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71)
  • ‘누굴 기다리는 걸까?’

    다시 고개를 돌린 아셀라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엔 과일을 비롯해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꼭 함께 밤을 보낼 연인들의 만찬 같았다.

    순간,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아셀라가 흠칫했다.

    “아셀라.”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남자는 흰 셔츠와 검은 바지만의 간단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입으니 전혀 단출해 보이지 않았다. 상반신의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얇은 셔츠는 목깃부터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어 일견 방만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와 마주 보는 의자에 앉은 남자가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댔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요.”

    저절로 입술이 벌어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셀라는 마치 자신이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자유로운 건 생각뿐이었다.

    “다행이군.”

    칼릭스가 포도주병을 들어 잔 두 개에 차례로 따랐다. 투명한 유리를 타고 잔에 떨어진 적포도주가 피처럼 붉었다.

    “마셔.”

    팔이 들어 올려졌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잔을 집어 들었다.

    ‘마시면 안 되는데……!’

    아셀라가 머릿속으로 다급히 외쳤다.

    그녀는 술을 정말 못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머리가 핑 돌며 어질어질해졌다. 잔에 들어 있는 양 정도면 완전히 취해 까무룩 기절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꿈속의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아셀라는 제 손이 포도주가 든 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걸 지켜만 보아야 했다.

    “술에 익숙지 않을 것 같아 달콤한 것으로 준비했어. 입맛에 맞나?”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남자의 모양 좋은 입술이 완벽한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아셀라는 그 웃음에 섬뜩함을 느꼈다. 한껏 휘어진 입꼬리와는 달리 붉은 눈은 비정하리만치 싸늘하기만 했다.

    ‘뭔가가 이상해.’

    지독한 무표정 위에 피어오른 거짓 웃음. 너무도 기이한 인상이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에 아셀라의 몸이 떨렸다.

    “겨우 한 모금 가지고 되겠나. 더 마셔.”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요.”

    “내가 직접 고른 거야. 성의를 봐서 한 잔쯤은 마실 수 있지 않나?”

    집요하리만치 권해오는 말에 아셀라가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어서 마시라는 의미로 가볍게 턱짓했을 뿐이었다.

    기어이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다가 삼켰다. 목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포도주가 닿는 여린 점막이 타는 것처럼 아우성쳤다.

    “잘했어.”

    칼릭스가 제 포도주잔을 집어 들고는 입술에 가져다 댔다. 붉은 입술과 붉은 포도주. 아셀라는 둘 다 지나치게 새빨갛다는 생각을 했다.

    포도주를 천천히 목 뒤로 넘기면서도, 그의 눈은 그녀를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는 사람처럼.

    “아직인가?”

    잔을 입에서 뗀 남자에게서 나온 말이 기묘했다. 아셀라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해졌다.

    “오래 버티는군.”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름 끼치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 이상했다. 의도를 가늠키 힘든 남자의 말과 기괴하리만치 묘한 얼굴, 아니, 이 상황 자체가. 살아 있는 거미가 살갗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북한 기분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이 꽂혀 들었다. 동시에 가슴이 타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흐윽!”

    아셀라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가 쓰러진 주위로 깨진 유리잔과 붉은 액체가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토해진 검붉은 피가 마른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설마……!’

    아셀라의 푸른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놀랐나?”

    아셀라가 다급히 목을 부여잡았다. 솜으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으나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이런. 많이 힘든 모양이야.”

    사내가 느릿하게 자세를 낮추더니 피가 튄 그녀의 뺨을 쓸었다. 어조에 미묘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생리적인 공포에 아셀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이혼 서류에 서명했으면 좋았잖나.”

    “……!”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독에 잠식당한 몸의 장기 곳곳이 망가지며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셀라가 꺽꺽거리면서 힘겹게 입을 뻐끔거렸다.

    “왜, 왜…….”

    “성가셔서.”

    남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아내에게 방금 독을 먹인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르마의 비밀을 엿보았는데도 살려줬으면.”

    “흣…….”

    “감사히 여기고 쥐죽은 듯 살았어야지.”

    아셀라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며칠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카르마의 문장이 새겨진 문 앞에 서 있던 칼릭스 베네비토. 어쩌면 카르마의 수장일 수도 있는 남자.

    “넌 아델을 누가 죽였는지 눈치를 챘을 거야. 그렇지?”

    일순 아셀라가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이윽고 벼락같은 깨달음이 거세게 전신을 내리쳤다.

    “네가 생각한 대로 내가 카르마의 수장이야.”

    엄습하는 공포에 아셀라의 몸이 가느다랗게 경련했다.

    ‘……베네비토를, 그를 조심…….’

    칼릭스 베네비토를, 그를 조심해.

    어머니의 경고가 다시금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죽어가는 몸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전신으로 퍼져나간 독이 끝내 아셀라의 가파른 호흡마저 막았다.

    “넌 아델과 달리 이능이 없어 살려둘까도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던 귀가 남자의 잔인한 말을 전했다. 서늘하고 무자비한 붉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겨우 버티고 있던 상체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점차 잦아들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푸른 동공만이 애처로이 떨렸다.

    칼릭스가 그런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귓가에 다정스레 속삭였다.

    “샤르투스의 핏줄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해.”

    * * *

    “비전하, 비전하……!”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에 아셀라가 잠에서 깼다.

    안절부절못하는 마부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어느덧 하늘엔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던 일행들은 벌써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마차에 올라탔는지 몰랐다. 맞은편 소파에서 자는 메리엘을 지켜보며, 아셀라가 왼쪽 가슴께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내가 죽는 꿈.’

    칼릭스 베네비토가 그녀를 독살했다.

    악몽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자꾸만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경계하라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솟구치는 불안과 두려움에 오한이 일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소매 안으로 감추며 아셀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 * *

    대공의 집무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라이젠이 슬쩍 눈을 굴려 주인의 기색을 살폈다. 겉으로는 특별할 것 없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공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살벌하여 감히 말을 붙이지도 못할 정도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운이 나빴어.’

    조금 전 카르마의 보고가 있었다. 대공의 명에 따라 외출하는 대공비를 호위하러 나간 자들이었다.

    마법 영상구를 개방하자마자 동생과 대화하는 대공비의 모습이 잡혔다. 그게 다였다면 좋았을 것을, 한 사람이 더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큰일 났다.’

    영상구 속 남자를 보자마자 라이젠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금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젊은 사내는 누가 보아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모습이 뭇 여인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져 다행이다 싶었는데 웬걸, 나중에는 대공비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까지 나누는 게 아닌가.

    영상이 계속될수록 주변 공기가 실시간으로 뚝뚝 떨어졌다. 팽팽해진 공기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단련된 라이젠조차 숨쉬기가 버거웠을 정도였다.

    심지어 대공비가 사내를 향해 웃음 지었을 때는.

    ‘죽는 줄 알았지.’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영상 속의 사내를 금방이라도 짓씹어 삼킬 듯이 흉흉해졌다.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남자의 사지가 찢어발겨 졌으리라는 데, 라이젠은 제 목을 걸 수도 있었다.

    ‘비전하를 모셔올까요?’

    서슬 퍼런 살기를 뚫고 라이젠이 어렵사리 묻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에게선 답이 없었다. 당장 그녀를 데려오라 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음에도.

    무서울 정도의 침묵 끝에, 주인의 유려한 입술이 벌어졌다.

    ‘두어라.’

    그리고 이후 수 시간 째, 대공은 이 상태였다.

    겉으로는 평소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업무는 매끄러웠고 지시는 간결 명확했으며 서명의 필체까지도 완벽했다.

    그러나 실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섬뜩한 날것의 무언가가 주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흐르는 광포한 피가 들끓는 것이었다.

    ‘부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원초적인 욕망의 집합체나 다름없는 존재의 흔적. 이 피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혈족들에게 끊임없이 존재를 과시하려 들었다.

    아마도 라이젠의 짐작이 맞는다면 지금 주인에게서 요동치는 욕망은 아마도.

    ‘……소유욕.’

    역대 모든 대공이 제 욕망에 충실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그래도 되었으니까. 무서우리만치 집요하고 탐욕적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다. 설사 나중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가져야만 했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주군은 누구보다도 핏줄의 힘을 강하게 타고난 자였다.

    라이젠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긴장하며 촉각을 세우는 것도 이 탓이었다. 대공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보긴 힘들었지만 적어도 경솔했다. 그녀는 남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라이젠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전하, 비전하께서 조금 전 성문을 지나셨다는 전갈입니다.”

    마침내 시종이 대공비의 귀택을 알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63화

    15. 오해

    마차에서 내리려던 아셀라가 멈칫했다. 파비안을 위시한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들 가운데 라이젠이 있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셀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일직선으로 죽 뻗은 길 끝에 중앙 문이 활짝 열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실내장식이 보였다. 그러나 아셀라에겐 그저 악마의 거대한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꽉 맞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말했다.

    “잠시 방에 들러야 할 것 같아요. 이제 막 돌아온 터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물론입니다, 비전하.”

    “메리엘이 마차에 잠들어 있어요.”

    아셀라가 시종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을 지켜보다 제 방으로 향했다. 대공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간단히 씻고 가벼운 치장을 했다.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실내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방을 나섰다.

    “모시겠습니다.”

    라이젠의 안내를 받으며 걷는 내내, 아셀라는 치밀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억눌렀다. 비록 꿈이라지만 조금 전 자신을 독살했던 남자를 만나는 거였다. 치맛자락을 쥔 손에 긴장으로 힘이 들어갔다.

    넓은 복도를 따라 걷던 그녀는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는 멈추어 섰다. 그녀의 발걸음이 멎자 라이젠이 뒤를 돌았다.

    “비전하?”

    “전하의 집무실로 가는 게 아니었나요?”

    비록 대공과는 다른 건물을 쓰고 있었으나, 그의 집무실엔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기에 대강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지금 걷는 복도는 한 번도 지나친 적이 없는 길이었다.

    라이젠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제 설명이 미흡했습니다. 지금 가시는 곳은 식당입니다. 혹시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까?”

    물론, 라이젠은 아셀라가 식사 전임을 알고 있었으나 부러 질문했다. 고개를 젓는 아셀라의 물빛 눈동자가 불안으로 잘게 떨렸다.

    “아니요. 그런데 그건 왜…….”

    대답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공간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아셀라가 흠칫 놀랐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쥐며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흰 셔츠 차림의 칼릭스 베네비토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 *

    처음이었다.

    지금껏 아셀라는 남편과 함께 식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공성은 대공과 대공비의 공간이 북쪽과 남쪽 건물로 거의 완벽하리만치 분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대공비 전용 공간의 식당이나 혹은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메리엘과 함께 식사하곤 했다.

    ‘갑자기 저녁 식사라니, 어째서…….’

    차라리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묘한 위화감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앉지.”

    칼릭스가 의자를 손수 꺼내어 아셀라를 자리에 앉히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법 상냥한 손길이었으나 아셀라는 오히려 한층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안절부절못하던 아셀라의 귀에 칼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 일렀어.”

    “감사해요.”

    아셀라가 자동 응답 인형처럼 대답하던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꿈속의 장면이 스쳤다.

    ‘술에 익숙지 않을 것 같아 달콤한 것으로 준비했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포도주를 넘기던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던 서늘한 눈. 기이하리만치 한껏 휘어지던 입매. 죽어가던 자신을 향한 차가운 조롱과 비소.

    “장소가 불편한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의 식당이나 응접실에서 식사해도 좋아.”

    “아, 아니에요.”

    아셀라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가 두 손을 맞잡아 힘껏 힘을 주었다.

    ‘그냥 나쁜 꿈일 뿐이야. 긴장할 필요 없어.’

    마음을 진정시키는 와중에도 턱 끝이 떨렸다. 아셀라가 보이지 않게 안쪽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애가 말하길 그대와의 외출이 처음이라더군.”

    돌연 들려온 말에 아셀라가 움찔했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생각을 읽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듯한 태도에, 아셀라가 신중하게 단어를 추려 답했다.

    “네. 그동안은 사정이 있어서 함께 밖에 나가보질 못했어요.”

    “그래서, 즐거웠나?”

    질문하는 목소리가 건조하다 못해 싸늘했다. 무심한 얼굴은 여전했으나 어째서인지 남자의 눈빛이 매섭게 느껴졌다. 서슬 퍼런 무수한 칼날이 주변을 메우고 있는 것만 같은 섬뜩함에 아셀라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좋았던 모양이군.”

    칼릭스의 입매에 비뚜름한 조소가 걸리자 아셀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대답한 듯했다. 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었길래.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초조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아셀라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남자는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불안감에 아셀라의 몸이 뻣뻣해졌다. 테이블 밑, 쥐고 있던 치맛자락은 이미 구깃구깃해져 본래의 매끈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져 있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이 숨 막히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전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팽팽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아셀라가 조용히 밭은 숨을 토해냈다.

    “들지.”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셀라가 정갈하게 세팅된 접시 위로 시선을 내렸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두고서도 아무런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학습된 동작으로 식기를 집어 든 그녀가 칼끝을 표면에 가져다 대었을 때였다.

    “흡!”

    외마디 신음성과 함께 아셀라가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잘린 단면의 틈으로 진득하게 흘러나온 핏물이 접시를 적셨다. 티 없이 새하얀 식기와 핏물의 새빨간 색채가 대조적이었다.

    ‘겨우 한 모금 가지고 되겠나. 더 마셔.’

    선명한 선홍빛이 독이 들어 있던 포도주를 연상시켰다. 연신 손바닥에 토해냈던 핏덩어리의 색채와도 어딘가 닮아 있었다.

    전신이 타는 것 같던 끔찍한 고통. 미친 듯이 명멸하던 시야.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느릿해지던 심장 박동.

    그리고 죽음.

    숨이 찼다. 물속에 던져진 육지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허우적대다 깊은 심해 속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비전하, 새 나이프입니다.”

    사용인이 금세 새 식기를 가져다주었다. 아셀라가 힘겹게 손에 다시 나이프를 쥐었다. 그러나 접시에 고인 붉은 핏물이 자꾸만 꿈에서의 참상을 떠올리게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지고 멀미가 났다.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

    어느새 식사를 멈춘 칼릭스가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에요.”

    대답을 듣고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에 아셀라가 접시 가장자리의 완두콩 몇 개만을 가까스로 입에 가져갔다. 구역질이 울컥 밀려 나오려는 것을 참아내며 겨우 목 뒤로 넘겼다.

    그러나 그 힘겨운 노력도 칼릭스의 예리한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왜 먹질 않지?”

    칼릭스의 적안이 사냥감을 훑듯 아셀라의 얼굴과 바들거리는 손끝,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에 차례로 닿았다. 그러곤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도 아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싸한 침묵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질식할 것 같은 적막 끝,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칼릭스였다.

    “라이젠.”

    “예, 전하.”

    칼릭스의 시선이 라이젠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신경 쓰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그리 명하셨습니다.”

    “그럼 내 비가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봐.”

    “죄송합니다.”

    “주인의 입맛도 못 맞추는 것들을 살려둘 필요가 있나?”

    일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리라는 걸 아는 이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주인의 말은 그저 말뿐인 협박이 아니었다.

    “책임을 묻겠다.”

    피바람을 예고하는 서늘한 명령에 그들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 저녁 식사에 관여했던 모든 이가 대공의 칼날에서 무사하지 못할 터. 라이젠 역시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소리 없이 침음을 삼켰다.

    “하나도 빠짐없이 끌어내.”

    “전하, 잠시만…….”

    첨예한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살벌하던 공간에 여린 목소리가 퍼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셀라의 목소리를 들은 칼릭스의 얼굴에 미미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 형형하게 빛나던 적안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아주 약간이지만 느슨해졌다.

    대공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가 숨을 죽이며 대공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저 속이 좋지 않은 것뿐이에요.”

    “…….”

    “조금 더 익히면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들을 감싸려는 거라면―”

    “정말이에요, 전하.”

    칼릭스가 아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인지를 가늠하는 노골적인 관찰에도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했다. 테이블 밑의 맞잡은 두 손은 미친 듯이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다시 가져와. 제대로 익혀서. 두 번은 없어.”

    살기등등한 경고와 함께 내려진 명령에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셀라 앞에 완벽히 익힌 음식이 새로이 놓였다.

    유독 보기 좋은 모양과 진한 풍미가 요리사들의 절실한 마음을 짐작게 하여, 아셀라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먹어야 해.’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으로 어렵사리 식기를 쥐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핏물은 보이지 않았다. 접시와 나이프, 포크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에 흘렀다.

    “이제 먹을 만한가.”

    “네. 맛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잘 익혀진 최고급의 고기였지만, 아셀라는 전혀 맛을 느끼지 못했다. 가능한 한 작게 썰어 입안에 밀어 넣고는 몇 번 씹어 목 뒤로 넘겼다. 태엽 인형처럼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요리사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식사라기보다는 꾸역꾸역 삼킨 것에 불과했으나, 어찌 되었든 아셀라는 접시를 반쯤 비울 수 있었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그들 앞에 찻잔이 놓였다. 시트러스 가향 홍차의 상큼한 향기가 은은하게 공기 중에 퍼졌다. 그녀가 즐겨 마시던 차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러나 아셀라에게 향긋한 차향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게 얼른 끝났으면 했다. 오렌지 빛깔의 찻물이 유독 붉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 거라고 애써 되뇌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칼릭스가 말을 건넸다.

    “묻질 않는군.”

    “네?”

    “갑자기 마련한 자리에 놀랄 법도 했을 텐데.”

    “이유가…… 있으신가요?”

    불안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이 사내를 향했다. 남자의 표정, 몸짓, 목소리. 무어라도 읽어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질 않았다.

    칼릭스가 제 보좌관에게 짤막이 명했다.

    “가져와.”

    그러자 라이젠이 몇 장의 얇은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도주하는 대공비 64화

    서류를 받아 든 칼릭스가 내용을 찬찬히 읽어내려가자 아셀라의 동공이 격하게 진동했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이혼 서류에 서명했으면 좋았잖나.’

    제게 독이 든 잔을 먹인 사내가 웃으며 했던 말을 떠올린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아셀라를 엄습했다. 진득한 공포가 목덜미를 내리누르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팔딱거렸다.

    “나쁘지 않군.”

    칼릭스가 라이젠에게 도로 서류를 건넸다.

    잠시 뒤 아셀라의 찻잔이 옆으로 밀리고 그 자리에 서류가 놓였다. 그러나 차마 내용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류를 정갈히 놓은 라이젠이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사용하실 내탕금입니다.”

    그제야 아셀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를 차례로 읽어내려갔다. 서류의 마지막 부분, 총액을 확인한 아셀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이게 다 제게 배정된 예산이란 말인가요?”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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