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71)
  • “전하를 뵙고 싶어요.”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요청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대공을 찾는 이유나 목적조차 묻지 않았다. 불과 몇 분 만에 라이젠이 칼릭스의 답을 전했다.

    “전하께서 곧 찾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여기로 오신다고요? 제가 가도 되는걸요.”

    “아닙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으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돌아오자 아셀라는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겨우 냈던 용기마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초조하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녀의 귀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준비했던 말은 죄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말았다.

    다행히 바깥의 그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준비가 되기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제 옷매무새를 점검한 그녀가 두 손을 꽉 부여잡았다. 손에 힘을 주자 그나마 긴장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으나 그만 더듬거리고 말았다.

    “드, 들어오세요.”

    정작 방 주인은 바깥에서 노크하고 떡하니 그의 침실을 차지한 자신이 안에서 들어오라 허락하다니.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상황이 묘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건 아셀라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며 떨렸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듯싶더니 금세 그녀의 시야에 검은 구두코가 들어왔다.

    “아셀라.”

    칼릭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셀라는 당혹감을 느꼈다.

    고저 없는 사내의 서늘하고 낮은 음성은 늘 두려움만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사뭇 달랐다.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놀라우리만치 듣기 좋았다.

    “날 찾았다고 들었는데.”

    퍼뜩 정신을 차린 아셀라가 얼른 옆의 소파를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일단 이쪽으로 오셔서 앉으세요.”

    소파 테이블 위엔 워머로 감싼 티포트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힐끗 그 모양새를 본 칼릭스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늘 무서워하며 피하고 도망치려만 들던 여자가 용기 내어 저를 불렀다. 게다가 그가 온다며 차까지 마련해 놓았다.

    얼마나 고심하며 준비했을지를 생각하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졌다.

    칼릭스가 지금의 상황을 즐거워하는 사이, 아셀라가 신중하게 차를 따르고는 말문을 열었다.

    “전하께서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진 잘 모르지만…….”

    “찻잎은 그대가 직접 골랐나?”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칼릭스의 귀에 다 들렸다. 긴장 어린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가 좋군. 잘 마시지.”

    그렇게 대화가 끝난 뒤, 침실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둘 다 소리 하나 없이 차를 마시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물론 아셀라는 차를 입에 대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다. 하도 떨려서 차의 향이며 맛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녀가 커다란 눈을 도르르 굴려 칼릭스의 안색을 살폈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던 찰나, 칼릭스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당신 얼굴이 어두워. 이능을 각성한 게 기쁘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

    “실감이 되질 않아서 그러나?”

    아셀라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풀이라도 붙인 듯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겨우 입을 열어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그것도 그렇고…….”

    아셀라가 말끝을 흐렸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아래로 푹 꺼트렸다. 그러다 귓가를 스치는 손길에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앞쪽으로 잔뜩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그가 귀 뒤로 넘겨준 거였다.

    “마음껏 기뻐해도 돼, 아셀라. 당신이 바랐던 일이잖아.”

    그 손길이 언뜻 다정하게 느껴져 죄책감만 더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가느다란 손이 치맛자락을 꽉 쥐자 질 좋은 천에 사정없이 주름이 졌다.

    “죄, 죄송해요.”

    파들거리던 입술이 벌어지며 고백에 가까운 진심이 토해져 나왔다. 칼릭스가 우뚝 동작을 멈추고는 무슨 의미냐는 눈빛을 보냈다.

    “당신이 내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어.”

    “전하께 무례하게 굴었잖아요.”

    아셀라가 여전히 칼릭스를 마주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살인자라고…… 전하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믿지 못하고 계속…….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하를 원망하고 나쁜 말까지 한 걸요.”

    급기야 아셀라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용서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아셀라.”

    칼릭스가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울먹거리며 용서를 비는 모양새가 처량하여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틀간 마음고생을 적잖이 한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바로 이야기를 나눌 것을.’

    그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시간을 준다는 게 되려 괴롭힌 결과를 불러온 셈이었다.

    “당신도 몰라서 그런 거잖나. 이런 일로 사과할 것까진 없어.”

    저답지 않게 부드러이 말을 건네자 자그마한 몸이 움찔했다. 아셀라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바라봐 주었다.

    그녀가 무어라 말할 듯 말 듯 입을 벙긋거리는 걸 보고는 칼릭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겨우 이런 일 정도로 화가 나진 않아. 다만 생각을 좀 하기는 했지.”

    “어떤 생각을요?”

    아셀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칼릭스가 나직한 음성으로 담담한 위로를 건넸다.

    “그동안 당신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다고.”

    일순 그녀의 몸이 굳었다.

    잠시 뒤엔 무언가를 잘못 들은 사람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몸이 진동했다.

    푸른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에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뒤섞인 감정들이 일렁였다.

    아셀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 밑에 삽시간에 물기가 고이더니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아셀라.”

    칼릭스가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고는 가녀린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아주 작은 힘만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가냘픈 몸이 쉬이 딸려왔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여자가 작게 흐느꼈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내용은 타박하는 듯했으나 음성은 다정했다. 그제야 아셀라가 그의 앞섶을 붙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의 아픔과 슬픔을 죄다 쏟아내는 처절하고 진한 울음이었다.

    서럽게 우는 아셀라를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짧은 시간 고민해야 했다.

    우는 사람을, 그것도 여자를 달래는 법은 누구도 그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이지 않나. 그녀는 제 곁에서 평생 함께할 이였다. 자신 외에 베네비토의 이름을 단 유일한 존재였다.

    칼릭스는 언젠가 스치듯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 두 팔로 아셀라의 등과 허리를 조심스레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마른 등을 천천히 도닥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다. 그보다 배는 더 어색한 말투로 그가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아셀라. 이젠 다 괜찮아질 테니까.”

    아셀라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였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쏟던 그녀는 시간이 흐르자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훌쩍임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에게 찾아온 건 부끄러움이었다.

    ‘다 큰 성인 귀족이 아이처럼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배웠는데.’

    빨간 토끼 눈이 된 아셀라가 슬그머니 손등으로 남은 눈물 자국을 훔쳤다. 동작이 묘하게 다급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곤 그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커다란 손으로 아셀라의 한쪽 뺨을 감쌌다.

    그의 돌발 행동에 그녀가 숨을 삼키며 동작을 멈추었다.

    물기에 젖어 말갛게 윤기마저 도는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이상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지?”

    아셀라의 얼굴이 더 달아오르고 말았다. 뺨에 더해 귓가까지 붉어지자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구보다도 예리한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몸이 아픈 건가?”

    “아, 아니에요!”

    아셀라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게 반쯤 안겨 있는 모양새가 이제야 신경이 쓰였다.

    자연스러운 척 슬쩍 몸을 뒤로 빼보려 했으나 그새 움직임을 눈치챈 칼릭스가 팔에 힘을 주어 저지했다.

    “왜 그러나.”

    “그…… 차가 식겠어요. 이제 전 괜찮으니까 어서 드세요.”

    “이미 다 식었어.”

    아셀라가 민망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던 그녀의 시도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산됐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영 어색했다. 지나치게 뜨거운 사내의 체온은 기이한 긴장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아셀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가락만을 꿈질거릴 때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94화

    “혹시 내게 궁금한 게 더 있나?”

    들려온 질문은 의외의 것이었다.

    “뭐든 물어봐.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말해줄 테니까.”

    조금은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아셀라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묻고 싶은 건 태산처럼 많았지만 그걸 냉큼 꺼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대범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며 고심하자 칼릭스가 확언했다.

    “난 마음에도 없는 말은 안 해.”

    아셀라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은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가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믿음이 생긴 이후에도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던 작은 불안이었다.

    “사실은…….”

    말문을 여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기만 했다.

    “괜찮으니 말해봐.”

    머뭇거리던 아셀라가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전하께서 카르마의 수장이시잖아요. 그 비밀을 제가 알아도 되는 건지…… 걱정됐어요.”

    칼릭스의 얼굴이 한층 진지해졌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가 잠시 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문제지?”

    “네?”

    “당신은 내 아내잖나.”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칼릭스가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보통은 대공비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말해준다고는 들었어. 하지만 미리 알았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아.”

    “그럼…….”

    “그걸로 내가 당신에게 화라도 낼 거라고 여긴 거라면 신경 쓸 거 없어. 알아야 할 걸 조금 빨리 알게 된 것뿐이니까.”

    순간 아셀라의 표정이 멍해졌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는데 칼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카르마에 대해서 알아낸 건지는 내가 묻고 싶었던 거기도 해. 아델이 이야기해 주었나?”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꿈을 꾸었던 건가?”

    아셀라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누가 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티 나는 반응에 칼릭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몽을 꾸었을 때…… 보았어요.”

    “페르난데도 내가 카르마의 수장이라는 사실 정도는 내심 짐작하고 있을 거야. 단지 증거가 없을 뿐이지. 그걸 이용해 당신에게 악몽을 불러일으켰던 모양이군.”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생각하자 아셀라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희미한 두려움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말을 건넸다.

    “어쨌거나 그 문제는 안심해도 좋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아셀라가 잠시 눈을 끔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걸.’

    무의미한 걱정이었던 셈이었다. 그를 피하며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했던 결과였다.

    아셀라가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는데, 칼릭스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있어.”

    “소식이요?”

    “오늘 당신 동생이 성에 도착할 거란 기별이 왔어.”

    “정말요?”

    아셀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유디트로부터 미리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성녀는 일주일쯤 걸릴 거라 예상했었다.

    “일정이 늦어지지만 않는다면 저녁 식사는 함께할 수 있을 듯해.”

    그제야 정말 실감이 난 듯, 아셀라가 중얼거렸다.

    “메리엘이…….”

    이윽고 햇살이 비추듯 그녀의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멍울졌던 꽃망울이 개화하는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고운 얼굴에 가득 드리웠다.

    칼릭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이었다. 아셀라가 저에게 이토록 티 없이 밝은 웃음을 보여준 것은.

    눈이 부셨다.

    그는 그깟 미소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저가 가진 어떤 귀한 물건도 그녀의 미소에 가져다 댈 수 없었다.

    매일 보고 싶다. 울거나 두려워하는 것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제 곁에서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

    칼릭스가 어느덧 그런 바람을 품는 사이, 아셀라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저, 그럼 제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잠깐만이라도 좋아요. 메리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어서요.”

    “몸은, 괜찮은 건가.”

    뒤늦게 튀어나온 목소리가 며칠은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다 나았어요. 이젠 쌩쌩한걸요.”

    한껏 들뜬 목소리엔 생기가 가득했다. 그리도 기쁜가 싶으면서도 좋아하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을 호출하기 전, 칼릭스가 그때까지도 붙들고 있던 아셀라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아셀라는 시종 앞에서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아도 되었다.

    “대공비가 돌아갈 예정이니 시녀들에게 준비하라 이르라.”

    “예, 전하.”

    시종이 나간 뒤 아셀라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전하.”

    아까만 해도 품에 좀 안았다고 불편해하며 바르작대더니 이젠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웃기까지 한다.

    해사한 미소를 마주하자 갑자기 얼굴이 홧홧해졌다. 칼릭스가 급히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전하?”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며 답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아내는 동생이 온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서서히 기우는 해가 대지에 붉은빛을 흩뿌릴 때쯤이었다.

    대공성이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메리엘 일행이 성문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막 당도한 직후부터였다.

    내내 동생을 기다리던 대공가의 안주인은 저택 앞까지 직접 마중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부터 자그마한 인영이 다다다 뛰어오더니 여인의 품에 냉큼 안겼다.

    “언니!”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셀라가 두 손으로 아이의 등을 감추듯 감싸며 꼭 껴안아 주었다.

    “고생 많았어, 메리엘.”

    애정이 담뿍 담긴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냐. 로샨 신관님이 도와주셔서 힘든 건 하나도 없었어. 마탑에도 신기한 게 많아서 재밌었구!”

    메리엘이 발랄하게 답하고는 유디트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가 귀엽다는 듯 아이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목을 쭉 빼내어 누군가를 찾더니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휘 들며 인사했다.

    “스승님! 알렌!”

    그 소리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메리엘이 뛰어온 길 끝에서, 로샨과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마탑주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더니.’

    간단한 마법이라도 쓴 듯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소년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채도 높은 금발을 가진 소년의 눈이 총기로 빛났다.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반겼다.

    “두 분 모두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로샨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메리엘을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무사히 이능을 각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도요.”

    “당연한 일인걸요. 오히려 아가씨 덕분에 지루함 없이 즐거웠어요.”

    로샨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집사 파비안이 곧바로 안내를 자처했다.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 * *

    알렌을 본 칼릭스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열여섯이라는 나이를 미리 들었음에도 막상 마주하자 생각보다 어리게 느껴진 탓이었다. 알렌 역시 이를 의식한 듯 그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식사부터 하지.”

    평상시엔 거의 비어 있던 대공의 식당이 오랜만에 여러 사람으로 북적였다.

    여섯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지만 의외로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유디트와 메리엘이 중간중간 적당한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라앉지 않도록 해주었다.

    아셀라가 먹기 좋게 썬 음식을 입가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별로 불편하지 않아.’

    말하지는 못했지만 실은 걱정했었다. 대공과의 식사는 이번이 두 번째였고, 저번에는 식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긴장했었으니까.

    그런데 메리엘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여러 사람이 함께해서인지, 이번에는 거북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었고 옆에 동생이 있다는 건 더 좋았다. 덕분에 그녀는 평소보다 양껏 먹었다.

    물론 아셀라는 칼릭스가 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식탁을 가득 채웠다는 것도, 그가 간간이 그녀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제 배불러!”

    후식을 입안에 한껏 밀어 넣은 메리엘이 빵빵해진 배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곤 아셀라가 차를 다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제 언니랑 둘이서 놀래요!”

    “뭐하며 놀 건데?”

    유디트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그런 게 있어요. 성녀님께는 비밀이에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알려줘.”

    유디트가 과장되게 눈을 깜박거리며 졸랐으나 메리엘은 단호했다.

    아셀라의 손을 덥석 잡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칼릭스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죠?”

    어떻게 보면 버릇없을 정도로 당돌한 메리엘의 행동에 유디트, 로샨, 심지어 알렌마저 동시에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어질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원하는 대로 해.”

    그들은 귀를 의심했다. 특히나 유디트는 제가 잘못들은 줄 알고 귀를 후비적거렸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신이 난 건 메리엘뿐이었다.

    “언니, 어서 가자!”

    아셀라가 조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전하.”

    “좋은 시간 보내고.”

    마지막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얼굴에 일순 경악이 스쳤다.

    ‘좋은 시간 보내고? 내가 방금 그렇게 들은 거 맞아?’

    유디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충격으로 떡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도 못 했다.

    로샨이 주먹을 쥐어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작게 헛기침했다.

    알렌은 조용히 접시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예 못 들은 척했다.

    그나마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두 사람과는 달리 유디트는 아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셀라가 메리엘의 손에 이끌려 식당을 나갔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제 아내에게 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도주하는 대공비 95화

    유디트 일행이 라이젠의 안내를 받아 손님용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가 그간 있었던 일이에요.”

    칼릭스를 기다리는 동안 유디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나 황제의 정체를 알게 된 로샨은 침음을 삼켰다.

    “좋지 않아. 황제가 흑마법사라면 일이 쉽지 않겠어.”

    “그렇게까지 상황이 나쁘진 않아요, 스승님. 메리엘이 각성한 데다 아셀라도 각성이 시작된 것 같으니까요.”

    “황제가 이를 눈치챈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그 어린것의 이능 발현을 막으려고 흑마법을 썼을 정도니까. 목숨을 위협하려 들겠지.”

    그때 유디트의 귀에 대공 부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혼잣말했다.

    “어딜 갔나 했더니 모시고 올 생각이었나 보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대공 부부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레 상석으로 걸어간 칼릭스가 아셀라를 먼저 앉히곤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메리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아셀라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시선을 떼곤 로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아내를 대하던 얼굴과는 영 딴판인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겉모습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로군.”

    뼈가 있는 말이었다. 유디트가 곧바로 받아치려는데 로샨이 그녀를 막아서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를 오해하게 만든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편의라는 것 말인가?”

    “그 점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이유는 흑마법의 조사 때문이었어요.”

    로샨과 유디트가 서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디트가 성녀가 되기 전부터, 신전의 중요한 정보가 속속들이 새어나갔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칼릭스가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제국 내에서 흑주술이 사용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마저도 신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눈치챈 거였죠.”

    “이미 신전에 적이 깔려 신관들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이야. 둘이서 흑마법의 출처를 은밀히 추적해야만 했지. 로샨이 모습을 수시로 바꾸는 건 그 때문이야. 적의 눈을 따돌려야 했으니까.”

    유디트가 로샨의 말을 받아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칼릭스가 물었다.

    “성녀가 말했던 죽은 신관들이 그들인가?”

    “맞아. 죽은 이들은 전부 흑마법에 당한 흔적이 있었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예언 신관이었지.”

    “예언 신관?”

    “여신의 신탁을 받고 해석하는 신관을 말해. 마지막 신탁이 내려진 게 어언 몇백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거든.”

    유디트가 말하다 말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황제가 그들만을 골라 흑마법으로 조종하다 죽인 걸 보면 신탁과 관련이 있다고밖엔 볼 수 없어.”

    “그대는 성녀잖나. 신탁을 듣는 능력이 없나?”

    “신탁을 받는 건 신관 중에서도 선택받은 이들만이 가지는 능력이야. 성녀라고 해서 무조건 가능한 게 아니라고.”

    잠자코 듣고 있던 아셀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제가 제 어머니를 노린 이유도…… 예지의 이능 때문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커요.”

    유디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페르난데가 아델에게 필립과의 재혼을 종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녀를 해칠 기회를 만들려 했을 테니까.”

    칼릭스가 덧붙인 말에 아셀라가 눈을 홉떴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으나 나머지도 충격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어머니가…… 원해서 결혼하신 게 아니었어요?”

    “황제의 입김이 아니면 필립 같은 자가 무슨 수로 아델과 결혼할 수 있었겠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