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
“마시라고 했어.”
순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덮치듯 내리눌렀다. 아셀라는 본능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녀를 짓누르며 압박했다.
숨통이 조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병을 받아들고 말았다.
“마셔야지.”
“…….”
“어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자못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집요한 요구가 뜻하는 바는 섬뜩한 것이었다.
‘메리엘이 어디에 있는지 전부 들통나고 말 거야.’
흔들리는 푸른 시선이 병에 닿았다. 핏빛의 붉은 액체가 안에서 일렁였다.
‘마셔선 안 돼. 절대로.’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었다.
아셀라가 그대로 병을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완전히 박살 난 유리 파편이 이리저리 튀고, 안의 붉은 내용물이 쏟아져 바닥을 더럽혔다.
“무슨 짓이지?”
칼릭스의 적안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번득였다.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으나 아셀라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작지만 분명한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마시지 않을 거예요.”
조금은 예상외인 그녀의 반응에 칼릭스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기회를 줄 때 스스로 마시는 게 나을 텐데.”
얼마간 그녀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릭스가 이내 비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람을 시켜 강제로 먹이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충격적인 말에 아셀라의 눈이 거세게 요동쳤다. 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손끝이 잘게 진동했다.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솔직하게 답을 하든지, 아니면 베락시움을 마시는-”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칼릭스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그에겐 간지럽지도 않은 마찰이었으나 중요한 건 그 행위 자체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칼릭스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감히 제게 손찌검한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아셀라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맑은 바다를 연상시키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들어차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그런 협박을……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두 주먹을 꽉 쥔 아셀라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칼릭스가 처음 마주하는 그녀의 분노였다.
“왜 도망쳤냐고요?”
도자기처럼 뽀얀 얼굴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당신이 싫었으니까.”
일순, 칼릭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적안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걸 보며 아셀라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젠 그만하고 싶어.’
그녀는 늘 무력한 자신이 싫었다.
누군가에게 매달려 사정하고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생이 비참하고 슬펐다.
필립과 안토니의 폭력에 시달리며 사용인들의 조롱까지 받아내기를 수년.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이 덜 고통스러우리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버티며 견딘 이유는 메리엘 때문이었다.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신조차도 절실할 어린 동생을 생각하면 쉬이 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계였다. 너무나 힘들고 지쳐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아픔과 고단함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날 죽이겠지.’
하지만 이제 아셀라는 자신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떠느니, 다 놓아버리고 편해지고 싶었다.
이 비참한 생 끝에는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작은 위안마저 들었다.
“당신이 무서웠으니까.”
피안의 세상에는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없다지. 갈 곳 없는 영혼조차 거기선 안식을 얻는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차라리 죽음이 그녀에겐 구원이었다.
그럼에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셀라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방울들이 쉴 새 없이 만들어지며 뺨을 적셨다. 희고 수척한 얼굴에서 깊은 절망과 체념이 배어 나왔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한번 말을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아셀라의 입에서 둑이 터지듯 진심이 쏟아져 나왔다.
“나를 물건처럼 사 왔잖아요. 인형처럼 살라고 했잖아요. 도구로 쓰려 했잖아요.”
“아셀라.”
아셀라가 그녀에게로 다가오려는 칼릭스를 피해 급히 몸을 틀었다.
“잠깐, 아셀라!”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아셀라의 발에 박혔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가까이 오지 마!”
아셀라의 격렬한 거부에 칼릭스는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셀라가 필사적일 만큼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감정이 있어요. 마음이 있다고요.”
아셀라가 딸꾹거리는 목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내뱉었다.
단지 드러내는 걸 허락받지 못했기에 감추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겐 솔직함조차 사치였다.
아셀라가 꾹꾹 숨겨왔던 진실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홀로 아픔을 삭이고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억눌러왔던 기억이었다.
“어차피 당신은 날 죽이기 전에 가지고 놀고 싶었던 거겠지만…….”
아셀라의 말에 칼릭스의 붉은 눈이 동요했다.
“이만하면 된 거잖아요. 어머니랑 날 죽이는 거로는 충분하지가 않나요? 그 어린것마저 기어이 해쳐야 만족하시겠나요?”
그대로 칼릭스의 동작이 멎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77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당최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셀라, 그게 무슨 소리지? 알아듣게 설명을 해.”
그러나 이미 아셀라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던 날 이후로 지금껏 그날의 진실을 숨겨왔다. 내내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당사자에게 제가 모든 걸 알고 있었노라 털어놓는 지금, 아셀라는 맨정신일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이…….”
아셀라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걸고 있던 목걸이를 바깥으로 꺼냈다.
줄에 매달린 펜던트의 뚜껑이 열리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또르르 굴러간 단추가 칼릭스의 발치까지 와서 멈추었다.
단추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칼릭스의 얼굴에 일순 당황이 스쳤다.
온통 새까만 바탕의 단추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은 그도 익히 잘 아는 조직의 문장이었다.
“그대가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지? 이건―”
그러나 칼릭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셀라가 외마디 비명처럼 외쳤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였잖아!”
“뭐?”
“카르마를 시켜서 어머니를 살해했잖아!”
하, 칼릭스가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그가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했지? 필립인가?”
“그게 중요한가요?”
아셀라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칼릭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연한 푸른빛 눈에 가득 찬 감정을 읽은 칼릭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건 명백한 원망과 증오였다.
‘어째서?’
자신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건 알았다. 그녀는 그가 조금만 얼굴을 굳혀도 긴장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아내가 이토록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심장이 선득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은 감각에 칼릭스가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일생 처음으로 그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초조함과 긴장, 심지어는 묘한 두려움마저 일었다.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죄다 뒤섞이며 그의 내면에 휘몰아쳤다.
처음 맞닥뜨린 이 모든 변화는 그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탓에 칼릭스는 아셀라의 얼굴에 떠오른 결연한 각오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날 죽이는 건 상관없어요. 각오했던 일이니까.”
아셀라가 땅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메리엘은 안 돼.”
“아셀라!”
뒤늦게 알아차린 칼릭스가 급히 손을 뻗었으나 그녀의 동작이 더 빨랐다.
아셀라가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목덜미에 찔렀다.
* * *
잠깐 풀리나 싶던 대공성의 분위기가 다시금 얼어붙었다.
숨조차 내쉬기 힘든 적막이 성내에 감돌았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필 뿐이었다.
대공의 명으로 그의 침실에 불려갔던 사용인들은 모두 낯빛이 창백해져서는 입을 다물었다.
특히 아침에 불려갔다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나온 주치의의 얼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그를, 문 앞을 지키던 기사가 부축해 줘야 했을 정도였다.
주치의가 하루 내내 입에 물 한 방울 대지 못하고 살펴야 했던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했고, 지켜보던 이들은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목숨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몸을 사렸다.
이 때문에 사건의 경위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모두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대공 부부 사이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 * *
성의 지하 복도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다지 밝지 않은 공간이었음에도 감옥을 지키던 카르마의 고문관은 멀리서 걸어오는 이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주인을 맞이하고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철문이 바닥에 긁히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주군, 오셨습니까!”
칼릭스가 만신창이가 되어 고깃덩어리처럼 벽에 걸려 있는 두 사람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어찌 되었나.”
“이놈들 생각보다 질긴데요? 아직도 자백을 안 하고 버티는 중입니다.”
지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자백제를 쓰시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자백제 같은 쉬운 방법으로 끝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직도 한없이 모자랐다. 더 지독하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에겐 약이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백하지 않는다는 건.”
“…….”
“아델을 죽인 자가 황제라서인가?”
순간, 쇠사슬에 묶여 있던 몸이 움칠거리며 반응했다. 지크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개새끼들이 답을 못한 이유가 있었네.”
지크가 들고 있던 날카로운 둔기를 휙휙 돌리며 필립 앞으로 다가갔다. 우악스럽게 뒷머리를 움켜잡고 끌어내리자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들어 올려졌다.
“발설하지 못하게 되어 있구나?”
지크가 다른 쪽 손으로 쇠사슬에 묶인 손목을 앞쪽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황제의 개에게 새겨진 복종의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인이 걸어둔 주술에 반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속박하는 마법이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가, 개가 주인의 의지와 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하려 들면 문양이 나타나 이를 막았다.
지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군? 이거 곤란하게 됐는뎁쇼. 이래서야 자백제도 안 들을 거 아닙니까.”
“상관없다.”
칼릭스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벽에 띄엄띄엄 걸린 횃불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린 끝에, 칼릭스가 결박된 자들 앞에 멈추어 섰다. 아직도 지크가 필립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문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심한 붉은 눈이 뚫어질 듯 팔목을 응시했다. 칼릭스는 각인이라도 하듯 문양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간 몇 번 황제의 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도 보았으나 이토록 유심히 관찰한 건 처음이었다.
필립의 팔에서 시선을 뗀 칼릭스가 이번에는 품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걸 본 적이 있나?”
칼릭스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필립의 눈이 요동쳤다. 온통 새까만 색깔의 단추. 거기에 새겨진 문양은 그의 팔목에 낙인찍힌 문양과 꼭 같은 것이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아셀라에게 단추를 주었나?”
흠칫.
필립의 몸이 갑자기 벼락 맞은 사람처럼 튀어 올랐다. 계속된 고문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그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입에 물린 재갈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주군. 이 개자식 반응 보니까 황제가 사주한 게 맞나 본데요?”
필립이 아니라고 부인할 때마다 손목의 문양이 진해졌다. 강제로 행동을 제어하는 마법이 발현되며 사실과는 다른 대답을 하도록 종용하는 거였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지? 세뇌인가? 아니면 약물을 먹여 기억을 조작했나?”
칼릭스가 아셀라의 말을 떠올리며 추궁을 이어갔다. 그러나 끝내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필립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자백을 받아내긴 글렀는데요. 어떻게 할깝쇼?”
“…….”
아직 알아내야 할 게 많았다. 모두 아셀라와 관련된 일이었다.
왜 아델을 그가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황제조차 제대로 실체를 파악해 내지 못한 카르마에 대해선 어떻게 아는 건지, 메리엘 록트린은 어디에 숨겼는지. 그리고.
‘왜 내가 저와 동생을 죽일 거라 여기는 건지.’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마디마디마다 희게 불거졌다.
“전하.”
뒤쪽에서 대기하던 라이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제가 개입되어 있다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쯤이면 관련자는 모조리 제거되었을 테고 흔적도 남김없이 지워졌을 겁니다.”
무려 칠 년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일의 시작이 황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제 와 찾을 수 있는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찾아라.”
그러나 칼릭스의 명은 단호했다.
“아델의 죽음과 관련된 거라면 무엇이든. 아주 작은 정보라도 상관없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
아델을 죽인 건 황제 본인이거나 최소한 황제의 사주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아셀라에게도 어떠한 해를 입혔다.
방법은 알 수 없으나 이로 인해 아셀라의 기억이 영향을 받았고, 칼릭스가 아델을 죽였다는 오해를 하도록 만들었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나 마력을 지닌 마법사가 필요하다.’
적어도 아셀라의 기억을 흐트러트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페르난데가 관여했다면 황제의 개들에게 사용된 복종 마법처럼 고위급의 마법이 사용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마탑주와 성녀에게 연락을 넣어. 칼릭스 베네비토가 만나고자 한다고.”
“두 사람 모두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 최근 바뀐 마탑주는 아직 신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떤 조건을 요구하든 맞춰주겠다고 해. 무슨 수를 써서든 성사시켜.”
“주군! 그런데 그쪽에서 끝까지 거절할 수도 있잖습니까?”
지크의 물음에 칼릭스의 적안이 섬뜩하리만치 날카롭게 벼려졌다.
“만일 응하지 않을 시엔.”
그의 얼굴에 스산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베네비토와 적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지.”
발언의 의미를 깨달은 지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서늘한 정적 속, 라이젠이 침착하게 물었다.
“더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칼릭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손에 쥔 흑색 단추 위로 내려앉았다.
눈물 젖은 얼굴로 펜던트에서 단추를 꺼내던 아셀라의 모습이 떠오르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메리엘 록트린을 찾아.”
그의 적안이 어둡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모습이 발견된 곳에서부터 샅샅이. 어떤 마법의 흔적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칼릭스가 단추를 손에 움켜쥐었다. 빈틈 하나 없이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안의 내용물이 사정없이 우그러졌다.
‘아셀라.’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도, 메리엘 록트린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78화
정신을 잃은 여자에게서 옅은 숨이 흘러내렸다.
칼릭스는 고개를 숙여 아셀라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붙였다. 팔딱이는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하고 있음을 한참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떼어냈다.
‘…….’
날카로운 유리가 아셀라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칼릭스가 쏘아낸 힘이 조각을 맞추었다. 유리 조각은 그대로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혼절하여 무너져 내리는 아셀라의 몸을 받아낸 건 그다음 일이었다.
칼릭스는 주치의가 오는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아셀라의 상처를 직접 치료했다.
성한 데가 거의 없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산길을 오르다 가시덤불에 긁히고 찔린 상처들이 팔과 다리에 그득했다.
유리 조각을 쥐었던 손은 깊이 베였고 곳곳에 파편이 박힌 발은 피로 흥건했다.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성내에 보관 중이던 고가의 치료약물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어 새살이 보송하게 올라 있었다.
이제는 매끈해진 아내의 손을 매만지던 칼릭스의 시선이 아셀라의 얼굴로 향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한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를 속이고 기만하려 들었던 여자. 다가오는 척하며 한편으로는 도주를 준비했던 여자. 차분한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자.
그의 아내, 아셀라 베네디토를.
‘나도 감정이 있어요. 마음이 있다고요.’
정말이지, 그녀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칼릭스에겐 그 어떤 존재도 특별하거나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필요하니 곁에 두었고 굳이 내칠 필요 없으니 내버려 두는 식이었다.
자신에게도 무심한 인간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리 만무했다. 남의 감정 같은 건 고려한 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만은 자꾸 신경이 쓰여서.
‘나를 물건처럼 사 왔잖아요. 인형처럼 살라고 했잖아요. 도구로 쓰려 했잖아요.’
갑자기 심장께가 지끈거렸다. 아릿하게 저리는 고통에 칼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랑 날 죽이는 거로는 충분하지가 않나요?’
아셀라의 발언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오랜 시간 품어왔던 의문을 일시에 풀어준 말이기도 했다.
어째서 아내가 그를 그토록 피하려 들었는지. 별일 아닌 일에도 겁먹어 움츠러들곤 했는지. 왜 제 잘못도 아닌 일로 용서를 빌었었는지.
그걸 그때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 제 목을 유리 조각으로 찌르려다가 혼절했던 그녀는, 깨어난 뒤 세 번이나 더 자신을 해하려 시도하다가 칼릭스에게 제지당했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그의 곁을 떠나려다가 실패하여 붙잡힌 그녀의 선택은 그렇게 또 다른 방법의 도망이었다.
칼릭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말갛고 푸른 눈동자에 깃들던 원망과 증오를 마주했을 때는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희고 섬약한 얼굴에 아로새겨지던 절망을 보았을 때는 심장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이거 놔요!’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아셀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안 될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칼릭스가 아셀라의 얼굴을 덧그리듯 손으로 쓸었다. 동그란 이마와 닫힌 눈꺼풀, 촉촉하게 젖은 은빛 속눈썹과 발간 눈가, 해쓱한 뺨과 파리한 입술까지도.
그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의 풍경으로 향했다.
그의 침실을 다섯 개쯤 합쳐놓은 크기의 커다란 공간이었다. 세상의 값비싸고 귀한 것을 죄다 모아놓은 양, 사방이 화려했다. 보는 이의 눈이 휘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이곳은.
대공의 밀실이었다.
“아마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날 믿지 못할 테지.”
처음에 칼릭스는 아셀라를 설득하려 했다. 그는 아델을 죽이지 않았다고. 그러니 더는 겁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와 동생 모두 이젠 안전할 거라고. 자신이 지켜주겠노라고.
그러나 아셀라는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거짓말!’
그러면서 칼릭스가 저에게 자백제를 먹일까 봐 두려워했다. 동생이 있는 장소를 저도 모르게 실토하게 될까 봐 스스로를 해하려 들었다.
칼릭스는 자신의 선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저 아셀라가 스스로 말해주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으나 그건 그의 명백한 오판이었다.
어떻게든 동생만은 살리고자 했던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대가는 컸다.
‘아셀라, 당신에게 강제로 자백제를 먹이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오지 말아요!’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던 아셀라를 떨어지기 직전 붙잡았을 때, 칼릭스는 깨달았다.
아내가 계속해서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들리라는 걸. 앞으로도 매번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는 걸.
“하지만 아셀라, 난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그리하여 잠든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다. 이곳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다른 어떤 이의 손도 타지 않고, 무엇보다 그녀가 그에게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못할 완벽한 공간.
차오르는 희열에 칼릭스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이제야 온전히 그녀를 품에 가둘 수 있었다. 그의 선조들이, 그리고 그가 꾸민 이 더없이 아름다운 새장은 비로소 완전해졌다.
이제 자그마한 은빛 새는 황금빛 새장 속에서 그만을 위해 날갯짓하고 노래 부를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길들일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결코 벗어나지 못할 촘촘한 덫도 쳐두었다.
“그러니 당신이 포기해.”
칼릭스의 시선이 미끄러지며 쥐고 있던 아셀라의 손으로 향했다.
희고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 사이로 은색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결혼식 날 직접 끼워주었던 반지였다. 그의 손가락에도 같은 모양의 반지가 있었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아내로, 평생 내 곁에 있게 될 테니까.”
그는 이제 제 질척하고 어두운 갈망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아셀라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들리며 깨끗한 벽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천정의 문양에 아셀라가 눈을 빠르게 끔벅였다.
‘다 끝난 걸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창밖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피안의 세계로 넘어온 걸까. 고개를 내려 몸을 살폈지만 아프거나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추락한 몸이 성할 리가 없을 터인데, 죽은 자들의 세계에선 다시 건강해지는 모양이었다.
안도하듯 한숨을 내쉰 아셀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긴 대체…….”
주변을 둘러본 아셀라의 말문이 막혔다. 말을 잇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공간이었다. 곳곳이 번쩍거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