 비전하께 걸린 주술을 깨뜨리진 못했어.”

    “영애에게 걸린 마법은 일반적인 방어 마법과는 달랐습니다.”

    일순 유디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가 제 옆의 로샨을 향해 홱 고개를 틀더니 물었다.

    “스승님, 지금 알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네가 짐작한 바대로란다.”

    “말도 안 돼!”

    유디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샨과 알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아무리 상황이 그렇대도 어떻게…….”

    “록트린 가문의 유전병은 발병률도, 치사율도 높습니다. 일단 발병하고 나면 병이 급속도로 진행되죠. 만일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잠깐,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말아봐. 이건 정말…….”

    유디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한숨을 터뜨렸다. 세 사람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는 아셀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성녀님, 마탑주님. 두 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메리엘의 몸에 남아 있는 방어 마법과 아버지의 유전병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제대로 설명하라는 대공의 눈빛에 알렌이 냉큼 말을 이었다.

    “어떤 마법이든 발동하기 위해선 대가가 따릅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법 시전을 위해 체내의 마력을 사용하지요. 마력이 없는 자가 마법을 구사하기 어려운 이유도 그래섭니다. 하지만 마력 외의 대가를 요구하는 마법들이 있습니다.”

    유디트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겨우 받아들인 자의 표정을 하고선.

    “보통의 방어 마법은 마력으로 구축하지만 때로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대가를 쓰기도 합니다.”

    “어떤 대가인가요?”

    “생명력입니다.”

    놀란 아셀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알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마법이든 목숨을 대가로 한 마법보다 강력한 건 없습니다.”

    아셀라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의 대화가 떠오르더니 서서히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주술을 씌울 기회만을 노리는 황제, 갓난아기인 메리엘, 록트린 가문의 유전병이 발병한 아버지, 생명을 대가로 치르는 강력한 방어 마법의 존재.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이 자리를 찾아 맞춰지며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냈다.

    마침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설마 아버지가…….”

    아셀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판단 후에 결단을 내리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알렌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도주하는 대공비 96화

    아셀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짓이기듯 힘을 주는데도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메리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아버지. 그리고 남편의 생명을 앗아가는 마법을 시전할 수밖에 없었을 어머니.

    두 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를 생각하자 심장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오늘은 몸이 좀 어떠세요?’

    ‘괜찮은걸. 오랜만에 산책할까?’

    ‘아델, 무리해선 안 됩니다. 아이도 가졌는데 조심하셔야지요.’

    ‘뭐 어때요. 날 닮았다면 메리엘도 산책 좋아할걸요?’

    ‘하지만…….’

    ‘자자, 모처럼 우리 가족이 다 모였잖아요. 소풍 분위기 좀 내요.’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다. 모두가 함께 있어서 행복했던, 그저 따뜻하기만 했던 기억.

    더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셀라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일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칼릭스가 흐느끼는 아셀라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눈짓했다. 그만 나가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유디트 일행이 몸을 일으키자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걸요.”

    “무리할 필요 없어. 내일 해도 늦지 않아.”

    “아녜요, 전하. 이젠 괜찮아요.”

    아셀라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칼릭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데…….”

    “신경 쓸 거 없어.”

    손길이 꼼꼼하면서도 세심했다. 닦는다기보다는 지그시 눌러 물기를 훔치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보드라운 직조감의 손수건은 몹시 얇아서, 그럴 때마다 천이 아니라 손가락이 맞닿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남자의 높은 체온 탓인지 손가락이 지나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특히 눈가와 귓불 같은 예민한 살결을 스칠 때는 묘한 느낌에 움찔댔다. 일부러 그가 더 오래 머무르는 것 같은 생각마저 일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생경한 기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셀라가 이도 저도 못 하고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이, 눈가와 뺨을 지난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여기도 젖었군.”

    동시에 사내의 검지가 맞붙은 입술 사이를 꾹 눌렀다. 그 작은 틈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손수건에 빨려들듯 스미며 축축한 손가락의 감각이 그대로 느껴졌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소리가 샜다.

    “아……!”

    아셀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귓가는 물론이고 희고 연한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 이젠 제가 할게요.”

    그녀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리며 칼릭스가 들고 있던 손수건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는 당황한 아내를 위해 순순히 힘을 풀어주었다.

    아셀라가 남은 물기를 훔치는 동안 칼릭스가 유디트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하나. 다들 앉지 않고.”

    조금 전 본 장면에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던 세 사람은 대공의 눈빛을 받고는 화들짝 놀랐다.

    특히나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유디트의 얼굴에는 제 생각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저 정도였어?’

    메리엘에게서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대공이 미친 게 아닐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아셀라를 대하던 칼릭스의 표정이며 행동에선 그녀를 향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둘을 처음 보는 사람조차도 도저히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여기서 딱 한 명만 모르는 것 같지만.’

    그새 얼굴이 말끔해진 아셀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이제 눈물기는 가시고 없었다. 그녀가 미안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바쁘신 분들을 기다리게 했네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저들은 처음부터 당신을 위해 여기 온 거니까.”

    칼릭스가 살짝 흐트러진 채 가슴께로 흘러내린 아셀라의 은빛 머리칼을 등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유디트가 코에서 김을 뿜었다.

    ‘저 인간이 남들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유디트조차 혀를 내두를 뻔뻔함이었다. 지켜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찌나 빠짐없이 매만지던지, 저러다 아셀라의 얼굴이 닳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게다가 입술을 스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절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순진한 애한테 무슨 짓이야!’

    유디트의 금안이 불붙은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셀라는 외모만큼은 아델의 판박이였으나 성격은 정말이지 아버지인 클라우드를 빼닮았다.

    이런 방면에서 어이없으리만치 눈치 없는 것조차도.

    대공이 언제고 여린 아내를 홀랑 잡아먹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게 다른 사람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 오직 그녀만이 몰랐다.

    “아까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리자면.”

    칼릭스의 목소리에 유디트가 잠시 사사로운 감정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조만간 아셀라에게 주의를 일러주리라 다짐하면서.

    “선대 샤르투스 후작 부부는 황제의 흑마법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말이로군. 그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거고.”

    “덕분에 록트린 영애는 주술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아셀라는 지키지 못했지만.

    칼릭스가 시선을 내려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모인 아내의 두 손을 감쌌다. 혼잣말 같은 나직한 목소리에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예지의 이능으로 미리 알아채지 못했던가.”

    “예지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원하는 미래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바로 옆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칼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셀라가 그를 바라보며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어요. 예지는 신의 뜻이라서 인간이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거라고. 다만 신께서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한 번씩 행운처럼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요.”

    아셀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셨던 걸 거예요.”

    “아셀라.”

    “전 그렇게 생각해요. 두 분이 제게 기회를 만들어 주신 거라고.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아서 진실을 알게 되었잖아요.”

    아셀라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칼릭스는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작은 이슬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어떤 힘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능 각성이 시작됐고, 곧 주술도 깨뜨릴 수 있을 테니까…… 메리엘도 저도 무사하니까…….”

    아셀라의 눈꼬리에서 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죽 흘러내렸다.

    “부모님의 유언을 지킬 수 있어서 기뻐요.”

    그녀가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 * *

    대화가 모두 끝난 뒤, 대공 부부 사이엔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혼자서도 괜찮다는 아셀라와 기어코 침실까지 데려주겠다는 칼릭스의 입씨름이었다.

    “바로 문밖에 호위기사들이 있는걸요. 전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바쁘실 텐데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을 방에 데려다줄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있어.”

    아셀라는 극구 사양하려 했으나 그녀가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한 사내라는 점이었다.

    “정 싫다면 함께 내 침실로 가는 건 어때.”

    “아니요!”

    화들짝 놀란 아셀라가 짧게 소리치고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커다란 눈이 도르르 굴러 유디트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을 살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재빨리 못 들은 척해주었다.

    아셀라가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칼릭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서 가요.”

    어느새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본 그가 입매를 당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셀라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소매를 놓았다.

    그러나 응접실의 문이 닫히기 직전, 유디트 일행은 문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은근슬쩍 아셀라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는 칼릭스의 모습을.

    * * *

    잠시 뒤, 응접실에는 기진맥진한 얼굴의 세 사람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칼릭스를 잡겠다며 뛰쳐나가려는 유디트와 말리는 로샨의 한바탕 난리가 난 직후였다.

    그 와중에 응접실 내의 집기가 부서지지 않도록 알렌은 미친 듯이 손을 놀리며 마법을 써야 했다.

    “정말이지 못 말리겠구나, 유디트.”

    “그럼 꼭지가 안 돌아요? 보란 듯이 얼굴 만지고, 손 깍지 끼고!”

    유디트가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얼굴로 식식거렸다.

    “아셀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걸 다 받아주고 있고! 내가 속이 터져서 원!”

    “성녀님.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잖습니까.”

    “아니, 그렇긴 한데……!”

    지극히 상식적인 알렌의 반문에 유디트가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녀가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긴 했다.

    단지 유디트가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저 음험한 인간이 아셀라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비전하께 해가 될 만한 일을 할 분으론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렌,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대공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인정사정없는 인간인데! 심지어 무례하고 오만하기까지 하다고.”

    “하지만 비전하께는 한없이 자상하고 다정하시던데요.”

    순간 유디트가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긴 했다. 눈에서 아주 꿀이 줄줄 떨어지는 게 보였으니까.

    그걸 아셀라만 모르고 있었지만.

    “모두에게 친절한 남자야말로 최악의 남편이라 들었습니다. 자고로 사내란 제 여자 외엔 가벼이 미소도 짓지 말아야 하는 법이라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지. 누가 그런 소릴 했어?”

    “녹스 원로님께서요.”

    “이 영감탱이가 대체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유디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정말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알렌은 나중에 좋은 남편이 되겠구나. 벌써 그런 걸 다 알고.”

    로샨이 웃으며 말을 얹었다.

    “유디트,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

    “알아요, 스승님. 제가 괜한 심술 부리고 있다는 거.”

    유디트가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잖아요. 아셀라는 이제 겨우 대공에게서 공포심만을 걷어냈을 뿐이라고요.”

    “적어도 보통의 부부처럼은 되었지. 귀족들에게 정략혼은 아주 흔한 일이고.”

    귀족의 결혼에 사랑은 필수조건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만으로도 대부분은 무난한 결혼 생활을 했다.

    게다가 한쪽이 상대방에게 마음을 품고 있을 경우에는 시간이 흐르며 애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 차라리 대공에게서 금빛 기류를 보았다는 사실을 말해줄까요?”

    “아셀라에게 말이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로샨이 입을 열었다.

    “아니.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어째서요?”

    “아셀라는 선택에 익숙하지 않아. 지금껏 남이 정해준 대로만 살아와야 했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도 있잖니.”

    그래서 메리엘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일 터다.

    로샨은 아셀라가 대공을 택하든, 혹은 택하지 않든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고 싶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97화

    “그러니 아셀라의 마음이 가는 대로 두자꾸나.”

    말뜻을 이해한 유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스럽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우리도 그만 일어날까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제 각자 침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알렌을 배웅한 그녀들은 반대쪽 복도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미리 말해 둔 덕에 침대가 두 개 놓인 커다란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로샨이 문을 닫고는 유디트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제 말해보렴.”

    “그렇게 티 나요?”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유디트가 씩 웃었다. 그러나 그녀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델 님이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 궁금해서요.”

    “…….”

    “어째서 이 진실을 전부 숨기셨던 걸까요?”

    의문 하나가 풀린 자리에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아델은 황제가 흑마법사이며 그녀의 딸들이 표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샨과 유디트에게 어떠한 언급 없이 세상을 떠났다.

    “혹시 우릴 믿지 못하신 걸까요?”

    “그건 아닐 거야.”

    로샨이 곧바로 부정했다. 아델과 쌓아온 세월은 그정도로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샨 자신이 친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믿었다.

    “아델은 아셀라에게도 정확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어. 우릴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게 뭔데요?”

    “예지로 무언가를 봤던 거겠지.”

    유디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답을 찾아냈다.

    “아델 님이 미래를 보신 걸까요?”

    “그리고 원하는 미래가 오도록 만들려 했을 테고.”

    예지는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 있는 미래를 엿보는 힘이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한번 만들어진 물줄기의 방향을 트는 건 쉽지 않았다.

    “미래라는 건 현재 내려진 무수한 선택의 결과니까. 아델의 목표가 두 아이를 살리는 거였다면…….”

    “……성공하신 거네요.”

    로샨이 긴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망할 아델. 그녀는 속으로 다시 한번 욕설을 뇌까렸다.

    아마 그녀의 친우는 자신이 황제의 손에 죽게 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꼬물거리는 것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어, 아델.’

    혼자서 얼마나 고민했을까. 떠나는 순간까지도 남겨질 두 딸을 얼마나 걱정했을까.

    “아직 성공했다고 단정하긴 일러.”

    로샨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나자 유디트가 움찔했다. 평소의 온화하던 스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 주변으로 창끝의 첨예함과 같은 예기가 감돌았다.

    “아델과 클라우드, 그리고 아이들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똑같이 고스란히, 아니, 그 이상으로.”

    유디트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간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스승이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꾹꾹 눌러 담았음에도 비어져 나온 날것의 감정이 칼날처럼 살갗을 찔러댔다.

    “두고 보렴. 황제는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테니까.”

    로샨의 마지막 말은 단호한 선고였다.

    * * *

    침실에 도착한 아셀라가 칼릭스에게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셀라가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빛으로 칼릭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당신 부모님의 일은 유감이야.”

    “아…….”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아셀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눈에 모이는 열기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마치 눈물샘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걸핏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보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감사해요.”

    눈을 깜박여 흔적을 지운 그녀가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그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좋은 밤 보내세요, 전하.”

    무언가 아쉬운 얼굴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인사를 건넸다.

    “당신도. 편안한 밤이 되길 바라.”

    * * *

    그러나 아셀라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몸은 피로에 절어 있는데도 침대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나도록 뒤척거리기만 했다. 알게 된 진실들이 감은 눈꺼풀 뒤로 자꾸만 둥둥 떠올랐다.

    그렇게 잠 못 이루기를 한참.

    그녀의 몸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더워지는 듯싶더니 열이 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처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에 급속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급기야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누군가를…… 불러야…….’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거리자 수정구 끄트머리가 만져졌다.

    아셀라가 있는 힘껏 수정구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길에 반응한 수정구가 환하게 빛났다.

    가까스로 사용인들을 호출한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풀썩, 가냘픈 몸이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비전하!”

    다급히 달려온 사람들의 외침을 끝으로, 아셀라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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