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71)

이 일이 끝나면 오갈 곳 없어진 가련한 새는 그의 새장에 스스로 날아들 수밖에 없을 테니. 유일한 생명줄인 그의 품에 갇혀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마음에 들었다. 무척이나.

칼릭스는 벌여왔던 일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곧 나가겠다. 출발 준비를 하라.”

“예, 전하.”

명을 내린 칼릭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아셀라에게선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오늘이야말로 그대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일이 이렇게 되었군.”

아내의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살살 쓸며 그가 입을 열었다.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방울이 애처롭게 어룽거렸다.

이 여자는 알까. 이런 모습이 묘하게 그의 가학심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피처럼 붉은 눈이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서운한가?”

잠시 멈칫한 아셀라가 이내 작게 도리질했다. 그는 아내의 입이 살짝 벌어져 몇 번 달싹이다가 자그맣게 움직이는 모양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숨결처럼 옅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사히 다녀오신 후에…….”

“그래. 다녀와서.”

칼릭스가 입귀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곤 반쯤 풀려 있던 아셀라의 드레스 앞 끈을 도로 여미기 시작했다. 벌려 젖힌 건 아니었기에 살결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손길에 아셀라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히려 그 탓에 타오르듯 붉어진 귓가가 더 잘 보이고 말았지만.

칼릭스의 능숙한 손놀림이 이어진 끝에 예쁘게 리본이 묶였다. 그러나 그는 몸을 떼는 대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셀라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며 속삭였다.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생각이야.”

“…….”

“기대해도 좋아.”

지독히도 낮은 음성엔 노골적인 정염이 녹아 있었다.

* * *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대공성에 감돌았다.

‘무슨 일인 걸까.’

아셀라가 창가에 서서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등불 몇 개만이 은은하게 켜진 저택은 특별히 달라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대공성이 묘하게 부산했다.

‘폐하께서 어쩐 일로 연락을 하신 건지.’

라이젠은 황궁에서 서신이 왔다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지만 정확한 발신인을 눈치채는 건 쉬웠다. 황제의 연락 정도가 아니면 대공이 곧바로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생각이야.’

그녀를 놓아주기 전 그가 했던 알 수 없는 말. 아셀라는 지금껏 칼릭스의 말을 곱씹고 있었으나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아…….”

착잡함에 아셀라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바깥과 안의 기온 차 탓인지 그녀의 입김이 닿은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그때까지도 대공비의 방에 남아 있던 마고가 아셀라를 향해 말을 건넸다.

“비전하, 이제 그만 주무시지요.”

“잠이 오질 않아서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일었다. 심장이 얕지만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수면초를 피워드릴까요?”

“수면초요?”

“예. 깊은 잠을 잘 수 있어 다음 날 몸이 아주 개운해진답니다. 두통에도 좋아 머리도 맑아지지요.”

“들어본 것 같아요.”

잠시 고민하던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의 지시에 따라 사용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잠시 뒤, 아셀라의 침대맡에 놓인 수면초가 무색의 연기를 뿜어냈다. 특유의 상쾌하고 청량한 향기가 은은하게 방에 퍼졌다. 침대에 몸을 누인 아셀라의 베개 높이를 조정한 마고가 온화하게 말했다.

“품질이 좋은 수면초예요. 곧 잠이 오실 겁니다.”

“고마워요.”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그녀의 폐 속 깊숙한 곳까지 향이 들어와 박혔다. 맡고 있으니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졌다. 아셀라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제 이불을 정돈하는 마고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메인 부인.”

“예, 비전하.”

“혹시 전하께서 수도에 가시나요?”

마고가 멈칫했으나 곧 자연스럽게 표정을 숨겼다.

“예. 폐하의 부름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나요?”

“저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마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마수 토벌 때문일 수도 있고, 대공께서 관여하시는 황실 쪽의 사업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지요. 그 외에도 황제 폐하와 긴밀히 하고 계신 일이 많아 어느 것이라 콕 집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아셀라는 왠지 마고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마수의 이상행동과 공격을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꿈 꾸시길.”

마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셀라의 몸이 나른해졌다. 눈꺼풀의 깜박임이 조금씩 느려지고, 또렷하기만 하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수면초가 불러일으킨 잠이 순식간에 그녀를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불과 몇 분 만에 아셀라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앳된 얼굴의 시녀 하나가 마고 곁에 바짝 다가와 섰다. 마고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지시를 내렸다.

“모두에게 단단히 입조심하라 일러.”

“네, 백작 부인.”

마고가 잠든 아셀라의 이부자리를 마저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헉, 허억……!”

아셀라가 몸을 소스라뜨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사위가 온통 어두운 것을 보아 아직도 깊은 밤이었다.

“흐윽…….”

푹신한 침대의 감각이 어쩐지 이질적이었다. 몸은 침대 위에 있는데 아직도 눈앞에 불타는 샤르투스 저택이 보이는 듯했다. 심장이 발작하듯 쿵쿵 뛰었다.

목이 탔다. 아셀라가 삐걱거리는 몸을 질질 끌어 테이블 옆 협탁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이 그만 컵을 놓치고 말았다.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셀라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또 악몽을 꿨어.’

너무도 참혹했던 꿈속 장면이 잔상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꿈이라지만 꿈 같지가 않은 현실감이었다. 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샤르투스가…….’

습격은 동이 막 트는 새벽에 이루어졌다. 공격은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후작 가의 기사들이 대응할 수 있었을 리 만무했다.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다.

악마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저택을 집어삼키던 불길, 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 도망치는 사람들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애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만들어내던 궤도, 튀어 오르는 피, 귀를 찢는 단말마의 비명.

스무 해 가까이 살아온 저택이, 어머니와의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공간이, 긍지 높은 그녀의 가문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체 왜…….’

그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 칼릭스 베네비토, 그녀의 남편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면서도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시퍼렇게 벼려진 검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호선을 그릴 때마다 누군가의 피가 솟구쳤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찢고 울려 퍼지던 절규가 아직도 귓가를 쟁쟁 울렸다.

“우욱!”

울컥 토기가 치밀었다. 아셀라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연신 구역질을 했다. 뜨거운 기름을 머릿속에 부은 것처럼 두통이 일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녀가 가까스로 헛구역질을 멈추었을 때.

일순 그동안 꾸었던 꿈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맞추어지며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저 문양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나?’

꿈속의 그녀는 우연히 카르마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칼릭스 베네비토가 눈치챘다.

‘넌 아델과 달리 이능이 없어 살려둘까도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처음엔 그녀를 살려주려던 남자는 무슨 이유에선지 생각을 바꾸곤 샤르투스 가문을 공격해 모두를 몰살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혼 서류에 서명했으면 좋았잖나.’

그 상황에서 서명하라는 건 일종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베네비토의 성씨를 떼어낸 그녀를 죽이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일 테니까.

메리엘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꿈속의 그녀는 이혼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독살해 버렸다.

‘넌 아델을 누가 죽였는지 눈치를 챘을 거야. 그렇지?’

‘샤르투스의 핏줄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해.’

메리엘 역시 비슷한 끝을 맞이했을 게 뻔했다. 어머니를 죽였던 것처럼 끝내는 그녀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만 것이었다.

끔찍한 결말이었다.

“안 돼…….”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아셀라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새어 나온 목소리가 며칠 말을 하지 못한 사람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양팔로 감쌌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옷가지가 축축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이며 존재감을 알렸다.

길고 긴 밤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마고가 아셀라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며칠 시일이 걸릴 거라 들었습니다.”

간밤에 칼릭스가 이미 저택을 나섰다는 이야기였다. 라이젠도 함께라고 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서둘러서…….’

아셀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마고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특별히 걱정하실 만한 건 없습니다. 저택은 파비안이 지금껏 잘 관리해 왔고 기사들도 대부분 성에 남아 있으니까요. 메리엘 아가씨의 수업도 차질없이 진행될 겁니다.”

마고의 말대로 대공성은 주인이 있건 없건 다를 바 없이 굴러갔다. 사용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맡은 일들을 수행했다.

아셀라 역시 평소처럼 생활했으나 속으로는 치솟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샤르투스에 연락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나치게 생생했던 꿈이 자꾸만 생각났다.

대공이 무슨 명분으로 샤르투스 가문에 공격을 감행했는지까지는 꿈에서도 나오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만들면 그만이다. 칼릭스 베네비토라면 황제를 움직여 적당한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혹시라도 샤르투스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메리엘이 위험해져.’

일어나지도 않은 대공의 공격을 미리 입에 올릴 수는 없겠지만, 단지 저택의 보안을 강화하라는 정도라면 전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도무지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언니, 무슨 걱정거리 있어?”

마고가 내준 과제 중이던 메리엘이 아셀라의 심각한 기색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67화

“아니야.”

“있는 것 같은데? 언니 얼굴이 하얘. 여기 눈썹 사이도 찡그려져 있고.”

아이가 예리한 눈썰미로 그녀의 상태를 짚었다.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응?”

그러나 아셀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에게까지 괜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메리엘만큼은 그녀와는 달리 밝게 자라났으면 했다.

“기분이 안 좋은 거면 성 밖으로 또 놀러 갈까?”

“그건 안 돼. 아카데미 시험이 곧인데 열심히 준비해야지. 게다가 전하께서도 안 계시고…….”

고개를 젓던 아셀라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어떤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서였다.

‘그 사람이 없어.’

대공을 피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그나마 그가 자리를 비운 이때야말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샤르투스에 소식을 전하기 위한 시도나마 해볼 수 있었다.

아셀라는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메리엘.”

동생을 부르는 아셀라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감돌았다.

* * *

달리는 마차 안, 아셀라는 소맷자락 안에 감추어 두었던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샤르투스에 보낼 서신이었다. 저택의 방비를 강화하라는 것, 혹시나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일은 당분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잘 돼야 할 텐데.’

필립이나 안토니를 위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메리엘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어머니가 남겨주신 가문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호위 기사들의 눈을 피해서 길드에 의뢰할 수 있을까.’

일단 나오기는 했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막막해졌다. 도무지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괜한 일을 벌였다가 의심만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셀라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엘이 아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언니.”

메리엘이 아셀라의 두 손을 맞잡았다. 아이의 높은 체온이 손을 타고 전해지자 아셀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제 손보다 훨씬 작은 손인데도 그 온기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똑 닮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메리엘이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 잘 될 거야.”

* * *

“딸기 주스 두 잔! 초콜릿 칩 쿠키도!”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번화가의 한복판, 야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으며 메리엘이 우렁차게 외쳤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어서 앉아, 언니.”

아셀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긴장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엔 메리엘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메리엘을 이 일에 끼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지금이라도 관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딸기 주스를 거의 다 마셔가던 메리엘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이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마치 제 생각을 고스란히 읽힌 듯한 기분에 아셀라가 당혹스러워하는데, 메리엘이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작할게.’

아셀라에게 신호를 보내자마자, 메리엘이 무언가가 기억났다는 듯 손바닥을 딱 마주쳤다. 조금은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맞다! 에트망 부인께 쓴 안부편지를 부친다는 걸 깜박했어!”

그러고는 품에서 미색의 편지봉투를 꺼내 들었다. 아셀라가 마차에서 미리 건넸던 편지였다. 메리엘이 근처 골목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중에서도 영리해 보이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짓했다. 소년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메리엘이 재차 손짓하자 뛰어와 테이블 옆에 섰다.

“절 부르셨나요, 아가씨?”

“응. 난 메리엘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다들 토미라고 불러요.”

“그렇구나, 토미.”

메리엘이 토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제 외양이 여러모로 유용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언니가 훨씬 예쁘지만.’

아니나 다를까, 소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넋이 나간 얼굴에 메리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혹시 쿠키 좋아해?”

그러나 토미는 선뜻 받아들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에는 위험한 것이 많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이의 태도였다.

‘완벽해.’

오히려 소년이 의심 없이 쿠키를 먹겠다고 달려들었다면 메리엘은 다른 아이를 찾을 생각이었다. 적당한 경계심이 있어야 실수 없이 일을 잘 마칠 수 있을 테니까.

메리엘이 토미 앞으로 쿠키 접시를 밀며 생긋 웃었다.

“괜찮아. 얼마든지 먹어도 돼.”

토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아셀라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는 넉넉하단다. 가져가서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렴.”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그제야 토미가 반색하며 쿠키 접시에 손을 뻗었다. 메리엘이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쿠키에 막 손가락 끝이 닿으려던 찰나, 토미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나쁜 짓은 안 해요, 아가씨.”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많은 위험이 따랐다.

당장 곯는 배를 어떻게든 달래보고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고자, 많은 아이가 범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곤 했다.

토미는 이미 그런 일로 친구들을 여럿 잃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일이 있어도 범죄 조직엔 들어가지 않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쁜 짓이 아니란다. 그저 간단한 심부름일 뿐이야.”

아셀라가 소년이 놀라지 않도록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했다.

“내 동생이 전에 공부를 가르쳐 주던 가정교사에게 안부편지를 썼거든. 이 편지와 주소가 적힌 쪽지를 길드에 가져다주기만 하면 돼.”

생각보다 쉬운 내용에 토미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되물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내시려는 거면 굳이 길드에 의뢰하지 않고 그냥 우정국에서 붙이셔도 되잖아요?”

“우정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걸!”

메리엘이 곧바로 답했다.

“길드에 의뢰하면 늦어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텐데 우정국은 한 달까지도 걸리잖아. 그럼 너무 늦어. 에트망 부인이 내 편지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마지막 말에는 약간의 울음기가 섞였다. 그 목소리에 토미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은 옷차림만 보아도 고위 귀족이었다. 귀족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간 무슨 고초를 겪게 될지 몰랐다.

“거,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럴 수도 있지.”

아셀라가 온화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은화 두 개를 놓았다.

“하나는 길드에 의뢰하는 데 필요한 돈, 나머지 하나는 네 심부름 값이란다.”

토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 들려온 말은 더 놀라웠다.

“의뢰가 성사되면 길드에서 확인증을 발급해 줄 거야. 잘 마치고 돌아오면 은화 두 개를 더 줄게.”

토미가 침을 꿀꺽 삼켰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화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렵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쿠키는 가져가서 친구들과 같이 먹으렴.”

“하, 할게요!”

소년이 눈을 빛냈다. 은화 세 개는 큰돈이었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보름 동안 빵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돈이었다.

소년이 테이블 위의 은화 두 개를 제 호주머니 속에 밀어 넣은 뒤, 편지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걸 길드에 가져다주면 되는 거죠?”

소년은 귀족들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잘 알았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지 모를 일이니 빠르게 다녀오는 편이 나았다.

소년이 큰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 * *

막사 한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이 사위며 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자 후드득 소리를 내며 불이 타올랐다. 불티가 그 주위에 어지럽게 흩날렸다.

라이젠이 조용히 주군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새 재미있는 일이 생겼군.”

칼릭스가 의자에 느릿하게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몹시도 음산한 음성이었다. 불빛의 어른거림을 따라 그의 얼굴에 비친 그림자가 이리저리 이지러졌다.

“그 얌전한 얼굴로 깜찍한 일을 벌였어.”

칼릭스의 얼굴에 떠오른 싸늘한 미소에 라이젠이 숨을 삼켰다.

그의 주인은 지금 명백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다. 깨진 유리 파편보다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막사 안에 감돌았다.

조금 전 마법 전서구가 라이젠에게 가져온 편지가 이 사달을 만들었다.

발신처는 공국의 길드였다.

제국의 모든 길드가 카르마의 손아귀 안에 있었고 이들을 라이젠이 관리했다. 제국의 핵심 정보가 전부 이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길드에 대공의 결혼이 있기 전부터 일찌감치 내려졌던 지시가 있었다.

‘샤르투스와 관련된 의뢰는 반드시 보고할 것.’

최우선순위에 올라간 명령이었다.

“샤르투스 쪽은?”

“필립과 안토니 모두 저택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유력 귀족 가문들, 심지어는 황궁에 이르기까지 칼릭스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암흑가 카르마의 수장, 그 베일을 걷어낸 자리에 그가 있었다.

“계획을 당긴다.”

“언제로 말씀입니까?”

“오늘 새벽, 동이 트기 직전.”

해가 뜨기까지는 채 여섯 시간도 남지 않았다. 너무 일렀다.

“황제께선 아직 모르시지 않습니까.”

“상관없어. 내가 따로 연락하겠다.”

주인의 뜻이 확고했다. 지금 바로 움직인다면 빠듯하게 도착할 수는 있으리라.

“준비하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라이젠이 나간 뒤, 막사엔 칼릭스가 혼자 남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목을 낮게 울리며 아내의 이름을 읊은 그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보는 사람의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웃음이었다.

그녀가 샤르투스에 몰래 서신을 보내려고 들었다. 그것도 필립과 안토니에게.

지금껏 학대받다 결혼으로 겨우 그 폭력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그들에게 편지로 위험을 경고했다.

결혼 전 가문에 문제가 생기면 가주인 남편이나 아내의 뒤에 숨으면 되지만, 가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배우자의 운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어렸을 적 가문으로 돌아가 평생을 혼자 살거나, 받아주지 않으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자신 대신 그들을 택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이 일을 막을 수가 없어.”

철저하게 짓밟아 없애버릴 것이다. 하르메니아에 그런 가문이 존재했던가 싶을 만큼 완벽하게. 돌아갈 곳이라곤 이 제국 어디에도 없게끔. 그녀가 있을 곳은 제 곁이었다.

그를 배신한 대가는 그 이후에 치르게 하면 되었다. 방법은 많았다.

“내게서 벗어날 수도 없고.”

칼릭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모닥불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정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글씨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닥불에 편지를 던졌다.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종이가 검은 재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68화

분노와 욕망의 힘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칼릭스를 위시한 카르마의 병력이 수도에 당도했을 땐 아직 밤중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랐다.

원래 약속대로라면 황제를 만나는 게 먼저였겠지만, 칼릭스는 가볍게 계획을 뒤집었다.

굳이 내일까지 미루며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늘 그랬듯, 그는 일을 질질 끄는 걸 질색했다.

샤르투스 후작저까지는 금방이었다. 지면을 힘껏 박차던 말발굽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때쯤,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이 살아 있을 땐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던 저택이, 지금은 어울리지도 않는 온갖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덕지덕지 덧입혀져 일견 지저분한 인상마저 주었다.

이 저택에 기생하는 쥐새끼들과 어지간히도 닮았다며, 칼릭스가 비소했다.

“전하.”

라이젠이 칼릭스의 검을 받쳐 올렸다. 상당한 무게의 진검이었으나 그는 마치 펜을 들듯 가벼이 집어 들었다.

“…….”

불 꺼진 저택을 바라보는 눈이 온기라곤 하나도 없이 서늘했다. 해뜨기 직전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안광이 형형하리만치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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