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71)

그 와중에도 줄은 계속해서 바스러지더니 연결된 마법진의 중앙까지 다다랐다. 그러자 마법진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크게 진동했다.

곧이어 그들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색 금속처럼 견고하던 마법진이 가장자리부터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쿠키 조각이 떨어지는 것처럼 부서지더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붕괴가 멈추었을 때는 마법진이 처음의 반절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으나 그 차이를 현격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원의 지름이 줄어들었다. 이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법진이 사라진 자리엔 싱그러운 장미 덩굴만이 남아 향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성녀, 설명해라. 일이 어떻게 된 거지?”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유디트가 칼릭스의 물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남은 마법진에 다가가 위아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동시에 강한 스파크가 튀며 몸이 뒤로 밀렸다.

“악! 젠장……!”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가 타는 듯한 불쾌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유디트가 황급히 손을 휘휘 털며 입을 열었다.

“비전하, 한 번만 다시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까 하셨던 행동 그대로요.”

“안 돼.”

칼릭스가 막아섰다. 그의 시선은 이제 시뻘겋게 데여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 유디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신성력으로 손가락을 치료하며 빽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비전하께 해가 될 일이라도 시킬까 봐서?”

“적어도 헤뷔움의 군주가 경망스럽다는 것 정도는 잘 알겠기에.”

“뭐야!”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와중에 아셀라가 가만히 장미꽃잎을 잡아보았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그 사실을 알아챈 유디트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이며 맞은편에 섰다. 아셀라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젠 안 되네요. 아까랑 똑같이 해봤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거든요.”

“네?”

유디트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칼릭스의 눈이 가늘어지며 대답을 재촉했다.

“흑주술은 희생자가 죽기 전에는 파훼할 수 없다고 했던 제 말, 기억하시죠? 그런데 예외가 하나 더 있어요. 지금 상황에선 무의미한 가정이라 생각해서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

유디트의 얼굴에는 이제 화색이 만연했다. 아델의 장미꽃은 이제 붉은 표면에 윤기가 자르르할 정도로 생기가 돌았다.

그녀가 아셀라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비전하의 이능 각성이 시작된 것 같아요.”

* * *

페르난데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샤르투스의 둘째가 이능을 각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를 미칠 듯한 불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어. 벌써 이능이 발현될 리가 없지.’

이성적으로는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본능적인 감각이 자꾸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일이 틀어지고 있다고.

초조함이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잔뜩 예민해진 신경 탓에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나 화를 내는 일이 하루에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황제궁 소속의 궁정인들은 극도로 몸을 사리며 이 시기가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숨소리조차도 조심할 정도였다. 황제와 눈을 마주치거나 작은 소리라도 내어 주의를 끌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졌다.

황제의 죽 끓는 변덕의 희생양은 그의 충복마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던컨은 시도 때도 없는 화풀이를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오늘도 던컨이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본 건 저를 향해 날아오는 화병이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으나 산산이 조각나 부서진 유리 파편이 튀며 던컨의 뺨에 생채기를 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따끔한 뺨을 대충 손등으로 쓸고는 제 주인을 불렀다.

“폐하.”

“소득이 없다는 둥, 알아낸 게 없다는 둥 쓸모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마탑에 심어놓았던 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탑이라니?”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페르난데가 미간을 좁혔다. 판단은 신속했다.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성했더냐.”

던컨이 보고 내용을 읊었다. 자신은 생각하는 자가 아니다, 그저 주인의 뜻대로 행동하는 자일 뿐이다, 계속 되뇌면서.

“……여자아이 하나가 마력을 발현해 마탑에 찾아왔답니다. 원로들이 확인 후 마탑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정보였습니다.”

“누가 그걸 물었느냐?”

페르난데가 책상을 부서뜨릴 듯 내리쳤다. 차가운 노성에 던컨이 고개를 숙였다.

예상했던 바였으나 여러 차례 겪었다고 하여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빠져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것뿐.

“마력을 발현했다는 계집이 메리엘 록트린이 맞는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흐윽!”

던컨이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접었다. 툭 불거진 눈에 핏발이 흉하게 섰다.

우악스러운 손이 심장을 잡아 쥐어 터뜨릴 듯 힘을 가하고 있었다.

개들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의 한 방식이었다. 살려달라, 용서를 빌지도 못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끊임없이 비명을 토했으나 실제로 입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개의 몸을 통제하는 황제가 성대의 기능을 차단한 탓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던컨이 밟힌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무능한, 네놈들을, 내가, 언제까지, 봐줘야 하지?”

씹어뱉듯 나오는 말에 살기가 그득했다. 말이 끊길 때마다 심장에 가해지는 압력이 치솟다 줄기를 반복했다.

던컨은 절명 직전의 개처럼 몸을 바르르 떨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다.

‘쓸모없는 것.’

페르난데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던컨을 향했다. 이십여 년 가까이 자신을 보좌한 충복을 내려다보는 눈은 냉혹하기만 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벌로 수하를 다스렸음에도 엉망진창이 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십 년이 넘게 공들인 일이 망쳐질지 모른다는 불안 역시 쉬이 가시지 않았다.

‘기분 전환을 할 만한 것.’

페르난데는 애써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이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 그 장난감이 있었지.’

그의 부름에 수많은 줄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새카맣게 변해버린 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델의 첫째 딸에게 걸어놓은 주술.

여러 차례 힘을 불어넣은 덕택에, 줄은 언제 끊어질 뻔했느냐는 듯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걸 보자 더러웠던 기분이 그나마 나아졌다. 동시에 과거의 일이 떠오르며 입가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아델, 네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어도 소용없잖느냐.”

아셀라에게 주술을 건 건, 그녀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다. 일부러 샤르투스 일가를 황궁에 초대한 뒤 부부의 눈을 피해 아이에게 주술을 걸었다.

꼬박 하루를 채웠다면 주술이 완벽히 각인되었겠지만, 아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말았다.

그녀가 곧바로 백마법을 덮어씌우는 바람에 그의 흑마법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무르고 말았다.

“거기서 멈추었으면 모두가 편했을 것을. 너 때문에 이토록 지리한 세월을 보내야 했지 않느냐?”

잘 끝났다고 여겼던 일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은 건, 아델이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는 정보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첫째에게 벌어진 일로 아델이 철저하게 임신을 숨긴 탓에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샤르투스엔 여아가 한 명밖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히 남아일 테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미리 손을 쓰려 했으나 아델이 저택에 결계를 쳐두고 두문불출한 탓에 그마저도 어려웠다.

언제 임신을 했는지, 아이의 출생 예정일이 언제인지조차 불명확했다.

페르난데는 고심 끝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흑주술에 걸려 있는 아셀라를 이용해 아델을 사지로 몰아넣기로.

반응은 거의 즉각적이었다. 아이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사악한 마법을 두어 번쯤 불어넣자, 아델이 딸에게 가해지는 마법을 대신 받아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배 속의 아이를 잃지 않았다.

페르난데가 필사적으로 술식을 만들어 흑마법을 밀어 넣었으나 소용없었다. 도리어 무리하여 강한 술식을 쓴 대가로 한동안 마법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도중에 클라우드 록트린이 유전병으로 사망했으나 아델은 남편을 잃은 상황에서도 무사히 둘째를 출산했다.

딸이었다. 페르난데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나중에서야 어렵게 메리엘에게 접근했으나 이미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손가락 하나 댈 수가 없었다.

페르난데가 개 한 마리를 아델에게 보내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아주 긴 계획의 시작이었다.

탐욕스럽고 열등감이 있으면서도 신분 상승의 욕망이 있는 자. 아둔하나 위아래를 알고 눈치가 있는, 꼭두각시인 줄도 모르면서 꼭두각시의 역할을 할 인간.

그의 예상대로 필립은 훌륭하게 제 임무를 해내었다. 덕분에 아델을 죽일 수 있었고, 흑주술과 학대의 영향으로 아셀라 샤르투스는 이능을 각성하지 못했다.

그런데 메리엘이 각성해 버린 것이다.

“조막만 한 계집이 애를 먹이는구나. 하나 너도 네 어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게다.”

두 자매 간의 정이 각별하다는 필립의 말을 기억해 낸 페르난데의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 소중함이 클수록 약점이 되니까.

아델이 힘과 생명력까지 소모해 가며 딸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메리엘 록트린도 제 언니를 위해 그리될 것이다.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손끝이 자연스레 줄을 향했다. 줄을 가볍게 튕기는 손놀림이 마치 악기의 현을 타듯 즐거워 보였다.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

지독한 병을 앓게끔 해볼까. 메리엘 록트린이 주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은근슬쩍 기운을 흘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페르난데가 힘을 방출하려던 순간.

줄이 사라져 버렸다.

‘무어라?’

처음엔 저가 착각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아셀라 샤르투스의 줄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페르난데가 이상 기운을 감지한 바로 그때.

“……흐억!”

심장에 격통이 찾아왔다. 집채만 한 돌덩이가 심장을 짜부라뜨리는 것 같은 강력한 짓누름.

페르난데가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토하며 상체를 고꾸라뜨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92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고통보다도 이유를 모른다는 충격이 더 컸다. 잠시 뒤 눈 앞에 펼쳐진 마법진의 모습에, 그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저 주술이 어떻게 파훼될 수 있단 말인가?’

마법진 가장자리에서부터 주술이 차례로 부서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기랄!’

마법이 강제로 깨진 여파가 그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공들여 구축했던 만큼 하나하나가 강력하고 치명적인 흑주술이었다.

심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 속, 페르난데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아오는 주술을 차단했다.

그러나 수개월의 시간 동안 만든 마법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건 무리가 있었고, 결국 주술 하나를 막지 못했다.

그의 몸에 정통으로 역주술이 꽂힌 순간, 끔찍한 고통이 덮쳤다. 페르난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상황, 페르난데가 남은 마력을 죄 끌어모아 마법진을 향해 방출했다.

반쯤 파괴된 마법진의 붕괴가 가까스로 멈춘 것을 확인한 그의 의식이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이능 각성.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샤르투스의 직계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는 축복의 힘.

그러나 각성의 가능성을 들은 아셀라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기쁨이 아닌 당혹감이었다. 놀라움조차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에겐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는 말이었다.

‘잘못 생각한 거겠지.’

결론은 빨랐다. 생각을 정리한 아셀라가 입술을 떼었다.

“성녀님, 저는 팔 년이 넘게 각성하지 못했어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착각한 게 아니냐고요?”

되물은 유디트가 칼릭스를 향해 슬쩍 눈짓했다. 자리를 잠시 피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는 성녀의 진지한 눈빛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침실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유디트가 아셀라 앞의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벽안과 성녀의 금안이 맞부딪혔다.

“샤르투스의 이능엔 특유의 기운이 있다는 거, 비전하도 알고 계실 거예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샨도 말한 적이 있었다.

“저나 고위 신관이 그 기운을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해요. 이능 또한 헤르니야 여신의 축복이기에 신성력이 저절로 반응하거든요.”

그러면서 아셀라의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 비전하의 심장에서 이능의 기운이 느껴져요. 그것도 꽤 강하게 방출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도 아시다시피 메리엘의 각성이 시작되었는걸요. 샤르투스에서는 한 세대에 단 한 명의 이능자만이 태어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진 않아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설명이 이어졌다.

“샤르투스의 이능자가 지금껏 한 세대에 한 사람뿐이었던 건 여아가 한 명씩만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메리엘, 아니, 록트린 영애가 태어날 때부터 이능의 그릇은 둘이었던 셈이죠. 단지 흑마법 탓에 비전하의 각성이 막힌 것뿐이었고요.”

아셀라의 긴 속눈썹이 잘게 진동했다.

잠시 뒤 선홍빛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며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럼…….”

“확실해요. 각성은 이미 시작됐어요.”

지난한 세월 동안 거의 포기한 소망이었다. 희미하게 품어왔던 일말의 바람조차 메리엘이 이능을 각성한 뒤로는 완전히 내려놓았다.

꿈에서조차 간절히 바랐던 힘이었건만, 막상 제게 능력이 쥐어졌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사실 비전하의 각성이 여느 사례와 다른 건 사실이에요.”

유디트의 말이 계속되었다.

“록트린 영애 말로는 각성의 전조 단계가 있다고 했는데 그걸 전부 건너뛰었잖아요. 아까 비전하의 힘은 일시적인 경험이라 보긴 힘들어요. 흑주술을 깨뜨리려면 각성된 이능이라야 가능해요.”

“하지만 저는 제 이능이 뭔지도 모르는걸요. 어떻게 힘을 쓸 줄도 알지 못해요.”

“말씀대로 그 점도 특이하고요.”

유디트가 미간을 좁히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그녀가 짓는 표정이었다.

“황제의 마법진을 파훼한 걸 보면 마법의 이능 같기도 한데…….”

흘러나온 목소리는 대화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록트린 영애의 이능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져요. 이것만은 분명해요.”

유디트의 얼굴에 뭔가 찝찝한 표정이 떠올랐다. 구부러진 검지 마디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심하는 그녀에게 아셀라가 나름의 의견을 건넸다.

“메리엘의 각성이 아직 진행 중이라서가 아닐까요?”

“아차, 제가 아직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제야 유디트가 얼굴을 펴며 손바닥을 소리 나게 맞부딪혔다. 평소의 낯빛으로 돌아온 그녀가 사탕을 숨겨놓은 어린아이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록트린 영애의 각성이 끝났어요.”

순간 멈칫했던 아셀라의 눈이 잠시 뒤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마력의 양으로 보나, 구사하는 마법의 수준을 보나, 잠재력이 무궁무진해요.”

유디트가 메리엘이 신전에 도착한 이후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아셀라는 차분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로샨의 정체를 들었을 때는 입이 벌어졌다.

“그럼 메리엘은 지금 로샨 신관님과 함께 있는 건가요?”

“네. 아마도 지금쯤 마탑에 있을 거예요. 마탑의 일원이 되려면 원로들을 만나야 하거든요. 일이 끝나는 대로 대공성으로 오기로 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여기로…… 말인가요?”

아셀라의 목소리가 떨리며 푸른 눈이 흔들렸다. 유디트는 그녀의 불안을 빠르게 읽어냈다.

아셀라가 칼릭스에게 가졌던 공포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델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 지금껏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라 믿은 기간이 적지 않았던 만큼 혼란도 클 터다.

대공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유디트는 이번 한 번만 그를 좀 도와주기로 했다.

“불안하신 거지요? 록트린 영애가 위험해질까 봐서요”

정확히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아셀라가 움찔했다.

“아델 님이 유언으로 범인을 대공 전하라 지목했다면 믿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죠. 그래서 지금껏 전하를 피하신 걸 테고요.”

아셀라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디트가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전과는 다른 꿈을 꾸셨죠. 대공께서 범인이 아닌 꿈을.”

“그건…… 단지 꿈일 뿐이에요.”

아셀라가 유디트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 자신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어서였다. 애초에 대공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놓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저 단순한 꿈이 아닐 거예요.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지 않던가요?”

아셀라는 부인하지 못했다.

“각성의 영향으로 흑마법이 깨지면서 원래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꿈이 진짜란 말인가요?”

“아델 님이 남긴 증거인 단추도 있고,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요. 암시가 완전히 파괴된 뒤 온전한 기억을 되찾고 나면 정확히 드러나겠지만, 일단 전 그렇다고 봐요.”

유디트의 대답은 단호하리만치 명료했다.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확신이 아셀라를 뒤흔들었다.

지금껏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 여겼던 믿음의 표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칠 년 전엔 대공께서도 고작 열다섯의 소년이셨어요. 물론 베네비토 가문의 후계인 만큼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겠지만요.”

“하지만 제 기억에선 어머니가 분명…….”

“비전하.”

아셀라가 애써 항변하려 했으나 유디트가 타이르듯 그녀를 부르며 저지했다.

“대공께서는 그때 제국에 안 계셨어요.”

“네?”

“암암리에 벌어진 일이라 잘 알려지진 않았을 거예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아셀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대공께서 당시 소공자이던 지금의 대공 전하를 용병으로 보내버리셨거든요. 제국 내도 아닌 타국의 전쟁터를 수년간 전전해야 했어요.”

금시초문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칼릭스 본인조차도.

“그러다 선대공께서 돌아가신 뒤 대공위를 물려받으신 거고요. 황제가 벌인 전쟁을 수습하러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지만요.”

“어,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베네비토 가문이 후계자에게 비정한 면모가 없잖아 있지만…… 선대공께서 유독 하나뿐인 아들에게 가혹했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아셀라의 머릿속에 스치듯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공국으로 이동하던 중, 마수에게 당해 팔에 상처를 입은 그녀를 대공이 직접 치료해 주던 때의 기억이었다.

‘익숙하신 듯해서요. 이런 일이.’

‘……전쟁터에선 뭐든 알아서 해야 할 때가 많으니까.’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대꾸한 사내는 놀라우리만치 세심하게 그녀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었다.

“……전혀 몰랐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치부이기도 하니까요. 쉬이 밝힐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귀족가의 자제를, 그것도 후계자를 용병으로 내모는 가주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타국의 전쟁터를 전전케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에는 큰 죄를 지은 자들을 일정 기간 용병으로 보내는 형벌이 있었다. 그만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하고 척박한 일이었다.

그러니 대공자가 용병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고 수치였다. 대공위에 올랐던 열여덟 살까지, 그는 최소 삼 년 이상을 피 튀기는 전장에서 처절하고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을 것이다.

진실을 맞닥뜨린 아셀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였잖아!’

‘난 아델을 죽이지 않았어. 그럴 이유도 없고.’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라며 남자를 비난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아득바득 달려들던 저를 붙들곤 오해라며 차분히 설득하던 남자의 얼굴도.

그간 그녀가 외면했던 진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성녀님의 말대로라면…… 내가 애먼 사람을 범인으로 몬 거야.’

아셀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말들이 더듬더듬 새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곤…… 정말로 아무것도…….”

“충분히 이해해요.”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에도 유디트는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한참이나 횡설수설하던 아셀라의 입에서 마침내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왔다.

“전하께서는…….”

그러나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셀라가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릎 위에 다소곳이 놓였던 손은 마주 잡힌 채 뼈가 죄 도드라져 있었다.

유디트가 그녀를 위로하듯 그 손을 감싸 쥐며 조언을 건넸다.

“대공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도주하는 대공비 93화

아셀라의 푸른 눈에 물기가 일렁였다.

“제 말을 들어주실까요?”

그를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로 몰았다. 제가 죽지 못하도록 막아설 때마다 분노하며 원망의 말을 쏟아부었다.

그를 끝끝내 믿지 않았었다.

대공이 그런 그녀를 이해해 주어야 할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쯤 못나고 어리석은 여자라 여기며 그녀를 경멸하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아셀라의 생각을 읽은 유디트가 고개를 저으며 설득했다.

“대공께서 왜 절 부르셨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대공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의 악몽을 해결해 주고 싶다고 했다. 손목에 멍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신경이 쓰여 침실을 찾았다고 했다. 가능하다면 기억도 찾길 바란다고 했었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제 말을 믿으셔도 좋아요, 비전하.”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성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망울에 설핏 감도는 작은 기대를 눈치챈 유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대공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 * *

아셀라가 용기를 내기까지는 꼬박 이틀의 시간이 더 걸렸다.

성의 손님방에서 머무르는 유디트와 몇 차례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으나 그날 이후로 유디트는 특별히 그 일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찾아오거나 부르는 일이 없었다. 마고도 여간해서는 그녀를 방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셀라는 하루 대부분을 혼자 침실에서 머물렀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사흘째가 되는 날 아침, 아셀라는 일찌감치 일어나 마고를 불렀다. 가볍게 단장을 마친 그녀가 짧게 본론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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