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71)
  • 칼릭스였다. 아셀라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부족하기는커녕 너무 많았다. 웬만한 고위 귀족가의 한 해 예산에 맞먹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충격적인 액수에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요. 이걸 일 년간 사용하라니…….”

    “일 년 치 예산이 아닙니다. 비전하.”

    라이젠이 아셀라의 말을 정정했다.

    “한 달입니다.”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이렇게나 많은 돈을 내게 왜…….’

    지나치게 많았다. 그 정도가 정확히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그대 앞으로 별도의 금고를 빼두었어. 일 년 치 예산을 넣어두었으니 자유로이 사용해.”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아셀라가 황급히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아니에요, 전하.”

    돈의 힘을 간과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돈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알았다. 당장 필립만 보아도 그랬다. 레베카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으면서 로렌스 가문의 돈을 보고 수년 간 연인 행세를 해왔으니까.

    “이렇게까지 많은 돈은 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저, 남자에게 책잡힐 만한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필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와 메리엘을 두고 돈만 축내는 밥버러지라 욕설을 퍼붓곤 했다. 꼭 필요한 생필품마저 사주는 걸 아까워했고 결국엔 지참금마저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그저 몸만 온 아셀라였다. 대공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어떤 저의가 숨겨져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무섭기만 했다.

    “어차피 다 쓰지 못할 거예요.”

    말을 잇던 중에 아까 외출 중에 들었던 이야기가 언뜻 스쳤다.

    ‘소식 들으셨어요? 율피안 자작 이야기요.’

    ‘아, 자작 부인에게 피룬의 땅과 별장을 증여했다죠?’

    사생아를 가문에 입적시키거나 정부를 집 안으로 들일 때, 가주가 배우자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예가 있다고 했다.

    ‘……아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또 모를 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사교계 경험이었지만, 아셀라도 칼릭스 베네비토를 흠모하는 여자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핵심 인사였다. 전쟁이 필요하거나 마수들이 출몰할 때마다 황제는 대공에게 기댔다. 혈통적 배경, 막대한 부, 강력한 사병, 대공 본인의 출중한 능력까지. 그에겐 부족한 것이 없었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영향력은 이미 황제의 관에 비견될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런 사내에게 애인 하나 없을 거라 여기는 게 순진한 거였다. 숨겨둔 아이가 있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

    ‘그 아이를 가문에 입적시키려는 거라면…….’

    갑작스러운 식사 자리와 그녀 앞에 주어진 엄청난 돈. 모든 게 설명되었다. 동시에 겪은 것처럼 생생했던 꿈이 또다시 생각났다.

    어머니가 죽기 전 쥐여주었던 단추. 그 단추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았던 카르마의 문장. 그리고 그 카르마의 수장이라던 칼릭스 베네비토.

    꿈속의 그는 끝내 그녀를 살해했다. 단지 이혼을 요구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메리엘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요…….’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단순한 꿈일 뿐이라고, 이성이 거듭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가슴속 불안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웠다. 혼란한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온통 뒤죽박죽되었다. 말이 횡설수설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굳이 이렇게 많이…… 정말로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칼릭스가 한쪽 눈썹을 당겨 올렸다.

    그가 눈짓하자 라이젠과 사용인들이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둘만 남게 된 공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칼릭스의 물음에 미묘하게 날이 섰다.

    그는 낮부터 일었던 불쾌한 감정을 아내 앞에선 꾹꾹 숨겨두고 있었다. 질책하는 말 한마디라도 건넸다간 또 겁을 집어먹고 자신을 피하게 될까 봐.

    “하르메니아의 하나뿐인 대공비야. 당신 위치에 걸맞게 모든 것을 최고로 갖춰.”

    “하지만…….”

    “베네비토의 이름에 누가 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

    낯선 사내 앞에서 웃음 짓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제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미소였다. 그렇게 편안한 얼굴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여자였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그깟 웃는 얼굴이 무어 대수라고.’

    처음엔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여겼다. 그런데 도통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잠깐 흐트러질 때마다 그 화사하던 얼굴이 생각났다.

    ‘아셀라 앞으로 배정해 두었던 내탕금, 두 배로 올려.’

    ‘하오나 전하, 이미 비전하께 배정된 내탕금은 역대 최대 예산으로―’

    ‘당장 서류 작업해서 가져와.’

    칼릭스는 대공성으로 출발하던 날 그녀가 가지고 나왔던 단출한 짐을 아직도 기억했다. 가진 게 거의 없던 여자였으니 분명 기뻐하리라 여겼다. 동생과의 나들이에 기분도 좋았을 터다.

    아주 무심결에, 그는 어쩌면 그 미소를 제 앞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그 기대가 무참히 깨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뻐하고 좋아하기는커녕 되레 안색이 새파래졌다. 과하다며 거절하려 들었다. 부담스러워하는 거라기보다는 겁먹은 모양새였다.

    다른 남자가 들고 온 디저트 하나에는 사르르 웃기만 잘하던 여자가.

    ‘내가 주는 건 받기 싫어?’

    그럴 법도 했다. 그녀는 그를 원치 않아 했으니까. 필립의 강압에 못 이겨 강제로 한 결혼이었다. 그나마 관계가 달라질 수 있었던 초야마저 엉망으로 끝나버렸으니 정을 못 붙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해하려 했다.

    아내의 입에서 폭탄 같은 말이 나오기 전까진.

    * * *

    “지금 뭐라 했지?”

    칼릭스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섞여들었다. 싸늘한 적안을 빛내며 그가 물었다.

    “다시 말해봐.”

    아셀라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칼릭스는 이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진짜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이가 있으신 거라면…… 그래서 이러시는 거라면…….”

    “…….”

    “괜찮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기가 찼다. 이미 저 조그마한 머리통에선 그가 정부와 아이까지 두고서 아내를 맞이한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입적 동의서에 서명할게요.”

    “뭐?”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모든 호의를 사생아를 들이기 위한 입막음 용도로나 생각했던 거였다. 칼릭스는 이제 표정 관리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혼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이혼?”

    칼릭스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놀란 아셀라가 몸을 움찔하는 게 보였으나 더는 한계였다. 그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눈 깜짝할 새 아셀라 앞에 섰다.

    “지금.”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이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내게 이혼하겠다 했나?”

    주변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아셀라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반응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의 얼굴에 이유 모를 불쾌감이 가득했다. 꽉 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여린 살갗을 파고들었다.

    ‘이 사람 지금…… 내게 화가 났어.’

    일부러 말을 꺼낸 거였다. 남자가 원하는 일을 먼저 제안한다면 자신과 메리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목숨을 부지할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흉흉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째서?’

    이유를 찾던 아셀라의 귓가에 기억 속 필립의 말이 울렸다.

    ‘대공에겐 건방지게 굴지 마라.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내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걸 참지 못하니 말이다. 명하시면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그러겠다고 대답해. 네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결혼을 앞두고 메리엘이 도착했던 날, 허락 없이 동생과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필립에게 끌려가 매질을 당하며 들었던 말이었다.

    ‘내가 먼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서일까?’

    어쩌면 그녀가 먼저 이혼을 입에 담아서 분노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걸지도 몰라.’

    이혼하게 된다면 이혼을 당하는 쪽은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셀라가 제 말을 수습하려 입술을 떼었다.

    “당연히 귀책 사유는 제게 있는 것으로…….”

    “그대는.”

    칼릭스의 형형한 적안이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정부와 아이까지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쓰레기로 보이나?”

    칼릭스가 이를 으드득 갈며 소리쳤다. 주변의 공기가 무섭게 요동쳤다. 그의 흉포한 기세에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뜨리며 앉은 채로 몸을 뒤로 물렸다. 매끈한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했다.

    ‘그 이유가 아니었어?’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칼릭스가 그녀가 앉은 의자 양손잡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손잡이를 바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아셀라에게로 몸을 기울어뜨린 그가 살벌하게 물었다.

    “다시 묻지. 나와 이혼하고 싶나?”

    곧바로 아니라고 답하지 못한 건 아셀라의 큰 실책이었다.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하, 그렇단 말이지.”

    노골적으로 드러난 아내의 진심에 칼릭스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붉은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 살얼음 같은 적막.

    잠시 후, 칼릭스가 입매를 비뚜름하게 비틀었다. 몹시도 위험하고 오싹한 미소였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뱉는 말에 서늘한 경고가 담겼다.

    “베네비토 가문에 이혼은 없어.”

    “저, 저는…….”

    “감히 그따위 말을.”

    아셀라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창백해졌다. 가냘픈 몸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65화

    ‘젠장.’

    아셀라의 반응에 칼릭스의 기분이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먼저 해선 안 될 말을 해놓고서, 되레 자신이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베네비토 가문에 사생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대 어떤 대공도 혼외자식을 두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해 보려 했으나 될 리가 만무했다. 그녀의 발언은 선을 넘는 것이었다.

    사실 칼릭스는 사생아를 입적시키라는 말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혼을 운운해?’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서 벗어나 보겠다고 몸을 한껏 뒤로 물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도.

    “어딜 가나.”

    아셀라에겐 미처 반응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칼릭스가 그녀의 등허리로 손을 뻗어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몸이 일으켜진 아셀라가 그의 품에 파묻혔다. 놀란 그녀가 손바닥으로 칼릭스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팔에 강하게 힘을 주며 옭아매듯 몸을 붙였다.

    “아이라고 했나?”

    칼릭스의 다른 쪽 손이 아셀라의 턱을 붙잡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그와 마주친 물빛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칼릭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내 아이는 네가 낳아야지.”

    “……!”

    아셀라의 얼굴이 희게 질리며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마치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칼릭스가 조각상 같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분노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왜, 내 아이는 낳기 싫어? 그래서 사생아를 만들라고 했나?”

    다그침이 매서웠다. 그녀의 파리해진 얼굴은 이제 핏기 하나 없었다. 아셀라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여 들기 시작하자, 기분은 더 더러워지고 말았다.

    기어이 그녀의 입에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일었다.

    “대답해.”

    “…….”

    “대답해, 아셀라.”

    “죄, 죄송해요. 전하를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가 두려워서, 무서워서 또다시 떨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마법구로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여자가 제 앞에서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으면서 저와는 말도 붙이려 들질 않았다.

    ‘나와 이혼하고 다른 놈에게 가려고? 그래서 초야를 거부했어?’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부터 겪은 학대 탓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 시달리며 제대로 잠도 못 이루지 않던가. 게다가 최근 들어선 악몽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 역시도 알았다. 그저 우연한 마주침 뒤에 잠깐의 대화가 오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 남자를 찾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내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는 생글생글 잘도 웃던 여자가, 제 앞에서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겁에 질려 바들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았다.

    “네 본분이 무엇인지 잊었나?”

    칼릭스는 결국 그에게 가장 익숙한 수단을 택했다. 힘으로 으르고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 것.

    그렇게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을 놓은 칼릭스가 아셀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벌어지며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잊지 않았어요…….”

    칼릭스의 붉은 눈이 휘어졌다. 잔혹하고 무도한 사냥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나아가 좀 더 확실하게 해둘 생각이었다. 그녀가 분명하게 제 위치를 자각할 수 있도록. 다른 생각은 품지 못하도록. 스스로 내뱉은 말에 자신을 얽매도록.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테지.”

    아셀라의 입술이 몇 차례나 달싹거린 끝에 답이 흘러나왔다.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할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아셀라가 두려움을 삼키며 겨우 뱉어낸 말이었으나 칼릭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그는 그녀가 두려움에 질려가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면서도 냉정하게 선고했다.

    “정확하게 말해.”

    이젠 숫제 아셀라의 눈에 눈물이 아롱아롱 맺혔다. 눈 밑에 고여 드는 눈물을 지워내려는 듯, 그녀의 눈이 연신 깜박였다. 그의 가슴에 닿아 있는 가냘픈 손이 바르르 진동했다.

    그녀가 목멘 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아, 아이를…….”

    아셀라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칼릭스에게 시선이 붙들린 채, 그녀가 말을 마쳤다.

    “아이를 원해요…….”

    * * *

    칼릭스의 입매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이 여자는 알까. 제 거짓말이 눈에 훤하게 들여다보인다는 것을.

    기어이 원하는 답을 얻으면 한결 나아질 거라 여겼건만 웬걸, 전혀 아니었다.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알 굵은 눈물만 연신 떨구는 모습에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이를 원한다, 라.”

    지독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인가?”

    물음의 이유를 가늠하는 듯, 여자의 눈이 몇 차례 느리게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칼릭스는 가슴속 깊숙한 어딘가가 바짝 말라비틀어지는 걸 느꼈다.

    “앗……!”

    아셀라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칼릭스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아셀라의 몸을 그대로 공중에 띄운 탓이었다. 단 두 번의 발걸음에 아셀라의 허벅지 뒤쪽으로 식탁의 모서리가 닿았다. 당황한 아셀라가 손을 뒤로 뻗어 식탁 모서리를 부여잡았다.

    뒤로는 단단한 대리석 식탁이, 앞은 칼릭스에게 막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갇힌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아셀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칼릭스가 냉랭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굳이 미룰 필요 있나?”

    칼릭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어뜨리자 아셀라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반항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몸이 식탁 위에 뉘어졌다.

    등 뒤에 닿는 대리석의 서늘함과 남자의 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의 차이에 아셀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바짝 붙였던 몸을 일으키며 서늘하게 명령했다.

    “벗어.”

    “……!”

    순간, 맑은 물빛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였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뻔뻔하게 제 아이를 원한다고 내뱉었으나 역시 진심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칼릭스가 차갑게 비소했다. 그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인내심조차 걷어치워 버렸다.

    “그렇게나 원한다니 당장 아일 갖게 해주지.”

    아셀라의 푸른 동공이 파도가 치듯 흔들렸다. 아까부터 미세하게 떨리던 몸은 이제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진동하고 있었다.

    “벗겨줘?”

    “저, 전하…….”

    말간 눈망울에 두려움이 왈칵 담겼다. 그러나 칼릭스는 그저 비웃듯 물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사람처럼.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사정한 건 네가 아니었나?”

    “그건…….”

    목소리에 선연한 공포가 묻어났다. 그러나 이제 칼릭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가 어떻게 한들 겁만 집어먹고 피하려만 드는 여자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완벽한 공포를 심어 곁에 두는 게 나았다. 벗어나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역대 대공 가운데, 차라리 아내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이혼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칼릭스 역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내로서 의무를 다할 기회를 주는 내게 감사해야지. 그렇지 않나?”

    감히 제게 이혼을 말한 여자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들끓는 소유욕이 미친 듯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저주받은 혈족의 피가 전신을 휘돌며 그녀를 범하라고, 가지라고 충동질했다.

    그 말대로 이번에는 결코 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그녀를 품에 안아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켜줄 생각이었다.

    “아니면 또 거부할 셈인가?”

    그 말에 아셀라의 몸이 굳었다.

    칼릭스가 입매를 팽팽히 당겼다. 초야를 거부한 전적이 있는 그녀였다. 오늘만큼은 결코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거였다. 잘 차려진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그가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아셀라의 어깨 바로 옆, 그녀의 몸을 가두듯 식탁에 손바닥을 짚었다. 다른 쪽 손으론 긴 손가락을 뻗어 드레스의 앞을 여민 리본 끈의 끝을 쥐었다.

    긴장한 여자의 가슴께가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차례로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붉어진 눈,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희고 가느다란 목선까지.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선정적일 만큼 유혹적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식탁을 짚은 팔뚝에 핏줄이 우두둑 돋고 핏빛 눈동자가 욕망으로 물들던 그때.

    “전하.”

    여리디여린 목소리에 일순 칼릭스의 동작이 멈추었다.

    아셀라가 칼릭스의 손목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먼저 닿아온 건 결혼식 날 이후 처음이었다. 칼릭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당황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밤이 깊어지면 침실에서…… 여기선 싫어요.”

    “…….”

    초저녁의 식당. 칼릭스가 아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은 움직임이 필사적일 만큼 간절했다. 팔목에 닿는 온기가 금방이라도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가냘픈 떨림이 그의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이 뛰게 했다.

    ‘대체 이건…….’

    놀랍게도 휘몰아치던 분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고 말았다. 흉포하게 날뛰던 광기도 잠잠해졌다. 도무지 믿어 지지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 제 손목을 좀 잡았기로서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칼릭스가 당혹감을 감추려는 듯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싫고 좋고는 내가 정해.”

    “하지만…… 초야잖아요.”

    빌어먹을. 칼릭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비교적 또렷한 말과는 다르게 아셀라의 커다란 눈망울에서는 이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었으나, 그는 아내의 눈물에 약했다.

    이렇게 눈 맞은 새 같은 아내를 볼 때면 이중적인 감정이 솟구치곤 했다.

    안쓰러워서 품에 안아 도닥여주고 싶다가도, 저를 피하려는 모습을 보면 날개를 꺾어 새장에 가두어버리고 싶었다.

    두 번 다시는 날지 못하도록. 그의 새장 안에서 얌전히 제 손길만을 기다리도록.

    “울어도 소용없어.”

    칼릭스가 손으로 아셀라의 뺨을 감쌌다. 흥건하게 젖은 볼에서 손바닥으로 축축한 물기가 전해졌다.

    눈물이 많기도 하지. 이 작은 몸에서 펑펑 쏟는 눈물을 보고 있자면 신기할 정도였다.

    “봐줄 생각 없으니까.”

    내뱉는 말은 서늘했으나 정작 동작은 꿀이 떨어질 만큼 다정했다.

    그가 아셀라의 눈 밑에 고인 물방울들을 손가락으로 훔쳐낸 뒤 천천히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66화

    손가락 끝에 닿는 자그마한 입술의 감촉이 아찔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새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문 것인지 여기저기 부풀어 올라 있는 부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때마다 아셀라의 몸이 움찔거리며 그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을 만큼 작은 힘이었으나 칼릭스는 제 살결에 닿는 그 여린 감촉이 좋아서 내버려 두었다.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

    “저번처럼 피하려는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아셀라가 훌쩍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말했다. 원래의 그라면 어림없다고 답해야 했겠지만 어쩐지 칼릭스는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잠시 망설일 때였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황궁에서 급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라이젠의 목소리에 칼릭스의 모양 좋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필 지금.’

    황제의 요청이야 미루려면 얼마든지 미룰 수도 있었다. 사실 황제가 그를 찾는 이유가 ‘그 일’ 때문이 아니었다면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칼릭스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

    그의 시선이 아셀라에게로 가 닿았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푸른 눈동자가 깜박였다. 긴 속눈썹에 작은 눈물방울들을 대롱대롱 매달고서.

    ‘아이를 원해요…….’

    그녀의 말대로 이젠 정말로 그리될 터였다. 일정이 조금 앞당겨진 탓에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한편으론 차라리 잘된 것도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