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가 어디로 갔을지.”
“그, 그게…….”
안토니가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모른다고 답했다간 제 옆의 아비 꼴이 날 게 뻔했다.
“비전하께서 가실 만한 곳이…….”
“모르겠지.”
대답은 칼릭스의 입에서 나왔다. 이윽고 안토니의 입에도 재갈이 물렸다.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경련하는 몸이 미친 듯이 들썩였으나 되려 칼릭스의 분노만 부추겼을 뿐이었다.
‘고작 네놈들 때문에.’
칼릭스가 식어버린 쇳조각을 던져버리곤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지져댔던 부위에 망설임 없이 박아넣고 헤집었다.
안토니의 몸이 바들바들 경련하며 기괴하게 뒤틀렸다. 햇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겨우 벌레만도 못한 네놈들 때문에.’
칼릭스의 잇새로 분노가 새어 나왔다.
아셀라를 괴롭히며 학대했던 자들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걸맞은 끝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를 대신해 깔끔히 처리해 주었으니 제게 고마워하며 기뻐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아내는 도리어 도망쳐 버렸다.
그를 속이고.
칼릭스는 스스로 제품에 안겨들던 자그마한 여체를 기억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이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로 도와달라 청하던 목소리도 귀에 생생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매를 휘며 고맙다고 답하던 얼굴도 또렷했다.
그랬는데. 그래놓고선.
순순히 새장 안으로 들어오는 척하며 그를 안심시키곤, 문을 열어두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아가 버렸다. 처음부터 그의 곁에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처럼.
이는 완벽한 기만이었다. 명백한 배신행위였다.
‘…….’
쨍그랑, 들고 있던 날붙이가 바닥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입가에 새하얀 거품을 물며 정신을 놓은 안토니를 노려보던 칼릭스가 몸을 돌렸다.
라이젠이 건넨 검은 천으로 손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아낸 그가 짤막이 명했다.
“숨은 붙여놔.”
“예, 전하.”
카르마의 고문관들이 기절한 두 사내를 둘러쌌다. 양동이의 차가운 물이 끼얹어지는 소리를 뒤로하며 칼릭스가 지하실을 나섰다. 라이젠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복도를 저벅저벅 걷는 칼릭스의 발걸음마다 희미한 분노가 실렸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런 주인을 지켜보는 라이젠의 불안감은 말도 못 했다. 이마에서 자꾸만 식은땀이 나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도무지 예측되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대공비의 방에서부터 시작된 수색은 첫 보고부터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마법 사용의 흔적이 있습니다.’
카르마의 일원 중엔 마법사도 있었다. 테라스에서 찾아낸 흔적을 조사한 그들은 메리엘의 방에서 첫 마법이 시행되었음을 발견했다.
‘아직 확신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만, 메리엘 아가씨가 이능을 각성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군.’
카르마의 보고에, 칼릭스가 비소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돋는 것만 같은 오싹한 웃음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대공비의 호위기사, 시녀, 관련된 사용인 모두 끌려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백작 부인인 마고조차 예외가 되지 못했다.
대공성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언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지 몰라 모두가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었다.
라이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찾아라.”
평소보다 낮은 대공의 목소리가 지하 복도의 차디찬 공기를 울리자, 라이젠이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네게 카르마의 전권을 주겠다.”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부디 연루된 자가 많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사라진 대공비를 찾아야 했다.
지크를 포함해 카르마 단원 대부분이 대공비를 찾아 나선 참이었지만 더 서둘러야 했다. 칼릭스의 인내심이 언제 한계에 다다를지 알 수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허리를 깊게 숙인 라이젠이 주인의 명을 수행하러 움직였다.
* * *
칼릭스의 발걸음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공비의 방이었다. 거침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은 여전히 정갈했다. 커다란 창에 달린 새하얀 커튼이 한낮의 햇빛을 은은하게 비쳐들게 했다. 칼릭스의 시선이 방 안의 테이블, 화장대, 침대 등에 차례로 닿았다.
‘한 달 남짓인가.’
아셀라가 이곳에서 머물렀던 시간.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으나 벌써 방 곳곳에 아내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침대맡의 향초는 그녀에게서 나던 은은한 향과 닮았다. 화장대 위엔 자주 쓰던 장신구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테이블 근처의 상자엔 가끔 놓던 자수 용품들이 가득했다.
“아셀라 베네비토.”
칼릭스가 나직하게 아셀라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녀의 이름 뒤에 달린 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아내임을 뜻하는 표식. 그들이 부부임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
그녀는 제게 속한 인간이었다. 그의 여자였다. 하나뿐인 아내였다.
“이제 만족하나.”
칼릭스가 침대보를 느릿하게 쓸었다. 종종 잠든 아내를 지켜보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만일 지난 밤도 그녀를 찾았었다면, 그래서 곁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오늘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기쁘고 행복한가.”
샤르투스를 멸문시킴으로써 아셀라가 붙들 수 있는 모든 끈을 잘라냈다. 일부러 그리하였다. 그녀에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도록. 그래서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완전히 제 손에 붙들었다.
잡은 줄로만 알았다.
“날 속이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니.”
불과 엊그제 이 침실에서였다. 펑펑 눈물을 쏟은 이후 도와달라 청한 끝에, 그녀는 그의 품에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기력이 다해 지친 탓이었겠지만 그 무방비한 모습에 그는…….
칼릭스가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말아쥔 손의 마디가 죄다 희게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그를 온통 휘젓는 이 감정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베네비토의 이름을 단 여자가 제 의무도 다하지 않고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데에 분노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칼릭스는 자신에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세간에서 쉬이 떠들어대는 말랑한 감정 따위는, 그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어차피 아셀라를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메리엘 록트린이 각성했다고는 하나 최근이었다. 순간이동 마법을 걸 정도는 되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두 사람이 썼을 마법의 흔적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었으니까.
공국의 경계가 한층 강화된 상황에서, 설사 멀리 도망쳤다고 해도 결국은 공국 내였다.
“그러니 즐기도록 해.”
칼릭스가 굽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방을 한번 휘돌아 본 그가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올 때까지.”
일단 찾아서 데려오면 이 방이 비게 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 * *
아셀라와 메리엘은 대공성을 빠져나온 이후로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제 막 각성 중인 메리엘의 마법으론 한계가 있었다.
차선으로 택한 방법이 지면에서 살짝 발을 떼어 공중을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력 소모가 심해 한 번에 몇 분이 한계였고, 그마저도 사람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어 자주 쓸 순 없었다.
다행히 번화가까지 다다라 다른 도시로 향하는 새벽 발 삯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한 사람당 은화 하나요.”
마부가 아셀라를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가 아무리 간소한 외출복을 찾아 입었다지만 대공비의 드레스룸에 있던 최고급품의 옷이었다. 옷감의 재질부터가 달랐다.
“그런데 암만 봐도 이런 마차를 탈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아셀라가 메리엘의 머리에 씌웠던 모자를 누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부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혹시 귀족가의―”
“받게.”
아셀라가 마부의 손바닥 위에 금화 하나를 놓았다. 제 손에 놓인 반짝이는 것을 보자마자, 그가 냉큼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마차 문을 열곤 허리를 깍듯하게 반으로 접으며 외쳤다.
“편히 모시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주게.”
“예!”
삯 마차를 잡아탄 이후로는 조금 더 순조로웠다. 도시에서 도시로, 또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다 메리엘의 마력이 차오르면 마법을 썼다.
그러나 행운은 길지 않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73화
도주가 사흘째에 접어들던 날 아침, 메리엘은 일어나지 못했다.
힘든 여정에 결국 앓아눕고 만 거였다. 열이 끓어오르는 아이를 두고 아셀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여관 주인이 의사를 알아봐 주었다. 약을 먹이고 나서야 아이의 열이 가라앉았다.
메리엘이 다시 기운을 차렸을 때는 하루가 거의 지나버린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아셀라가 물수건을 적셔 들어오다 침대맡에 걸터앉은 메리엘을 발견하곤 얼른 다가갔다.
“메리엘, 괜찮아?”
“언니…….”
“응. 언니 여기 있어.”
“우리 떠나야 하는데 어떡해?”
“아니야. 오늘 하루는 쉬어도 돼.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출발하자.”
열은 떨어졌으나 여전히 메리엘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마력도 바닥나 버린 상태였다. 한시가 급했지만 아픈 아이를 무리하게 할 순 없었다.
‘거리가 많이 좁혀졌겠지만…….’
지금쯤이면 추격이 시작되고도 남았다. 어디까지 왔을까. 밤중에도 마차를 잡아타며 쉬지 않고 이동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당장 오늘 하루 내내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
아셀라가 턱밑까지 차오른 불안을 꾹꾹 누르며 메리엘을 챙겼다.
“배고프지? 뭐라도 좀 먹을래?”
따뜻한 고기 수프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 신선한 과일 샐러드까지. 작은 여관이었지만 객실은 깨끗했고 식사도 준수한 편이었다.
아셀라는 메리엘이 식사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동생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수프를 몇 술 뜨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입맛이 영 돌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대공성에서 도망친 이후로 거의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으나 슬슬 한계였다.
아셀라가 소매 안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자그마한 돌멩이가 손에 잡혔다. 로샨이 주었던 포털이었다.
‘이걸 써야 할지도 몰라.’
지금껏 아셀라가 포털을 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로샨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입이 극도로 통제되는 대공성에 두 번이나 드나들며 그녀를 치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로샨도 대공과 긴밀한 관계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포털의 이동지점 역시 헤뷔움의 대신전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언니, 그게 뭐야?”
메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셀라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셀라가 머뭇거리다 포털을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포털이잖아? 누가 준 거야?”
“……로샨 신관님이.”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걸 안 썼어?”
아셀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관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도 될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결국, 아셀라가 내놓은 건 애매한 답변이었으나 메리엘이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그랬구나.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로샨 신관님은 우리 편이거든.”
“우리 편이라니?”
메리엘이 겸연쩍은 듯 콧잔등을 문지르다 대답했다.
“미안. 언니한테 말 못 했는데 실은 독심술도 경험 중이었―”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간 아셀라가 밖을 내다보더니 급히 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언니?”
“메리엘, 당장, 여길 나가야 해.”
아셀라의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본 메리엘이 상황을 짐작했다.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겉옷을 챙겨입었다.
“작은 흔적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병사들이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구둣발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어지러이 이어졌다.
아셀라가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치곤 메리엘의 턱에 모자 리본을 단단히 고정했다. 혹여나 병사들과 마주치더라도 얼굴을 숨길 수 있도록 목에 커다란 스카프까지 뱅 둘렀다.
그렇게 메리엘의 손을 잡고 방 문을 열었을 때였다.
“혹시 여인과 여자아이 일행을 본 적이 있소?”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셀라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대공의 병사들이었다. 아직 낮이라 여관의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맞은편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서 기사 하나가 손님들을 상대로 탐문하고 있었다.
아셀라가 급히 뒤돌아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시간이 없었다.
“언니?”
“로샨 신관님이 우리 편이라는 거, 확실한 거야?”
“응. 확실해. 독심술로 빛깔을 봤는걸. 우릴 도와주고 싶다고도 하셨어.”
“그래, 그렇다면…….”
아셀라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포털을 꺼내 입을 맞추었다.
우웅, 흰 돌이 옅게 진동하더니 파스스 빛을 뿜었다. 잠시 후 그들 앞에 커다란 원형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포털이었다.
“메리엘, 언니 말 잘 들어.”
아셀라가 자세를 낮추어 메리엘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꾸만 빨라지려는 말을 애써 늦추었다.
“신전에 가면 제일 먼저 로샨 신관님을 찾아. 그 전까지 누가 물어보더라도 네 이름을 절대 밝혀선 안 돼. 알겠지?”
“언니는?”
왠지 이상한 느낌에 메리엘이 되물었다. 아셀라가 메리엘의 겉옷 단추를 여며주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각오했던 일인데도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도 할 일만 마치고 곧 따라갈 거야.”
“할 일이 뭔데?”
“그런 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아셀라가 동생을 안심시키려 얼굴빛을 밝게 꾸미며 웃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갈게.”
“꼭 오는 거지?”
“그럼.”
메리엘이 불안감에 쉬이 포털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것을, 아셀라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메리엘이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포털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빛기둥이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메리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생이 떠나버린 자리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아셀라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아셀라가 다시 포털에 입술을 맞댔다. 그러자 단단했던 조약돌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소용돌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하나가 충분히 드나들 정도로 컸던 소용돌이가 불과 몇 초 만에 점 하나의 크기로 줄어들더니 소멸해 버렸다.
“언니는 많이 늦을 것 같아.”
포털은 누군가가 일부러 닫지 않는 이상 일정 시간 동안은 열린 채 유지됐다. 도착지점에서 더는 넘어올 수 없게 포털을 닫더라도 출발점의 소용돌이, 즉 포털의 입구 자체는 남았다.
마법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면 포털을 연 사람이 남아 포털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세요, 어머니.’
짧은 기도를 마친 아셀라가 문고리를 잡고 크게 심호흡했다. 이젠 혼자서 움직여야 했다. 살짝 문을 열어 바깥 동태를 살피니, 맞은편 식당에서 탐문 중이던 병사는 이제 옆 가게에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여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아셀라가 계단을 내려가 일 층 플로어에 다다를 때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으레 다른 손님들이 그렇듯 잠깐의 외출이려니 생각하며 나가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번화가 한복판의 숙소를 빌렸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늦은 오후의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아셀라가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 속으로 섞여들었다.
‘신성 자치주 헤뷔움.’
그곳까지 가기 위해선 일단 공국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먼저였다. 그녀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
* * *
아셀라가 탄 마차가 죽 뻗은 길을 내달렸다.
목적지인 다음 도시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은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어느새 노을이 내리깔리는 하늘을 보며 아셀라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짧은 기간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정신을 다잡으려 해도 자꾸만 졸음이 밀려들었다. 마차의 흔들림과 소음을 뒤로 한 채, 아셀라의 눈이 느릿하게 감길 때였다.
“……!”
덜컹, 갑자기 마차에 가해진 충격에 아셀라가 눈을 떴다.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지?’
마차가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에 아셀라가 창문에 달린 천을 젖혔다. 말이 좋아 창문이지, 뻥 뚫려 있어 가림천을 걷자마자 바깥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게 무슨…….’
마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행렬의 끝에 도시 외곽의 성벽이 보였다. 전쟁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보통은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다.
‘국경 지역도 아닌데 이렇게 길이 막힐 수 있나?’
그때 어딘가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그녀의 창밖으로 말을 탄 자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의 갑옷에 달린 베네비토 대공가의 문장을 보자마자, 아셀라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저들이 검문 중인 거야!’
병사들이 관문을 막고 일일이 통행하는 사람을 확인하고 있었다. 급히 가림막을 당긴 아셀라가 보이지 않게 마차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구색만 맞춰 뚫린 창 너머로 병사들의 대화가 들렸다.
“아직인가?”
“예. 도시를 빠져나가는 길목마다 검문 중입니다만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항이 전해진 건 없었고?”
“간밤에 묵으신 것으로 추정되는 여관을 발견했다 합니다.”
아셀라의 눈이 불안으로 떨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금방 붙잡히고 말 거야.’
느리지만 행렬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넋 놓고 있다간 결국은 병사들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마차를 돌리자니 괜한 의심만 살 게 뻔했다. 이미 도시 곳곳에 기사들이 깔려 있을 테니 돌아가도 소용없었다.
‘어떻게 하지?’
창밖을 살피는 아셀라의 시선이 다급해졌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산?”
숲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도시라던 마부의 설명이 기억났다. 도시 외곽이었기에 마차들이 지나다니는 이 넓은 길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산이었다.
‘산을 넘는다면…….’
언뜻 보아도 산세가 험준해 보였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들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마저 들었다.
‘산만 넘는다면 시간을 벌 수 있어. 내가 도시 안에 있다고 여길 테니까.’
아셀라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
해가 완전히 저물자 아셀라가 살짝 마차 문을 열었다. 병사들은 어디론가 이동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셀라는 마부의 귀에 기척이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을 지르밟고는 마차를 빠져나왔다.
느려진 행렬 탓에 간간이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아셀라가 그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적당히 주변을 산책하는 척하다, 어둠을 틈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느 정도 마차에서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부터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산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주하는 대공비 74화
신성 자치주 헤뷔움의 대신전에 우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살인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희생된 두 명의 신관 모두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때문에 유디트와 로샨은 거의 열흘 가까이 이 일에 매달려야 했다.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했다. 그러나 그 정도 일쯤은 진짜 중요한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디트가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유디트, 눈 좀 붙이지 그래?”
“아뇨. 그럴 때가 아니에요. 벌써 다섯 명이라고요.”
“그래도 쉬어가며 해야지. 지금 사흘째 꼬박 날 새우고 있는 거 알아?”
유디트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곤 외마디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도저히 모르겠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유디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죄다 물어 뜯어버려 사라진 손톱을 또다시 초조하게 깨물며 말을 이었다.
“모든 흑마법은 신성력으로 간파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섯 명 모두 살아 있을 적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술식이 걸려 있었는데도요!”
유디트가 검은 기운에 잡아먹히다시피 잠식되어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특히 머리와 가슴 부위의 피부는 그을린 것처럼 새카맸다. 각각 정신을 좌지우지하고 생명력을 앗아가는 사악한 술식이 박혔던 흔적이었다.
“그만큼 적이 강하고 위험하다는 증거겠지.”
“적’들’일 수도 있어요.”
유디트가 로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한껏 긴장이 서려 있었다.
“인간이 이 정도의 흑마법을 펼치려면 일반적인 매개체로는 불가능해요. 아시겠지만 뭔가 강력한 동력원이 필요하다고요. 어쩌면…….”
유디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설마, 그건 아닐 거예요. 그렇죠, 스승님?”
“…….”
“스승님!”
로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폭풍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마탑에서도 계속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기다려 보자꾸나.”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마친 로샨이 시선을 옮겼다. 여섯 명이 족히 앉고도 남을 유디트의 책상 한쪽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서신이 쌓여 있었다.
“수도의 신전에서 오늘 편지가 도착했구나.”
가장 중요도가 높은 편지가 위쪽에 놓이게 되어 있었다.
“빈민가 지원 사업에 대한 보고 아닌가요?”
“아니. 그건 이미 받았어.”
로샨이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열고는 차분히 편지를 펼쳤다. 그녀의 눈이 미끄러지듯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던 로샨의 얼굴이 편지의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눈에 띄게 굳어갔다. 급기야는 왼손에 들고 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스승님? 무슨 일이에요?”
유디트가 몸을 일으켜 로샨의 손에서 편지를 빼냈다. 이내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샤르투스가 멸문했다니요? 반역이라니요!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유디트가 고함치듯 말했다.
“엄연히 제국의 후작가인데 이게 말이 돼요? 개국공신 가문이라고요! 게다가 헤르니야 여신의 이능까지 가졌는데, 이럴 순 없어요!”
“그 이능이 지금의 대에서 끊겼으니까.”
먼저 평정을 되찾은 로샨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짚어냈다.
“공식적으로는.”
유디트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헤르니야 여신을 섬기는 신전과 그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 전해지는 샤르투스 가문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아델이 죽고 나서부터는 교류가 끊겼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샤르투스와 신전을 묶어 생각했다.
“현 황제가 신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