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1)
  • 사후 세계란 원래 이런 걸까. 그러나 아셀라는 제일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침대맡의 털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온갖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가득한 방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걸을 때마다 발에 보석과 금이 채였다. 벽이며 기둥조차 화려했다.

    아셀라가 천천히 내부를 걸었다.

    ‘이런 방이 있다니.’

    욕실과 응접실, 드레스룸은 물론이거니와 독서 공간과 유리온실을 본 따 만든 듯한 자그마한 오랑제리까지 있었다. 아셀라가 작게 감탄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어찌나 창이 넓은지 햇살이 깊게 안까지 비쳐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엔 몽실한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녔다. 드넓은 초원 끝으로 대지와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이 보였다.

    “날씨가 좋네.”

    자연히 발이 이끌린 아셀라가 창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잠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셀라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구름이 움직이지 않아!’

    놀란 아셀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아셀라가 급히 창을 손으로 밀었다. 열려야 할 창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깥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아까와 똑같았다.

    마치,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림처럼.

    ‘여긴 어디지?’

    아셀라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아까 걸었던 공간을 다시 되짚으며 한 바퀴를 뱅 돌았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없어!’

    아셀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없었다. 벽이며 기둥을 샅샅이 뒤지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걸린 액자를 떼어내 보기도 했으나 어느 곳에도 없었다.

    ‘……문이 없어!’

    엄청난 충격에 아셀라가 비틀거렸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그녀의 몸이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그때, 앞으로 고꾸라지던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일어났나.”

    아셀라의 몸이 그대로 뻣뻣해졌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는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아셀라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코끝을 감돌기 시작한 강렬한 향은 도무지 착각일 수가 없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

    그녀의 몸이 허공에 들렸다. 아셀라는 칼릭스가 그녀를 양모 러그가 깔린 가죽 소파 위에 내려 놓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추워 보이는군.”

    칼릭스가 몸이 굳은 아셀라를 내려다보더니 근처의 담요를 집어 들었다.

    보송보송한 감촉의 폭이 넓은 담요였다. 빈틈없이 그녀의 몸을 꼼꼼히 감싼 뒤, 그가 아셀라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했다.

    “……여기, 어디에요.”

    아셀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연한 대꾸가 이어졌다.

    “당신 방.”

    “아니잖아요.”

    아셀라가 곧바로 받아쳤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 끔찍한 생각이 현실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여기가 당신 방이야. 앞으론 이곳에서 지내게 될 테니까.”

    “싫어요. 문이 어디죠? 지금 나가겠어요.”

    아셀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일어, 몸을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했잖나.”

    그새 아셀라 곁으로 다가온 칼릭스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도로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무엇이든 말만 해. 단.”

    커다란 손이 들러붙듯 아셀라의 뺨을 감쌌다. 기묘할 정도로 다정한 어루만짐이 이어진 끝에 뱀의 속삭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나가는 것만 제외하고.”

    도주하는 대공비 79화

    아셀라의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가 옅게 할딱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릭스가 물을 따라 건넸다. 아셀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거부하고는 파들거리는 입술을 떼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새어 나오는 말이 떨렸다.

    “나, 나를, 가둔 건가요?”

    “보호하는 거라고 해두지.”

    태연한 대답은 무도하리만치 뻔뻔하기만 했다.

    아셀라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다고 해서 제가 얌전히 여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전혀.”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내게서 벗어나려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 한 그대가 그럴 리 없겠지.”

    칼릭스의 집요한 시선이 아셀라를 옭아매듯 꿰뚫었다.

    “당신이 머물렀던 숙소에서 포털 사용의 흔적을 찾았어.”

    일순 아셀라의 몸이 얼어붙었다.

    “당신 동생이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보면 아마 그 포털을 이용한 것일 테고.”

    “…….”

    “포털을 누가 당신에게 건넸을지도 생각해 봤어.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더군.”

    읊조리듯 나직한 음성이 누군가의 이름을 뱉어냈다.

    “대신관 로샨.”

    아셀라의 눈동자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아셀라의 표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포털의 도착지점은 신전, 혹은 그 근처라 추측하는 게 맞지 않겠나?”

    ‘메리엘!’

    아셀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미 신전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며칠 후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메, 메리엘을…….”

    아셀라가 밀려드는 공포를 내리누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메리엘을, 그 아이를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말을 마친 칼릭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벽에 갑자기 문이 만들어지더니 안으로 시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셀라가 아는 이들이 아니었다. 마고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전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렬로 선 그녀들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풍겼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데 전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사람을 본 따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겨우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아셀라가 칼릭스를 향해 물었다.

    “이것들…… 대체 뭐예요.”

    “말했잖나. 그댈 시중들 거라고.”

    “원래 내 시녀들이 있잖아요. 로메인 부인은 어디 있죠?”

    “당신이 그자들을 찾을 줄은 몰랐는데.”

    칼릭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대공비를 호위하고 시중들라 붙여두었던 것들이 당신을 잃어버렸으니, 마땅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겠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아셀라가 멍해졌다. 잠시 뒤 무언가를 깨달은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예요.”

    “아직은 숨을 붙여놓았지만…….”

    말끝을 흐린 칼릭스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아셀라의 눈동자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곧 적당한 처분을 내릴 생각이야. 원한다면 그대의 의견도 듣도록 하지. 어떤 처벌을 원하나?”

    칼릭스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짙은 흑발이 흐트러지며 그 사이로 핏빛 눈이 그녀를 강렬하게 직시했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어요!”

    “죄가 없다니.”

    “전부 저 혼자 계획한 일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잘못 없는 사람들을…….”

    “그래서?”

    아셀라가 용기 내어 꺼낸 말이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당신이 성을 빠져나갈 동안 기사며 시녀들은 무얼 했단 말이지? 제 본분도 소홀히 하는 것들의 목숨을 붙여둘 이유가 있나?”

    어떤 이유에서건 살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오싹한 한기가 아셀라의 온몸을 휘감았다.

    “가져와.”

    그러자 시녀가 물 흐르는 듯한 걸음으로 걸어와 칼릭스에게 서류를 건넸다.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를 마치곤 다시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벽 가까이에 붙어 서 있던 나머지 시녀들 역시 미동 하나 없었다.

    기괴하고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아셀라의 눈가가 옅게 떨렸다.

    “당신 동생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던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녀 앞 테이블에 서류가 놓여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선명하게 찍힌 황제의 인장이었다. 그다음은 서류 맨 상단의 글씨였다.

    ‘입적 동의서?’

    아셀라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메리엘이 록트린의 정식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승계할 거라고?’

    내용을 확인한 아셀라가 더듬거리며 칼릭스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읽은 대로야. 메리엘 샤르투스가 록트린 가문에 입적되어 메리엘 록트린이 되었다는 것. 유일한 후계자로서 가문 승계의 자격이 있다는 것.”

    놀란 아셀라의 눈을 바라보며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황제의 인장까지 찍혔으니 입적 및 승계와 관련된 서류는 사실상 완성된 셈이고.”

    칼릭스가 종이 맨 뒷장을 들추어 빈자리를 가리켰다.

    “당신이 후견인이 되겠다는 서명을 하는 즉시 서류가 효력을 발휘할 거야. 당신 동생은 곧바로 록트린의 후계자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겠지. 물론 당신도 후견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테고.”

    아셀라가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만 된다면 메리엘은 반역자가 아니었다. 수도로 끌려가 처형당할 일도, 평생을 반역자의 신분으로 낙인찍혀 도망 다니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아셀라의 얼굴에 설핏 희망이 떠오를 때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이요?”

    칼릭스가 또 다른 서류를 입적 동의서 위에 올렸다. 아셀라의 눈이 빠르게 그 위를 훑었다.

    [……메리엘 록트린이 성년에 이르러 정식 가주가 될 때까지 베네비토 가문에서 모든 지원을 책임진다. 단, 아셀라 베네비토가 본인 스스로 몸을 해하거나 도주할 시엔…….]

    아셀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계약서라지만 실상은 협박이나 다름없는 문서였다.

    만일 그녀가 대공에게서 도망치려 하거나 목숨을 끊으려 했을 시, 메리엘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이를 굳이 직접 그녀에게 보여준다는 건 반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저열한 협박이었다.

    “이 계약에 응하면 당신 동생이 록트린 가문을 승계토록 해주지.”

    고개를 든 아셀라가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잘게 요동치는 물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칼릭스가 손을 미끄러뜨렸다.

    “모든 건 그대에게 달렸어.”

    칼릭스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아셀라의 붉고 도톰한 입술을 슬슬 문지르며 속삭였다.

    “당신에겐 나쁜 조건이 아니지 않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메리엘을 살려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고. 그러니 그만 포기하고 받아들이라고.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 약속하고 전처럼 지내겠다면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겠어. 물론 당신 동생도 무사할 테고.”

    아셀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메리엘이 록트린의 성을 가진다면 반역자로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겠지만, 그게 대공에게서의 안전을 의미하지는 못했다.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메리엘을 해칠 수 있을 테니까.

    “메리엘이 무사할 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아직도 날 의심하고 있군.”

    칼릭스가 짧게 혀를 찼다. 그녀는 그가 아델을 살해했다고, 또 자신과 여동생마저 죽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번에도 당신에게 말했지만.”

    “제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황제 폐하고, 단추의 문양은 황제 폐하가 부리는 직속 기밀 부대의 표식이라고요?”

    아셀라가 칼릭스의 말을 이어받아 말했다. 그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래.”

    “그럴 리 없어요.”

    “대체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어머니의 유언이었으니까요.”

    감정이 격해진 아셀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전하를 조심하라시면서 단추를 주셨어요. 이 단추의 문양, 카르마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카르마엔 별도의 문장이나 표식이 없어.”

    “그럼 전하가 카르마의 수장인 건요?”

    칼릭스가 자꾸만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당신이 어떻게 카르마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델의 일과 카르마는 무관해. 애초에 내가 아델을 죽일 이유도 없고.”

    “…….”

    아셀라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벌써 몇 번째 같은 패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셀라가 이번엔 손에 유리 조각을 쥐지도, 밖으로 뛰어내리지도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칼릭스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아셀라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그러고는 아셀라가 미처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움직였다.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단단히 받치곤 가뿐히 들어 올렸다.

    아셀라의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감각에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그의 셔츠 자락을 붙들었다.

    “내, 내려주세요.”

    “침대까지 데려다줄 테니 이대로 있어.”

    “걸어갈 수 있어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던 건 기억 안 나나?”

    아셀라의 말을 일축한 칼릭스가 그녀를 안아 든 채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간 뒤 침대 가장자리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만 쉬도록 해. 필요한 게 있으면 저들에게 말하고.”

    “자, 잠시만요.”

    아셀라가 칼릭스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 시녀들을 힐끗 보았다가 칼릭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지며 아까보다 훨씬 작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하신 제안 받아들일게요.”

    아셀라가 조금 전의 계약서를 떠올리며 말했다.

    “대신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안 돼.”

    대답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그러면 여기가 어딘지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당신이 몰라도 되는 일이야.”

    결국, 아셀라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평생 갇혀 살라는 말씀이세요?”

    눈이 부실 정도로 호화로운 공간. 그러나 이 방에 생명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시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기서 살아 있는 존재라곤 아셀라 뿐이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여기서 지내라니…….”

    창문도 열리지 않고 문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밀실.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공간에 갇혔다는 생리적인 공포에 아셀라의 눈 밑으로 기어이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가두겠다고 말하던 칼릭스가 멈칫했다.

    파란 눈망울에 눈물이 어룽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그럴 리가 없잖나.”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굽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아셀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새 눈물로 얼룩진 하얀 뺨을 커다란 두 손이 감쌌다.

    도주하는 대공비 80화

    “내가 있는데.”

    어루만지는 손길에 언뜻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내가 매일 찾아올 테니 걱정할 거 없어. 당신은 그저 여기서 날 기다리기만 하면 돼.”

    아셀라의 몸이 흠칫 굳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나만 보고, 내 목소리만 듣고, 내 품만 알면 돼. 다른 건 필요치 않아.”

    남자의 질척한 욕망을 마주한 아셀라의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졌다.

    그건 늪과도 비슷한 욕망이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도리어 붙잡혀 구덩이에 깊숙이 끌려 들어가고 마는.

    이대로라면 그의 뜻대로 이 끔찍한 공간에 홀로 갇히게 되고 말 것이다. 아셀라가 절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다시는,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저번처럼 절 다치게 하는 짓도 하지 않을게요.”

    “아셀라.”

    칼릭스가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나.”

    남자의 붉은 눈이 어떤 갈망을 띠고 섬뜩하게 번득였다.

    “대체,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무엇이?”

    태연하게 되돌아오는 물음에 아셀라가 몸서리치듯 어깨를 떨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걸 정말 모르겠나?”

    칼릭스가 슬쩍 눈꼬리를 휘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도망쳤잖나. 나를 속이고.”

    “그건…….”

    “난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아.”

    그대로 아셀라의 말문이 막혔다. 짙은 크림슨의 눈동자가 탁해진 채 묘하게 위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특히 기만이나 배신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셀라는 자신이 아무리 간청해도 이 부탁만은 남자가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절망과 함께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 차려, 아셀라. 뭐라도 해야만 해.’

    지금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언젠가 기회가 있을 수 있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럼 메리엘을 매일 볼 수 있게만이라도 해주세요. 저 때문에 감옥에 갇힌 시녀들과 기사들도 풀어주세요.”

    아셀라가 칼릭스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릭스가 답했다.

    “풀어주지. 당신 동생은 한 달에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주겠어.”

    “한 달은 너무 길어요!”

    놀란 아셀라가 다급히 외쳤다.

    “저를 보지 못하면 불안해할 거예요.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어린아이예요.”

    “마고더러 당신 동생을 돌볼 수 있도록 일러두지.”

    “전하!”

    몸을 일으키는 칼릭스의 소맷자락을 아셀라가 다급히 붙들었다. 저를 잡는 작은 힘에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셀라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나와 몸이 닿을 때면 부탁을 들어주곤 했었어.’

    지금도 그저 소맷자락을 붙들었을 뿐인데 멈추어 서서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고 있지 않은가.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시도해야만 했다.

    아셀라가 소맷자락을 쥐었던 손을 살짝 미끄러뜨렸다. 그러곤 칼릭스의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셀라?”

    놀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아셀라가 치밀어오르는 두려움을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저 동생을 보는 것뿐이잖아요.”

    “…….”

    “부탁드려요.”

    칼릭스의 적안이 아셀라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가 옅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일주일에 한 번. 더는 안 돼.”

    “하지만, 전하-”

    “당신에게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은 여기까지야. 정 싫다면 그만둬.”

    칼릭스가 냉정하게 못 박았다. 아셀라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록트린 가문의 승계가 취소되면 메리엘은 여지없이 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거부는 메리엘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었다.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지만…….’

    짧은 순간 결심을 마친 아셀라의 눈에 결연함이 차올랐다.

    반대쪽 손으로 침대 기둥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곧바로 칼릭스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일어나지 말래도.”

    아셀라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 기둥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기울어지며 칼릭스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체중이 실리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듯 달라붙었다.

    ‘젠장.’

    칼릭스가 낮게 뇌까렸다. 또 그 느낌이었다. 누군가 뇌를 주물러 대는 것처럼 머릿속이 녹진해지는 감각. 동시에 온몸에 묘한 나른함이 일었다.

    맞닿은 피부마다 피어오르는 야릇한 열기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일어나려는 거야.”

    칼릭스가 부러 그녀를 탓하듯 말했다. 그러나 불꽃이 닿은 기름에 순식간에 불길이 일 듯 이미 그의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피가 뜨겁게 들끓으며 미칠 듯한 정염이 일었다.

    ‘돌겠군.’

    이성을 차려야 했다. 충격으로 몇 차례나 정신을 잃었던 아내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지 않나. 제 저열한 음심으로 그녀를 범해선 안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나 얇은 셔츠를 뚫고 전해지는 여자의 야트막한 숨결은 너무나도 아찔해서.

    “전하.”

    아셀라가 칼릭스의 가슴에 두 손을 짚고 그 사이로 머리를 기댔다.

    굴곡진 몸에서 전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에 칼릭스가 열기를 품은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품에 가두고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탐하고 싶었다.

    ‘……지금은 안 돼.’

    가까스로 이성을 다잡은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붙든 팔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서 살짝 몸을 떼어냈다.

    “당신, 왜 이러는 거야.”

    그와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셀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그의 약점을 그새 알아차려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다고 내가 당신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나?”

    아셀라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의 결정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서일 것이다.

    물론 칼릭스는 그녀에게 휘둘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금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

    아셀라가 그의 셔츠 자락을 붙들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칼릭스는 쉬이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물기로 촉촉한 아내의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

    지금처럼 저를 오롯이 담고 있는 파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럼 내가 당신 약속을 믿을 수 있게 해야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하기야 품에 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어느덧 칼릭스는 아셀라와 접촉할 때마다 자신이 그녀에게 유해진다는 사실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믿어주실 건데요?”

    그러나 막상 또 이렇게 물어오자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알려주세요. 네?”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저히 못 이기겠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칼릭스가 아셀라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17. 신경 쓰이는 존재

    라이젠이 서류를 넘기는 칼릭스의 곁에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하루 이틀 내로 메리엘 록트린의 승계를 공표하겠다는 전갈입니다.”

    “나쁘지 않군.”

    어제까지만 해도 싸늘하기 그지없던 대공의 얼굴이 어느새 한결 풀려 있었다. 그 이유가 대공비에게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건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라이젠이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의 물음이 이어졌다.

    “다른 사항은?”

    “대신전과 마탑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아직 답신은 오지 않았으나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메리엘 록트린의 행방은 알아냈나?”

    “헤뷔움의 정보원으로부터 대신전에 신원 불명의 여자아이가 포털로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칼릭스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생각에 잠겼다.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던 라이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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