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71)

지금껏 어머니의 죽음에서 아셀라가 찾지 못했던 퍼즐이었다. 대체 이 단추는 누구의 것이고, 이 문양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그런데 지난밤 꿈에 이 문양이 나왔다.

아셀라의 입술이 벌어지며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가 빛이 점멸하듯 새어 나왔다.

“……카르마.”

암흑가 카르마. 지하 세계의 지배자.

황제가 지상의 제국을 통치한다면, 카르마의 수장은 어둠 속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악명과 영향력에 비하면 알려진 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카르마의 수장은 누구인지, 조직의 일원은 누구이며 그 수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간에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으나 그저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당장 옆에서 웃고 떠드는 동료나 이웃이 카르마의 일원일 수 있었다. 실체는 있으나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다는 것 때문에 제국민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카르마의 수장이라면.’

모든 이야기의 앞뒤가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카르마를 보내 어머니를 살해한 거라면.’

어머니는 어쩌면 카르마의 문양을 알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숨이 끊어지기 전, 그녀에게 칼릭스 베네비토를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일 수도 있었다.

단추를 쥔 가냘픈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인 걸까?

그러나 너무도 선명한 꿈이었다. 그녀를 품에 단단히 가두던 칼릭스의 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여, 아셀라가 작게 몸을 떨었다.

눈앞에서 바로 보이는 것 같은 장면, 생생하게 느껴지는 촉감. 꿈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마치 예지처럼.’

아셀라가 제 생각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이미 메리엘에게 각성이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예지는 샤르투스 가문에서도 가장 드물게 발현되는 이능이었다. 그런 희귀한 힘이 그녀에게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다 보아도 무방했다.

‘그래도…….’

이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은 어째서인지. 이런 꿈을 꾸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

‘날이 밝는 대로 서재에 가야겠어.’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 * *

비슷한 시각, 필립이 황제를 알현했다.

그가 가져온 물건을 황제 앞에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누군가의 사용 흔적이 남은 여성용 옷 몇 벌과 펜, 자수틀 따위였다.

“폐하께서 명하신 것들이온데 이것들이 맞는지요?”

페르난데가 필립더러 가져오라 한 건 아셀라가 쓰던 물건이었다.

‘오랫동안, 자주 사용한 것일수록 좋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되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자정 가까운 시각에 방문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하나같이 수상쩍고 괴이한 내용이었으나 황제의 명이니 따라야 했다.

“폐하?”

페르난데가 물건들을 예리하게 죽 훑더니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가져왔다는 생각에 긴장해 있던 필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데 이것들은 왜 가져 오라고 하신 건지요?”

그러나 황제는 대답 없이 가볍게 턱짓했다.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시지요.”

“자,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던컨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했으나 필립은 머뭇거리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페르난데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필립은 제가 할 말을 생각하느라 황제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이냐.”

“그…… 약속하셨던 일은 언제쯤 지켜주실는지요?”

“약속이라니?”

페르난데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필립은 순간 당황했으나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최근 대공에게 안토니의 일로 연락했을 때도 황제에게 말을 해놓겠다는 답신을 받지 않았던가. 승인이 떨어지는 대로 성대한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제 아들 녀석의 후작위 승계 말입니다. 곧 폐하께서 윤허해 주신다고 들어 기다리고 있사온데…….”

“아, 그거.”

페르난데가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필립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제가 웃자 따라 웃었다.

그러다 돌연, 페르난데가 웃음을 멈추었다. 일순 싸한 적막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필립은 왠지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가가 목 뒤에 칼을 겨눈 것처럼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가서 기다리고 있게나.”

“예, 예에…….”

사실 필립은 오늘이야말로 황제에게 정확한 날짜를 약속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스산하여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각하, 제가 마차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던컨이 문을 열고선 직접 안내까지 하겠다고 나서자 도리가 없었다. 필립은 쫓기듯 나와 샤르투스 가문의 마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홀로 집무실에 남은 페르난데가 앞에 놓인 물건을 눈으로 쓸었다. 모두 아셀라가 샤르투스 저택에서 머물며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낡은 옷에서 멈추었다. 미미하지만 그가 과거에 걸어두었던 주술의 흔적이 배어 나왔다. 페르난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쓸 만하군.”

페르난데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수백 개에 다다르는 반투명한 줄이 뻗어 나갔다. 줄 하나마다 그의 흑마술에 당한 사람이 속박되어 있었다.

찬찬히 줄을 들여보던 페르난데가 혀를 차며 손을 펼쳤다.

“또 귀찮게 하는구나.”

손바닥 위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줄 사이를 속속들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을.”

숨었다 한들 어차피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가 특별히 힘을 거두는 경우가 아니면 주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죽음 이외에는.

“그래, 어디 잘 숨어 보아라.”

페르난데가 즐겁게 흥얼거리며 서 있던 자리 그대로 몸을 느릿하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러나 줄을 훑는 눈만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어디선가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에 황제가 눈매를 접어 내렸다.

“벌써 숨바꼭질이 끝났구나.”

다른 줄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줄이었다. 깜박거리며 투명해졌다가 다시 보이길 반복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파르르 떨리던 줄은, 페르난데가 죽 잡아당기자 힘없이 끌려 나왔다.

“벌써 이렇게 너덜거려서야.”

오랫동안 쓰지 않다 최근 몇 번 악몽을 심어 넣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줄의 상태가 나빠져 버렸다.

“고쳐주마.”

페르난데의 몸에서 뿜어진 검은 기류가 필립이 가져온 매개물을 순식간에 감쌌다. 검은 불꽃 속에서 옷가지며 물건들이 잿더미로 변해갔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쥐고 있던 줄은 점점 뚜렷하게 형태를 갖추며 두꺼워졌다.

“충분하군.”

페르난데가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웃었다.

어미를 잃어 충격받은 계집애 하나를 망가뜨리는 건 갓 움튼 꽃잎을 짜부라뜨리기보다 쉬웠다. 필립에게 학대를 종용해 사정없이 짓밟아버렸다.

‘나중엔 필립 스스로가 괴롭힘을 즐기게 된 것 같지만 말이야.’

확실하게 이능을 못 쓰게 된 걸 확인한 이후로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굳이 주술을 쓸 가치도 없어 내버려 두었다. 그가 내내 상황을 주시하며 신경 썼던 건 망가진 첫째가 아니라 둘째였다.

‘폐하, 아셀라가 곧 성년이 되는데 혼사를 추진해도 될는지요?’

‘마음대로 해.’

하필이면 상대가 칼릭스 베네비토라는 게 거슬리기는 했으나 크게 상관하진 않았다. 어차피 쓸모없는 여자였다.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기도 했고.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나쁘진 않아.”

아델이 그전에 덮어씌웠던 백주술 탓에 방해받고는 있으나 칠 년 전에 걸었던 암시가 아직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샤르투스에 심어놓았던 첩자들의 말도 암시가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했다.

‘결혼을 거부해 필립이 매질을 한 탓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대공과의 결혼만 피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들었습니다.’

‘결혼식 때 대공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폐하.’

“정말 운이 없는 아이로구나.”

페르난데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퉁기자 줄이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이 자극적이었다. 누군가의 생을 농락하는 기분은 늘 그에게 미칠 듯한 희열을 제공했다.

이 줄이 존재하는 한, 아델의 첫째 딸은 그의 흑주술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었다. 환각에 사로잡힌 채 망상에 시달리며 꼭두각시처럼 끌려다닐 미래만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를 원망하려거든 네 아비를 탓하거라.”

차라리 평범한 사내와 결혼하는 편이 그녀에겐 나았을 것이다.

“어쩌겠느냐. 이게 네 운명인 것을.”

칼릭스 베네비토가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는 줄을 손대게 했다. 그에게서 받은 분노를 되돌려줄 수가 없으니, 페르난데는 이런 식으로라도 대신 화풀이를 하며 재미를 볼 생각이었다. 덤으로 대공을 성가시게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자, 더 두려워하거라. 압도적인 공포에 절망하거라.”

페르난데의 손에서 다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언제 죽게 될지 불안해하며 의심하고 또 의심하려무나.”

악의가 가득한 새카만 연기가 줄로 스며들었다. 줄이 잠깐 검게 변했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암시의 강화였다.

주술 앞에 희생자가 원래 갖고 있던 성품이나 능력은 거의 무용해졌다. 현명한 이도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게 했고, 정신력이 강한 자도 나약하게 만들었다.

이는 그의 흑주술이 희생자의 마음 가장 약한 곳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안을 먹이 삼아 공포를 주입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버렸다.

그렇게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버리고 나면, 인간 대부분은 버티지 못했다.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마음이 부서져 망가진 인형이 되어버렸다.

‘아주 볼만하겠어.’

어떤 식으로 가지고 놀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페르난데의 전신에 쾌감이 일었다.

“아이를 갖기 전에 망가뜨려 버리는 편이 좋겠지.”

칼릭스를 제외하면 현재 베네비토의 혈족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황제로서는 퍽 기꺼운 일이었다. 현 대공만 제거해 버리면 눈엣가시던 베네비토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 오만한 남자가 쉬이 아내를 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미리 경계하여 나쁠 건 없었다.

“이제 베네비토의 혈족도 끝을 볼 때가 되었지. 그렇지 않으냐?”

페르난데의 손이 줄을 사정없이 꾹꾹 눌렀다. 마치 저항하지 못하는 먹잇감을 죽기 전까지 가지고 노는 듯한 잔혹함이었다. 가느다란 줄이 파르르 경련하며 쉴새 없이 깜박였다.

“네 발버둥이 기대되는구나.”

황제의 입가에 잔악한 미소가 내걸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59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 아셀라가 서재에 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곧 시녀에게서 뜻밖의 상황을 전해 듣게 되었다.

“오늘부터 서재 공사가 시작되어 당분간은 이용하실 수 없대요.”

“공사라니?”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전하께서 지시하셨다고 해요.”

소식을 전해준 시녀가 안주인의 실망을 의식한 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들었어요. 게다가 공사가 끝나면 훨씬 아늑해질 테니 이용하시기에도 편해지실 거고요.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셔요.”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아셀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갑자기 서재 공사를…… 혹시 그 사람이 무언가 알아채 버린 거라면…….’

어제 서재에서 대공과 마주쳤던 일을 떠올리자, 어찌하지 못할 불안감이 아셀라를 엄습했다. 그녀는 긴장한 낯빛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던 거지?”

“네, 아! 그리고 비전하의 서재도 공사하라 명하셨대요.”

“서재가 또 있었어?”

금시초문이었다. 아셀라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자, 곁에 있던 다른 시녀들이 황급히 답했다.

“죄송해요! 저희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어요.”

“원래 성엔 서재가 두 곳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쓰시는 북쪽 서재와 비전하께서 쓰시는 남쪽 서재요. 그런데 남쪽 서재는 쓰지 않은 지 오래되다 보니 썩 상태가 좋진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나 봐요.”

변명 같은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시녀 하나가 무언가를 생각해 내곤 얼굴이 밝아지며 손뼉을 딱 쳤다.

“사실 그 일 때문에 성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요.”

“무슨 소문?”

의아해진 아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시녀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아셀라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께서 비전하를 무척 아끼신다는 소문이요!”

“……뭐?”

당황한 아셀라가 그만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던 탓이다.

“원래 전하의 서재엔 아무나 못 들어가거든요. 비전하라고 하셔도요.”

“왜 두 분 서재가 따로 있겠어요? 역대 많은 대공비가 계셨지만, 그분 중 누구도…….”

시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티아라 ‘여신의 영광’도 약혼 선물로 주셨잖아요!”

“메리엘 아가씨도 여기 데려올 수 있게 해주셨고요.”

“이건 비밀인데, 제가 살짝 들은 바로는 비전하께 배정될 내탕금이 어마어마하다고…….”

시녀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동시에 아셀라에게로 향했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아셀라가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들갑스럽게 발을 동동 굴러댔다. 나중에는 저들끼리 흥이 나서 온갖 말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비전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전부 들어주실지도 몰라요.”

“전하께 말씀만 하시면요!”

말없이 듣고 있던 아셀라는 이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칼릭스 베네비토가 자신을 아끼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시녀들에게 대놓고 아니라 말할 순 없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어 대던 시녀들이 돌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

시녀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간 아셀라가 마고를 발견했다.

“부인, 잘 다녀왔나요?”

“예, 비전하.”

잠시 대공에게 불려갔던 마고가 돌아온 거였다. 그녀는 문가에서 대기하던 하녀에게 담요를 건네받아 아셀라의 어깨에 둘러 단단히 여며주며 말했다.

“아침 공기가 아직 쌀쌀합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몸을 일으킨 마고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시녀들을 훑고는 딱 한마디, 조용히 말했다.

“비전하 앞에서 감히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잘재잘 잘만 입을 놀리던 시녀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지켜보던 아셀라가 마고를 말렸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부인. 내가 서재에 가지 못해 상심하니, 저 아이들이 기분을 풀어주려다 실수를 한 것뿐이에요.”

마고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고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분위기가 풀어진다 싶더라니. 이참에 기강을 제대로 잡아야겠어.’

이번에는 안주인이 문제 삼지 않았기에 넘어가겠지만 항상 운이 좋을 순 없었다. 대공 성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입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실수가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 대공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하께서 아신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터.’

모시는 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건 주인을 기만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

마고는 혹여라도 대공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이들에게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지리라 확신했다. 본보기를 위해 가문까지 화를 입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결코 관대한 주인이 아니었다.

‘비전하와 관련된 일이니 더욱 용서치 않으실 거야.’

라이젠이 마고에게 따로 일러주었던 대로, 대공은 아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이 호감이나 염려 또는 호기심이나 흥미든 간에,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전하의 침실을 자주 찾고 계시고.’

대공은 한밤중 찾아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떠나곤 했다. 그러나 특별히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침구는 항상 정갈했고, 대공비의 몸 어디에도 정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주인은 그녀의 남편이 침실을 찾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부인.”

들려온 청초한 목소리에 마고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서둘러 답했다.

“예, 비전하.”

“혹시 어젯밤에 누가 찾아왔었나요?”

마고가 멈칫했다. 안주인의 시선을 따라가니 침대맡에 놓인 의자 하나가 보였다. 간밤에 누가 그 의자에 앉았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함구하라.’

대공의 명을 떠올린 마고가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곤 재빨리 부인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그래요?”

“제가 어제 비전하를 살피다 의자를 제자리에 놓는 걸 깜박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녜요. 내가 조금 예민하게 굴었네요.”

사소한 일로 사람을 추궁했다는 생각에 아셀라가 미안해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틈을 타 마고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리고 메리엘 아가씨가 곧 여기로 올 예정입니다.”

때마침 문밖에서 메리엘이 왔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아셀라는 반갑게 동생을 맞이했다.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은 몰랐는걸.”

“아냐! 나 이제 늦잠 안 자!”

메리엘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과거의 행적을 부인했다. 그러나 아셀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내 진실을 시인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오늘은 엄청 특별한 날이거든!”

“특별한 날?”

“응!”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메리엘이 힘차게 외쳤다.

“언니랑 같이 밖에 놀러 나갈 거야!”

아셀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밀려드는 당혹감에 그녀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랑 데이트!”

메리엘이 아셀라의 두 손을 덥석 붙잡고는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 * *

그리하여 잠시 뒤, 베네비토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크고 화려한 마차에 똑 닮은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메리엘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셀라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겠지만, 메리엘은 아셀라가 들떠있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언니…….’

오늘의 외출은 메리엘의 작품이었다. 아셀라가 낙마 사고 이후 방에서 거의 꼼짝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직접 대공을 찾아갔다.

어린아이의 행동치고는 발칙할 정도로 대범한 일이었다.

‘외출을 허락해 달라?’

‘네. 따뜻한 봄이잖아요.’

‘굳이 내 허락이 필요한가?’

‘언니랑 둘이서만 나가고 싶어서요. 아, 마부는 필요하겠지만요.’

그 말에 칼릭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둘이서만 외출하고 싶다는 말은, 다시 말해 수행원 하나 없이 밖에 나가겠다는 의미였다.

‘마고도, 호위 기사도 제외하고 말인가?’

‘네.’

‘재미있는 소리군.’

의도를 가늠하는 대공의 눈이 매서워졌다.

메리엘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하게 굴었다. 여기서 주눅 들어버리면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아버지 때문에 언니랑 같이 밖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대공의 길쭉한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걸 바라보며, 메리엘이 말을 이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언니가 무척 기뻐할 거예요.’

툭, 툭, 일정한 박자로 내리꽂히던 손가락이 돌연 멈추었다.

허락을 의미하는 간결한 대답이 떨어진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모두 메리엘이 계획했던 대로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식을 들은 아셀라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며 기뻐했다. 꾸며진 기색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지금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예쁜 파란색 눈망울이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언니.’

그런 아셀라의 모습에 메리엘이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늘 마음 한쪽 구석에 품고 있던 죄책감이 재차 고개를 든 탓이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아셀라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샤르투스 저택에 도착했던 날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언니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메리엘은 필립의 명령에 강제로 아셀라와 떨어져 방에 갇혔다.

그러곤 몇 시간 뒤, 무얼 했는지 땀에 절어 찾아온 필립에게 협박 섞인 훈계를 들었다.

‘메리엘. 네 잘못과 실수는 아셀라가 책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또다시 어리석은 짓을 했다간 아셀라가 아주 곤란해지게 될 거다.’

메리엘은 본능적으로 아셀라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직도 숨을 몰아쉬는 필립에게서 묘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어, 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잔말 말고 있다가 결혼식이나 보고 떠나!’

돌아온 건 필립의 고함과 협박뿐이었다. 메리엘은 자신 때문에 또 아셀라가 다치게 될까 봐 더는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켜야 했다.

‘헤르니야 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국의 수호신이자 샤르투스 가문에 축복을 내렸다는 여신 헤르니야. 메리엘은 아셀라를 걱정하며 기도하다 문득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깬 건 어디선가 들려온 소음 때문이었다.

문밖 복도에서 사람들이 우글우글 걸어오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귀족 영애가 잠들어 있는 방 근처임에도 그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메리엘이 시트를 턱밑까지 당겨 눈을 감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60화

사용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메리엘의 방에 들어왔다. 그들은 잠든 아이를 확인하고는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거봐. 아니라고 했잖아?’

‘미안. 아까 언니한테 보내 달라고 어찌나 징징대던지. 혹시나 했지 뭐야?’

‘다행이지 뭐. 또 걔한테 가기라도 했어 봐. 각하께서 가만 계시겠어?’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떻게 됐대?’

‘각하께서 교육을 제대로 하신 모양이던데.’

움찔. 메리엘이 이불 속에서 작게 몸을 꿈틀거렸다. 사용인들이 아셀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채찍을 중간에 갈아 치웠대. 피에 절어 제대로 매질이 안 돼서.’

‘방 정리하던 하녀가 핏자국 지우느라 힘들었다고 툴툴대더라.’

아연함에 메리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필립이 언니한테 하는 짓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도 사용인들의 말소리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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