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71)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끝내는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슬픔이 아셀라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용서해 주세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셀라가 울음을 목 뒤로 삼켰다. 고개를 들고 칼릭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뇨. 저는 샤르투스예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라서였을까. 아셀라는 평소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한 번도 베네비토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칼릭스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전하께서도 절 아내라고 여기신 적 없잖아요.”

“……뭐?”

“말 잘 듣는 얌전한 인형, 후계를 이을 도구, 대공비의 자리를 채울 적당한 여자.”

하나씩 읊는 아셀라의 얼굴이 비참함으로 물들었다.

“팔려온 주제에 값어치도 제대로 못 하는 결함품.”

“아셀라 베네비토.”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경고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을 다문 아셀라가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저 사람이 항상 무서웠어.’

그가 두려웠었다.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늘하고 냉정한 시선도,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도, 그가 가진 권력과 부도, 모든 것이 두려웠다.

언제든지 그 힘으로 자신을 짓밟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괜찮다가도 더럭 겁이 나곤 했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힘겹게 아득바득 쥐고 있던 희망을 완전히 놓아버린 이후의 감정은 차라리 평온함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냥감을 훑듯이 쳐다보던 비정한 붉은 눈. 배려 없던 행동과 잔인하게 내뱉던 말……. 깊숙한 기억의 바다에서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수면으로 끄집어 올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여겼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

아셀라는 사실 자신이 상처받았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안에서부터 곪았던 상처였다.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된 상처가 한계까지 부풀어 오르면 터지고 말듯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벌어져 있던 상처를 잔혹하게 헤집는데도 다른 고통과 공포가 더 컸던 나머지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셀라가 두 눈을 꾹 감았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설움이 북받쳐 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어이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저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여기서 어떤 처지인지 잘 알아요.”

“그만해.”

한편, 칼릭스는 아셀라의 말이 당혹스러웠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으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사실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그녀를 선택해 결혼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아셀라의 입에서 저 말을 듣는 순간, 제 치부가 죄다 까발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하께 어떤 존재인지도.”

“그만하라고 했어.”

그러나 칼릭스는 아셀라의 입술이 다시금 열리는 걸 막지 못했다.

“……전하의 전리품.”

칼릭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결혼식 날이었다. 잔뜩 긴장하여 떠는 그녀에게 위협하듯 을러댔었다.

‘전쟁이란 꽤 할 만해. 특히 전리품이 가치 있다면 더욱.’

너는 팔려온 것이라는, 그러니 인형처럼 얌전히 있으라는 말.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처음부터 처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겠다는 저열한 마음에서 비롯된 협박.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가.’

칼릭스의 적안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스운 가정이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었다. 인형처럼 가져다 놓으려 했으나 그의 아내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그런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저,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모른 척 외면했을 뿐.

‘전하, 샤르투스 영애와 따로 약속을 잡으시겠습니까?’

‘필요 없다.’

청혼서를 넣고서도 얼굴 한 번 보러오지 않았던 자신을 두고,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나 원한다니 당장 아일 갖게 해주지.’

‘네 본분이 무엇인지 잊었나?’

‘싫고 좋고는 내가 정해.’

몸이 살짝만 닿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자에게 윽박지르듯 했던 말들.

어떤 저항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아내는 어떤 심정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까.

‘팔려왔다’는 아셀라의 표현은 그녀가 느꼈을 수많은 감정을 응축한 말에 불과했다.

“…….”

아셀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여린 뺨을 감쌌다. 그녀의 감은 눈꺼풀 사이로 하염없이 눈물방울들이 떨어지며 그의 손등을 흥건하게 적셔갔다.

“아셀라.”

칼릭스의 무감하던 눈빛에 설핏 온기가 감돌았다.

조금은 다정한 말을 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꾸며낼 것까지는 없이. 사실이지만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기는 조금 낯간지러운.

“당신은 내 아내야.”

아셀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칼릭스가 재차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하지 않아.”

그러고는 잠자코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겼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아셀라의 물빛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말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칼릭스의 심장에 아릿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는 왠지 누군가가 목구멍을 솜으로 틀어막은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답했다.

“그래.”

“그럼…….”

아셀라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일렁였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데 선뜻 꺼내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칼릭스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아셀라의 입술이 열렸다.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제 동생만이라도…….”

달싹거리는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말이 묘했다. 그러나 칼릭스가 그 미묘한 지점을 곱씹을 틈도 없이 아셀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칼릭스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껏 아내가 그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으니까.

“저는 괜찮으니까 메리엘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전하께서 조금만 힘써주시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부탁드릴게요…….”

안쓰러울 정도로 간절한 청이었다. 울음기가 섞여 말이 횡설수설했으나 칼릭스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메리엘 록트린이 된 걸 아직 모른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 제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아셀라가 제게 기댈 테니까.

마고를 통해 미리 소식을 전하게 한 것도 이 탓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였다.

아셀라가 고민 끝에 깨닫게 될 거라 여겼다. 동생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뿐이라는걸.

그런데 아내의 생각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나가버린 듯했다. 칼릭스가 직접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도 버려졌다고 여긴 게 분명했다.

아셀라가 제 아픈 속내를 다 토해냈던 것도, 결국은 곧 죽을 것이라 여겼기에 한 말이었다. 기꺼운 오해는 아니었으나 그렇기에 아내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칼릭스가 제 팔을 붙잡은 가냘픈 손에서 눈물로 얼룩진 아셀라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절박했다.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의 심장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동시에 낯선 감정이 일었다.

아주 가끔 그가 아셀라에게서 받았던, 다른 이에게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그 감정이었다.

“메리엘만 살려주신다면 전하께서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할게요.”

“그럴 필요 없어.”

칼릭스가 아셀라의 뺨에 어지러이 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직이 답했다.

“당신도, 당신 동생한테도 아무 일 없을 테니까.”

“…….”

“그러니 그만 울어.”

칼릭스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셀라가 처음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녀가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사실 아셀라가 필립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입수했을 때, 그는 참을 수 없이 분노했었다. 그러곤 저에게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메리엘 록트린의 목숨을 담보로 겁박하고 회유하는 저열한 방법마저 고려했을 만큼.

그러나 또 막상 아내를 마주하자마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딱 지금처럼.

“이리 와.”

아셀라가 멈칫했다. 잠시 꼼짝 않고 가만히 있던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주춤거리며 천천히 다가와 그의 품에 안겼다.

칼릭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셀라를 끌어안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71화

제게 닿아오는 보드라운 몸에 칼릭스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은은하게 코끝에 감겨드는 체향이 달큼했다. 그가 어루만지듯 아셀라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한참이나 칼릭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셀라가 고개를 들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약속해 주시는 거죠?”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대왔다.

“정말로 메리엘을 살려주실 거죠?”

도저히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칼릭스가 목이 쉰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어쩌면 아셀라가 칼릭스의 팔을 붙잡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아내와 몸이 닿을 때면, 그는 제 생각이 비이성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말을 죄다 들어주고 싶어지곤 했다.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눈치챘다. 몸속,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에게 연신 경고하고 있었다. 더는 위험하다고.

그러나 아내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은 머릿속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릴 만큼 달콤한 것이었다.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중독될 만큼 강렬한 매혹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 속절없이 응할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 * *

대공이 돌아온 지도 어느덧 사흘째였다.

이젠 대공성의 기사들부터 말단 마구간지기에 이르기까지, 샤르투스 후작가가 멸문했다는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아셀라 앞에서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아내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돌아온 날 대공이 대공비에게 보인 태도로, 그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빠르게 눈치챘다.

“전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비전하를 찾아가셨다며.”

“자정이 한참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던걸?”

“주치의가 아침저녁으로 비전하의 건강을 살핀대.”

“주방에도 비전하께서 드시는 음식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어.”

은밀한 소문은 사용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왜 전하께선 샤르투스 가문을?”

“왜겠어? 그놈들이 비전하의 가문을 빼앗았잖아. 전하께서 대신 복수해 주신 거지.”

“메리엘 아가씨는 어쩌고?”

“이건 내가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기사님한테 들은 이야긴데…….”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살핀 사용인이 제 동료들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미 비전하의 친부이신 록트린 가문으로 입적이 끝났대. 메리엘 아가씨가 유일한 후계자고, 비전하께서 아가씨의 후견인이 되시고.”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비전하께서도 아셔?”

“아직은 모르신다던걸. 그런데 곧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겠어?”

대공비를 향한 그들의 깍듯함은 배가 되었다. 정작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아셀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막 점심 식사를 마친 오후였다. 아셀라가 디저트를 오물거리는 메리엘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리엘.”

“응?”

“대공성에서 지내는 거…… 어때?”

“좋아! 로메인 부인이랑 수업하는 것도 즐겁고, 정원도 예쁘고. 다들 친절해서 이전에 지냈던 곳보다 훨씬 좋아.”

메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답하자 아셀라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은 굉장히 어지러웠다.

아셀라는 며칠 전의 밤을 떠올렸다. 귀환한 칼릭스 베네비토가 그녀를 찾아왔던 날이었다.

‘이리 와.’

제품으로 오라며 손을 뻗는 남자의 모습은 조금 의외였다. 그렇게 풀어진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마치…….

‘아니야.’

아셀라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의미 없을 행동에 다른 이유를 부여해서는 안 됐다.

‘잠깐의 변덕일 뿐이야.’

갑자기 제 할 말을 하는 인형에게 약간의 흥미가 돋은 것에 불과할 터다. 그래서 아셀라는 남자의 기분을 맞추려 스스로 다가갔다.

더할 나위 없이 양순한 태도로 그에게 청했다. 도와달라고. 메리엘이 수도로 끌려가지 않게 해달라고.

‘도망쳐야 해.’

칼릭스가 그녀와 메리엘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단언했지만, 아셀라는 믿지 않았다.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가 언제 생각을 바꿔 자신들을 죽이려 들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단지 약간의 시간만을 벌었을 뿐이다.

‘제국 안에서는 안심할 수 없어.’

이제는 방패막이가 되어 줄 가문의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르메니아 제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다.

어떻게든 제국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메리엘의 각성이 멀지 않았으니 안전한 곳만 찾을 수 있다면 충분했다.

“메리엘, 만약에 말이야.”

아셀라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생의 모습에 무거운 죄책감이 일었다.

“아카데미에 가지 못하게 되면―”

“언니.”

메리엘의 얼굴이 돌연 진지해졌다. 아이의 작은 손이 그녀의 손을 덮었다. 아셀라는 삽시간에 달라진 동생의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난 괜찮아. 아카데미에 가지 못해도 상관없고.”

“메리엘?”

“샤르투스 가문이 그렇게 되었다는 거 나도 알아.”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셀라의 머릿속이 징 울렸다. 자신도 내색하지 않았고, 시녀들도 극도로 몸을 사리며 입조심 하는 걸 보았는데 어쩌다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저택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서 조종술을 썼거든.”

“그랬구나.”

아셀라가 착잡한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메리엘만은 모르길 진심으로 바랐었다. 동생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받았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괴로워졌다. 알면서도 모른척했을 아이가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겠구나.”

“조금.”

“내가 너만은…….”

아셀라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언니?”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줄게.”

아셀라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메리엘이 한참 뒤 물었다.

“언니는 여길 떠나고 싶은 거야?”

메리엘의 질문이 정곡을 찔렀다. 아셀라가 눈을 끔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고 싶어.”

몸은 편하고 안락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러했다. 그러나 마음 불편한 건 샤르투스 저택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믿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으니까. 사방이 칼릭스 베네비토의 눈과 귀가 깔린 감옥과도 같았다.

단지 그뿐이라면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너무 위험하니까.”

자신과 메리엘의 목숨이 그의 손에 있었다. 남자가 원하는 대로 목줄 잡혀 끌려다니다 언젠가 그의 변덕이 끝나는 순간 처참하게 처분될 미래가 빤히 보였다.

“네가 각성을 마치는 대로 떠날 거야. 준비도 해두었어. 제국을 떠나 안전한 곳에 정착하자.”

아셀라가 미리 외워두었던 대공성의 지리와 도주로, 챙겨둔 보석과 금화 등을 떠올리며 답했다.

“그럼 오늘 떠날까?”

예상하지 못한 메리엘의 말에 아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언니에게 말해주려 했는데.”

메리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들과 한참은 떨어져 있던 테라스의 걸쇠가 풀리더니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놀란 아셀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법의 이능이었다.

“아직 각성한 건 아니야. 오늘 아침부터 경험을 시작한 거라서.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도, 마력의 양에도 한계가 있어. 이능을 쓰다 보면 금방 지쳐버리고…….”

말끝을 흐리던 메리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씩 웃었다.

“그래도 여길 빠져나가는 덴 꽤 쓸만할걸?”

* * *

약속된 시간, 침대에 누워 있던 아셀라가 눈을 떴다. 모두가 잠들었을 깊은 한밤중이었다.

‘서둘러야 해.’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일정이 당겨진 탓에 준비를 완벽히 마치진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문까지 멸문한 상황에서 한시가 촉박했다.

소리를 죽여가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가능한 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를 묶어 틀어 올렸다. 얼굴과 머리칼을 가려줄 챙 넓은 모자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화장대 서랍으로 걸어가 펜던트를 꺼내 목에 걸고는, 보석과 금화가 든 주머니를 챙겨 품에 단단히 넣었다.

‘메리엘이 기다릴 거야.’

발걸음이 급했다. 아셀라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바로 옆 테라스에서 익숙한 이의 속삭임이 들렸다.

“언니!”

“메리엘!”

동생을 발견한 아셀라의 눈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향해 마주 웃은 메리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메리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메리엘?”

“나 여기 있어.”

아까와 똑같은 방향에서 메리엘의 목소리만이 들리자 아셀라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투명 마법을 써서 그래. 하지만.”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아셀라의 품으로 메리엘이 와락 뛰어들었다. 동시에 메리엘의 모습이 다시 아셀라에게 보였다.

“이렇게 몸이 닿으면 볼 수 있게 돼.”

“신기하네.”

씩 웃은 메리엘이 아셀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테라스 난간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착지 지점을 가늠하며 주변으로 보호 마법을 건 뒤, 아셀라를 돌아보았다.

“이젠 내려갈 거야.”

따뜻한 기운을 품은 마력이 몸을 감싸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바닥에 착지해 있었다. 메리엘이 치맛자락을 가볍게 톡톡 털며 몸을 바로 세웠다.

“언니, 가자…… 읍!”

아셀라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급히 메리엘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공성의 경비를 맡은 기사들이 그들 근처에서 순찰 중이었다.

‘저들한텐 우리가 안 보여.’

그녀는 마법으로 자신들의 몸이 투명해졌음을 되새겼다. 그런데도 잔뜩 긴장한 심장이 펄떡였다.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심장 소리가 저들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그럴 일이 무에 있겠나. 비전하께서 이 밤중에 산책이라도 하시겠나?”

“하기야. 지금쯤은 잠들어 계실 텐데.”

이야기를 주고받는 병사들의 낮은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가 도로 멀어졌다. 아셀라는 잠자코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메리엘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 뒤로는 마주치는 이가 없었다. 아셀라에게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앞에 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이동을 할 순 없지만…….”

메리엘의 손바닥 위에서 만들어진 마력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이가 아셀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준비됐어?”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두 사람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 * *

새벽빛에 둘러싸인 대공성의 분위기가 오싹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당연하게도, 성의 주인인 칼릭스의 심기가 완전히 뒤틀려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무척 화가 났다. 이토록 화가 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냈나?”

주인이 선홍빛 눈을 한껏 휘며 짓는 웃음에, 라이젠의 전신으로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그건 천장과 이어진 쇠사슬에 두 손이 결박되어 매달린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샤르투스 후작 가의 후계자로, 또 그 후계자의 아비로 불렸던 자들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72화

그들이 대공성의 지하실로 끌려온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지옥을 경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두 사람은 이제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했으나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라이젠. 내 비가 이자들과 지낸 기간이 얼마라고?’

‘칠 년 이 개월하고도 나흘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한쪽 입꼬리만이 비틀려 올라갔다. 그 뒤 칼릭스의 입에서 나왔던 말은, 카르마의 고문관들조차 마른침을 삼켰을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금괴 열 상자를 기억하나?’

나는 무엇이든 열 배로 갚자는 주의라.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 이후 고문관들의 손에 살이 갈리고 뼈가 뒤틀렸다. 만신창이가 되어 몸이 너덜너덜해지면 온갖 치료약물이 쏟아지며 죽지 못하게 회복시켰다. 다시 같은 고통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대공이 직접 그들을 심문하지는 않았었다. 지금까지는.

칼릭스가 벽에 즐비하게 걸린 도구들을 무심하게 훑고는 필립과 안토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해. 내 아내가 갈 만한 곳이 어딜지.”

그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모, 모, 모릅니다! 저는, 저희는 아무것도……!”

“이런.”

칼릭스의 입에서 탄식하는 듯한 짧은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돌연, 그의 표정이 빙하처럼 싸늘해졌다. 신이 빚은 조각상 같은 얼굴 위로 베일 듯한 살기가 스쳤다.

“이렇게나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곧이어 필립의 처절한 비명이 지하실을 울렸다.

그러나 칼릭스는 시종일관 무감한 얼굴이었다. 새빨갛게 달구어진 쇠를 상의가 발가벗겨진 사내의 뱃가죽에 지지면서도,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역겨운 냄새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는 입이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해.”

주인의 말에 라이젠이 익숙하게 남자의 입안에 천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틀어막힌 목구멍에서 희미한 신음만이 간신히 새어 나왔다.

“훨씬 나아.”

필립이 눈까지 까뒤집으며 발버둥 쳤으나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단단히 결박된 쇠사슬에서 찰캉거리는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지독한 고통에 발작하듯 전신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기절하여 축 늘어졌다.

옆에서 이를 모두 지켜본 안토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몸을 돌린 칼릭스가 이번에는 안토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너는 좀 짐작이 되나?”

끔찍한 공포에 몸이 달달 떨렸다. 바짓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지는 것도 잠시, 그의 발밑으로 노란 물웅덩이가 고였다. 라이젠이 풍기는 악취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옆으로 옮겨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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