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71)

금방이라도 아이를 끌고 올 기세로 헤뷔움에 카르마를 보낸 대공이었다.

“일단은 대신전에 메리엘 록트린의 신병 인도를 공식적으로 요청해.”

“예, 전하.”

“나머지 조사는 어찌 되어 가고 있지?”

“아직은 특별히 보고드릴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최근 황궁 내 궁정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어 움직이기가 수월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어딘가에 페르난데가 흘린 흔적이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칼릭스가 의자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는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턱을 괴었다. 라이젠이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던 칼릭스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커튼으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가려진 방이었다.

대공의 침실. 그곳에 아셀라가 있었다.

라이젠이 조심스레 주인의 얼굴을 살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악마 같은 능력과 더불어 역대 베네비토의 대공들은 하나같이 소유욕이 강했다. 그건 제 아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정략혼으로 인한 철저한 계산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선대 베네비토 대공 중에는 대공비의 불륜이 발각되자 그 자리에서 내연남을 베어버린 뒤, 아내를 몇 년간 밀실에 가둔 자도 있었다.

알고 보니 무심한 대공의 마음을 흔들어보고자 가엾은 대공비가 벌였던 자작극이었으나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친구나 지인은 물론 가족과도 일체 만날 수 없었고, 드나드는 사람은 오로지 대공 자신과 시녀 한 명만이 허용되었다.

‘차라리 날 죽이세요!’

갇히고 난 후 몇 달이 지나자, 끔찍한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외치는 아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럴 순 없지. 당신은 앞으로도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 할 거야. 그댈 꺼내주지 않는 날 원망하고 두려워하면서, 매일 나만을 생각하게 되겠지.’

그의 말처럼, 외로움에 지친 그의 아내는 나중엔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매달렸다.

그 덕분인지 후손을 보기 힘든 베네비토 가문에서 무려 자식을 셋이나 두었다. 물론 둘은 나머지 한 명이 대공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었지만.

이렇듯 역대 대공 부부들은 대부분 평탄한 부부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껏 베네비토 가문에 사생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 흔한 정부나 추문도 없었다. 오히려 결벽적일 정도로 깨끗했다.

그건 그들이 특별히 정조 관념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였다.

‘후계자를 낳을 이도 아닌 여자와 왜 그런 불필요한 짓을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쪽 방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극도로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가문이었지만, 여인들 간의 티파티나 살롱에서 입으로 간간이 전해지는 소문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새신부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야 했으니까.

초야를 보낸 대공비들은 얼굴을 붉히기도, 말을 더듬기도, 애써 화제를 돌리기도 하는 등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으리라는 걸 추론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81화

모든 걸 다 갖춘 남자. 그러니 여러 흉흉한 소문 속에서도 베네비토 대공가는 늘 귀족 여성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혼처였다.

‘아마도 비전하께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베네비토와의 혼담을 원치 않는 제국의 가문은 아마도 딱 하나, 얼마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샤르투스 가문이었다.

베네비토는 표면적으론 대표적인 황제파 가문의 껍데기를 뒤집어썼고, 따라서 신전의 날개인 샤르투스와는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한때는 두 가문의 힘이 거의 비등했던 적도 있었으나, 현 황제 페르난데가 황위에 오르면서 힘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델이 습격을 받아 사망하면서 완전히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황제는 샤르투스의 핵심 가신들을 정계에서 잘라내는 것을 필두로 완전히 샤르투스의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필립을 적당한 자리에 앉혀두고는 샤르투스의 것을 하나하나 빼앗았다.

‘그런데도 그 멍청한 황제의 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

그 과정이 어찌나 철두철미했던지 필립은 대공이 자신을 방해한다는 속 편한 생각이나 했을 뿐이었다.

물론 칼릭스가 관여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와의 거래 탓에 적당히 손을 댄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대공은 샤르투스 가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라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아셀라 샤르투스의 열여덟 생일이 지나 그녀가 막 성년에 이르렀을 때였다.

칼릭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샤르투스 가문에 혼담을 넣으라 명했다. 비단 라이젠뿐만이 아니라 베네비토의 가신 모두가 그 결정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감히 주군의 뜻에 반기를 들기는커녕, 이유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 대공의 말이 곧 법이었고 명이 내려졌으니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아셀라 샤르투스가 아셀라 베네비토가 되었다.

‘그 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지만…….’

대공 부부가 제대로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라이젠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어서가 아니었다.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대공의 초야는 고작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

베네비토의 핏줄은 공통적으로 ‘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대공들은 자신의 소유라 낙인이라도 찍듯 제 아내를 품고 또 품었다.

그렇게 초야가 끝나고 나면 그들의 관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자식에게조차 냉정하고 잔혹한 혈족이었으나 그나마 아내에게는 유한 편이었다.

‘선대공께서 살아계실 적에 지금의 전하께 그토록 모질게 구셨던 것도 전부…….’

칼릭스를 낳은 선대공비가 출산으로 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 탓이었다.

어쨌거나 베네비토의 가신이며 사용인들이 대공비에게 깍듯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래서였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베네비토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녀의 아이가 곧 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거라는 건 확실했으니까.

라이젠이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칼릭스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감옥에 가두었던 자들을 풀어주고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

“예, 전하.”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명령이었다. 기실 칼릭스가 그들을 바로 처벌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기만 한 일부터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공비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막 전해졌을 때, 그녀와 관련된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라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공은 그들을 가두라 명하고는 일절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처사였다.

‘비전하를 신경 쓰신 거겠지.’

대공비가 마고를 비롯해 시녀들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칼릭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서 소식을 전해줘야겠군.’

어떻게 알았는지 대공령 경계를 지키던 로메인 백작이 소식을 듣고는 아내의 구명을 위해 탄원서를 올려 보낸 참이었다.

백작 외에도 감옥에 갇힌 가족을 걱정하는 귀족들이 여럿 있었다. 감히 대공에게 직접 말하진 못하고 라이젠에게 연락을 취해오기는 했지만.

“전하, 그럼 비전하를 원래 머무르시던 곳으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니.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내 침실에서 지낼 거다.”

“그럼 시녀들은 어찌하라 이를까요?”

“마고 로메인이 맡아서 시중들게 해. 나머지는 대공비의 방에서 아셀라가 돌아갈 때까지 준비토록 하고.”

“그리 이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이젠이 등불의 조도를 높였다. 해가 저물어가면서 방 안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주치의는 다녀갔다던가?”

“예. 비전하의 몸을 보할 약을 지어 올렸다 합니다.”

“이제야 그 게으른 작자가 일할 생각이 난 모양이군.”

라이젠은 가엾은 주치의에게 짧은 애도를 보냈다.

실력은 좋지만 눈치는 없던 사내는 대공 앞에서 ‘다행히 비전하께선 별문제 없이 괜찮으시다’라는 말을 뱉었다가 그야말로 칼릭스에게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탈탈 털려야 했다.

“점심 식사도 만족스럽게 하셨다 들었습니다.”

라이젠이 요즘 눈 밑이 꺼멓게 죽은 수석 요리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 역시 여러모로 라이젠에게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

때마침 라이젠의 회중시계가 울렸다. 칼릭스가 ‘차’를 마실 시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고, 식사 때가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저녁 식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침실에서 먹겠다.”

라이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그는 되묻는 대신에 대공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아셀라와 함께.”

라이젠은 하마터면 ‘하지만 그랬다간 비전하께서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실 텐데요’라고 엉겁결에 말할 뻔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로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어쩐지 선득해지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라이젠이 냉큼 답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주인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셀라가 저와의 식사를 그다지 반길 것 같지는 않다는, 그러한 생각을.

‘당신이 싫었으니까.’

칼릭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저 말에 꽤 충격을 받았다.

기실 아셀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단순히 그가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오해가 아니더라도, 칼릭스는 아셀라에게 괜찮은 남편은 아니었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꼬여 있었다. 정확히는 칼릭스가 샤르투스 가문에 청혼서를 밀어 넣던 그때부터.

‘미리 찾아가 언질이라도 해두었어야 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고자 한다고.

그랬다면 아셀라의 오해를 조금 더 일찍 알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도 해명할 기회가 있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결혼 전에 진실을 증명할 방법을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가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서신이라도 몇 차례 보낼 것을.’

그랬다면 적어도 결혼식을 앞둔 한 달간은 필립 부자의 학대에서 아셀라가 자유로웠을 것이다.

대공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고 여겼을 테니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터.

‘제가 여기서 어떤 처지인지 잘 알아요. 전하께 어떤 존재인지도.’

‘……전하의 전리품.’

첫 만남이나 다름없던 결혼식 날 그가 보여준 태도는 그녀가 어떤 기대도 품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칼릭스는 비참한 얼굴로 그때의 기억을 읊던 아셀라를 떠올렸다.

아물 새도 없이 찔리고 또 찔려 곪아 터진 상처를 체념하듯 내보이곤 울던 모습을 생각했다.

두려움과 상처뿐이었을 결혼 생활. 그러니 아셀라가 그를 싫어하며 피하게 된 건 거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도망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을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스스로를 결함품이라 칭하던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동생을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영영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곳으로.

‘또 시작이군.’

칼릭스는 심장 한구석에서 이는 아릿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도망쳤던 아내를 데려온 뒤로, 그녀를 생각할 때면 꼭 한 번씩 느끼게 되는 감각이었다.

사실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전쟁터에서 수년을 보냈던 그였다.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부상은 적지 않았다. 마취 없이 생살을 가르고 박힌 화살촉을 뽑아내거나 벌어진 살을 꿰매는 일도 종종 있었다.

덕분에 육체적 아픔 따위는 거의 이골이 날 만큼 났다. 여간한 고통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심장의 통증만큼은 너무도 생경했다. 마치 느리게 깜박이는 불빛처럼 찌릿하게 치고 올라왔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아픔이라고 표현하기 우스울 정도로 가벼운 통증이었으나 그때마다 다른 일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나와의 식사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

라이젠은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대답을 듣기 위한 말도 아니었기에 칼릭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럴 만한 힘도, 배경도, 능력도 있었다. 타인을 멋대로 휘두르고 주무르는 것도 가능했다. 애초에 카르마의 수장인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 제국 땅을 밟는 인간 중에 그의 손끝에서 놀아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존재하던가?

그러니 타인에게 무감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떤 일도 그에겐 감흥을 주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에겐 특별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은 날 죽이기 전에 가지고 놀고 싶었던 거겠지만…….’

그런데 어째서 뇌리에 박힌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 것인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얼굴도, 피를 쏟듯 제 감정을 토해내던 목소리도, 망설임 없이 목에 유리 조각을 찔러 넣던 모습도.

왜 잠들려 누워 눈을 감을 때면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떠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거 놔요!’

아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가 영원히 되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려 시도할 때마다 그의 심장이 아득히 내려앉았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젠.”

“예, 전하.”

칼릭스는 제 보좌관을 부르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라이젠이 의아하게 물었다.

“전하?”

칼릭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셀라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을 때, 마치 자신이 까마득한 나락으로 처박히는 듯했던 그 끔찍한 기분을.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돌이킬 순 없다.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는 그조차 시간만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칼릭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마고 로메인을 들라 해.”

도주하는 대공비 82화

황제, 페르난데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대공이 직접 그 도시까지 내려가 대공비를 데려왔다?”

“예, 폐하. 대공이 도시를 봉쇄하면서까지 일을 벌인 터라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습니다.”

“대공성에서 거기까지 얼마나 걸린다지?”

“질 좋은 말이 끄는 사륜마차가 지름길로 반나절을 꼬박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요즘 들은 이야기 중 제일 재미있군.”

페르난데가 감탄하듯 손뼉을 한 번 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정말 재미있어.”

그의 안면에 이렇듯 완연한 즐거움이 떠오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호위도, 수행원도 없이 동생과 단둘이 성을 빠져나간 대공비. 그들을 찾아 움직인 대공. 도시 전체에 내려진 봉쇄령.

어찌 된 일인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몇 가지 정보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대공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는 건 아니냐는 소문이 근방 귀족들의 입에서 은밀하게 떠돌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들 쉬쉬하고 있습니다만.”

“결혼한 지 한 달 남짓한 대공비가 도망을 쳤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페르난데가 입매를 팽팽하게 당기며 웃었다.

“암시가 꽤 잘 먹혀들었던 모양이구나.”

필립이 가져왔던 매개물로 주술의 끈을 질기게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끈이 시커멓게 변할 때까지 암시를 강화하고 끝없는 악몽을 주입했다.

그 와중에 샤르투스 가문이 멸문했으니 공포에 질린 계집이 대공에게서 도망쳤으리라.

“필립을 오래 살려둔 보람이 있었어. 덕분에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던컨?”

던컨이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페르난데가 묻는다고 하여 눈치 없이 제 생각을 입에 올릴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던컨이 황제의 많은 개 중에서도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심지어 그에겐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음에도.

“도망친 용기가 가상하기는 하구나. 방에 처박혀 벌벌 떠는 게 고작일 줄 알았건만.”

“…….”

“대공이 뒤처리하느라 애 좀 먹었겠어.”

대공이 도망친 대공비를 잡으러 그 먼 길을 직접 움직인 이유야 뻔했다. 여자가 이능 발현의 가능성이 있는 제 동생까지 빼돌려 같이 도망쳐서일 것이다.

‘답지 않게 공들여 손에 넣은 아이를 빼돌렸으니 찾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게다가 도망치며 쓸데없는 일이라도 벌이면 성가셔질 테고.’

페르난데의 입가가 절로 씰룩거렸다. 졸지에 귀찮은 일을 해야 했을 칼릭스를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런데 대공비가 머물렀던 여관 주인의 말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니?”

“두 사람이 함께 숙박하던 도중 대공비 혼자 여관에서 나갔다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방에는 아이가 없었고요.”

“여관 주인이 미처 보지 못한 거겠지.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이 수십 명일 텐데 그걸 어찌 전부 기억하겠느냐?”

페르난데가 짧게 일축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어떤 자인데. 그 아이를 놓쳤을 리가 없어.”

혹여나 샤르투스의 둘째에게서 이능이 발현될까 봐 결혼식 날 바로 필립을 구워삶아 탈적까지 시킨 자였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록트린 가문을 가져다 붙였다.

덕분에 메리엘 록트린은 샤르투스의 멸문 이후에도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차라리 첫째 계집을 버리면 또 모를까.”

페르난데는 제 생각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깝기는 하구나. 둘째를 빼내 올 좋은 기회였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대공령에 개들을 조금 더 풀어놓을 걸 그랬어.”

페르난데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던컨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보아야 대공이 깔아놓은 정보원 탓에 결국 발각되었겠지만.’

물론 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열 살 생일이 이제 곧이로군. 조만간 이능 각성 여부가 드러나겠어.”

페르난데의 잿빛 눈이 빛났다. 그가 이미 몇 차례나 언급했던 사항을 또다시 강조했다.

“던컨, 그 아이가 이능자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나머지 개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둬. 그리고…….”

페르난데가 말하던 도중 이맛살을 찌푸렸다.

‘굳이 둘씩이나 살려둘 필요가 있나? 아니지.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려면…….’

미간을 짜증스럽게 문지르며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능이 발현되지 않을 땐 그냥 내버려 둬.”

페르난데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제가 내린 명령이었지만 정말 그리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신탁만 아니었다면.’

원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제국이 세워진 지가 어언 천 년이었다. 구시대의 유물인 여신의 신탁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동안이나 끊겨 세상 사람들에겐 전설 속의 이야기 정도로나 치부되는 일 따위가.

‘역시 무시해 버렸어야 했나.’

그러나 같은 내용의 신탁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페르난데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신탁의 내용대로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작은 의심은 그를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망설이게 했다.

결국, 페르난데는 샤르투스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버리려 했던 결정을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샤르투스의 둘째가 이능 각성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번거로이 메리엘 록트린을 제거하기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능이 없다면 내게 위협이 되지 못해.’

샤르투스의 핏줄 하나를 더 여분으로 남길지, 혹은 없애버릴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문제는 이능을 각성해 버릴 경우인데…….’

도저히 메리엘 록트린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다.

사실 페르난데는 대공성을 염탐할 요량으로 지난 한 달간 개를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대공령의 경계를 넘기도 전에 발각되었고, 나머지도 성 근처에 접근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건 물론이었다.

“대공령에 마지막으로 개들을 보낸 게 열흘 전쯤이었나?”

“예. 사흘 전 연락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렇게나 어렵다더냐?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할 만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되었다. 더 말해 무엇할까.”

짧게 타박하긴 했으나 페르난데도 알았다. 대공성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성벽의 방비를 뚫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으나 들어가고 나서도 문제였다.

성 곳곳에 결계석이 박혀 감지 반경 내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즉시 구속 마법이 작동되었다.

그러니 승인되지 않은 자가 성내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페르난데가 팔걸이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울어뜨리곤 턱을 괴었다. 무언가 고민하거나 생각할 일이 있을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만일 각성한다 치면 무조건 초반에 끝을 봐야 하는데…….”

샤르투스의 각성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게 없으나 페르난데에겐 약간의 정보가 있었다.

각성 초반엔 이능이 불안정했다. 힘이 안정화되면서 완전히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능자를 제거하려면 가능한 한 그 시기 안에 해결해야 했다.

그 이후엔 굳이 대공의 보호가 아니더라도 건드리기 힘들어질 터.

“너도 알잖느냐? 아델을 제거하기 위해 어찌나 애를 먹었었는지.”

“…….”

“그래도 그땐 필립이 꽤 제 역할을 잘 해내었지. 쓸 만하게도 말이야.”

써먹을 수 있는 대로 이용하다가 폐기해 버린 자신의 개를 입에 올리는 페르난데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던컨은 수긍하듯 말이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말아 쥔 그의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필립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도로, 황제가 개들을 취급하는 태도에는 이가 갈렸다.

“완전한 각성 전에 제거해야 한다. 늦어질수록 가능성이 떨어지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 반평생을 페르난데의 곁에서 보낸 그는 어떤 동요도 내비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던컨의 속내는 짐작도 못 하는, 정확히는 관심조차 없는 페르난데의 말이 이어졌다.

“메리엘 록트린의 가문 승계를 빌미로 수도로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잘 되질 않았고.”

대공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페르난데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아직은 후계자이니 작위 수여식은 성년 이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공표나 하라며 그를 압박했다.

일단은 대공성에서 나와야 뭐라도 시도를 해볼 수 있을 텐데, 아예 접근 자체가 어려우니 던컨과 개들이 아무리 계획을 짰어도 실행이 불가능했다.

“어찌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예. 가능한 경우의 수를 전부 열어두고 덫을 치고 있습니다.”

“끌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 방법이 마땅치가 않단 말이지.”

대공성은 어림도 없고 대공령 안에서도 쉽지 않았다. 일단 수도 쪽으로 끌어내야 승산이 있었다.

페르난데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가락이 책상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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