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71)
  • 도주하는 대공비 56화

    14. 진실과 거짓의 경계

    낙마 사고 이후, 대공성에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아셀라는 한동안 방에만 머물렀다. 그녀를 진찰한 주치의는 몸에 별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키면서도 절대안정을 권했다.

    ‘당분간 푹 쉬며 몸을 보하셔야 합니다. 몸에 무리가 될 만한 일은 하셔선 안 됩니다.’

    마고와 메리엘의 수업 시간이 늘어나면서 동생의 얼굴도 보기 힘들어졌다. 때문에 아셀라는 하루 대부분을 혼자 보냈다.

    어떤 의미에서, 그건 아셀라를 향한 감시가 덜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녀들과 호위기사들은 대공성의 안주인을 달가워했다. 일견 예민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과는 달리 그녀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고, 행동반경도 좁아 특별히 신경 쓸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모시기 쉬운 상전이었다.

    어쨌든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조금씩 마음을 놓기 시작했고, 아셀라에게 호의를 갖게 된 이도 생겨났다.

    “비전하, 오늘도 서재로 가시겠습니까?”

    “응. 어제 덜 읽은 책이 있어서.”

    “준비해 두라 이르겠습니다.”

    바쁜 마고를 대신해 아셀라 또래의 앳된 시녀가 배정되었다. 아직 어려 사람을 쉽게 믿고 정이 많은 아이라 아셀라가 직접 곁에 두길 택했다. 예상대로 성품이 모난 데 없고 손끝도 여물어 여러모로 좋은 시녀가 되어주고 있었다.

    서재 앞에 다다른 아셀라가 몸을 돌려 뒤따라온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저녁 식사 전까지 있을까 해. 힘들면 쉬었다가 시간 맞춰 와도 좋아.”

    “하지만…….”

    “괜찮아.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

    아셀라가 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대공비의 신임 어린 말에, 그들이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 숙였다.

    “대신 저희가 필요하시면 꼭 불러주셔야 해요!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럴게.”

    자유 시간을 갖게 된 시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답은 저렇게 해도, 막상 그녀가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그들을 찾는 경우는 여간해선 없었다.

    “비전하, 드시지요.”

    육중한 문이 기사의 손에 가볍게 밀려 들어갔다. 이윽고 넓은 서재에 아셀라가 들어섰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책장이 벽면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낮은 책장이 놓였다.

    문으로부터 쭉 뻗은 통로는 바깥의 복도와 마찬가지로 융단이 깔려 밟으면 폭신한 느낌을 주었다.

    아셀라가 익숙하게 통로를 가로질렀다. 양옆의 책장들을 한참 지나치고 나자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재에서도 가장 빛이 잘 드는 곳에 꾸며진 그녀의 독서 장소였다.

    어느새 친숙해진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그녀가 테이블 위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꽃향기가 싱그러웠다.

    “따뜻하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따뜻한 차가 긴장된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려 주는 것 같았다. 나긋하게 풀린 그녀의 눈매가 아늑한 주변을 훑었다.

    처음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전부였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셀라가 몇 번 이곳을 찾고 난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급스러운 응접실처럼 탈바꿈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를 묻는 그녀에게 시녀들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전하께서 비전하가 편히 독서 하실 수 있게 꾸미라 하셨대요.’

    ‘내가 이곳에 오는 걸 어떻게 아시고?’

    그러나 그 물음에는 시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대공에게 고했노라 답한 사람이 없었다.

    ‘저희는 아닌데…… 누군가가 전하지 않았을까요?’

    ‘기사님들인가?’

    불필요한 말은 일절 않는 마고와는 달리, 어린 시녀들이라서인지 묻지 않은 말도 곧잘 이야기하곤 했다.

    덕분에 아셀라는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대공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으며, 평소와 다른 모습이 관찰될 경우 곧바로 보고된다는 사실을.

    그러니 이 서재 안이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그녀가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차를 채 반도 마시기 전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외울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녀가 서재 가장 안쪽의, 조금은 으슥하기까지 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왼쪽에서 세 번째 칸, 위에서 네 번째…… 찾았어!’

    아셀라가 상체를 거의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두꺼운 책을 꺼냈다.

    ‘이제 여기에 손수건을 두면 돼.’

    아셀라가 책이 있던 자리에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끼워두고 돌아섰다. 다 읽고 난 뒤 원래 자리를 찾아 꽂아두기 위한 표식이었다. 그냥 두어도 사용인들이 치우겠지만 자신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대공에게 보고될 위험이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한 그녀 나름의 방책이었다.

    책 무게가 상당했던 탓에 아셀라가 널따란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마저 맺혀 있었다.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아셀라가 책을 펼쳤다. 마치 상자 뚜껑이 열리듯 책표지가 열리며 안의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성의 지도였다.

    “서재가 여기니까…….”

    아셀라는 지난 며칠간 성내의 지리를 외우고 있었다. 도주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장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 미리 준비는 해두어야 해.’

    그녀는 메리엘이 각성을 마치는 대로 이곳을 떠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의 지리를 외우고 쓸 만한 보석 장신구는 따로 빼두었다. 시녀와 기사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놓도록 행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기회는 한 번뿐일 것이다. 실패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신중하게 기회를 가늠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행에 옮겨야 했다.

    ‘여긴 사용인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라 눈에 띌 거야.’

    ‘이 길은 문이 너무 많아. 병사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커.’

    고민하기를 한참, 문득 길어진 그림자를 확인한 아셀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지도를 반듯하게 접어 넣고는 아까의 책장을 찾았다. 손수건으로 표시해 두었던 자리에 도로 꽂으니 감쪽같았다.

    ‘오늘은 이 책이 좋겠어.’

    아셀라가 근처의 책장에서 지도와 전혀 관련 없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국 남부의 신비한 꽃들>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에 화려하게 채색된 꽃 그림이 있었다.

    이 책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적당히 펴 놓으면 이제 할 일은 끝나는 셈이었다.

    “휴…….”

    오늘도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에 아셀라가 안심하며 몸을 돌리던 순간.

    “……!”

    앞을 가로막은 검은 그림자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칠 것 같은 긴장에 심장이 쿵쿵 요란한 소리를 때며 펄떡였다.

    들고 있던 책은 이미 손에서 놓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책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음은 들리질 않았다.

    “아셀라.”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셀라가 자꾸만 빨라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누군가의 손에 안전하게 착지한 책이 보였다. 책 모서리를 쥔 길쭉한 손가락, 붉은 커프스단추로 장식된 소매, 주름 하나 없는 흰 셔츠를 따라 천천히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전하.”

    아셀라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마주한 이를 불렀다.

    ‘언제 온 걸까? 만약 봤으면 어쩌지?’

    긴장으로 몸이 떨렸다. 맞잡은 손바닥 안쪽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녀는 지도를 꽂아 둔 책장 칸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칼릭스가 말없이 책을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책을 받아 든 아셀라가 품에 파묻듯 책을 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다시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서재엔 어쩐 일로…….”

    “찾을 책이 있어서.”

    담백한 대답이었다. 아셀라는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성의 주인이었다. 서재가 아니라 어디에 있건 그녀가 무어라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아셀라가 책을 쥔 손에 꽉 힘을 주며 더듬더듬 입을 뗐다.

    “저, 저는 막 나가려던 참이에요.”

    그러고는 인사를 빙자해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 책, 조금 전에 꺼낸 것 아니었나?”

    멈칫.

    아셀라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사내의 핏빛 눈과 마주쳤다.

    번뜩이는 예기를 담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네. 시간이 늦어 가져가려던 참이었어요. 방에서 읽을까 하고요.”

    “…….”

    “그러니까,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자꾸만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힘을 주며 아셀라가 기도했다. 부디 넘어갈 수 있기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를.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사내의 붉고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셀라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 *

    아셀라가 황급히 떠난 자리를 잠시간 지켜보던 칼릭스가 천천히 움직였다. 책장 사이를 느릿하게 지나가며 책을 훑는 그의 동작이 궁지에 몰린 사냥감에 다가가듯 여유로웠다.

    문득 칼릭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정확히 아까 아셀라가 손수건을 끼워두었던 그 자리였다. 그녀가 무게 때문에 힘겹게 꺼내야만 했던 책을, 그는 검지를 까닥이는 것만으로 손쉽게 끄집어내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적막한 서재에 흘렀다.

    “……지도라.”

    그것도 베네비토 대공성의 내부가 속속들이 담긴 지도였다.

    “사람들을 죄다 물려놓고 무얼 하나 했더니.”

    지도는 고급 정보였고, 어떤 가문에서건 특별하게 관리되었다. 적에게 노출된다면 약점이 될 수 있는 정보였기에 접근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깜찍한 짓을.”

    칼릭스는 저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애써 태연한 척 숨기려 했던 모양이나, 제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안쪽 깊숙한 공간에서 아내의 기척을 잡아낼 정도로 예리했다.

    “그런 눈을 하고서 누굴 속이겠다고.”

    푸른 눈망울은 솔직하기만 했다. 말간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차게 흔들렸었다.

    ‘비전하께서 책을 찾으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공비의 서재를 열까요.’

    ‘아니. 내 서재를 쓰게 해.’

    ‘예?’

    대공의 서재는 칼릭스 외엔 철저히 출입이 제한된 공간이었다. 라이젠조차 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랬기에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그의 서재를 이용케 한 이야기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대공비의 서재는 이십 년 가까이 닫혀 있었으니 쓸 만하게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터.’

    대공의 말은 일견 타당했으나, 그렇다고 그 충격적인 호의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했다.

    “거짓말엔 영 소질이 없어.”

    칼릭스가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셀라가 떨어뜨리고 간 손수건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제게 들켰을까 봐 새파랗게 질려서는 안절부절못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건네준 책을 쥐는 손가락 마디가 죄다 희게 불거졌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몇 가지 가능성만을 추측해 볼 뿐.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엿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릭스가 목을 낮게 울리며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대공비의 서재가 준비되지 않아서, 혹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적당한 변명은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으나, 사실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제 서재를 내어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로 인해 다쳤던 아내를 볼 때마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던 죄책감.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약간의 들뜸.

    ‘무슨 생각인가.’

    칼릭스가 서재를 빠져나오자, 문밖에서 기다리던 라이젠이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왔다.

    “사람을 붙여.”

    그가 제 보좌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짤막이 명했다. 서늘한 음성에 묘한 집착이 묻어났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는지 빠짐없이 보고해.”

    “예, 전하.”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는 미묘한 불쾌함에 칼릭스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너무도 희미하여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그 감정은 분명, 배신감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57화

    아셀라는 꿈속이었다.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바닥에 폭신하게 깔린 융단이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한껏 죽여주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지금 자신이 누구를 따라가는지, 왜 따라가는지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그녀를 이끌었다. 무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실루엣이 큰 걸 보아 사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묘하게 익숙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아셀라가 멈칫했을 때, 남자가 코너를 돌며 옆모습이 드러났다.

    ‘칼릭스 베네비토?’

    자신이 왜 그를 따라가는 건지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그 와중에도 발이 멋대로 움직이며 계속 그녀를 이끌었다. 이미 몸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며칠 새 매일같이 보아왔던 탓에 내부가 익숙했다. 칼릭스가 거침없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재 가장 안쪽,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 들어찬 책장 앞에 선 그가 차례로 몇 개의 책을 뒤로 밀었다.

    잠시 뒤 아셀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달칵, 드르륵.

    기계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벽 일부가 앞쪽으로 툭 튀어나왔다. 이윽고 튀어나온 벽이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밀리면서, 커다란 비밀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릭스가 통로로 들어가자마자 아셀라도 냉큼 따라붙었다. 다행히 문이 닫히기 전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재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 줄은…….’

    나선형의 계단이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인 듯했다. 빛이라곤 벽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등불이 전부라 통로가 꽤 어두웠다.

    깔린 것이 없는 돌바닥인 탓에 아셀라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소리가 나선 안 됐다.

    계단이 나선형이라 대공이 설사 뒤를 돌아보더라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당히 긴 계단이었다. 처음에는 폭이 좁았던 길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아셀라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음을 짐작했다.

    앞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던 발소리가 멎었을 때, 아셀라도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통로 안쪽 벽에 손을 짚고 조심스레 고개만 빼 앞의 동태를 살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원형의 공간은 무척 넓었다. 지하인데도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밝아 내부가 환했다. 천장이 높아 마치 커다란 홀을 연상시켰다.

    그녀가 선 곳과 정확히 반대쪽, 홀의 가장 안쪽에 칼릭스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건가 봐.’

    그러나 어째서인지 남자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충분히 그의 시선을 피해 벽 뒤로 숨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아셀라는 그러지 못했다. 몸이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윽!”

    오히려 떠밀린 것처럼 홀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차갑고 단단한 돌바닥에 몸이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전신에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참기 힘든 아픔에 아셀라가 미약한 신음성을 내고야 말았다.

    “이런.”

    그러나 대공은 그녀를 발견하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조심해야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남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염려나 걱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흥미가 짙게 밴 핏빛 눈으로 아셀라의 꼴을 재미있다는 듯 감상했을 뿐이었다.

    비밀을 들킨 사람 같지 않은 여유로움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아주 느릿한 발걸음으로, 칼릭스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셀라는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도망은커녕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울 수조차 없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채, 그저 떨리는 시선으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땅바닥을 짚어 겨우 상체만 세운 그녀의 손 바로 앞에, 칼릭스가 멈춰 섰다.

    “원하던 건 알아냈나?”

    아셀라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사라지자 남자의 얼굴에 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평소에도 진득한 핏물을 흠뻑 적신 듯했던 눈이 유독 더 붉어 보였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나.”

    칼릭스가 자세를 낮추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눈을 한껏 휘어 웃었다. 늘 무섭게 느껴지던 붉은 동공이 눈꺼풀에 가려 사라졌는데도, 정작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되레 날것의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아셀라.”

    뺨에 닿는 사내의 손에서 느껴지는 열감에 아셀라가 흠칫거렸다. 다정하게 귓가에 박히는 음성이 섬뜩할 정도로 소름 끼쳤다.

    “그대가 찾는 거, 뭔지 알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의미심장한 말이 떨어졌다.

    아셀라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보아선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도리질이 필사적이었다. 무어라 변명하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으나, 잔뜩 뭉그러져 의미를 알아듣기 힘든 말만이 간신히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아, 아니…… 아니에…….”

    “아니긴.”

    그녀의 앞을 가리고 있던 칼릭스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목소리가 아셀라의 귀에 뱀의 혀처럼 감겨들었다.

    “저길 봐.”

    뻥 뚫린 시야에 조금 전까지 남자가 서 있던 문이 보였다.

    문 한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아셀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말이 되지 못하는 불분명한 신음이 그녀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겨우 새어 나왔다.

    “기뻐해야지, 아셀라. 그대의 수고를 내가 덜어주지 않았나.”

    아셀라의 시야가 흐릿하게 미어졌다. 몸이 격렬하게 진동했고 미친듯한 속도로 박동하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문에 새겨진 그림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본 이후로 각인된 것처럼 기억되었고, 아마도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문양이었다.

    죽어가던 어머니가 자객에게서 뜯어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단추, 그 단추에 새겨져 있던 문양과 꼭 같은 것이었다.

    “그대도 본 적이 있겠지.”

    생리적인 공포감에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아셀라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하자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럼 저 문양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나?”

    아셀라의 고개가 금방이라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처럼 뻣뻣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아니라고,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 했으나 솜으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카르마.”

    아셀라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몸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떨리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사내의 입술이 그녀를 조롱하듯 한껏 비틀렸다.

    “벌써 이렇게 떨면 어떻게 하나.”

    칼릭스가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눈물로 잔뜩 젖은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자못 다정했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문양을 보여주느라 조금 떨어졌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에게 다가와 붙었다.

    순식간에 몸이 일으켜진 아셀라가 거의 파묻히다시피 칼릭스의 품에 안겼다. 허리와 등을 뒤덮듯 감싸는 남자의 두 팔이 전하는 감각이 생생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그에게 갇힌 모양새가 된 아셀라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셀라 베네비토.”

    그의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지하실의 한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열감이 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살고 싶나?”

    아셀라의 말문이 막혔다.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 살벌한 기운을 뿜으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른 의미로 묘하게 위험하게 느껴졌다.

    “대답해야지.”

    “흐윽…….”

    무어라 표현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울음이 터졌다. 아셀라가 흐느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그녀의 애처로운 애원에도 무서울 정도로 침묵하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화근이 될 만한 건 살려두지 않아.”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사형선고였다. 지독히 무표정한 얼굴에서 붉은 눈만이 섬뜩하게 빛났다. 아셀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겨우 한 마디를 밖으로 토해냈다.

    “제발…….”

    남자가 목을 낮게 울리며 웃었다.

    “정 그렇다면.”

    일순, 그의 웃음이 멈추었다. 사내가 그녀를 제 쪽으로 바투 끌어당기고는 한껏 고개를 기울여 여린 목덜미에 금방이라도 입술을 댈 듯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아셀라가 흠칫거렸다.

    “지금부터 잘 생각해 봐. 네가 뭘 해야 할지.”

    칼릭스가 허리를 짚던 손가락을 아주 느릿하게 위로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아셀라의 등줄기를 타고 묘한 감각이 올라왔다. 정수리가 쭈뼛거리고 그의 손길이 닿는 몸의 부분 부분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너무도 이상한 느낌에 아셀라가 몸을 작게 움찔거리자, 그가 다시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더 행동을 반복한 사내의 손이 아셀라의 허리로 향했다. 그러곤 그녀의 몸을 아주 가볍게 반대쪽으로 돌려세웠다. 아셀라의 등 뒤로, 칼릭스의 몸이 다시 맞붙었다.

    “모르겠어?”

    커다란 손이 아셀라의 뺨을 감싸듯 쥐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게 했다. 비스듬하게 들려진 시선의 끝에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남자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아셀라는 그의 시선에 붙들린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어졌다. 아마도 평생, 눈 감을 날까지 영영 잊지 못할 강렬한 눈빛이었다.

    “모르겠다면.”

    완벽한 외양의 사내에게서는 일견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마신이 현신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리라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가르쳐 주지.”

    붉은 눈동자에 감추지 못한, 그리고 감출 필요가 없는 욕망이 넘실거렸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강렬한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집요하게 번득였다.

    아셀라는 그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밝은 달빛이 방 안까지 비쳐들던 그 날 밤.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주겠다고.’

    아셀라는 칼릭스가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할지 알아채고야 말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그걸 눈치챈 남자가 그녀의 깍지낀 손을 뒤덮듯 감싸더니 맞닿아 있던 두 손목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

    그러나 아픔은 없었다.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그럼에도 감히 잡힌 손목을 빼낼 시도는 하지 못했다.

    “아셀라.”

    뺨에 닿은 사내의 손이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홍염처럼 타오르는 붉은 시선에 몸이 칭칭 옭아매지는 듯했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에, 아셀라가 눈을 감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58화

    막 꿈에서 깨어난 아셀라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침구가 덮인 가슴께가 숨 가쁘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왜 이런 꿈을…….’

    아셀라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주위로 깔린 러그에 발이 닿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대 앞까지 간 그녀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봉해진 부분을 검지로 꾹 누르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처럼 덮개가 비틀려 열렸다. 안에서 작은 단추 하나가 그녀의 희게 질린 손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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