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71)
  • 네 귀퉁이에 고운 자수가 보였다. 아마도 직접 놓은 것인 듯했다.

    ‘찾으러 올까.’

    정성 들인 수를 보아 어쩌면 흘린 사실을 알고 다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적당히 벤치 위에 올려두고 가면 되리라.

    그러나 행동에 옮기려던 순간, 그는 주저하고 말았다. 그냥 놓고 돌아서면 될 일인데 묘하게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저를 찾아 뛰어오는 라이젠을 발견하곤, 손수건을 제 손안으로 말아 쥐어 숨겼다.

    그렇게 가져온 것을 서랍의 비밀 공간에 감추듯 넣은 게 이 년 전의 일이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겐 처리할 일이 산적해 있었고,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그때의 기억도 순식간에 잊혔다.

    다시 떠올린 건 최근의 일이었다. 아셀라가 서재에서 떨어뜨린 손수건을 넣으려다가 보관된 손수건을 찾은 것이다.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막상 지금까지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하, 가볍게 한숨을 쉰 칼릭스가 상자에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끄트머리를 매만지기를 한참, 어렵사리 뚜껑을 덮었다.

    그렇게 비밀 공간에 상자를 도로 밀어 넣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라이젠입니다.”

    대공가의 충직한 신하가 그를 급히 찾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87화

    18. 밝혀지는 진실

    동도 트지 않은 시각.

    수하의 보고를 받기엔 일렀으나 칼릭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라이젠이 이리 찾아올 정도면 시간이 문제가 아닐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다만 괜스레 아셀라가 신경 쓰였던 탓에 마고더러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라 명하고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집무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칼릭스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라이젠이 가져온 건 무척이나 뜻밖의 정보였다.

    “후작가의 가계도?”

    “예.”

    황제와의 거래대로, 샤르투스의 멸문 후 후작저는 베네비토에 귀속되었다.

    수도에 있던 대공가의 권속들이 저택에 남겨진 기록과 자료를 정리하던 중, 숨겨진 비밀 공간을 발견한 게 불과 어제 아침이었다.

    샤르투스의 가주만 접근할 수 있도록 복잡한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던 탓에, 카르마의 마법사 상당수가 매달려 술식을 풀어내야 했다.

    마침내 열린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책장과 가구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자국과 흔적들이 보였으나 다 들어내 버린 것인지 없었다.

    목제 상자 하나에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두꺼운 책 한 권만이 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선대 샤르투스 후작이 훗날 장소가 발각될 것을 대비해 모든 자료를 미리 폐기한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다.”

    칠 년 전 습격 사건이 있었던 당시, 둘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썩 몸이 좋지 않았던 아델은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 미리 준비를 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황제가 후작가를 노리고 있는 걸 아델이 몰랐을 리가 없으니.”

    아델의 재혼을 두고 세간에선 결혼의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소문은 첫 남편 클라우드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아델이 필립의 적극적인 구애에 넘어갔다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그 어리석은 선택 탓에 샤르투스 후작가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넘어갔다고 여겼다.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이 샤르투스의 이름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습격 사건이 있기 불과 몇 달 전, 칼릭스는 신년 연회에 참석했다가 아델과 필립이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내가 폐하를 찾아뵈면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협박하는 거야?’

    ‘거래를 잊지 말라는 충고지.’

    명백한 비웃음이 깔린 목소리였다.

    당시 대공자였던 칼릭스는 그 대화를 흘려넘겼다.

    정치적 목적의 결합은 귀족 간에 흔히 벌어졌고, 무엇보다 샤르투스 일가의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델이 원했던 결혼이든 아니든 그와는 상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이 그를 용병으로 내돌려 전쟁터를 전전하게 하면서 그때의 기억은 거의 잊혔다.

    아델이 습격으로 사망하고 후작가가 사실상 필립과 황제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었다.

    “황제가 아델을 압박해가며 필립과의 재혼을 추진시켰어. 무엇을 빌미로 협박당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델은 이에 응했고.”

    지금까지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시 아델이 황제와 필립을 경계했다면 언제 발각될지 모를 자료를 남겨둘 리 만무했다. 특히나 가문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결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더더욱.

    “그런 상황에서 가계도 만큼은 남겨두었다…….”

    “예.”

    책상 위로 붉은색 가죽 표지의 두꺼운 양장 책이 놓였다. 샤르투스 후작가의 계보였다.

    방계의 정보까지 기술된 탓에 복잡했던 초반부의 가계도는, 중반부를 넘어서부터는 간략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칼릭스의 손이 멈추었다.

    ‘아델 샤르투스.’

    배우자였던 클라우드를 비롯해 아셀라와 메리엘도 계보에 올라 있었다. 이를 유심히 보던 칼릭스가 낮게 읊조렸다.

    “이상하군.”

    “무엇이 말씀입니까?”

    “이름 외엔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잖나. 하다못해 생몰 연도도 없어.”

    “아델 후작이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빠뜨린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페이지가 뚫어질 듯 쳐다보던 칼릭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전하?”

    그가 벽에 걸린 등에서 빛을 뿜어내는 마정석을 빼내어 자리로 돌아왔다. 힘을 주자 설탕 덩어리처럼 부서진 가루가 종이 위에 쏟아졌다.

    그가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인 초를 가루에 가져다 댄 순간, 라이젠이 작게 탄성을 냈다.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숨겨두었던 거로군요!”

    아델이 예지와 마법의 두 가지 힘을 가진 강력한 이능자였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반짝거리는 글씨를 보던 라이젠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생년월일을 적기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했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러난 내용은 네 사람의 생년월일뿐이었다. 클라우드의 사망일만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아주 중요한 정보다.”

    칼릭스의 적안이 예기로 빛났다.

    ‘과연. 그래서였나.’

    메리엘 록트린의 이능 각성과 관련해 지금껏 가졌던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메리엘 록트린의 생일이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전이다.”

    “예?”

    숫자를 확인한 라이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이미 열 살 생일이 지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능이 발현된 거였군요.”

    “게다가 메리엘 록트린이 태어나던 날 클라우드 역시 살아 있었고.”

    칼릭스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 클라우드의 사망일은 정확히 메리엘이 태어난 다음 날이었다. 유복자로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놀라움에 라이젠의 입이 벌어졌다.

    “선대 샤르투스 후작이 일부러 메리엘 록트린의 출생을 숨겼어.”

    “하나 그럴 이유가 딱히 없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알아내야지.”

    어디서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황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칠 년 전이 아니라 최소 십 년 전부터. 아니, 가능하다면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페르난데가 아델을, 그리고 샤르투스를 노린 건 어쩌면 훨씬 이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행적을 재조사해. 처음부터 되짚을 필요가 있겠어.”

    그 오랜 시간 페르난데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샤르투스를 물고 늘어졌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 뱀 같은 속내로 어떤 짓을 벌였든 간에 남김없이 찾아낼 생각이었다.

    “일의 진척이 있는 대로 꼼꼼히 보고하라.”

    “예, 전하.”

    명을 내린 칼릭스가 막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성벽을 방비하던 기사단장이 급히 그를 만나길 청했다.

    “무슨 일이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에 칼릭스가 미간을 좁혔다. 성문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기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인의 말에 답했다.

    “신전에서…… 성녀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 * *

    새벽녘에 대공성을 찾아온 성녀는 혈혈단신 혼자였다. 마차도, 호위기사도 없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의 새하얀 의복 하며 특유의 연분홍색 머리칼과 금빛 눈이 그녀의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성녀의 때아닌 방문에 기함했다. 그들의 반응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유유히 걸어온 성녀는 동생 방 문을 노크하듯 성문을 똑똑 두드렸다.

    결국, 내성의 방비를 맡던 기사단장이 실례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대공을 찾는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차례 홍역을 치른 뒤 칼릭스와 유디트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라이젠이 엄선한 질 좋은 차가 두 사람 앞에 놓였으나 당연히 둘 다 손도 대지 않았다.

    팔짱을 낀 칼릭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신전의 예의에 새삼 감탄했어. 기별도 없이 멋대로 남의 성에 들이닥치는 성녀라니.”

    물론 그런 도발을 참고 넘어갈 유디트가 아니었다.

    “협박 편지를 보내면서 찾아오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쯤이야.”

    칼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디트가 양쪽 입술을 한껏 끌어 올려 해사한 미소를 날렸다. ‘반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라는 의미를 담아.

    따지자면 그녀는 엄연히 신성국의 군주이기도 했다.

    “사람 가려서 예의 지키는 게 헤뷔움의 신조라서.”

    하, 칼릭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좋을 대로 해.”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릭스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돌변하자 유디트도 움찔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 혼자지?”

    “뭐?”

    “메리엘 록트린은 어디 있나. 분명히 함께 오라 전했을 텐데.”

    칼릭스의 눈빛이 일순 형형해졌다. 완전히 식어 내린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상대를 헤집을 듯 샅샅이 훑어내렸다.

    유디트가 헛숨을 삼키며 답했다.

    “메리엘은 마탑주와 함께 올 거야. 알겠지만 이능을 각성했잖아?”

    칼릭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얼마간 유디트를 관찰했다. 말의 진위를 가늠하는 눈빛이 매서웠다. 에일듯한 한기에 유디트가 신성력으로 몸을 데우며 말했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로샨 님이 원로들을 만나야 한다면서 마탑에 데려갔다고.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는 도착할 거라니까?”

    “로샨?”

    익숙한 이름에 칼릭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애써 한쪽으로 밀어 놓았던 어떤 사건과 관련해 무언가 실마리를 찾았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로샨은 신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자유로이 마탑의 원로를 만날 수 있단 말이지?”

    아차, 유디트는 자신이 그만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게, 그러니까, 아무래도 대신관이다 보니 인맥이…….”

    그러나 제 생각에도 변명이 영 옹색했다. 유디트는 그대로 접싯물에 코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뭐라도 입을 털며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 했으나 무의미한 시도였다.

    성녀의 변명 아닌 변명을 잠자코 듣던 칼릭스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결국엔 할 말이 없어진 유디트가 입을 다물자 서늘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더 해보지 그래.”

    칼릭스의 적안이 번뜩였다. 지금껏 은밀하게 로샨의 진짜 정체를 추적해 왔던 그는 지금이 둘도 없는 기회임을 알았다.

    “말해. 그 로샨이라는 신관의 정체.”

    대공성에 왔던 대신관 로샨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로샨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아셀라가 메리엘과 함께 외출했던 날,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사내.

    대공비에게 붙여두었던 호위 인원의 일부가 홀로 찻집을 나서는 남자를 쫓았으나 중간에 놓치고 말았다.

    마법의 잔해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후의 조사에서 그녀들을 태웠던 마부가 로샨이라는 이름을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했다.

    “신관이 아니라 마법사였나? 원로를 만날 정도면 고위급의 마법사일 테니 같은 원로급, 혹은 마탑주일 수도 있겠군.”

    거의 핵심을 파고든 칼릭스의 추리에 유디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어떻게 신성력을 쓰는 거지? 마탑의 일원이면서 신관이 되는 게 가능하나? 대공비를 치유할 여자 신관을 보내라 요청했는데 성별을 속이고 사내를 보낸 거였나?”

    칼릭스의 추궁이 쏟아졌다. 어쩐지 마지막 질문에서는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유디트는 눈치 빠르게 자신이 무얼 제일 먼저 답해야 할지 알아챘다.

    도주하는 대공비 88화

    “스승님은 여자야. 그건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

    그 말에 주변을 감돌던 첨예하리만치 날 선 기류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정확히 설명해.”

    대답을 요구하는 눈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유디트는 로샨에게 또 한 소리 얻어듣겠다는 생각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대공성에 왔을 때가 로샨 님의 본모습이었을 거야.”

    유디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눈치챘겠지만 그분은 신관이면서 마법사야. 정확히는 신관으로 지내다가 나중에 마력이 생긴 거고. 뭐, 신성력과 마력의 공존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 아델 님도 이능이 둘이었잖아?”

    유디트가 칼릭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극구 사양했는데도 마탑의 원로들이 말을 들어 먹지 않았거든. 그쪽 어르신들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서.”

    “그래서 마탑주가 되었군.”

    “지금은 아니지만. 알렌이라고, 쓸 만한 녀석한테 자리를 넘겼어.”

    쉼 없이 말을 잇던 유디트가 목이 탔는지 그새 다 식어 빠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여하튼 그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모습을 바꾸면서 돌아다녀. 스승님을 찾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나름 고충이 크다고.”

    그러니까 하필이면 젊은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로샨을 아셀라가 우연히 마주친 셈이었다.

    ‘알고서 이야기를 나눈 거였나.’

    하기야 아내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고 모르는 사내와 그리 자연스레 담소를 나눌 성격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그간 꽤 비이성적인 오해를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들었더라면 이리 빙빙 돌 필요도 없었을 것을. 조사니 추적이니 미련한 짓을 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마탑주까지 부른 이유가 뭐야?”

    유디트의 물음에 칼릭스가 생각을 멈추고 답했다.

    “아셀라의 악몽 때문이다.”

    “악몽?”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주 심한 악몽을 꾸고 힘들어해.”

    언제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을 수 있을지, 칼릭스의 주먹 쥔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더불어 아셀라의 기억에 문제가 있어.”

    “기억이? 정확히 어떻게?”

    돌연 유디트의 얼굴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해졌다. 칼릭스가 자세히 설명하려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전하!”

    얼굴빛이 새하얘진 마고가 문을 벌컥 열고는 외마디 말을 토해냈다.

    “전하, 비전하께서……!”

    ‘아셀라!’

    칼릭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 * *

    아셀라가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눈과 통통한 뺨, 긴 은발에 벽안을 가진 아이는 익숙한 이였다.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또 그 꿈이야.’

    열 한 살의 어느 날, 정원을 걷는 아이.

    항상 똑같은 꿈의 시작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아이의 몸속이 아니라 제삼자의 시선으로 지켜본다는 것 정도일까.

    아셀라가 손을 꾹 말아쥐었다.

    ‘이제 더는 꾸고 싶지 않아.’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음에 기뻐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이가 별안간 흠칫 몸을 떨었다. 푸른 눈망울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더니 몸을 돌려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아셀라가 고통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뒤를 따랐다. 달린다 한들 아이의 보폭인지라 따라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숨이 헉헉 들어찰 때까지 달린 아이가 우뚝 멈추어 섰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광경, 그리고 죽어가는 어머니.

    어머니를 붙들고 애처롭게 우는 아이의 모습에 아셀라의 눈이 습윤하게 젖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는 아이와 죽어가면서도 딸을 달래는 어머니. 아셀라가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아…… 셀라…….”

    유언을 남기는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 그마저도 너무나 다정하여 눈물이 왈칵 솟았다.

    “페르난데 그자를, 황제를 조심해…….”

    ‘뭐라고?’

    아셀라의 몸이 굳었다.

    그건 아델을 힘껏 껴안고 있던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미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돼. 너와 메리엘 모두 위험해질 거란다……. 꼭 기억하거라. 메리엘이 살아야 너도 살아. 둘이서 꼭 살아남겠다고 약속해 주렴…….”

    얼어붙었던 아이가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에 정신을 차렸다. 새카만 단추였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격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이가 제 목에서 펜던트를 꺼내 열고선 안에 단추를 밀어 넣고 닫았다.

    그러자 처음부터 뚜껑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틈이 사라지며 표면이 매끄러워졌다.

    주인이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는 펜던트였다. 누가 억지로 열려 시도하면 아예 파괴되어 버렸다.

    “내 아가…… 네게 너무나 큰 짐을 지워서 미안해…….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어미를 용서하렴.”

    피에 젖은 길쭉한 손이 아이의 정수리를 쓸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안타까이 딸의 뺨을 매만지던 아델이 크게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어머니!”

    “잊지 말아라…… 황제가…….”

    우리의 적이란다. 마지막 말과 함께 아델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가쁘게 오르내리던 가슴은 이제 완전히 멈추었다. 아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어미를 눈으로 바삐 훑었다.

    “어, 어머니…… 어머니…….”

    아이의 애처로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아셀라가 충격에 비틀거렸다. 곁에 있던 나무 기둥을 가까스로 붙잡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혼란스러움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여기 있었구나.”

    음산한 목소리에 아셀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음울하고 불길한 잿빛 눈의 남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아셀라의 눈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저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제국의 정점, 하르메니아의 주인. 그는 황제였다.

    중년인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그가 죽은 아델, 정확히는 그 옆의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조금 전 아델이 남긴 말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황제가 잿빛 눈을 번뜩이며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그의 입술에 차가운 비소가 스쳐 지나갔다.

    도로 시선을 옮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표정을 얼굴에 두르곤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여운지고. 어미가 죽어 슬픈 모양이로구나. 이리 오련.”

    아이가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내뺐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티 나는 거부반응에 페르난데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휘어졌다.

    “이런.”

    “…….”

    “아델이 죽기 전에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아셀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제가 무언가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아이를 보던 아셀라가 급히 발을 떼었다.

    당장 아이를 저 흉악한 인간에게서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

    그러나 곧바로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단단하고도 견고한 벽이었다.

    벽 너머가 깨끗하게 비치는데, 말소리도 생생하게 들리는데, 더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셀라!”

    그녀가 아이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나 벽 너머의 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셀라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력하게 벽 건너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아델이 알려주더냐? 내가 저를 죽였다고 말이다.”

    아셀라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이가 목이 졸린 것 같은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몸을 떨어댔다.

    페르난데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치가 따로 없군. 고작 열한 살짜리 계집에게 그걸 밝혀 무얼 할 수 있다고.”

    죽은 자를 한껏 비웃은 그가 싸늘히 얼굴을 굳혔다.

    “덕분에 귀찮은 짓을 하게 되었어.”

    페르난데가 저를 피해 주춤주춤 몸을 뒤로 물리는 아이의 팔을 홱 잡아챘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앞으로 끌려온 아이가 엎드리듯 땅에 처박혔다.

    “아악!”

    밀려드는 아픔에 아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듯 찌푸려졌다.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은 아이가 팔로 눈가를 훔치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이의 몸 위로 새카만 연기가 누르듯 덮쳤다. 놀라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작은 몸을 단숨에 휘감은 연기가 밧줄처럼 몸을 꽁꽁 동여맸다.

    “이, 이거 놔!”

    붙들린 아이의 몸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가자 점차 몸에서 힘이 풀리며 눈이 몽롱해졌다. 암시의 시작이었다.

    초점을 잃고 완전히 흐리멍덩해진 눈을 확인한 페르난데가 제 입술을 한껏 찢어 웃었다.

    “잘 기억해 두어라, 아가야.”

    “…….”

    “네 어미를 죽인 자는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다.”

    움찔.

    반항하듯 아이의 몸이 튕겨 올랐다. 그러자 페르난데가 손에서 다시 검은 연기를 뿜어내 코와 입에 밀어 넣었다. 완전히 구속당한 아이의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델을 죽인 거야.”

    아이가 수긍하듯 눈을 느리게 한번 깜박였다. 암시가 완전히 들어 먹혔다는 증거였다. 그제야 페르난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친 아셀라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의 동공에서 오징어먹물처럼 검은 액체가 번져 나와 눈의 흰자위를 새카맣게 물들였다.

    온통 검은 마름모꼴의 눈이 지옥의 통로인 양 소름 끼치게 번들거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습하는 지독한 공포에, 아셀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황제의 비틀린 입매가 벌어지며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이야말로 네 어미의 유언이다.”

    * * *

    헉, 단말마의 신음성과 함께 아셀라가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급히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네 어미를 죽인 자는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팔딱거렸다. 전신이 미친 듯이 떨리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에 둔통이 일었다.

    ‘난 아델을 죽이지 않았어. 그럴 이유도 없고.’

    불현듯 자신은 아델의 죽음과 무관하다던 대공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꿈을 꾸게 된 걸지도 몰랐다.

    이전까지는 늘 대공을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에서 꿈이 끝나곤 했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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