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71)
  • 그러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쳤다.

    ‘잠깐. 대공성을 빠져나와?’

    일순 페르난데의 동작이 멈추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던 소리도 뚝 끊겼다.

    ‘그 유약하기만 한 계집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대공성에서 도망쳤다고? 그것도 아이까지 데리고?’

    대공성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나오기도 힘들었다.

    어찌나 철두철미하게 감시하는지 물샐 틈도 없었다. 사용인 대부분은 성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매일 드나들어 얼굴이 익은 이조차 병사들이 일일이 확인하여 내보냈다.

    “어이가 없군. 왜 지금껏 생각을 못 했지?”

    “폐하,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아라, 던컨.”

    게다가 악몽을 집어넣어 공포를 심어두기까지 했다. 머릿속을 죄다 헤집어놓았으니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하지도 못해야 맞았다.

    ‘어쩌면 둘째가 벌써.’

    페르난데의 얼굴이 급격히 싸늘해지며 잿빛 눈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던컨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그것들이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을까?”

    * * *

    헤뷔움의 대신전. 성녀의 집무실을 찾아간 로샨은 잔뜩 열이 올라 있는 유디트를 발견했다.

    그녀가 로샨을 보자마자 잘 왔다는 듯 팔을 붙잡고는 종이 한 장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스승님! 이걸 좀 보세요!”

    “유디트?”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로샨이 유디트에게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발신인이 칼릭스 베네비토라 적힌 서신이었다.

    ‘대공이 편지를?’

    내용을 죽 읽어 내려가던 로샨의 한쪽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이런.’

    그녀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이건 뭐랄까. 굳이 표현하자면 밀림의 사자가 옆 동네 호랑이를 건드린 격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83화

    로샨이 얼른 유디트를 달랬다. 헤뷔움의 성녀는 그 위대한 신성력 만큼이나 성격도 괄괄했다.

    “우리가 메리엘을 억류하고 있다니, 이걸 말이라고!”

    “공식적인 보호자가 아셀라잖니. 그 아이가 대공성에 있고.”

    “메리엘을 대공성으로 보내지 않을 시 직접 병력을 이끌고 헤뷔움까지 오겠다잖아요. 이게 무슨 요청이에요? 협박이지!”

    로샨이 한숨을 내쉬었다. 욱하는 유디트의 성질머리를 고려하고서라도 대공의 연락이 썩 신사답지는 않았다. 말투만 정중했지 내용은 반절 이상이 협박으로 가득했으니까.

    “그런 주제에 대공성으로 오라니. 누굴 부르면 꼬리치며 달려오는 강아지로 아냐고요!”

    “하지만 편지가 없었어도 대공성에 갈 생각이긴 했잖니?”

    로샨이 말의 허점을 정확히 짚었다. 때맞춰 메리엘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대공성에 찾아가 아셀라를 내놓으라며 한바탕 뒤집어엎고도 남았을 유디트였다.

    물론, 성내에 들어갈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건 그렇지만…… 아니, 필요하면 저가 오든가. 왜 나한테 오래?”

    유디트가 식식거렸다. 로샨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득했다.

    “그래도 가야지. 가는 김에 아셀라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잔뜩 구겨졌던 유디트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역시, 그렇죠? 그 오만하고 못 돼 먹은 인간을 만나야 하는 건 짜증 나지만-”

    “유디트.”

    “네. 그러니까 대공을 보는 건 싫지만요.”

    로샨의 지적에 유디트가 냉큼 단어를 순화하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메리엘이 아셀라를 많이 걱정하고 있어서요.”

    “겨우 함께 지내게 됐는데 그렇게 떨어지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아셀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죠. 메리엘이 무사히 도망치려면 자기가 남아야 한다고 여겼을 거예요.”

    작게 한숨 쉬던 유디트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로샨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메리엘과 함께 계셔야 하잖아요?”

    포털을 열고 신전에 들어왔던 날 밤, 메리엘은 다른 이능의 가능성을 닫고 마법의 힘을 택했다.

    각성의 여파로 메리엘은 지난 며칠간 시도 때도 없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식사하다가 꾸벅 존다거나 이야기 도중에도 부지기수로 멍해지곤 했다. 그래서 로샨이 예언의 방에서 메리엘을 돌보는 중이었다.

    “별일은 없는 거죠? 각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니 불안해서 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는 유디트를 향해 로샨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아니야.”

    “그럼 뭔데요?”

    “메리엘의 이능 각성이 끝났어.”

    “정말요?”

    유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세상에…… 드디어!”

    유디트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더니 안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아델 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유디트가 얼른 두 손을 깍지 꼈다. 진지한 태도로 여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그녀를 보며 로샨이 콧잔등을 매만졌다.

    이럴 때면 영락없는 신의 사도이자 헤뷔움의 군주였다.

    ‘저 성질머리만 죽여도 벌이는 사고의 절반은 줄어들 텐데.’

    로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기야 그럼 유디트가 아니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사이에 기도를 마친 유디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로샨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능력은 어때요? 아델 님의 딸이니 보통은 넘을 것 같은데.”

    로샨이 씩 웃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유디트의 얼굴이 확 펴졌다.

    “장난 아니군요?”

    “마탑의 원로쯤 되어야 그 아일 상대할 수 있을까.”

    “이야. 알렌이 탐내겠는데요?”

    그 말에 로샨이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짧게 탄성을 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구나. 실은 알렌에게서도 연락이 왔단다.”

    “그 꼬맹이가 웬일이래? 혹시 메리엘의 존재를 벌써 눈치챘나?”

    “그건 아니고, 대공이 알렌에게도 만나자고 연락한 모양이야.”

    “대공이요?”

    유디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마탑주랑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건 말하지 않았다는구나.”

    “정말 희한하네.”

    유디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녀가 받은 서신에도 오라는 말만 있었지 이유는 쓰여 있지 않았다.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로샨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아셀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뭐라고요?”

    유디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어디 다치게 한 건 아니겠죠? 이 망할 인간, 내가 가서-”

    “그랬다면 치료 신관을 불렀겠지.”

    금방이라도 대공성을 때려 부술 기세로 일어났던 유디트가 멈칫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그건 그렇네요’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마탑에 들렀다 대공성으로 바로 이동하실 건가요?”

    “그래. 메리엘이 마탑에 소속되려면 원로들을 한번 보기는 해야 하니까. 대공성에서 만나자꾸나.”

    “알겠어요. 그리고…….”

    유디트가 무어라 이야기를 더 꺼낼 듯하다가 도로 말끝을 흐렸다. 성녀를 오래 지켜봐 온 로샨은 그녀의 얼굴에 스친 걱정을 포착해 냈다.

    “유디트, 왜 그러니?”

    답지 않게 망설이던 유디트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스승님은 정말 대공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질문하는 유디트의 머릿속에 메리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공에게서 금빛 기류를 봤다는 게 정말이야?’

    ‘네. 언니랑 성에서 빠져나오던 날 낮에도 봤는걸요. 그리고 사실…….’

    머뭇거리던 메리엘이 덧붙였다.

    ‘지금은 색깔이 진해졌어요. 맨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요.’

    대공의 감정이 여전할뿐더러 이전보다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지어 샤르투스 가문을 제 손으로 멸문하던 시점에도.

    그 이후 메리엘이 록트린 가문으로 입적했으며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디트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대공이 아셀라를…….”

    “다른 건 몰라도 투시의 이능으로 보았다면 확실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요. 그 남자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혹은 그것과 비슷한 감정을 품다니.

    “전 지금껏 대공처럼 메마른 사람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로샨도 이 점에 대해선 굳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감정에 인색한 사람도 분노나 증오 같은 부정적 감정은 드러내게 마련인데 대공은 그조차도 드문 이였다.

    마치,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이게 잘된 일일까요?”

    “아직은 모르겠구나.”

    유디트의 물음에 로샨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인 그녀도, 성녀인 유디트도 미래만은 내다볼 수 없었다.

    하기야 예지의 힘을 가졌던 아델도 제 죽음은 못 피하지 않았던가.

    “직접 가서 만나본다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대공이 과연 변했는지. 달라졌다면 얼마나 달라졌을지.

    적어도 로샨은 한번 기대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 * *

    아셀라가 읽던 신문기사를 내려놓으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좋은 소식인지라 가져왔습니다.’

    라이젠이 가져온 건 수도에서 발행된 여러 신문이었다. 하나같이 일 면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록트린 가문의 새 후계자.]

    메리엘의 소식이었다.

    [……샤르투스 후작가가 멸문하기 전에 탈적이 이루어졌으며, 록트린 가문으로의 입적도 승인되어 승계에 어떤 지장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공의 약속대로였다. 메리엘은 이제 반역자가 아니었고, 한 가문의 어엿한 후계자가 되었다.

    아셀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런 자신을 책망했다.

    “안심하면 안 돼, 아셀라.”

    다짐하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믿어서는 안 된다. 그저 철저한 거래일 뿐인 행위에 마음을 놓아버려선 안 됐다. 그는 어머니를 죽인 사내였다.

    ‘하지만 메리엘을 구해주었는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아셀라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대공이 샤르투스를 멸문시키지만 않았다면 메리엘이 위험해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기사를 봤잖아. 필립과 안토니가 반역 음모를 꾸민 건 사실이었어. 대공의 손을 빌리지 않았더라도 샤르투스는 멸문했을 거야.’

    그래도,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미리 말해줄 수는 있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존중했다면 작은 언질 정도는 주었어야 했다.

    “착각하면 안 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아셀라는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언젠가 죽일 여자라서, 이용 가치가 다하면 버릴 여자라서, 그래서 그녀에게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것일 거라고.

    아셀라는 자꾸만 풀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중 담요 하나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밀실에서 덮고 나온 것이었다.

    저절로 지난밤의 일이 기억났다.

    그녀를 안아 든 칼릭스가 밀실 벽에 다가가 손을 짚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생겼다. 문을 통과하여 나온 공간은 아셀라도 아는 곳이었다.

    ‘여긴 전하의 침실이잖아요.’

    ‘그래.’

    대공의 침실 옆에 그런 밀실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아셀라가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칼릭스가 답했다.

    ‘실제론 방 옆에 붙어 있지는 않아.’

    ‘그럼 아까 만들어진 문은…….’

    ‘일종의 포털이야.’

    칼릭스가 간략히 덧붙였다.

    ‘그 포털을 작동시킬 수 있는 건 베네비토의 혈족뿐이고.’

    정말 밀실에 갇힐 뻔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오며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셀라가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동안 칼릭스가 침대가 있는 안쪽 공간으로 들어섰다.

    ‘전하, 문은 저쪽인데…….’

    ‘몸이 회복될 때까진 여기서 지내.’

    ‘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셀라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그, 그럼 전하는요? 어디서 주무시려고…….’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개미 소리만치 작아졌다.

    ‘어디냐니. 이만하면 충분히 넓은 침대 아닌가?’

    딸꾹!

    놀란 아셀라의 입에서 갑자기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딸꾹질을 멈추려 했지만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아셀라는 결국 칼릭스가 건네준 찬물 한 컵을 죄 들이켜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누가 보면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게 아니라 조금 놀라서…….’

    아셀라가 횡설수설 변명하자 칼릭스가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입을 열었다.

    ‘걱정할 거 없어. 난 다른 데서 잘 테니.’

    대공은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그녀를 두고 자리를 비운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내가 대공비의 방으로 돌아가면 될 일인데.”

    어쩐지 의도치 않게 대공의 침실을 빼앗아버린 기분에 아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84화

    “비전하, 마고입니다.”

    “로메인 부인!”

    아셀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서둘러 문까지 걸어간 그녀가 문을 밀어 열었다. 온화하게 웃으며 서 있는 마고가 보였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요. 부인.”

    얼른 그녀를 안으로 들인 아셀라가 마고를 소파에 앉히곤 자신은 맞은편에 앉았다.

    “비전하께서 저희를 살려주셨다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고의 말에 아셀라가 미안한 낯빛을 했다. 감사를 받기는커녕 자신이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비전하.”

    “건강은…… 괜찮은 건가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멀쩡합니다.”

    다른 이들의 안부까지 죄 물은 아셀라가 모두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공 전하의 침실에 출입을 자유로이 허락받은 시녀가 저뿐입니다. 혼자 비전하를 모셔야 하니 미흡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나, 불편하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셀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 때문에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고생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불편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샤르투스 저택에서의 경험 탓에 마고처럼 유능한 시녀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담소가 오갔다. 그러다 대화가 잦아들자 마고가 슬슬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비전하께 전해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내게 말인가요?”

    아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마고가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사용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저마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아셀라의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한눈에도 값비싼 무언가가 들어 있을 법한 크고 작은 상자며, 열쇠 꾸러미 등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셀라를 당혹스럽게 한 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쌓인 정체불명의 서류 더미였다.

    모든 일을 마친 사용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자 아셀라가 입을 열었다.

    “로메인 부인, 이게 다 뭔가요?”

    아셀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마고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비전하께 안주인의 권한을 일임하라 명하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놀란 아셀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마고의 눈짓에 사용인 하나가 아셀라의 근처로 다가왔다. 테두리가 금장된 화려한 상자를 열어젖히자, 세 단으로 이루어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마다 온갖 보석 장신구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보석들이 사방으로 반짝임을 흩뿌리며 아름답게 빛났다.

    “역대 베네디토의 안주인께 대대로 내려왔던 물품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마고가 열쇠 꾸러미를 집어 아셀라에게 건넸다. 모양이 조금씩 다른 금빛 열쇠가 총 다섯 개였다.

    열쇠 손잡이마다 마정석이 박혀 있었는데, 네 개는 투명했고 나머지 하나만 푸른색이었다.

    “가문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비전하의 전용 창고는 푸른색 열쇠로 구분되어 있으니 자유로이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걸 전하께서 제게 주신다고 하셨다고요?”

    “혹 열쇠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정석이 사용자를 인식하기에 비전하 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아셀라의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다음은 앞으로 비전하께서 관리하시게 될 내성의 일입니다.”

    마고가 쌓인 서류 더미 맨 위의 서류철을 집어 아셀라 앞에 내려놓았다.

    “확인해 보시지요.”

    아셀라가 떨리는 손을 뻗어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대공성의 재정 일람과 고용인들의 현황, 지출되는 예산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앞으로 모든 내성의 일은 비전하의 결재를 받은 후 진행될 예정입니다. 실무자들에게도 그리 일러두었습니다.”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정말로 대공이 그녀에게 안주인의 권한을 전부 넘겨준 거였다.

    ‘어째서 내게…….’

    불과 하룻밤 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랐다.

    대공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그녀를 밀실에 가둔 게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심지어 메리엘의 안위를 두고 계약을 빙자한 협박까지 했다.

    ‘결국엔 나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완전히 몸이 회복될 때까지 대공의 침실에서 머물라는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대공가의 안살림까지 맡으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비전하께서 대공성의 엄연한 안주인이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늦은 축에 속하지요.”

    기다렸다는 듯 답하는 마고의 말에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믿기지 않아.’

    허울뿐일 대공비 자리. 언젠가 죽임당하기 전까지 자리만 채우고 있다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그러려니 했었다.

    ‘필립도 아무런 기대 말고 얌전히 있으라 했었고.’

    베네비토 가문에선 내성의 일도 대공가의 가신들이 모두 도맡아 한다고 들었다. 원래 그렇다 하니 감히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자신은 팔려온 여자였다. 임시로 대공비 자리에 앉혀진 여자였다. 그런 주제에 안주인의 권한을 바란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조금 갑작스러워서요.”

    아셀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주인의 당혹감을 눈치챈 마고가 얼른 사용인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만 방 안에 남게 되자, 마고가 아셀라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비전하, 무엇이 곤란하신지요?”

    아셀라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한테 이럴 이유가 없는데…… 이해할 수가 없어.’

    아셀라가 조금 전의 일을 곱씹는 동안 마고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전하께서 왜 비전하께 내성의 일을 맡겼는지가 궁금하신지요?”

    속내를 정확히 짚은 마고의 말에 아셀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걸, 어떻게…….”

    “제 미흡한 소견입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마고가 눈꼬리를 휘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 비전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의미가 아닐는지요.”

    “…….”

    “아내로서.”

    아셀라의 물빛 눈동자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당신은 내 아내야.’

    떠오른 목소리에 아셀라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말은 그저 그녀의 마음을 놓게 하기 위한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난 아델을 죽이지 않았어. 그럴 이유도 없고.’

    ‘내가 왜 당신과 당신 동생을 해칠 거라 여기는 거지?’

    아셀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비전하께선 전하의 하나뿐인 비이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셀라가 엉겁결에 외쳤다. 마고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아셀라가 더듬거리며 말을 수습했다.

    “전하와 제 결혼은 가문에서 정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부인.”

    “비록 정략혼이어도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부부가 많답니다. 저와 제 남편도 그렇지요.”

    아셀라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그녀를 지켜보던 마고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정 그러시다면 대공 전하께 직접 여쭤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 아뇨. 그런 건…….”

    “오늘 산책 때 넌지시 물어보시면 자연스럽게 답을 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산책이요?”

    아셀라가 눈을 끔벅거렸다.

    “실은 조금 전 대공 전하께서 함께 산책하자는 연락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밖은 어둑어둑했다. 산책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지금 말인가요?”

    “곤란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어렵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고가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살피며 답했다. 아셀라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왠지 거절하면 마고가 곤란해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대공이 메리엘의 가문 입적을 도와준 상황에서 그의 제안을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리하실 필요는 없다는 언질이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아셀라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마고가 살짝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빠듯하지만 서두르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합니다.”

    마고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커다란 상자 하나를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메인 부인?”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진 아셀라를 향해 마고가 몸을 돌리며 답했다.

    “최선을 다해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마고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대공을 놀라게 할 생각을 하니 어쩐지 조금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발에 풀잎이 밟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가 완전히 저문 시각. 아셀라는 마고와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이 걷는 길 좌우로 마정석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덕분에 정원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환했다.

    아셀라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디며 생각했다.

    ‘괜찮을까.’

    그녀는 사실 제 모습이 어떤지 확인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대공의 침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로메인 부인이 알아서 잘해주었으리라 믿지만…….’

    직접 확인하지 못해서인지 조금 불안감이 들었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 책잡힐 정도는 아니어야 할 텐데.’

    아셀라가 대공의 반응을 걱정하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유리온실 앞까지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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