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71)
  • 순간, 아셀라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번개처럼 스쳤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머니의 유언 이후. 그녀는 자신이 그 기억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기억이 도려내진 것처럼.

    다시 시작되는 장면에선 추적추적 빗줄기가 내렸다.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그 사이의 기억이 하나도 없어.’

    묘한 위화감이 머리 위로 섬뜩하게 내려앉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89화

    그렇게 아셀라가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던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아셀라!”

    칼릭스가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다가갔다. 저벅거리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순식간에 곁으로 간 그가 고개 숙여 그녀의 혈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안쓰럽게 떨리는 몸 위에 재빨리 담요를 덮어주자, 아셀라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전하께서 여긴 어떻게…….”

    “마고가 왔었어. 당신이 악몽을 꾼다고.”

    뺨에 붙은 은빛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며 칼릭스가 답했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조금만 기다려. 당장 주치의를 불러올 테니.”

    “아니에요, 전하.”

    칼릭스가 몸을 일으켜 시종을 부르려 하자 아셀라가 소맷자락을 붙들곤 만류했다.

    “아셀라?”

    고개 돌린 사내의 얼굴에 아셀라가 헛숨을 삼켰다. 걱정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표정. 도무지 저를 향한 것이라곤 믿기 힘들었으나 선홍빛 눈이 머금은 온기만큼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진짜였나요?’

    정말로 날 걱정하는 건가요? 날 진심으로 아내로 여기는 건가요?

    꿈에서처럼,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당신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아셀라가 어렵사리 용기를 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떼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의 꿈이었어요.”

    칼릭스가 말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이불을 꾹 말아쥔 가냘픈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위를 감싸듯 덮자 비 맞은 새처럼 파들거리던 손의 진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항상 같은 꿈이었어요. 어머니의 유언도 같았고요.”

    대공을 조심하라 했다던 아델의 유언. 칼릭스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늘 꿈은…….”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가 혼란으로 세차게 일렁였다.

    “힘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야 했다. 아니, 말하고 싶었다. 남자를 온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조심하라고 말한 사람이…… 전하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남자를 믿고 싶은 무의식에서 발현된 용기였을지도 몰랐다. 꿈속의 범인은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꿈에서 황제가 나왔나.”

    “네.”

    아셀라가 제 꿈을 천천히 설명했다. 원래의 꿈은 어땠는지 그리고 오늘 꾼 꿈은 또 어떠했는지.

    칼릭스가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중간중간 아셀라가 힘들어하며 말을 멈출 때면 손등을 도닥이며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하는 저번에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셀라가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 펜던트의 중앙을 눌렀다. 표면이 갈라지며 뚜껑이 생기더니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단추 하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 드러났다.

    “그전까진 펜던트가 열린다는 건 저 말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어요. 설사 누군가가 알고 강제로 열려 시도한다 한들 열리지 않게 되어 있고요.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받자마자 펜던트에 숨긴 단추. 그래서 꿈속의 황제는 그녀가 증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니를 죽인 자에게서 뜯어냈을 단추를.

    “지금까지 단추를 몰래 갖고 있을 수 있었던 거예요.”

    아셀라의 눈가가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방울진 눈물이 눈꼬리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 만일 전하의 말이 맞는 거라면…… 정말 황제 폐하가 어머니를 해치라 사주한 범인이라면…….”

    꿈속의 장면을 떠올린 그녀가 진저리치듯 몸을 떨었다. 뱀처럼 아이의 몸을 칭칭 감싸던 검은 기류에선 사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자신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저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푸른 눈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 무언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가 일었다. 그녀의 눈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애처로이 흔들렸다.

    “아셀라.”

    그 모습이 안타까워 칼릭스가 아내의 뺨에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높은 천정까지 닿는 두꺼운 오크 문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미미한 진동이 났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문이 박살 났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바깥에서 이는 실랑이를 눈치챈 칼릭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전하……?”

    칼릭스와 달리 아셀라는 바깥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영문을 몰라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그가 차분히 설명했다.

    “조금 전에 헤뷔움에서 성녀가 찾아왔어.”

    “성녀가 대공성까진 무슨 일로요?”

    “내가 불렀어. 당신 악몽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

    아셀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가 놀란 낯빛으로 물었다.

    “제가 악몽을 꾸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래. 당신 침실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어.

    아셀라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도대체 언제? 그녀의 표정을 읽은 칼릭스가 답했다.

    “초야 다음 날에 당신 동생이 알려주더군. 언니 손목에 멍이 들었다고. 처음엔 그걸 확인하러 찾아갔었어. 그러다 당신이 악몽에 시달린다는 걸 알게 됐고.”

    “메리엘이…….”

    그랬구나. 말하지 말라 신신당부했지만 어린 동생은 못내 언니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단 며칠 만에 대공이 다시 로샨을 부른 거였다.

    “함구령을 내렸기에 다들 말하지 못했을 거야. 내가 찾아가는 걸 알게 되면 당신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거든.”

    그렇다면 제 숱한 악몽의 내용도 전부 아는 건 아닐까. 아셀라가 긴장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아시는 거예요?

    “대충은. 필립과 안토니 때문에 당신이 괴로워했으니까.”

    “그 두 사람이 제 꿈에 나왔어요?”

    의외의 대답에 아셀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대공과 관련된 무서운 꿈을 꾸면서도 희한하게도 필립 부자의 꿈은 꾸지 않았으니까.

    샤르투스 저택에 있었을 땐 수시로 꾸던 악몽이었기에 희한하게 여겼는데 단지 꿈꾼 사실을 잊은 것뿐인 모양이었다.

    “몰랐어요.”

    “그럴 수 있지. 꿈을 꾼다고 해서 그걸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칼릭스는 악몽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위해 저가 어떤 일을 했는지 까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되려 부담스러워만 할 테니까.

    쾅, 그 와중에도 바깥에선 성녀가 야단법석을 피워대고 있었다. 문을 깨부술 작정인가. 칼릭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아셀라, 괜찮다면 성녀를 만나보겠나?”

    * * *

    무어라 묻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칼릭스 탓에 유디트가 멍해졌다.

    허둥지둥 따라나섰지만 그새 대공은 보이지 않았다. 급히 복도를 내달려 마고를 붙잡았다.

    “아셀라가 어떤데요? 무슨 일이에요?”

    “그건…….”

    “거기로 데려다줘요.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잠깐 망설이던 마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이 거의 뛰다시피 하여 대공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그들의 출입을 막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엄명입니다.”

    “잠깐, 왜! 대체 무슨 일인데!”

    유디트의 고함에도 병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로막은 창을 위협적으로 내밀며 ‘전하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길 한참, 결국 유디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그녀의 몸에서 강한 신성력이 방출되었다. 병사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목표물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 흰 구체가 문을 부술 듯 요란하게 부딪혔다.

    “성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니 그러게 왜 못 들어가게 해!”

    마고며 병사들이 달라붙어 성녀를 제지했으나 말린다고 들을 유디트가 아니었다. 체면이고 뭐고 죄다 내던진 그녀가 팔과 다리를 붙잡히고도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체 아셀라한테 무슨 짓을 하길래 문을 안 열어! 당장 열어!”

    마침내 문이 열렸다.

    냅다 소리를 지르려 했던 유디트가 헙,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험악한 얼굴로 문을 열고 선 칼릭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옆에서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존재 때문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아셀라?”

    여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을 처음 뵙네요. 아셀라 베네비토예요.”

    “마, 만나서 반가워요.”

    유디트는 아셀라의 미소에 그대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시에 감격했다.

    ‘그 자그마하던 꼬마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다니.’

    칠 년 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서럽게 울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은빛 머리칼에 푸른 눈. 아델을 쏙 빼닮았지만 동그랗고 순한 눈매는 아버지인 클라우드를 닮았다. 메리엘의 말로 미루어보면 아마 성품도 그러할 것이다.

    더불어 저따위 성질머리 더러운 대공에게 이 예쁘고 착한 아이가 가당키나 하냐는 생각과 함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뭐 하나. 들어오도록.”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디트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제 앞에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칼릭스가 한쪽 팔로는 아셀라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아셀라의 손을 잡고 걷는 탓이었다. 거의 부축에 가까운 자세였지만 그건 유디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저 늑대 같은 놈이!’

    분명 사이가 소원하다고 들었건만. 며칠 사이에 저 음흉한 대공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내를 홀랑 잡아먹으려 드는 게 훤히 다 보였다.

    ‘메리엘도 없으니 때는 이때다 싶었겠지.’

    유디트가 칼릭스의 간교함에 치를 떨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사이 아셀라를 부축한 칼릭스가 그녀를 소파에 조심스레 앉혔다. 그리곤 자연스레 옆에 나란히 앉으려 하자 유디트가 막아섰다.

    “대공께서 맞은편에 앉으세요. 비전하의 몸을 살펴야 하니까.”

    아셀라의 앞이라 존대였다.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칼릭스가 눈을 예리하게 빛내자 순간 움찔했으나 굴하지 않고 턱을 빳빳하게 세웠다.

    짧게 헛웃음을 친 칼릭스가 몸을 일으켜 반대쪽에 앉았다. 유디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셀라의 옆에 앉았다.

    “비전하. 지금부터 제 신성력으로 비전하의 몸을 살피며 악몽의 원인을 찾을 거예요. 운이 좋다면 비전하의 잃어버린 기억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고요.”

    칼릭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셀라도 놀라진 않았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나요?”

    “네.”

    유디트가 아셀라의 이마를 덮듯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흰 빛이 아셀라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디트가 동작을 멈추었다. 뿜어져 나오던 신성력도 뚝 끊겼다.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거 이상한데.”

    도주하는 대공비 90화

    “성녀님?”

    “성녀, 무슨 일이지?”

    의아하게 묻는 두 사람을 향해 유디트가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

    “잠깐만요. 다시 제대로 해볼 테니까.”

    유디트가 신성력을 방출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희고 밝은 빛이었다.

    빛 덩이가 완전히 아셀라의 몸을 감싸고 난 뒤, 유디트가 무엇을 찾는 것처럼 빛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잡아 홱 낚아챘다.

    흰 빛무리 사이로 잡혀 나온 건 새카만 줄이었다. 아셀라가 제 심장에서 뽑혀 나온 검은 줄에 놀라 크게 숨을 삼켰다.

    유디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씹어뱉듯 말했다.

    “흑마법.”

    칼릭스가 몸을 굳혔다. 이내 그의 시선이 유디트의 손에서부터 검은 줄로, 이윽고 아셀라의 심장께까지 다다랐다.

    “그랬군.”

    칼릭스가 헛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간단한 답을 지금껏 찾지 못했다는 게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피를 이은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황위를 쥔 자였다. 능글맞은 얼굴 뒤로 똬리 튼 뱀 같은 속내를 숨긴 자였다. 그런 자가 멀쩡한 마법만을 쓰리라고 생각하다니.

    “페르난데가 흑마법사였어.”

    일순 침실에 적막하리만치 정적이 찾아왔다.

    유디트는 순간 멍해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당혹감에 존대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고 반말부터 튀어 나갔다.

    “대공, 지금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소린지 알고 있어?”

    제국에서 흑마법은 금기였다. 사악한 술법으로 규정되어 마법의 시전은 물론이고 가르치고 익히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흑마법을 사용되다 발각되면 즉시 사형이야. 그런데 황제가 흑마법사라니, 아무리 대공이어도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했다간…….”

    유디트를 향해 무언가가 휙 날라왔다. 재빨리 낚아챈 그녀의 눈에 반쯤 우그러진 단추가 보였다.

    “뭐야? 이걸 왜 대공이 갖고 있어?”

    유디트가 단추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성녀님께서도 이 단추에 새겨진 문장의 의미를 아시나요?”

    옆에서 들려온 아셀라의 목소리에 유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극비정보이긴 한데 속칭 황제의 개라고, 황제가 부리는 직속 조직의 문장이 이거거든요.”

    아셀라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얼 생각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 단추는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범인의 증거로 주셨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유디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윽고 두 사람의 말뜻을 알아들은 그녀의 얼굴이 아연함으로 물들더니 나중에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아델 님을 죽인 게 황제라고?’

    유디트가 도로 줄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오닉스처럼 반짝거리는 줄은 줄이라기보다는 마치 탄력 있는 금속 같았다. 새로 칠을 한 것처럼 불길한 검은 빛으로 번뜩거렸다.

    유디트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황제가 적이었어.”

    깨달음은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못 찾은 거였어.”

    하르메니아 제국은 여신의 가호 아래 세워졌다.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울 때 여신의 은총이 그를 수호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많은 역사서에 남아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황실이 신전의 세를 경계하면서도 대놓고 배척하지는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유디트가 황제를 의심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여신의 은총을 입은 핏줄이 감히 사악한 흑마법에 손을 대다니.”

    모든 편견을 걷어내고 생각했다면 쉬이 찾을 수 있었던 문제였다.

    신관이 살해되고 신전의 기밀 정보가 속속들이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범인은 거의 완벽하리만치 흔적을 은폐하며 움직였다. 일반적인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불빛에만 집중한 나머지 등잔 밑의 어둠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감쪽같이 속았던가. 유디트가 망연함마저 느끼던 때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기억 속에선 달라요. 제 어머니를 해친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던 아셀라가 칼릭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셨거든요.”

    “뭐?”

    유디트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녀는 아셀라가 대공을 무서워했던 이유를 단박에 깨달았다.

    “여러 차례 같은 악몽도 꿨었고요. 그런데 아까는 달랐어요.”

    아셀라가 차분히 꿈을 털어놓았다. 두 번째 설명이었기에 아까보다는 훨씬 더 침착하게 말을 마쳤다.

    “그랬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모든 설명을 들은 유디트가 제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 로샨 님과 나는 아델 님을 죽인 사람이 필립이라 확신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증거가 나오질 않았죠.”

    치솟는 분노에 몇 차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말을 이었다.

    “범인이 황제라면 모든 이유가 설명돼요. 생각해 보면 황제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죠. 이능자를 해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것도 아델 님 같은 강력한 이능자라면 더더욱. 그걸 왜 지금껏 몰랐을까?”

    유디트가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으리라 여겼던 범인은 양지바른 곳에서 그들을 우롱하듯 사악한 짓들을 벌여오고 있었다.

    “페르난데가 아셀라의 기억에 손을 썼다고 추측했어. 그걸 알아내기 위해 그대와 마탑주를 부른 거였고. 그런데 흑마법이었군.”

    칼릭스가 검은 줄을 바라보며 고저 없이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으나 유디트는 알았다. 대공이 서슬 퍼런 살기를 애써 갈무리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성녀님, 이 줄을 끊는 방법은 없나요?”

    “그게…….”

    유디트가 망설임 끝에 답했다.

    “별 소용이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이 줄은 흑마법의 시전자가 희생자를 쉽게 조종하려고 추가로 달아놓는 장치에 불과하거든요.”

    “그렇다면 주술 자체를 파훼하면 되지 않나?”

    칼릭스의 물음에 유디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 그래서 흑마법이 사악한 술법이고.”

    그녀의 얼굴이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같은 마법에 당한 사람들을 여럿 본 적이 있어. 모두 신관이었지. 일단 주술이 한번 발동되고 나면 희생자가 죽기 전까진 해제가 안 돼. 다만…….”

    유디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번에는 감지해 낼 수 있었던 거지?’

    신전에서 신관들이 죽어갈 동안 유디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죽고 나서야 사악한 술식의 흔적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마치 발견해 달라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주술의 흔적을 곧바로 잡아챌 수 있었다.

    ‘혹시?’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힘을 흘려보낸 유디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셀라의 몸에 남겨진 다른 흔적을 찾아냈다.

    이제는 너무나 미미하게 남아 있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나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의미하는 건 분명했다.

    “아델 님의 마법이야! 그래서 눈치챌 수 있었던 거였어!”

    유디트가 소리쳤다. 그녀의 어둡던 얼굴이 약간 밝아져 있었다.

    “아델 님이 황제의 주술을 알아챈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보호 마법을 덧씌웠을 거예요.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해도 힘이 상충 되면서 흑주술의 효력이 약해질 테니까요.”

    “어머니께서 절 위해…… 보호 마법을 걸어주셨다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비전하께서 버틸 수 있었던 걸 거예요. 왜냐면 제가 본 다른 희생자들은 모두…….”

    유디트가 말끝을 흐렸으나 의미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칼릭스가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를 짚어냈다.

    “아델이 보호 마법을 걸었다기엔 시기가 맞질 않아. 페르난데가 아셀라의 기억을 조작한 건 아델의 사망 직후일 텐데.”

    유디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셀라를 바라보는 눈이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아니. 흑마법은 그때 처음 걸린 게 아닐 거야.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주술의 첫 발동 시기가 최소한 십 년 이상이거든. 기존에 심어놓은 흑주술을 통해 암시를 집어넣어 기억을 조작했을 거야. 그리고 내 짐작으로는…….”

    유디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능의 그릇은 둘이었으나 하나는 채 개화하지도 못하고 져버린 것이다.

    아셀라는 그녀가 하려다 만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 흑마법이 제가 이능을 각성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군요.”

    “……맞아요.”

    유디트가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과 이능의 무각성. 자연히 두 지점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강력한 마법이에요. 술식이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도무지 깰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아마 마탑주가 오더라도 파훼는 불가능할 거예요. 방법이 없기에 아델 님께서도 보호 마법을 덧씌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걸 테고요.”

    설명이 끝나고 나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유디트는 제 잘못이 아닌데도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다 아셀라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그 술식을 제게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황제의 흑마법을요?”

    “네.”

    “굳이 왜……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닌걸요.”

    “보고 싶어요.”

    어머니의 마법도 거기에 함께 있을 테니까요. 아셀라가 희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디트가 잠깐 주저하다 몸을 일으켰다. 아셀라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실을 붙잡은 채로 방 중앙에 섰다.

    그새 아셀라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칼릭스는 아내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등허리를 부드러이 감쌌다.

    아셀라는 잠시 멈칫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덕분에 작은 안도감마저 들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내가, 그리고 성녀도 있잖나.”

    아셀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시작할게요.”

    유디트의 손끝에서 아지랑이처럼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정신을 집중한 그녀의 관자놀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내 검은 실에서부터 새카만 무언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방 안을 거의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원형 마법진이었다.

    형체를 갖춘 마법진은 가장자리부터 안쪽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문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은 의미를 알아보기 힘든 문양이었고 짐작되는 것마저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악한 모양이었다.

    그 괴기스러움에 아셀라가 숨을 들이켰다. 칼릭스가 그녀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충격으로 흔들리던 아셀라의 눈에 다른 것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잎사귀 하나가 톡 움트더니 초록색 덩굴이 뻗어나 마법진의 글자 하나하나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법진이 초록빛으로 뒤덮이고 곳곳에 붉은 꽃망울이 생겨났다. 그리고 잠시 뒤.

    “아……!”

    장미꽃이 만개했다.

    “비전하.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장미꽃은…….”

    “어머니의 상징. 가장 좋아하셨던 꽃이었죠.”

    아델의 마법을 바라보는 아셀라의 눈에 그리움이 차올랐다. 조금 전까지 흑마법진이 뿜어내던 사악한 기운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검은 줄을 타고 제 심장 근처까지 뻗은 초록 넝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가장 가까이에 피어난 붉은 장미꽃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검은색 줄에 변화가 일어났다. 색소가 빠지는 것처럼 색깔이 연해지더니 팽팽하고 탄력 있던 줄이 급속도도 얇아졌다.

    급기야는 가루로 바스러져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91화

    유디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셀라 곁으로 다가갔다.

    “비전하, 조금 전에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꽃을 만진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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