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1)
  • 더 이상 갈무리할 필요가 없는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익히 알고 있던 기운에 카르마의 단원들이 숨을 삼키며 조용히 주인의 명을 기다렸다.

    마침내 핏물을 머금은 듯한 대공의 입술이 벌어졌다.

    “처리해.”

    “존명.”

    단 하나도 여기서 살아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칼릭스의 명령을 머릿속에 새기며 카르마가 밤의 그림자마다 스며들었다.

    * * *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저택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란에 놀라 뛰쳐나온 사람 중 반수는 도망도 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통 검은색뿐인 제복.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는 무성한 소문 속의 이들. 죽음을 앞둔 찰나의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칼날에 반사된 번쩍이는 빛이 눈에 들어왔을 땐, 그들은 여지없이 절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차라리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한 거였다.

    정보원들로부터 건네받은 정보를 토대로, 카르마가 일부 사용인들을 산 채로 끌어냈다.

    모두 대공비에게 가해진 학대와 폭력에 가담했던 자들이었다. 낱낱이 색출된 이의 수가 적지 않았다.

    저택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온 자 중엔 한때 아셀라의 시중을 들었던 하녀들도 있었다.

    병사가 그들을 저택 앞 잔디밭에 거칠게 내동댕이치자, 고통 섞인 신음성이 흘렀다.

    카르마가 그들 주변으로 빙 둘러서며 위압적이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바닥에 무릎 꿇려진 이들의 얼굴은 죄다 희게 질려 있었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눈앞에서 다른 동료들이 가차 없이 베여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으니 정신이 말짱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택 곳곳이 역한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유독 고급스러운 잠옷 차림의 두 사람이 끌려 나왔다.

    필립과 안토니였다.

    “이거 놓아라!”

    “이놈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필립이 붙잡힌 팔다리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고함치는 목소리가 흡사 돼지 멱 따는 소리와 비슷했다. 안토니 역시 병사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소용없었다.

    바깥으로 끌려 나온 두 사람이 그대로 땅바닥에 밀어 젖혀졌다.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이었다. 몸이 나동그라지며 흙바닥이 비싼 옷을 죄 더럽히고 말았다.

    “아윽!”

    극심한 통증에 안토니의 입에서 비명이 샜다. 몸에 둔탁하게 가해지는 고통에 필립도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는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부리던 사용인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필립이 냉큼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네놈들,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되면 너희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흐억!”

    기세등등한 외침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필립의 눈이 충격과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라이젠이 제 검을 뽑아 필립의 목에 가져다 댄 탓이었다. 예리한 칼날에 고작 스친 것이 전부였음에도, 피부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네, 네놈은! 왜, 왜, 네놈이 여기에……!”

    그러나 라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턱짓하자, 병사들이 필립의 양팔을 붙잡아 자리에 꿇어 앉혔다.

    “이, 이게 무슨 짓……!”

    라이젠에게 항의하려던 외침이 뚝 멎었다. 필립의 눈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진동했다.

    저택에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저, 전하!”

    어슴푸레하게 비쳐드는 새벽빛 사이로 칠흑 같은 머리칼이 나부꼈다. 사내의 몸에 딱 맞추어 만들어진 검은 정복이 만들어내는 실루엣이 실로 완벽했다.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음을 증명하듯, 빈틈없이 짜인 근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평소보다 훨씬 진해진 크림슨의 눈이 자신을 직시하자, 필립의 몸이 벼락 맞은 사람처럼 퉁겨 올랐다.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를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마치 사신의 부름처럼 들려, 필립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묵직한 소리가 멎고, 칼릭스의 발이 땅을 짚은 필립의 손에 거의 닿을 듯 멈추어 섰다.

    필립이 대공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다. 병사들이 어깨를 누르고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끌려 나온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눈빛만은 금방이라도 그들을 찢어 죽일 듯 흉흉했다. 공포에 질린 이들의 흐느낌이 적막한 새벽공기에 섞여들었다.

    한참 후에야 칼릭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듣는 이의 속을 선득하게 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끝났군.”

    그 말에 필립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급한 부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전하! 가, 갑자기 저희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조금은 비굴한 낯으로 필립이 말을 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아들의 승계 문제로 소식을 주고받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황제가.”

    칼릭스가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사냥이 끝난 후에 사냥개를 살려두는 걸 봤나?”

    “지, 지금 뭐라고…….”

    “쓸모가 다하면 폐기되는 게, 너희 개들의 운명 아니던가.”

    필립의 얼굴이 멍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복도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과 진득한 피 웅덩이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의 신발과 바지 밑단에도 죽은 이들의 질척질척한 피가 흥건히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껏 폐하께 얼마나 충성했는데……!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예외였습니다. 저만은 달랐단 말입니다!”

    “꽤 오래 살려두었지. 그 페르난데가 말이야.”

    황제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사내의 얼굴이 지독히도 오만했다.

    “아델이 죽은 이후 그녀의 딸들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마침 네가 딱 좋은 적임자였으니 폐기를 유예한 것뿐이지.”

    “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필립이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으며 외쳤다. 그러나 칼릭스는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이제 페르난데에게 넌 그저 걸리적거리는 돌멩이일 뿐이야.”

    “그게 무슨…….”

    칼릭스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후작위를 넘보았나. 황제가 기어오르는 개를 가만둘 것 같은가?”

    “마, 말도 안 돼!”

    필립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눈에 수치와 억울함,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이럴 수는 없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날 이런 식으로 죽일 수는……!”

    “죽일 수 없기는.”

    칼릭스가 눈짓하자 라이젠이 기다렸다는 듯이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엔 돌돌 말린 서류 한 장이 있었다. 필립의 무릎 위로 얇은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직접 확인해.”

    순간 필립은 섬�함을 느꼈다. 뭔가가 확실하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달달 떨리는 손을 뻗어 서류를 주워 펼쳤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서류 하단에 찍힌 커다란 황제의 인장이었다. 그 위의 깨알 같은 글씨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필립이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애써 끔벅거리며 적힌 것을 읽어내려갔다. 잠시 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아버지!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안토니가 필립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챘다. 마찬가지로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이, 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됩니다.”

    라이젠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황명을 읊었다.

    “선대 아델 샤르투스 후작을 살해하고 후작가의 작위와 재산을 탈취하려 한 죄를 묻는다. 더불어 대 제국 하르메니아의 황제인 나를 능멸하고…….”

    “이, 이건 모함이야! 반역이라니!”

    사용인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역에 연루되면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까지도 위험해졌다. 소름 끼치는 공포가 찾아들었다.

    “이 정도면 죽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칼릭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스르릉, 금속끼리 맞부딪쳐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새벽녘의 저택을 뒤흔들었다.

    두려움에 질려버린 안토니가 절대 해선 안 될 말을 한 것도 그때였다.

    “비, 비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일순, 칼릭스의 얼굴이 빙하처럼 싸늘해졌다.

    날 선 기운이 정제되지 않은 채 빗살처럼 쏘아졌다. 그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안토니의 몸이 화살에 꿰인 짐승처럼 기괴하게 비틀렸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동공에 칼릭스가 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맺힌 것도 잠시.

    “아아악!”

    “안 돼! 안토니!”

    안토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필립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안토니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병사들의 손에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안토니의 어깻죽지를 정확히 꿰뚫은 예리한 칼날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칼릭스가 검을 박아넣은 그대로 느릿하게 힘을 주어 돌리자 처절한 울부짖음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끔찍한 고통에 바들거리던 안토니의 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졌다.

    “잘도 지껄이는군.”

    샤르투스에 관한 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했다. 아셀라가 제 가문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며 생활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감히 아내를 입에 담으며 자비를 구걸하다니. 칼릭스의 심장이 차게 식었다.

    그의 검 끝이 다시 쇄도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69화

    날 선 검이 꿇어앉은 필립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필립이 고통을 억누르지 못하고 신음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박아넣은 칼날을 비틀어대는 대공을 지켜보는 이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제 사생아를 가주의 자리에 앉히려고 양딸을 팔아치울 땐 언제고.”

    “으허억! 으억……!”

    “이제 와 아쉬우니 가져다 대는 꼴이라니.”

    끔찍한 고통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필립을 보며, 칼릭스가 여상스레 말했다. 필립 역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다른 쪽 허벅지마저 검이 박히자 그의 눈이 까뒤집히며 정신을 놓았다.

    “끌어내.”

    병사들이 기절한 필립과 안토니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공중에 가볍게 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낸 칼릭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용인들의 얼굴에 공포가 차올랐다.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본능적인 깨달음에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절한 애원이 이어졌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는 그저 시키시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발, 자비를……!”

    순식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절박한 변명과 울음이 커졌다.

    칼릭스는 감흥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어떤 사소한 자비도 저들에겐 사치였다.

    ‘아셀라.’

    악몽의 고통에 시달리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지옥 같은 감옥에서 홀로 칠 년을 버텨왔을 여자를 생각하자,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릭스가 꿇어 앉혀진 이들을 차례로 하나씩 훑었다. 남자의 핏빛 시선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몸이 퍼뜩 튀었다. 생리적인 공포에 눈물이 흐르고 일부는 하의가 축축해졌다.

    칼릭스의 적안이 차갑게 빛났다. 간결한 명령은 잔혹했다.

    “시신이 온전할 필욘 없다.”

    “존명!”

    살려달라는 사용인들의 처절한 비명과 애원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러나 날카롭게 벼려진 검들은 무자비하게 그들의 몸을 갈랐다. 검날이 호선을 그릴 때마다 공중에 핏줄기가 솟구쳤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칼릭스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한때 사람이었던 이들이 잘린 고깃덩어리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소란이 끝나고 병사들이 물러섰을 때,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과 살점들, 거대한 피 웅덩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끝났음을 알리는 제 권속에게, 칼릭스가 짤막하게 답했다.

    “먼저 돌아가겠다. 뒷일을 처리하라.”

    나뒹구는 시체와 피로 흥건해진 잔디밭을 잠시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칼릭스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 * *

    새벽 공기가 유난히도 스산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아셀라의 눈이 저절로 뜨였다. 창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침대 근처의 벽난로에선 여전히 불이 활활 타올랐다.

    충분히 따뜻한 실내였다. 무엇보다 추위를 말하기엔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으슬으슬하니 한기가 돌았다.

    아셀라가 침대맡에 걸어놓았던 담요를 걸치곤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짐승 가죽에 붙은 길고 보드라운 털이 맨발에 감겼다.

    푹신한 슬리퍼를 꿰어 신고 화장대까지 걸어간 그녀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받았을까.’

    지난 열흘간 대공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샤르투스에서는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아셀라가 시녀들에게 은근히 운을 띄워보기도 했으나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는 것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 태도였다.

    아셀라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들에게 더 묻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대비하고 있는 거겠지?’

    왠지 모를 불안에 갑자기 가슴이 옥죄이듯 답답해졌다. 아셀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 내쉬기를 반복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서 치솟는 불길함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문가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누가 찾아왔나?’

    마침 사용인들의 일과가 시작될 시각이었으나, 시녀들에겐 아니었다. 대공비의 방에 들어와 아셀라를 깨울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전담 시녀들뿐이었고, 그마저도 마고가 일임하고 있었다. 아직은 시각이 일렀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이어진 소리는 정확히 문을 노크하는 소리였다. 아셀라가 문 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비전하, 마고입니다. 아직 주무시는지요?”

    “로메인 부인?”

    뜻하지 않은 방문에 아셀라가 의아해하던 순간, 그녀의 눈에 막 동이 트는 하늘이 비쳤다. 어쩐지 이유 모를 소름이 끼쳤다.

    이 시간에 마고가 그녀를 찾을 일이 대체 무얼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직감이 아셀라의 뇌리를 스쳤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들어가도 될는지요?”

    “……들어와요.”

    테이블에 자리한 아셀라가 긴장을 감추며 마고를 맞이했다. 그러나 완전히 굳은 마고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셀라가 앉은 테이블 근처까지 걸어온 마고가 그녀의 맞은편에 섰다.

    “대공 전하께서 오늘 오전 중으로 귀택 예정이십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단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기엔 이 이른 시각의 방문이 설명되지 않았다. 아셀라가 마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는 거지요?”

    목이 잠긴 탓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마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셀라가 나이트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스멀거리는 불안감이 몸의 말단에서부터 심장으로 서서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고가 아셀라를 잠시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비전하.”

    마고의 목소리가 유난히 어두웠다. 아셀라의 쿵쿵대던 심장은 이제 소리가 몸 밖으로 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로메인 부인, 무슨 일인가요?”

    “…….”

    아셀라는 이제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태연함을 가장할 여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애써 무시해도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올랐다.

    아셀라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꼿꼿하게 서 있는 마고에게로 다가갔다.

    “부인, 말해줘요. 무슨 일이죠?”

    아셀라의 간절하기까지 한 물음에 마고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전서구를 통해 대공의 명이 도착했다. 마고로서는 꽤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세상에 악역을 자처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대상이 대공비 같은 이에게라면 더욱.

    그러나 대공의 명은 명확했다. 대공비에게 미리 소식을 전해둘 것.

    정말이지 내키지 않아 마고가 미간을 문질러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난 며칠간 아셀라가 손수건에 놓던 자수를 본 적이 있었다.

    티 없이 하얀 손수건에 정갈하게 놓이던 수는 샤르투스 가문의 문장을 담고 있었다.

    분명 대공비가 큰 충격을 받을 터였다. 도무지 대공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도리가 없었다. 베네비토의 가신들에게 대공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마고가 기어이 입을 열어 대공비에겐 한없이 충격적일, 어떤 측면에서는 잔인하기까지 한 말을 내뱉었다.

    “며칠 전, 샤르투스 가문이 멸문했습니다.”

    아셀라가 멍한 얼굴로 마고를 바라보았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였다. 뭔가 정보가 들어오긴 했는데, 머릿속에서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을 거부했다.

    “잘…… 듣지 못했어요, 부인. 다시 한번 말해주겠어요?”

    “죄목은 반역이라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저택의 전원이 참살되었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셀라는 그 말을 이해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득한 심연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도리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황실에서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반역에 가담한 필립과 안토니 샤르투스 모두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합니다.”

    마고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셀라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비전하!”

    “아니야…… 거짓말이야…….”

    멸문이라니. 반역이라니. 아셀라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숨이 막혔다. 꼭 누군가가 몸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가 꺽꺽대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대체, 어쩌다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셀라의 눈앞이 꺼멓게 변했다. 놓치지 않으려 가까스로 부여잡았던 정신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툭, 끊어졌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16. 기만과 배신

    아셀라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새 익숙해져 버린 천장 몰드의 섬세한 세공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도 붉었다.

    “일어났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셀라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사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일몰이었다.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피워낸 해가 완전히 저문 것이다.

    “몸은 좀 어떻지?”

    벽에 걸린 등에서 불빛이 작게 일렁이며 사내를 비추었다. 아셀라는 차라리 불이 꺼져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남자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

    “당신에겐 그 소식이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야.”

    아셀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마주하게 된 참담한 현실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침대 시트를 양손으로 그러쥐어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샤르투스의 반역과 멸문. 그녀의 꿈이 보여주었던 건 끔찍한 미래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고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제 와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메리엘을…….’

    자꾸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아셀라가 애써 정신을 부여잡았다.

    ‘메리엘을 지켜야 해.’

    당장 메리엘이 위험했다. 가문이 반역에 연루될 경우 직계 가족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계승권이 없거나 아주 어린 아이의 경우엔 목숨을 부지해 노예가 되기도 했지만, 죽을 때까지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녀와 함께 대공성에 머무르고 있다고는 하나, 메리엘은 샤르투스의 직계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머릿속을 관통하는 깨달음은 절망적이었다. 아셀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메리엘을 구할 수 없다. 살릴 수 없다.

    몸을 통째로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끔찍한 상상들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되었다.

    더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젠 다 끝이라는 끔찍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셀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할딱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셀라.”

    언제 온 건지 칼릭스가 그녀 곁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미처 몸을 무르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아셀라의 뺨에 닿았다. 그녀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셀라, 나를 봐.”

    그러나 아셀라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메리엘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이젠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도주하는 대공비 70화

    떨군 시선이 고집스럽게 바닥만을 보았다. 그러던 중, 아셀라는 칼릭스가 대공성을 나서기 전 자신에게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기대해도 좋아.’

    아내의 가문을 반역으로 몰아 멸문시키러 가면서, 남편이란 자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무도한 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샤르투스의 핏줄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던, 꿈속의 칼릭스 베네비토가 했던 말. 아셀라는 어쩌면 그 꿈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와 결혼한 거였고.’

    그녀가 다른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여 성씨가 바뀌면, 설사 샤르투스가 멸문당하더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아셀라가 살아나갈 기회를 처음부터 막아버린 셈이었다. 이제 샤르투스가 멸문했으니 다음 목표물은 그녀였다.

    칼릭스 베네비토는 자신을 어떻게 ‘처분’할 생각인 걸까. 꿈에서처럼 독살일까? 아셀라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달싹거리던 입술이 물음을 담았다.

    “전하께서 하신 일인가요?”

    어차피 답을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질문했다.

    “전하께서 샤르투스를 직접 멸문하셨나요?”

    “그렇다면?”

    티끌만 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듯한 사내의 태연한 태도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아셀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 어떻게 제 가문을 한마디 말씀도 없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당신 가문은 베네비토잖나.”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베네비토의 사람이라 칭하는 남자의 말이 소름 끼쳤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 거였는데.’

    가문을 빼앗겼어도 희망까지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메리엘의 각성이 진행 중이었다. 동생이 이능을 완전히 개화하기만 한다면, 가문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깐이지만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문은 반역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멸문했고, 언제 메리엘이 수도로 끌려가 처형당할지 몰랐다.

    ‘그리고 나도 죽겠지.’

    그녀의 목숨 역시 칼릭스 베네비토가 쥐고 있었다. 아셀라는 그가 자신을 곧 사지로 몰아넣으리라 확신했다.

    정략적으로 결혼했고 그 효용이 끝났다. 쓰임이 끝난 물건은 버려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죄송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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