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가 온실 문을 열며 그녀를 배웅했다.
“전하께서는 먼저 와 계십니다.”
“고마워요, 부인.”
아셀라가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메리엘과 산책할 때마다 들렀기에 익숙한 장소였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긴장만 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물이 흐르듯 조용하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쪽에서 두 인영을 발견한 아셀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대로 처리하라.”
“예, 전하.”
산책을 앞둔 잠깐의 시간에도 업무를 보는지 대공의 손에는 묵직한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어쩐지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아셀라는 숨소리도 죽이고 얌전히 기다렸다.
곧 라이젠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비전하, 오셨습니까.”
그제야 서류를 읽던 칼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의 눈이 평소보다 크게 뜨였다.
“……아셀라?”
무언가 충격받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붉은 눈동자가 못 박힌 것처럼 아셀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단지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몸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아셀라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긴장으로 잘게 경련하는 두 손을 맞잡았다.
‘마음에 들지 않나 봐.’
내리깔린 아셀라의 눈에 그녀가 입은 드레스가 비쳤다.
질 좋은 새틴으로 만들어진 오프 숄더 형태의 이브닝드레스였다. 어깨와 쇄골까지 다 드러나는 형태라 그녀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마고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이라며 그녀를 설득했고 아셀라는 망설임 끝에 받아들였다.
‘로메인 부인이 괜찮다고 했는데.’
그런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굳어졌던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니 도저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밀려드는 후회와 함께 아셀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을 때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85화
“와주었군.”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셀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어디서 그런 천박한 옷을 골라! 당장 다른 드레스로 바꿔입지 못해?’
어디선가 필립의 고함이 들리는 듯하여 아셀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셀라.”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엔 노기가 전혀 없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아셀라가 저를 향해 뻗어진 손을 보곤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에스코트의 의미.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턱짓으로 제 손바닥을 가리켰다.
“함께 걷지.”
아셀라가 머뭇거렸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는 동안 그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아셀라가 칼릭스의 손을 잡았다.
* * *
온실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셀라가 온실의 신비로운 식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손을 쥐었던 남자는, 어느 순간 제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우며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순간 어찌나 놀랐던지, 아셀라는 하마터면 짧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메리엘과 손잡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당최 그리 되지가 않았다. 밀착된 손가락 사이사이로 묘한 열기가 느껴져 더욱 그러했다.
“밤에 산책하는 건 처음인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칼릭스였다. 아셀라는 생각에 잠겨 바닥만 보고 걷다가 말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 걸음이 멎고 나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무심결에 들은 말을 기억해 내곤 얼른 답했다.
“네, 처음이에요.”
“마음에 드나?”
아셀라는 이상한 질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에겐 자신의 기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을 텐데.
“그대가 이 온실을 좋아한다고 들었어.”
그제야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예쁘다…….”
한밤중의 온실은 아름다웠다.
주변엔 이제 갓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이 이슬을 머금은 채 피어 있었다. 공중에 방울꽃 모양의 등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빛을 뿜어냈다.
‘밤엔 또 이렇게 아름답구나.’
물론 그녀는 이 공간을 꾸미기 위해 불과 반 시간 전까지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어떻게 갈려 나가야 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셀라는 한동안이나 넋을 잃은 채 온실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그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던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
당황한 아셀라가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러다 칼릭스가 계속 저를 응시하자 결국 슬쩍 눈을 비껴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쩐지 그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건 두려움이나 거리낌과는 조금 다른, 생소한 감각이었다.
“저쪽으로 가서 앉지.”
칼릭스가 근처의 탁 트인 공간을 가리켰다. 아셀라를 의자에 앉힌 그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자리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아셀라는 한참이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먼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감사해요.”
“무엇이?”
“여기 오기 전에 로메인 부인과 만났어요.”
“아.”
칼릭스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당신에게 사과하지. 베네디토의 안주인으로서 마땅히 가질 권리를 그동안 주지 않았으니.”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짧은 시간, 아셀라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며 칼릭스의 행동에 대한 근거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듣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납득하기 힘든 이 모든 일의 이유를.
“무슨 의미지?”
칼릭스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지금까지는 당신이 이곳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겨서 미룬 거야. 이젠 적당한 때가 왔다고 판단했고.”
“하지만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잖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되돌아온 물음에 그녀가 멈칫했다. 어쩐지 구구절절 늘어놓기엔 망설여졌다. 그가 성가시다 여길 것 같았다.
“제가 도망쳤으니까요.”
그래서 짧은 문장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죄 담았다.
“그래. 내게서 도망쳤었지. 그대는.”
“…….”
“내가 싫어서.”
아셀라가 움찔했다. 거의 이성을 상실한 채로 쏟아냈던 말이 기억났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미쳤었나 봐.’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지켜왔던 비밀을 어떻게 그리 쉬이 털어놓았을까.
돌이켜보면 그보다 미친 짓은 없었다.
“솔직히 아직 확신하지 못했어.”
“어떤…… 확신이요?”
“그댈 거기서 꺼낸 내 결정이 옳았는지.”
아셀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칼릭스가 말하는 장소가 어딘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대공의 밀실. 그가 그녀를 가두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 했던 공간.
아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 다시 가두진 않으실 거지요?”
칼릭스가 평소보다 훨씬 깊어진 눈매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쩐지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옭아매지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이 약속만 지킨다면.”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더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말이 불러올 결과를 생각하기도 전에 아셀라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만약…… 어기면요?”
물음에 칼릭스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의 입가가 팽팽해지며 위로 슬쩍 휘어졌다. 왠지 모를 위험한 미소였다.
아셀라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선 안 될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만일 내게서 또 도망치다 잡히면…….”
잠시 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오싹한 말이 들려왔다.
“당신이 그 방에서 나올 일은 영원히 없을 거야.”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저 진득하고 질척한 감정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어쩐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어 아셀라가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일순 칼릭스의 적안이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번득였다.
“어차피 당신 입으로 약속한 일이잖나. 날 속이려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지?”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질문의 의도를 찾는 시선이 그녀를 샅샅이 훑어 내렸다.
“다시 도망칠 궁리라도 하고 있나?”
“그런 거 아니에요.”
아셀라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정말이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여기서 도망치지도, 저를 다치게 하지도 않겠다고요. 전하께 그런 질문을 한 건…….”
“…….”
“순간 궁금증이 일었던 것뿐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말을 마친 아셀라가 칼릭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숨길 게 없다는 양.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칼릭스가 눈매를 풀었다.
“그렇다고 해두지.”
그녀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지만 그렇게 주장하니 일단 두고 보겠다는 뉘앙스였다.
그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아셀라가 초조하게 물었다.
“메리엘을 도와주신다는 약속은 지켜주시는 거죠?”
“공식적 절차는 끝났어. 당신 동생은 적법한 록트린의 후계자야. 황실의 정식 공표가 있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했나?”
아셀라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들을 깨물었다. 정말 중요한 사항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괜찮으니까 말해봐.”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아셀라가 그제야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메리엘만은 살려주신다고 했던 약속은 지켜주시는 거죠?”
“또 그 소린가.”
칼릭스가 혀를 찼다.
“묻고 싶군. 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 자매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을 거지?”
하지만 아셀라는 답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유언이 거짓일 리는 없으니까.
‘어머니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분이셨어.’
칼릭스 베네비토를 조심하라던 말. 죽어가던 어머니가 험한 세상에 내던져질 어린 자매를 걱정하며 남긴 마지막 당부.
그걸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
“아셀라.”
평소보다 더 진지해진 얼굴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는 내 아내야. 베네비토의 하나뿐인 대공비고.”
아셀라가 눈을 끔뻑였다. 도저히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다.
대공비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는 하나 어차피 그녀의 위치란 바닷가의 모래성과도 같았다.
대공이 부서뜨리길 원하는 순간 짓밟혀 사라질, 혹은 파도에 휩쓸려 무너져 버릴 모래성.
‘……거짓말이야.’
그러니 대공의 말은 그저 현혹에 불과했다. 휘둘려 미혹되는 순간 끝이었다.
“못 믿겠다는 얼굴이군.”
“…….”
“어떻게 해야 그대가 여기서 안심하며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셀라가 칼릭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당신에게서 도망쳐 안전한 곳으로 떠나지 않는 이상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오직 당신에게서만 내 후계를 바란다면, 믿을 텐가?”
아셀라의 푸른 눈동자에 거센 동요가 일었다.
‘어째서…….’
하르메니아의 귀족에게 후계자는 특별한 존재였다.
저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가주들은 가문을 존속시키고 선조들의 영광을 이을 자신의 핏줄을 대부분 소중히 여겼다.
더불어 어떤 귀족 가문도 후계자를 둔 배우자를 내치지는 못했다. 설사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대부분은 상대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했다.
기어이 아셀라의 벌어진 입술 틈새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불과 조금 전 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대체 왜…….”
밀실에 갇힐 뻔했던 일로 남자가 그녀를 곁에 두려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말을 듣지 않는 애완동물을 뜻대로 길들이려는 것이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소유하려는 것 정도의 욕망이었다.
그렇기에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남자의 말은 지금까지 그녀가 지레 품어왔던 생각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그녀에게서 후계를 바란다는 건, 다시 말해.
‘당신은 내 아내야.’
그녀를 정말 배우자로 여긴다는 의미였으니까.
아셀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86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나치게 달콤한 설득이었다. 하지만 향기에 취해 꿀통인 줄 알고 몸을 던졌다간 그대로 수렁에 집어 삼켜지고 말 것이다.
속으면 안 돼. 믿으면 안 돼. 되뇌고 또 되뇌며 허벅지에 놓인 손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의식중에 손톱 밑 거스러미를 잡아 뜯고 있었다. 피가 방울방울 맺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전하.”
아셀라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휩쓸려 넘어가 버릴 것 같았다.
위험했다. 더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는 팽배한 긴장감에 그녀의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실은 몸이 좋지 않아서요. 오늘은 먼저 가봐도 될까요?”
“…….”
“신경 써주셨는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주치의를 부르라 이르지.”
“그 정도는 아녜요. 하루 정도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칼릭스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아셀라가 입술 안쪽을 말아 물며 차오르는 불안을 견뎠다.
“그렇게 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셀라가 몸을 돌렸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만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거였다.
“아셀라.”
동작이 멎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네, 전하.”
“내가 다시 그대에게 청하면 산책하러 나와줄 건가?”
또 이런 자리를 만들려 하나. 자꾸만 저를 흔들려는 의도가 무얼까. 달갑지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었다.
아셀라가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그럴게요.”
“다음에 보지.”
이번에야말로 아셀라는 서둘렀다. 고개를 까닥여 짧은 인사를 마치곤 황급히 뒤를 돌았다.
등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곧게 뻗은 중앙 통로를 따라 온실을 빠져나가는 내내, 그녀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 * *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땔감을 더 집어넣자 고풍스러운 벽난로에서 불길이 세게 치솟았다. 등 하나 켜놓지 않았으나 벽난로의 불꽃만으로도 사물을 식별하기엔 충분했다.
침실 공기가 조금 더 훈훈해지길 기다리며 칼릭스가 잠든 아셀라의 머리맡을 지켰다.
‘…….’
온실에서의 일을 찬찬히 곱씹는 사내의 적안이 점점 깊어졌다.
칼릭스는 결코 아내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그녀는 앞으로 평생을 그의 곁에서 그의 비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지금껏 칼릭스가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것. 그러나 아셀라가 바라는 건 그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겁을 주어 붙들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더 멀어지기만 했다. 그를 두려워하며 달아나려 했다.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메리엘 록트린을 인질로 잡는 건 그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그는 그녀를 공포심만으로는 곁에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고 방법을 바꾸었다.
‘비전하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곳이 비전하와 메리엘 아가씨에게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기면 정을 붙이실 겁니다.’
지난밤의 일은 마고의 간언을 받아들인 그 나름의 노력이었다.
조금이나마 안심하길 바랐다. 아델과 관련된 오해는 풀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그녀와 동생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더불어 그에게 다른 여자는 없으리라는 사실도.
‘부담스러웠던가.’
후계자를 원한다는 말을 꺼낸 건 그로서도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기는 했다.
지금의 칼릭스에겐 누구보다 후계가 중요했지만 그건 필요에 의해서였다. 아비가 그랬듯, 그도 자식에 대한 특별한 애정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았다. 베네비토의 다음 대를 이을 핏줄,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면.
아셀라가 낳은 아이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저 둘 사이의 아이라면 작은 관심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한 저보다 아내를 더 많이 닮았다면 그 애정이라는 것도, 어쩌면 품을 수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그렇기에 아이를 바란다는 말은 설사 충동적이었을지언정 마음에 영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셀라.”
평온히 잠든 아내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린 가슴께에 덮인 이불이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침대 옆 협탁에 피워둔 수면초가 보였다. 근심 걱정이 있을 때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마고가 피워둔 것이었다. 밤새 타오른 탓에 새벽녘인 지금은 반쯤 줄어 있었다.
그녀가 깊게 잠든 걸 확인한 칼릭스가 더는 수면초 연기가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뚜껑을 덮은 뒤 아내의 단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동그란 이마와 얇은 눈꺼풀, 말랑말랑한 뺨과 여린 입술을 차례로 매만졌다. 보드라운 살결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좋아 손놀림은 느리기만 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한참이나 쓸고 덧그리고 어루만진 끝에, 칼릭스가 몸을 일으켰다.
향한 곳은 침실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었다. 집무실만큼은 아니어도 견고하고 고풍스러운 책상이 있었다.
맨 아래 칸의 서랍을 연 그가 뒤쪽의 누름 장치에 손을 댔다. 주인을 인식한 장치의 걸쇠가 소리 없이 풀리며 비밀 공간이 열렸다.
안에는 상자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을 책상 위로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비밀 장소 안에 숨겨두었다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히 개어진 손수건이었다.
일전에 아셀라와 서재에서 마주쳤던 날, 그녀가 떨어뜨린 걸 지금껏 보관해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틈틈이 꺼내 본적도 여러 번이었다.
가끔 묘한 열망이 일 때 코를 처박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실 때도 있었다. 이미 남은 체취는 죄 사라지고 없었으나 그러고 있노라면 마치 아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손수건 끄트머리에 소담하게 핀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엄지로 그 부분을 느릿하게 쓸었다. 아내의 솜씨일 게 분명한 자수는 꼼꼼하고도 정갈했다.
조심스레 손수건을 들어 올리자 그 밑에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또 다른 손수건이 있었다.
어째서 보관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물건. 그러나 그는 이 손수건을 버리지도 태우지도 못하고 서랍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
“…….”
단 한 번.
아셀라를 결혼 전에 본 적이 있다.
결혼 기사에서 떠들어댔던 것처럼 황궁에서 벌어진 승전 기념 축하 연회 때였다.
그를 위한 연회라지만 결국은 황제의 치세에 벌어진 일이었다. 페르난데는 제 업적을 길이 남기고자 대대적으로 승전을 알리고 죄인을 특별사면하는 한편, 한겨울이었음에도 연회를 크게 열었다.
연회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칼릭스도 참석했다. 몰려드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은 피로했고 곧 성가셔지고 말았다.
그는 그들을 대충 치워내고는 시종의 쟁반 위에서 술잔 하나를 집어 테라스로 건너갔다.
문을 열자마자 한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연회장 특유의 뜨뜻미지근한 공기와 소음에서 벗어나자 잔뜩 머릿속을 들쑤시던 신경이 가라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테라스의 문을 걸어 잠갔다.
밤중의 황궁은 고요했다. 날씨가 원체 쌀쌀하여 연회장 바깥에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새 내린 눈 탓에, 겨울의 정원에는 서리가 낀 것처럼 눈이 살짝 덮여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서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독한 위스키가 입술 사이로 빨려들 듯 사라지고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도수 높은 술 특유의, 목이 타들어 가는듯한 느낌이 꽤 자극적이고 짜릿했다. 당연하지만 그는 여간해선 취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술을 비웠다. 컵 위쪽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 빙빙 돌리고 있자니 안에 남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역시 한 잔으론 어림도 없지. 아예 병째 집어오는 게 낫겠다며 몸을 바로 세우던 순간이었다.
“……?”
인기척이 났다. 칼릭스의 시선이 저절로 테라스 아래로 향했다. 잠깐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결치듯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긴 은발, 푸른색 유리구슬 같은 눈. 칼릭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챘다.
몸집은 훨씬 작았으나 제 어머니를 쏙 빼닮은 여자였으니까.
‘아셀라 샤르투스.’
데뷔탕트를 치른 지 얼마 안 되었다 했던가. 아직 소녀인 얼굴에선 앳된 티가 묻어났다. 연회 참석이 힘에 부쳤던지 약간 지쳐 보였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정원 한구석의 작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밋빛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미동도 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칼릭스는 붙박인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감싸 쥔 유리잔 안의 얼음이 손바닥의 온기에 녹아 물이 되어 있었으나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시간이 흐르고.
문득, 그녀가 무언가를 느낀 듯 몸을 움찔하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는 순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며 그의 자취마저 완전히 감추어 주었다.
그렇게 모습을 숨기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피할 이유가 없잖은가.’
어이없는 일이었다. 설사 여자가 저를 보았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고. 거리낄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는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이었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이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제 황당한 반응에 코웃음을 친 칼릭스가 가리던 커튼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시선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아까의 벤치였다. 그새 자리를 떴는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덮이듯 깔린 흰 눈 위에 난 자그마한 발자국이 보였다.
‘연회장으로 돌아갔나.’
하기야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이 추운 날씨를 버티기란 쉽지 않았을 터. 가볍게 실소한 그가 돌아서려던 때였다.
여자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아래, 하얀 눈 위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칼릭스가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 땅으로 뛰어내린 건 그다음 일이었다. 미처 의식할 새도 없었다.
보폭 큰 걸음으로 단숨에 여자가 앉았던 자리까지 걸어가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손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여자가 남긴 작은 흔적.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