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샨이 착잡하게 덧붙였다. 샤르투스를 무너뜨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이 제격이기는 했다. 이로써 신전은 한쪽 날개를 잃었다.
“그럼 아셀라와 메리엘은요? 그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대공성에 있을 테니 안전할 거야.”
“안전하다고요? 황제의 명을 직접 수행한 게 그 칼릭스 베네비토라고요!”
유디트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숨을 헐떡이며 몇 번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안 되겠어요.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움직여야겠어요.”
“진정해, 유디트.”
“직접 가서 안전한지 확인할 거예요. 필요하다면 데려올 거고요.”
“대공이 그 애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야. 말했잖니. 메리엘이 금빛 기류를 봤다고.”
“아뇨, 그것만 믿고 있을 순 없어요.”
유디트가 단호히 답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데요. 설사 대공이 아셀라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갔겠어요? 보세요. 샤르투스를 대공이 직접 무너뜨렸다고요. 지금 당장 채비를…….”
“성하!”
나가려던 유디트가 벌컥 열린 문에 순간 뒷걸음질 쳤다. 아직 앳된 얼굴의 수습 신관이었다. 어찌나 허겁지겁 달려온 것인지, 그가 문고리를 잡고 허리를 반쯤 접어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찬 탓에 말이 툭툭 끊겼다.
“죄송합니다, 성하. 급한 일이라,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수습 신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웬 여자아이가 특수 포털로 신전에 들어왔다 합니다.”
* * *
“아, 아이가 아프다길래 의원을 불러다 드렸습니다! 그 뒤로는 식사를 준비해 달라 하셔서 만들어 올려보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여관 주인의 얼굴은 이제 보기 딱할 만큼 희게 질려 있었다. 갑자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공이 직접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언제 나갔나.”
“그, 그게 늦은 오후였는데…… 힉!”
모호한 답을 내놓던 여관 주인이 칼릭스의 매서운 기세에 눌려 숨을 들이켰다.
“오, 오후 여섯 시쯤,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하셨으니 그때쯤일 겁니다!”
여관 주인이 쩌렁쩌렁 답하며 온몸으로 살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머물렀다는 방이 어디지?”
“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후다닥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미처 그 방을 청소하지 못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손님을 받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를 생각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냉큼 방 문을 열고선 외쳤다.
“여깁니다!”
칼릭스가 가보라는 의미로 턱짓하자 여관 주인이 허리를 반으로 접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 근처로 올지 모르니 감시를 늦추지 말라.”
“예!”
대공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마저 떠났다. 라이젠을 문가에 세워두고, 칼릭스가 홀로 방 안에 들어섰다.
“…….”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부를 훑었다.
아셀라가 하루 남짓 머물렀을 공간. 서둘러 도망쳤을 텐데도 방 안은 놀라우리만치 깨끗했다. 흐트러진 침구와 테이블 위의 덜 치워진 식기가 어지럽혀진 것의 전부였다. 그녀의 평소 성격만큼이나 정갈했다.
벌써 사흘째. 금방 끝날 것이라 여겼던 추적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었다. 열 살 아이와 이동하면서도 그녀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였다.
‘마법 때문에 중간에 흔적이 끊기며 장소의 공백이 생깁니다.’
그때마다 카르마의 마법사들이 허공에 맴도는 희미한 마법의 자취를 찾아 방향을 알아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힘들었을 일이었으나 칼릭스에겐 충분한 유능함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은 더해졌고 불안함도 비례하여 커졌다. 참다못해 그가 직접 나서야 했을 만큼. 대공성을 비우고 아셀라의 흔적을 좇아 여기까지 내려왔다.
‘어디에 숨어 있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칼릭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온갖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아셀라를 못 찾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할 때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제게서 도망친 아내가 이름 모를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행복해할 모습을 떠올리자 눈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매일같이 시간 맞춰 마시는 그 빌어먹을 차가 아니었다면 진즉 광증이 폭발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칼릭스가 몇 차례 깊게 심호흡했다. 공기 중에 미미하게나마 남은 그녀의 향기가 느껴지자 미칠 듯이 휘몰아치던 불안과 분노가 그나마 가라앉았다.
‘이제 곧…….’
거의 다 온 셈이었다. 아셀라가 여기 있었음이 확인된 시각에, 도시를 빠져나가는 모든 길목은 봉쇄되었다. 그녀는 절대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전하. 관문 근처에서 비전하의 행방을 찾았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병사 하나가 부복하며 전하는 소식에 칼릭스가 몸을 홱 틀었다.
계단 세 개를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면서도, 그는 자신이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세워놓은 말에 단숨에 올라타 고삐를 틀어쥐곤 말에 거센 채찍질을 가했다. 가속도가 붙은 말이 맹렬하게 대로를 질주했다.
목적지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전력 질주한 말이 콧김을 뿜으며 거친 숨을 쉬는 동안에도 칼릭스는 한 점 흐트러짐 없었다.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온 마부가 희게 질린 얼굴로 제가 아는 것을 술술 불었다.
“부, 분명 마차에 타시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검문소에서 문을 열었더니…….”
말끝을 흐린 마부가 도르르 눈을 굴려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얼굴엔 불안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두둑해진 주머니에 운이 좋다 여겼던 마부는, 이제 제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칼릭스에게 눈앞의 인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깊은 어둠이 내리깔린 산의 초입으로 향했다. 수색하는 병사들이 만들어내는 불빛이 한밤을 가르며 주변을 밝혔다.
“라이젠.”
칼릭스의 부름에 라이젠이 곧바로 진행 상황을 고했다.
“마부가 마차를 몰았던 시간을 고려해 도달 가능한 반경을 계산했습니다. 절벽이나 낭떠러지 같은 위험 구간은 전부 차단했고,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수색 범위를 좁혀들어가는 중입니다.”
“…….”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곧 좋은 소식이…….”
“아니.”
칼릭스가 라이젠의 말을 잘랐다. 기다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이미 한계였다. 해소되지 못한 지독한 기갈이 더는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에라도 여자를 찾아 제 눈앞에 두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칼릭스의 적안이 짙은 갈망으로 번뜩였다. 느릿하게 입술을 핥으며 내뱉는 말엔 숨길 수 없는 열기가 담겼다.
“내가 직접 가겠다.”
그에게서 벗어나겠다고 저 험준한 산까지 오른 여자였다. 발각되었다 한들 순순히 따라 내려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아내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감히 아내를 만진 손을 잘라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털끝 하나 손대지 마라.”
산책하러 나간 아내가 돌아오는데, 마땅히 남편이 마중 나가야 하지 않겠나.
칼릭스의 나직한 목소리에 라이젠이 고개를 숙였다.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이제 아내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75화
칼릭스의 예상보다 산세가 훨씬 험했다. 오를수록 주변은 열악해졌다. 길은 온통 돌밭이었고 사방이 가시덤불이었다. 지금이야 병사들이 모두 헤쳐놓아 길을 열어두었으나, 아셀라가 오를 때는 그렇지 않았을 터.
‘여길 지나갔단 말인가.’
어떤 상황이었을지 빤했다. 급히 산으로 도망쳐 드느라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칼릭스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험한 숲에 몸을 내던지는 쪽을 택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극도로 저조해졌다.
그러던 중 칼릭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멈추어 섰다.
‘이건…….’
찢긴 천 조각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흐늘거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낚아채자 부들부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셀라의 것이었다.
칼릭스가 주먹을 인정사정없이 틀어쥐었다. 손아귀 안의 천이 엉망으로 구겨지는 게 느껴졌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놓칠 바에야 작은 틈도 없이 완전히 가두는 편이 나았다. 그의 손에 들어온 천 조각처럼, 곧 아셀라도 그렇게 될 터였다.
일단 제 손에 들어오고 나면…….
어둠 속에서 익숙한 형체 몇몇이 모습을 드러내며 한쪽 무릎을 꿇어앉자, 칼릭스의 생각이 끊겼다.
“찾았나.”
“예. 근처에 계십니다.”
칼릭스의 입매가 팽팽해졌다. 그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를 본 아셀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울음을 터뜨릴까, 혹은 도망가려고 발버둥 칠까.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내는 태생적으로 마음이 여린 여자였다. 협박이든 회유든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카드는 너무나 많았다. 결국엔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칼릭스가 숨을 느릿하게 들이마셨다. 어쩐지 부는 바람에서 그녀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공기까지도 가두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칼릭스는 이 순간, 아직도 성에 남아 있는 대공만이 출입 가능한 비밀 공간의 존재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성의 외딴 공간에 마련된 밀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공간. 그 방은 그들 욕망의 집약체였다.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는 베네비토 가문의 수장이 고작 물건 따위에 집착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공성의 어느 방보다도 안락하고 아름다운 그 공간에, 어떤 대상이 갇혔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셀라 베네비토.’
이제 칼릭스의 대에 이르러, 한동안 비어 있던 방이 다시 채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말간 눈동자에 담을 사람은 저 하나면 충분했다. 붉고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지며 나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도, 내뱉을 작은 숨결도, 품에 안을 때마다 느껴지는 말랑하고 보드라운 몸도,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완전히 제 색으로 물들 아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지독한 포만감에 칼릭스의 눈이 휘었다.
저벅저벅 산길을 헤치는 발걸음에 조급함이 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권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흑색 차림인 그들은 카르마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정예들로만 구성된 암살단이었다.
주인을 발견한 그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뻥 뚫린 시야 사이로, 칼릭스의 눈에 마침내 그토록 찾던 이의 모습이 비쳤다.
“……!”
일순 칼릭스의 적안이 동요했다.
아셀라의 은발이 바닥에 온통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죄다 찢어져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넝마가 되어버린 옷이 눈에 띄었다.
넘어진 것인지 바닥에 엎드린 아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가냘픈 팔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를 휩싸던 욕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고 그 자리를 걱정이 채웠다. 금방이라도 다가가 괜찮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자꾸만 급해지려는 발걸음을 애써 억누르며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다가갔다. 노력이 통한 것인지, 감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
아내의 푸른 눈이 출렁이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 * *
둘이 탄 마차 안은 고요했다. 간간이 아셀라에게서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칼릭스는 제 품에 안겨 기절하듯 잠든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여나 깰까 봐, 그는 거의 미동도 없이 마차에 앉아 있었다.
고생이 심했던지 그새 얼굴이 더 여위어 있었다.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몸은 마치 새털 같았다.
‘…….’
그의 원래 목표는 간단했다. 도망친 아내를 찾아 데려오는 것. 아셀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제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토록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는지 몰랐다. 단지, 아내라는 이름만을 달았을 뿐인 여자에게.
어차피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소유와 집착, 그 어딘가의 무언가가 아니던가?
그러니 아셀라 베네비토의 기분이나 생각, 감정, 마음 따위는 알 바 아니어야 마땅했다. 도망치려던 새를 기어이 붙잡았으니 이제 두 날개를 꺾어버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평생 문이 열리지 않을 새장에 가두고 저만 보게 하면 그만이었다.
‘돌아가는 대로…….’
그러나 그다음 생각이 선뜻 이어지지 않았다.
칼릭스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에는 꽤 자비로운 편이었으나, 배신자에게는 가차 없었다. 아셀라 베네비토는 그를 속였다. 그를 기만했고 배신했으며 도망쳤다.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왜.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제 감정에 칼릭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때였다. 때맞춰 마차가 멈추어 섰다. 라이젠이 마차 문을 열고는 예를 갖추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명마 네 마리가 이끄는 마차가 지름길을 통해 쉬지 않고 밤새 달린 덕이었다. 막 여명이 트는 대공저를 힐끗 쳐다본 칼릭스가 품에 안긴 아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담요를 가져와.”
열린 문 사이로 느껴지는 새벽 공기가 찼다. 이 몸에 감기라도 걸리면 아주 심하게 앓을 게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커다란 담요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어린 짐승의 부드러운 속 솜털만을 빗어 채취한 원사로 만든 담요는 가볍고도 따뜻했다.
담요를 받아 든 칼릭스가 아셀라의 몸을 꼼꼼하게 덮어 감싸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응…….”
얼굴에 찬 공기가 닿자 아셀라가 잠결에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칭얼대듯 소리를 냈다. 칼릭스가 그녀를 바투 끌어안으며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한편, 주인의 귀택을 기다리며 저택 앞에 대기했던 사용인들은 그 광경에 너나 할 것 없이 충격을 받았다.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마저 번졌다.
몇몇은 상황도 잊고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옆의 동료들에게 옆구리를 찔리고서야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사라진 대공비 때문에 저택이 뒤집힌 게 불과 엊그제였다. 어찌나 주인이 노했던지, 베네비토의 가신들조차 보고를 미루며 대공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대공비가 강제로 대공의 손에 끌려오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했었다. 결박되어 방에 갇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심한 일도 얼마든지 벌어지리라 예상했다.
더불어 새 안주인이 들어오며 품었던 희망도 조용히 접었다. 그저 봄날의 짧은 꿈이었거니 했다. 아셀라를 찾은 칼릭스가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베네비토 대공성의 사용인 모두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후였다.
그러나 그들 눈에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예상과는 몇 광년쯤 동떨어진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대공가에 바친 집사 파비안의 주름진 눈가마저 옅게 떨렸다.
‘대체…….’
주인의 시선이 아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게다가 태도는 또 어떠한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 양 품에 안아 들고는 혹여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세상 모르게 잠든 대공비는 혈색이 파리하기는 했으나 평온해 보였다.
“전하, 어디로 모실까요.”
“내 침실로 가겠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대공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마다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이젠조차 눈에 띄게 멈칫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간 대공이 마침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문밖에 도열해 있던 사용인이며 기사들이 저마다 낮게 숨을 토해냈다.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정말 전하께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부산했다. 그들의 생각을 재차 확인시켜 주듯, 파비안이 신중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비전하께 각별히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실수나 무례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집사 어르신.”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이보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아직은 이 흐름이 좋은 쪽일지 혹은 나쁜 쪽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변화의 열쇠는 모두 새 안주인이 쥐고 있었다.
* * *
칼릭스가 막 침실에 들어설 때였다. 그때까지도 잘만 잠들어 있던 아셀라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꺼풀을 잘게 떨었다.
은빛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내 눈앞의 존재를 식별한 푸른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아!”
놀란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켜며 몸을 버둥거렸다.
“곧 내려줄 테니 가만히 있어.”
칼릭스가 떨어지지 않게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 바르작대던 아셀라가 잠시 뒤 얌전해지자, 그가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서 아셀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칼릭스의 시선을 의식한 아셀라의 몸이 굳었다. 그는 고개 숙인 그녀의 어깨가 잘게 진동하는 걸 눈치챘다. 허벅지 위에 다소곳하게 모아 쥔 손끝이 옅게 떨리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흠칫. 저를 부르는 음성에 아셀라가 몸을 작게 들썩였다.
대체 이 여자는 왜 이렇게나 자신을 무서워하나.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고 했던가. 겁먹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칼릭스가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자 한숨 소리를 듣곤 또 움찔대는 게 보였다. 칼릭스의 마음이 다시 불편해졌다.
“왜 도망쳤지?”
그가 제 속내를 감추려 부러 질문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76화
작은 몸이 다시 한번 들썩거렸다. 맞잡고 있던 가냘픈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칼릭스는 강제로 아셀라의 얼굴을 제게 향하게 하는 대신,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왜 도망쳤느냐고 물었어.”
그제야 아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벌어졌다. 말을 할 듯 말듯 몇 번이나 달싹거리더니, 기어갈 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그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야.”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답했다. 그의 다그침이 이어졌다.
“당신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이능을 각성한 사실은 왜 숨겼지?”
메리엘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아셀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굳게 다문 입술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신전에는 잘 도착했겠지? 똑똑한 아이니까 별 탈 없이 로샨 신관님을 만났을 거야.’
자신은 대공에게 잡히고 말았지만, 그래도 메리엘 곁엔 다른 보호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어머니의 오랜 친우였다고 했으니까, 그분이라면 메리엘을 잘 돌보아 줄 거야.’
대신관의 위치에 있는 이라면 소식에도 밝을 것이고, 그렇다면 메리엘이 처한 상황도 금방 파악할 것이다.
이제 무사히 국경만 넘을 수 있다면 메리엘은 안전했다. 그녀와는 달리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어주어야 해.’
대공이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그녀를 살려둘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이제 아셀라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메리엘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 것.
“아셀라, 내가 묻고 있잖나.”
재차 들려온 말을 듣고도 아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칼릭스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틀어버렸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설명하기 힘든 묘한 불쾌감에 칼릭스가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로 그가 추궁했다.
“대답해. 왜 도망쳤는지, 당신 동생은 어디 있는지, 어째서 이능을 각성한 사실을 숨겼는지. 전부.”
“…….”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칼릭스의 잇새에서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무감하게 빛나던 눈이 낮게 침잠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
아셀라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칼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아셀라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눈 떠.”
“…….”
“아셀라 베네비토.”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아셀라는 오히려 감은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다 끝났는걸.’
처음 도주를 계획할 때부터 아셀라의 목적은 확실했다. 둘 다 도망치거나 그게 어렵다면 메리엘만이라도 탈출시키는 것.
비록 그녀는 다시 이곳으로 끌려왔으나 동생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만 입을 다물면 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녀 하나만의 목숨으로 끝날 수 있었다.
‘고통스럽더라도 참아야 해.’
어쩌면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고 대공이 지독한 짓을 가할지도 몰랐다.
필립의 채찍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끔찍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버텨야만 했다.
‘적어도 메리엘이 국경을 넘을 때까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감당해야 할 고통을 상상하면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래서 아셀라는 저를 향해 해사하게 웃음 짓던 동생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떠올리자 미칠 듯한 긴장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아셀라가 얌전히 처분을 기다릴 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말이 귀에 꽂혀 들었다.
“자백제를 먹여야 실토하겠나?”
생각지도 못한 협박에 놀란 아셀라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건 사납게 미소 짓는 칼릭스의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라이젠!”
가차 없이 아셀라의 말을 끊은 칼릭스가 보좌관을 불렀다.
라이젠이 들어온 이후에도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셀라를 응시하던 칼릭스가 짓씹듯 명령했다.
“베락시움을 가져와.”
“예?”
당황한 라이젠이 답지 않게 되묻고 말았다.
베락시움은 강력한 자백제였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한 방울만 먹여도 진실을 죄다 토하게 하는 약물이었다.
그 효과만큼 재료가 워낙 희귀하고 만드는 방법도 까다로워 귀족들도 평생 실물을 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하께서 왜 갑자기 베락시움을 찾으시는 거지?’
라이젠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금세 방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한 온기마저 감돌던 대공 부부 사이가 순식간에 냉랭해진 걸 보며 숨을 삼켰다.
‘설마 비전하께 베락시움을 쓰시려는 건가?’
라이젠의 동공이 흔들렸다. 뭔가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되고 있었다.
“하오나 전하, 베락시움은…….”
“지금 당장.”
도리가 없었다. 라이젠은 더는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인의 명을 수행했다.
잠시 후, 침대 옆 테이블 위엔 베락시움 병이 놓였다.
마개를 따낸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병을 내밀었다.
“마셔.”
아셀라의 물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