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라도 살려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우습기도 하고, 좀 안됐기도 하고.’
‘뭐가 안됐어? 운 좋아 귀족으로 태어난 게 전부면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데.’
메리엘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힘껏 쥔 주먹 탓에 팔이 다 부들거렸다. 이불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매일같이 얻어맞는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고상 떨고 있는 거 보면 웃겨.’
‘덕분에 저번에 다른 애들이 드레스 입혀준다면서 바늘로 찔러대도 찍소리도 못했다잖아?’
‘나도 들었어. 속이 다 시원하더라.’
메리엘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소리 없는 비명이 입안에서 터져 맴돌았다.
묻고 싶었다. 언니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냐고. 왜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알고 보면 다른 집 귀족 아가씨들이나 도련님들도 그런 거 아냐?’
‘화려한 옷 벗겨놓고 보면 몸에 상처가 가득할지도 모르지.’
깔깔깔. 저열한 대화가 오간 끝에 경박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너무나 끔찍한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대공 전하께서 보기 흉하다고 도로 결혼을 물리실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다. 걔한테 대공비 자리가 가당키나 한지.’
‘그런데 신관을 불렀다지 않아?’
그저 목소리일 뿐인데도 숨길 수 없는 적대감과 악의가 묻어나왔다. 아셀라의 사방이 모두 적이었다. 메리엘은 언니가 버텼을 그 지난한 세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파혼당하면 꼴이 우스워지긴 하겠다.’
‘난 솔직히 파혼보다는 이혼당했으면 좋겠어. 완전히 밑바닥까지 처박히게.’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결혼은 다신 꿈도 못 꾸겠지?’
‘수도원 같은 데 보내져서 죽을 때까지 못 나오게 되겠지.’
사용인들이 아셀라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고깃덩이처럼 말로 난도질하는 동안, 메리엘은 입 안쪽의 살들을 모두 짓씹어가며 그 시간을 겨우겨우 버텨냈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갔다.
모두가 나간 뒤 비로소 조용해진 밤, 메리엘은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되게 두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를 지키겠다고, 어렴풋이 생각만 했던 다짐을 마음에 새긴 건 그날 이후였다.
“메리엘, 혹시 무슨 일 있어?”
“응?”
걱정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에 메리엘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도 모르게 굳어버린 얼굴을 얼른 폈지만 이미 아셀라가 본 뒤였다.
“고민거리라도 생긴 거야?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그런 거 아니야.”
메리엘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환하게 얼굴색을 꾸미고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언니랑 어디에 가서 뭐 할까, 생각하느라 그랬어!”
그제야 걱정스럽게 메리엘을 쳐다보던 아셀라의 표정이 풀어졌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돼.”
“정말? 그래도 돼?”
“그럼.”
메리엘이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셀라를 향해 씩 웃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약속 꼭 지키는 거다!”
* * *
봄을 맞은 공국 곳곳이 사람으로 붐볐다. 북적이는 거리 탓에 마차는 느릿하게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인 건, 상류층들이 주로 찾는 거리로 진입하고 나서부터였다.
고급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 한쪽에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부가 문을 열고 공손한 태도로 안주인의 의중을 물었다.
“비전하, 어디로 모실까요?”
“디저트 가게!”
메리엘의 대답이 더 빨랐다. 냉큼 말을 가로챈 아이가 몸을 일으켜 마부 앞에 섰다.
“여기서 가장 유명하고 맛있는 디저트 가게로 데려다줘!”
마부가 슬쩍 눈을 굴려 아셀라의 눈치를 살폈다. 쿠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가씨와 동생 탓에 고심하는 대공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탓이다.
“언니, 들어줄 거지?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준댔잖아!”
메리엘이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밑에 대고는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였다. 동생의 어리광에 아셀라가 미소 지으며 마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잠시 뒤, 마차가 독특한 디자인의 삼 층짜리 건물 건너편에 멈추어 섰다. 가게 바깥까지 사람들로 우글우글했다.
아셀라가 놀란 낯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메리엘의 재촉에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 진짜 예쁘다! 가게가 커다란 분홍색 벨벳 케이크 같아!”
흰색과 분홍색으로 칠해진 외관이 눈에 확 띄었다. 기둥 사이사이로 난 투명한 창마다 반투명한 커튼이 걸려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자리를 마련하고…….”
“언니, 얼른 가자!”
마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메리엘이 아셀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서두르는 동생 탓에 당황하면서도, 아셀라는 마부에게 눈짓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엘은 그 틈도 참지 못했다. 아이가 아셀라의 손까지 놓고는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잠깐 메리엘, 조심해!”
“꺄악!”
“이런. 꼬마 아가씨가 조심성이 없군요.”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메리엘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아셀라가 체면도 잊고 급히 뛰어가 자세를 낮추고는, 메리엘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 어디 아픈 데는?”
“응. 난 괜찮아. 그런데…….”
메리엘이 손가락을 쭉 뻗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제야 옆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아셀라의 눈에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였다.
아셀라가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동생이 다치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을 봤다면 도왔을 거예요.”
남자가 담백한 대답과 함께 눈매를 부드러이 휘었다. 꾸밈없는 미소에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비전하!”
마침 일을 마친 마부가 쏜살같이 달려와 아셀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삼 층의 귀빈석에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수고했네.”
마부에게 고개를 까닥인 아셀라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놀랐을 법도 한데, 그의 얼굴은 마치 그녀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그가 완벽한 귀족식 예법으로 우아하게 인사했다.
“여기서 대공비 전하를 뵙는군요. 로샨입니다.”
“……로샨?”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아셀라가 멈칫했다. 남자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영문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메리엘은 종업원에게 큰 목소리로 메뉴를 묻고 있었다.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
“딸기 밀푀유가 가장 유명합니다. 대표 메뉴이지요.”
방방 뛰는 메리엘을 뒤로한 채, 아셀라가 로샨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로샨 씨. 도움 감사했어요. 먼저 가볼게요.”
“또 뵙지요.”
“언니! 얼른 가자!”
로샨의 대답이 영 이상했다. 그러나 메리엘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하는 바람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까스로 눈인사를 마친 그녀가 로샨을 등지고 돌아섰다.
아셀라가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 * *
파스텔톤의 내부가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메리엘이 걸음을 디딜 때마다 쉴 새 없이 감탄했다.
“비전하, 이쪽입니다.”
종업원이 격식 있는 태도로 그들을 삼 층으로 안내했다. 별도의 문과 계단이 있어 손님으로 복작거리는 일 층의 현관과 계산대 등을 지나칠 필요도 없었다.
아직 시간이 일렀던 탓인지, 삼 층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언니, 이거 봐! 구름 모양 쿠션이야!”
그새 뛰어들어 간 메리엘이 민트색 소파 위에 착지하며 쿠션을 품에 끌어안았다.
전망 좋은 자리였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벽면에 난 커다란 창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볕이 너무 강하지 않게 창에 달린 캐노피 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설핏 비쳤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놓인 민트색 소파는 여섯 명 정도는 족히 앉을 법했다.
아마도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이리라, 아셀라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지금 이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베네비토.’
어머니가 물려주셨던 영광스러운 샤르투스의 이름을 빼앗긴 대신 붙여진 이름.
‘앞으로 평생 가질 네 이름이다.’
아니, 그건 가진 게 아니었다. 그녀가 칼릭스 베네비토의 소유임을 확인시키는 낙인에 불과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서 그 이름을 거두어가길 원한다면 곧바로 그리되고 말 테니까.
“주문하시겠습니까?”
잠시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의 앞에 메뉴판이 놓였다. 메리엘이 고민도 하지 않고 외쳤다.
“딸기 밀푀유랑 딸기 라떼!”
아이의 해맑은 모습에 아셀라가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었다.
“디저트는 같은 것으로. 음료는 어울리는 따뜻한 차면 좋겠어.”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잠시 후 돌아온 종업원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다. 쭈뼛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온 종업원이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딸기 밀푀유가 조금 전에 다 떨어져서 지금 곧바로 만든다고 해도 시간이…….”
종업원이 어물어물 뒷말을 삼켰다.
“얼마나 걸리지?”
“그게, 남은 반죽이 없어서 최소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메리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서둘러 주문할 것을.’
아셀라가 울상이 된 메리엘을 도닥였다. 속상했는지 눈 밑까지 촉촉해져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갈 거야. 조금만 기다리자. 응?”
그렇게 그녀가 동생을 달래던 때였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우연히 듣게 되어서요.”
“당신은 조금 전에…….”
아셀라의 눈이 커졌다. 언제 온 건지 로샨이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언니의 품에서 우울해하던 메리엘도 고개를 빼꼼 들더니 속눈썹을 끔뻑거렸다.
“혹시 찾으시는 게 이것, 맞나요?”
로샨의 양손에 딸기 밀푀유가 가득 담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61화
메리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입안의 딸기를 오물거렸다. 아셀라는 디저트에 푹 빠진 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로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폐를 끼쳤네요.”
“아니에요. 꼬마 아가씨가 좋아하는 걸 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로샨의 소탈한 웃음에 아셀라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짧은 탄성을 냈다.
“성함이 로샨, 이라고 하셨죠?”
“네. 어느 신관과 이름이 똑같아서 놀라시진 않았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깜짝 놀란 아셀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로샨이 웃으며 답했다.
“동일 인물이니 이름이 같을 수밖에요. 본의 아니게 속인 셈이 되었네요.”
로샨이 바깥에선 들여다볼 수 없게 창문의 커튼을 휙 치더니 얼굴에 덮어씌웠던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드문드문 머리칼이 희게 센 그녀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아셀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신관으로 지내다 보면 여러 제약이 많다 보니, 필요에 따라 적당히 겉모습을 바꾸곤 한답니다.”
“전혀 몰랐어요.”
“꽤 그럴듯하죠? 이러고 있으면 다른 신관들도 못 알아봐요. 가끔 골탕 먹일 때 유용하게 쓰곤 하죠.”
로샨이 짓궂게 웃으며 다시 제게 변신 마법을 걸어 모습을 바꾸었다. 아까의 젊은 미남자가 된 그녀가 쳐두었던 커튼을 열어젖히자 테이블이 밝아졌다.
“실은 일전에 비전하를 뵌 적이 있어요.”
“저를요?”
“네. 그때는…….”
로샨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아셀라를 응시했다.
“샤르투스 영애셨지요.”
“아.”
아셀라가 살짝 시선을 비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서 지워진 이름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가시로 콕콕 찔리는 것처럼 아릿했다.
“성년이 되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결혼하실 줄은 몰랐어요. 귀족들은 보통 약혼 기간을 길게 갖곤 하니까요.”
“…….”
“게다가 상대가 베네비토 대공 전하라기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하마터면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답할 뻔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두 분 사이에 교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아, 제가 너무 주제넘은 말을 했네요. 죄송해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로샨이 황급히 사과했다. 아셀라가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귀족가의 일반적인…… 결혼 절차를 따랐어요.”
“그러셨군요.”
정략혼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로샨이 절로 착잡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한편, 로샨이 말을 멈추자 아셀라는 괜스레 불안을 느꼈다. 정략혼을 했다는 사실이 치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이 가문 간의 이해득실을 따져 혼사를 추진하니까.
하지만 왠지, 칼릭스 베네비토가 들었다면 불쾌해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날 떠보려는 건지도 몰라.’
수행원 없이 메리엘과 둘만 나온 나들이. 그러나 아셀라는 대공이 정말 그렇게 해주었으리라곤 여기지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호위기사들이 건물 주변에 몸을 숨기고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신관이라고는 해도 로샨은 대공이 불러온 사람이야.’
메리엘의 각성 사실을 숨겨주고 있다고 해서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말만 그렇게 하고 이미 대공에게 전부 밝혔을지도 몰라.’
아셀라가 테이블 밑으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물어야 한다는 생각과 괜한 짓이라는 생각이 얽히고설켰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번민이 지나간 끝에, 결심을 굳힌 아셀라가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를 아신다고 하셨죠?”
그때까지도 조용히 포크 질만 하던 메리엘이 일순 동작을 멈췄다. 바지런히 식기를 놀리던 소음이 사라지자 그들밖에 없는 공간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메리엘이 말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샨이 살짝 굳은 얼굴로 아셀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잘 알죠. 아델이 후작위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친우였으니까요.”
“몰랐어요. 어머니의 친우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거든요.”
“있을 거예요.”
“네?”
로샨의 단정적인 말에 아셀라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종종 만나곤 했으니까요. 아직도 말 타는 건 좋아하나요? 아델이 말 태워준다고 하면 놀고 있다가도 냉큼 달려오곤 했는데. 여름만 되면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커다란 파르페를 맛있게 해치우곤 했죠.”
아셀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걸요.”
“어릴 때니까 그럴 수도 있죠. 어쩌면…….”
로샨의 뒷말이 이어졌으나 아셀라의 귀엔 띄엄띄엄 들렸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걸 잊어버릴 수가 있지?’
어머니와의 사소한 추억까지도 기억하는 아셀라였다. 로샨의 말대로라면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던 듯한데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진 것처럼.
‘뭔가 이상해.’
사람 좋은 낯으로 웃고 있으나 속으로는 다른 속셈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머니와의 친분을 무기 삼아 그녀의 벽을 허물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칫 말실수라도 할까 저어되었다. 대공에게서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지금, 작은 허점도 드러내선 안 됐으니까. 더는 로샨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메리엘이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나직이 속삭였다.
“언니, 그런 거 아니야.”
영문 모를 말에 아셀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메리엘이 상자에서 새 딸기 밀푀유를 꺼내 아셀라의 접시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진지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발랄하게 말했다.
“어서 먹어봐. 굉장히 맛있어.”
“메리엘?”
“이것만 먹고 가자, 응? 언니도 분명 좋아할 맛이야.”
그때, 어디선가 삐빅 하는 소리가 났다. 로샨이 소리가 나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회중시계를 꺼냈다.
뚜껑을 여는 소리와 함께 안의 메시지를 확인한 로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조금은 거친 동작으로 시계를 품 안에 쑤셔 넣은 로샨이 아셀라를 향해 말했다.
“비전하, 죄송하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먼저 일어나봐도 될까요?”
다급해 보이는 얼굴과 긴장감 서린 목소리. 아셀라의 눈빛이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줄도 모르고 지금껏 붙잡아 두었네요.”
“아니에요. 이야기 즐거웠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뵐 수 있기를 바라요.”
인사를 마친 로샨이 몸을 돌리며 메리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메리엘도 윙크로 화답하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로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 어린 아가씨를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완벽히 각성하기 전까지는 대공의 보호를 받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메리엘이 이능을 통해 보았다던 금빛 기류가 사실이라면. 정말로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셀라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 사내가 두 자매의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터.
밖으로 나온 로샨이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붙는 인기척 몇이 느껴졌다.
‘대공이 보낸 손님이 여기까지 따라왔군.’
아셀라와 만난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사람을 붙인 모양이었다.
로샨이 인적없는 길모퉁이로 방향을 휙 꺾으며 투명 마법을 걸었다.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몇 분 정도 걷고 나자, 로샨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않게 되었다.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하는 그녀의 손짓이 조급했다.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동안은 숨어서 은밀하게 활동해왔다면 이제는 공격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에 로샨이 입술을 짓씹었다.
아까의 메시지가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예언 신관 두 명 사망. 속히 귀환 바람. -유디트-]
* * *
메리엘의 초롱초롱한 눈이 아셀라의 포크를 따라 움직였다. 아셀라가 밀푀유를 입에 넣기 무섭게 메리엘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아셀라가 밀푀유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이 열리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부인 덕분에 이 가게 삼 층에 다 와보네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목소리가 꽤 컸다. 아셀라와 메리엘의 테이블이 가장 안쪽에 있었던 데다 구역마다 칸막이가 높게 처져 있어 오해할 만도 했다.
시끌벅적하게 주문을 마친 그들이 종업원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시작했다.
“소식 들으셨어요? 율피안 자작 이야기요.”
“아, 자작 부인에게 피룬의 땅과 별장을 증여했다죠?”
얼떨결에 남의 사적인 대화를 듣고만 아셀라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만 일어서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짝 몸을 일으킨 그녀가 메리엘에게 속삭였다.
“메리엘, 이제 나가는 게 좋겠어.”
“사생아를 가문에 입적시켜야 하니 그럴 수밖에요.”
아셀라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지금 나가보아야 남의 치부를 엿들은 사람밖에 되질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그녀가 누구인지 저들이 알아볼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차라리 모두가 자리를 뜨고 난 뒤에 나가는 편이 나았다. 남의 입방아에 올라선 곤란했다.
도로 자리에 앉은 아셀라가 메리엘을 보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자는 신호였다. 메리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불임이라 어쩔 수 없었다더군요.”
“그건 핑계죠. 적당히 방계에서 후계자를 들여도 되는데.”
“남인 우리가 뭐라 할 수 있나요? 자작 부인이 수긍한 일인걸요.”
“부인도 어쩔 수 없었겠죠. 친정 가문 재정 상태가 엉망이었잖아요. 그 돈으로라도 메꿔야 했을 거예요.”
대화 내용이 점점 은밀해지고 있었다.
“클라린스 백작은 또 어떻고요. 남편을 두고도 아예 정부를 집 안에 들였잖아요.”
“그래도 뭐, 그쪽도 대가로 받은 게 꽤 될걸요?”
“수도에 저택 하나랑 엘피네 상단의 독점 운영권이요.”
“상당하네요.”
아셀라가 접시 위의 디저트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녀의 노력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워낙 목소리들이 커 귀에 쏙쏙 박혀 들었다.
“그래서 요즘 수도엔 이런 말이 떠돈다잖아요.”
“무슨 말이요?”
“배우자가 갑자기 내탕금을 많이 주면 의심부터 해보라고. 정부가 있거나 사생아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폭소가 터졌다. 한참이나 요란스러운 웃음이 공간을 휘감았다. 소란이 가라앉은 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한번 받아보고 싶네요. 그 어마어마하다는 내탕금.”
“진심이에요? 그러다 정말 사생아라도 데려오면 어쩌려고요?”
“몰라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요.”
꺄르르,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야기꽃이 계속되었다.
“정원에 흰색 제라늄이…….”
“수도에서 유명하다는 차가 이번에 선물로 들어왔는데…….”
대화의 주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평범해졌다. 열띤 흥분으로 가득했던 목소리들도 나중에는 차분하고 단조로워졌다. 그 사이에 메리엘은 밀푀유를 몽땅 해치우고는 아셀라의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들었다.
“…….”
아셀라가 새근새근 낮잠이 든 동생의 머리를 쓸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봄볕이 창을 통해 실내로 조금씩 깊이 비쳐들고 있었다.
한낮의 거리는 평화로웠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 즐거움과 활기가 넘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셀라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이 부실 듯 화창한 날씨와, 잠든 아이의 숨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목소리들까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아셀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볕 탓인지 몸이 나른해지더니 절로 졸음이 왔다.
‘자면 안 되는데…….’
그러나 이성을 부여잡는 것보다 잠의 유혹에 빠져드는 게 더 빨랐다. 순식간에 수마가 그녀를 잡아 덮쳤다. 아셀라는 그대로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62화
시야가 불분명했다. 아셀라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온통 흐릿하던 주변이 안개가 걷힌 것처럼 서서히 맑아졌다.
‘여긴……?’
대공비의 침실. 정확히는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몸이 안 움직여져.’
분명 제 몸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관찰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셀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근처에 놓여 있던 전신 거울에 모습이 비쳤다. 핏기없이 창백한 안색의 자신이 거울 속에서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