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71)

“빌어먹을, 고삐를 잡아!”

아셀라의 귓가로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애써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으나 자꾸만 미끄러졌다. 금방이라도 줄을 놓칠 것만 같았다. 앞뒤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그 순간,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몸을 튕기듯 뛰어올랐다.

“아셀라!”

말고삐를 놓친 아셀라의 상체가 뒤로 훅 꺾이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주하는 대공비 54화

아셀라의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리저리 뒤섞여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자고 싶어…….’

정신이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자꾸만 그녀를 깊은 곳으로 잡아끌었다. 아래로, 또 아래로…….

귓가를 어지럽히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옅어졌다. 몸을 감싸는 온기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눈을 감아버린다면…….

“아셀라!”

순간, 절박한 음성이 뇌리에 꽂혀 들었다.

“정신 차려! 아셀라, 숨을 쉬어!”

아래로 침잠하던 정신이 누군가 잡아채는 것처럼 휙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물속을 평화로이 유영하다 뭍으로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아셀라가 몸을 비틀며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충격으로 잠시간 멎었던 호흡이 다시 시작됐다.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고 흐릿하던 시야가 차츰 맑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아셀라의 눈동자에 누군가의 상이 맺혔다.

“전하…….”

“정신이 드나.”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셀라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말에서 떨어졌었어.”

그제야 머릿속에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머릿속을 잠식하던 안토니의 목소리, 저도 모르게 말허리를 걷어차고 말았던 것, 전력 질주하던 말 위에서의 공포…….

고삐를 놓치고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는 모든 게 끝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셀라의 눈이 천천히 제 몸을 훑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피에 젖은 곳도,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었다.

굳이 아까와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

누군가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몸이 기대여 있었다.

깜짝 놀란 아셀라가 반사적으로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자 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휘청였다.

“가만히 있어.”

칼릭스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의 움직임을 막았다. 동시에 아셀라의 상체를 감고 있던 반대쪽 팔에 단단히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다 또 떨어지면 어쩌려고.”

사내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아셀라가 칼릭스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그나마 약간의 여유라도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밀착되다시피 몸이 달라붙었다.

등허리부터 어깨까지 빈틈없이 느껴지는 생경한 감각에, 아셀라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작거렸다.

‘그 향기가…….’

진득하고도 묵직한 그의 향이 폐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콧속 깊이 스며드는 강렬한 향에 아셀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었다. 겨우 입술을 떼어 더듬더듬 제 의사를 전했다.

“이, 이제 괜찮아요.”

“그대는 생각이 있는 건가?”

그러나 되돌아온 건 조금 성이 난 듯한 칼릭스의 목소리였다.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감당도 못 할 속도로 말을 몰면 어떡하나. 고삐를 놓는 건 자살행위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정말 이상하게도, 나무라는 말에서 어쩐지 걱정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가슴 한쪽 구석에서 낯선 울렁거림이 일었다. 익숙지 않은 묘한 기분에 아셀라가 눈을 끔벅거리다 이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면 분명 비웃었을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초심자나 다름없으면서 그렇게나 위험한 짓을 하다니.”

“죄송해요.”

아셀라가 수없이 내뱉어 길이 들어버린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말을 마친 뒤에는 고개를 떨구곤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자신을 걱정한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가당키나 한 상상이던가. 사탕 몇 개를 쥐여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순진한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어 꾹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도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이어진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목이 부러졌을 거야.”

새삼스럽게도, 아셀라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칼릭스가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깨달았다.

주위엔 어느새 그들 둘뿐이었고, 그녀가 탔던 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곤 없었는데도.

아셀라가 주춤대며 몸을 반쯤 돌렸다. 목숨을 구해준 데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눈을 마주치는 건 어쩐지 겁이 나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간신히 입만 열었다.

“구해주셔서…….”

그러나 힘겹게 말문을 연 것이 무색하게도, 아셀라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전하! 비전하!”

라이젠과 지크가 말을 몰아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 뒤로 흙먼지를 날리며 따라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대공 부부를 발견한 그들이 서서히 말 속도를 줄여 곁에 멈추어 섰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무사하다.”

그제야 라이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가 대기 중입니다.”

칼릭스가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당겨 말 방향을 바꾸고는, 아셀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지. 다쳤을지 모르니 주치의에게 보이도록 해.”

“…….”

그의 말에 아셀라는 어쩐지 실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조금 전 죽을 뻔했으면서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워졌다. 바보 같은 실수를 해 버린 데 후회가 일었다.

“아셀라.”

그러나 차마 조금만 더 타면 안 되느냐는 말을 꺼낼 순 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그녀를 가까스로 받아내 목숨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남자에겐 큰 인내심을 발휘한 일일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저지른 실수가 적지 않았다. 더 타보고 싶다는 한한 소리나 지껄인다면, 그가 마지막 남은 자비심마저 완전히 내버릴지도 몰랐다.

“……네.”

그렇기에 아셀라는 얌전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 지난 수년간 그녀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더없이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 * *

복도에 희끄무레한 빛이 비쳐들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칼릭스가 여느 때처럼 아셀라의 방 문을 열고 나오자, 기사들이 묵례했다.

대공비가 잠든 한밤중마다 찾아오는 주인 탓에, 요즘 아셀라의 호위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대공의 기분이 극히 저조해 보였다. 그가 복도에 나오기가 무섭게 흉흉한 기운이 복도를 휘감았다. 기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낮에 대공비가 말을 타던 도중 사고를 당했다더니, 아무래도 그 탓인듯했다.

“라이젠을 불러.”

“예, 전하.”

무척 이른 시각이었으나, 대공에게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곧바로 누군가가 명을 전하러 움직였다. 칼릭스가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미친 듯이 회오리치던 살기가 멀어지고 나서야 기사들이 저마다 안도 섞인 한숨을 터뜨렸다. 훈련된 정예기사들이었기에 그나마 대공의 기운을 버틴 것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절했을 정도로 거친 힘이었다.

아까 방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낸들 알겠나?’

그러나 아무도 쉬이 입을 열지는 못했다. 주인의 저런 모습은 몇 년 전의 전쟁터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적어도 누군가의 피는 보고야 말겠구나 싶어 그들이 몸을 사리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대공이 저렇게까지 분노한 이유가 분명 대공비와 관련 있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 * *

집무실로 향하는 칼릭스의 발걸음이 사나웠다.

정제되지 않은 기세가 주변 공기를 웅웅 울렸으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잠든 아셀라 곁에서, 혹여나 그녀가 깰까 봐 기운을 갈무리했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순식간에 집무실에 들어선 그의 등 뒤로 문이 거칠게 닫혔다.

‘잘못했어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던 목소리를 떠올린 칼릭스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셀라가 또 악몽을 꾸었다.

이번엔 악몽의 대상이 필립과 안토니 둘 다였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가면서, 그의 아내는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때리지 말아 달라고, 제발 동생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고 애원했다.

저번과는 달리, 아셀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악몽 속에서 고통스러워했다.

조금만 강하게 깨우려 들면 공포로 자지러졌다. 핏기없이 새하얘진 얼굴로 연신 도리질 치며 용서해 달라 빌었다.

결국, 칼릭스가 해줄 수 있었던 거라곤 품에 끌어안고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아셀라가 기진맥진해 잠든 건 거의 새벽 동이 틀 때가 다 되어서였다. 잠든 여자의 지친 얼굴을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들끓는 살의를 느꼈다.

[선대 샤르투스 후작의 사망 이후로, 필립의 지속적인 학대가 있었던 것으로…….]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보고서의 글귀가 낙인처럼 머리에 아로새겨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

아니, 아니었다.

샤르투스에 잠입한 정보원이 보내온 보고에는 아셀라에게 가해진 폭력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체벌의 종류와 빈도, 이후의 상태까지도. 그녀를 향한 후작 가 사용인들의 노골적인 적대감과 무시, 비하적 태도 역시 기술되어 있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활자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별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실이 거슬렸다. 무척이나.

칼릭스가 멍으로 얼룩져 있던 아셀라의 손목을 다시금 떠올렸다.

몸이 성한 곳이 없이 매질을 당했다는 보고서의 내용은 한치의 과장됨 없는 사실이었을 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내버려 진 아내의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꽉 쥔 주먹 위,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것들을 모조리…….’

파드득.

새가 날아드는 소리에 칼릭스의 생각이 끊겼다.

눈앞에서 까만 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그의 앞에 발을 쭉 내밀었다. 마법 전서구가 되돌아온 것이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황금색 실링이 봉투 입구에 번쩍였다.

“쉬어라.”

칼릭스의 명령에 새가 서신을 그의 손바닥 위에 남기곤 연기로 화해 사라져버렸다.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봉인을 열고 내용을 확인한 그가 입매를 비틀며 오싹하게 웃었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받아라.”

때마침 찾아온 라이젠이 칼릭스에게서 황제의 서신을 넘겨받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필립 부자가 명을 재촉하는군.”

칼릭스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가 자꾸만 일을 미루려 들어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마침 그도 아셀라에게 설명할 말을 고르기 위해 고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가 뭐라건 진작 남김없이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하의 집기들을 바꿔. 전부 새것으로.”

라이젠이 훅, 숨을 들이켰다.

대공성에서 사용하는 지하 공간은 감옥뿐이었고, 그곳의 집기라고 해봐야 죄다 고문 기구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인은 집요하기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표정 없이 심문하던 대공을 떠올린 라이젠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완벽하게 정비해.”

“예, 전하."

대리석 신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55화

대공이 눈매까지 휘며 웃자, 라이젠의 등골이 섬뜩해졌다. 날것의 살의가 금방이라도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처럼 살갗을 찔러댔다.

“쉽게 죽여줄 수야 있나.”

정말로, 그의 주인은 지금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그만 죽여달라며 울부짖던 적국 병사들의 몸부림과 비명이, 여기 대공성 지하에서 곧 재현될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입단속 지시해.”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이 붉은 눈을 싸늘하게 빛냈다. 대공비에게 누설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살아남지는 못하리라고, 라이젠은 확신했다. 시신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자비가 될 터.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레베카 로렌스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일단 지켜봐. 페르난데가 당분간 로렌스를 비호할 생각인 것 같으니.”

“정보원으로부터 간밤에 보고가 있었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레베카 로렌스가 한동안 제국을 떠나 있으려는 모양입니다.”

칼릭스가 비소했다.

“덜떨어진 머저리인 줄로만 알았더니.”

“로렌스 자작이 황제에게 시엔의 항로와 무역 독점권까지 가져다 바쳤다 합니다.”

일순 칼릭스의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로렌스 가문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외동딸을 아끼기로 소문난 자작이 아닙니까. 칠 년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는데, 결혼은커녕 처참하게 버려졌으니…….”

“대가는?”

“필립 샤르투스의 목입니다.”

아셀라와 칼릭스의 결혼 이후, 로렌스 가문에서는 필립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이제 곧 안토니도 후작위에 오를 테니 미뤄왔던 레베카와의 결혼을 하루빨리 진행하자는 거였다.

필립은 레베카와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대신 비열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단 혼인서약서에 서명하고 결혼식 날짜를 멀찌감치 잡았다. 레베카는 아쉬워하면서도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필립이 황제에게 결혼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 채였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어떻게든 변명할 여지가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레베카를 제 인생에서 완전히 치워버리고 싶었던 필립이 그만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어리석은 치가 결국 제 무덤을 팠지요.”

자객을 고용해 레베카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만 것이다.

필립은 자객들이 레베카의 호위 기사들에게 당해 모두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한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생포된 자객은 로렌스 자작의 회유에 넘어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

“등에 칼을 꽂혔으니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칠 년의 사랑을 기만당한 레베카는 큰 충격에 빠졌다. 로렌스 자작의 분노는 말도 못 했다. 당장에라도 필립을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작 부인은 딸이 안쓰러워 몇 날 며칠간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사람은 레베카였다.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찢기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증거는 명백했다.

레베카는 마침내 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곤 자신을 농락하고 기만한 필립을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받은 고통 이상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의 크기만큼 비례한 증오가 무자비한 복수의 칼날로 뒤바뀌었다.

로렌스 자작 부부는 딸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지금. 레베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믿는 필립만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들을 후작위에 앉힐 단꿈에 빠져, 달콤한 꿀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이 이미 통발에 빠진 날벌레라는 사실도 모른 채.

“황제만 어부지리로 이득을 봤군.”

사냥은 끝이 났고, 황제는 사냥개를 삶아 먹으려 이미 솥을 걸어둔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렌스 가문의 청은 넝쿨째 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솥에 함께 불을 피우는 대가로 진수성찬을 대접받는 꼴이었다.

물론 덕분에 레베카 로렌스가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로렌스 자작은 운이 좋은 것이었다.

“기사를 내. 황제가 곧 안토니 샤르투스의 후작위 승계를 승인할 거라고.”

칼릭스의 평소 성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명이었다. 대공은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를 선호했다. 이런 식으로 떠들썩하게 일을 키우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젠은 주인의 의중을 짐작하기보다 침착하게 묻는 쪽을 택했다.

“황제께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움직였다는 걸 페르난데도 알 거다.”

“타블로이드지에 정보를 흘리겠습니다.”

자극과 가십을 찾는 소규모 신문사들이 넘쳐났다. 약간의 부스러기만 뿌려주어도 서로 먼저 차지해 보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사람 몇 명만 저잣거리에 풀어 적당히 부채질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샤르투스의 사업에 대던 자금을 더 늘려.”

칼릭스는 미끼를 던져 필립의 눈을 완벽하게 가릴 생각이었다. 가련한 황제의 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다가 끓는 솥에 던져질 것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 추락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절망이 될 터.

“레베카 로렌스가 현명한 선택을 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필립의 목이 베이는 자리에 레베카도 함께였을 것이다.

황제와의 거래가 있었다고는 하나 칼릭스로서도 꽤 자비로운 결정이었다. 레베카가 필립의 애인으로 지내는 동안, 적어도 아셀라에게 가해진 폭력에 가담한 정황은 없었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물론, 그렇다고 고이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적당히 손을 써. 다시는 아셀라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예, 전하.”

레베카 로렌스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교계에 발붙일 자린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필립 부자의 말로에 비하면 그 정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들은 즉결처분으로 처리하고 빼돌려.”

다른 시신으로 적당히 위장하여 태우고 황제에겐 결과만 전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증인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칼릭스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제 아내의 악몽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단 하나도.

* * *

수도 사교계는 최근 여러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는 사건은 단연코 베네비토 대공 부부의 결혼과 신혼생활이었다.

“대공께서 비전하께 푹 빠지셨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보기보다 비전하께서 수완이 좋으신가 봐요.”

“그러게요. 아무렴 결혼하면서 동생까지 데려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귀족들이 모여앉은 테이블 주변으로 궐련 연기가 자욱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샤르투스가 손대는 사업마다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고 계신대요.”

“곧 안토니 샤르투스 영식이 후작위에 오를 거라던데요.”

“정말요? 작년엔가 성년이 되지 않았던가요?”

“어차피 시간문제였잖아요. 비전하께선 대공 전하와 혼인하셨고, 샤르투스 영애는 아직 어리니까요.”

“설마 했는데 정말 샤르투스가 이렇게…….”

미묘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았다. 그들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를 잘못 들여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한테 가문을 빼앗기다니.’

그러나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필립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건 위험했다. 이젠 대공의 위세까지 등에 업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든 객기랄지, 만용을 부리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어서.

“그런데 조금 놀랍긴 하네요.”

“뭐가요?”

“다들 결혼식에서 보셨잖아요? 전하께서 진노하셔서 발검까지 하셨던 일요.”

“아, 샤르투스 영식이 비전하께 큰 무례를 저질렀다고…….”

정확한 속사정이야 몰랐으나, 고깃덩이처럼 엉망진창이 된 꼴로 제 누이에게 무릎을 꿇던 안토니 샤르투스의 모습은 똑똑히 보았다. 그 앞에서 사납게 웃으며 흉흉한 살기를 내뿜던 대공도.

입조심 하라는 경고를 들었으니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야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끼리는 종종 그 일을 회자하곤 했다.

“그래서 솔직히 이렇게 쉽게 후작위를 승계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뭐, 비전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최근 믿을 만한 정보통으로부터 받은 소식이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살롱의 고용인들이 들어오자 이야기가 잠시 멈추었다. 그들이 빈 접시를 치우고 새 음식을 놓은 뒤 술잔을 채우고 나가자, 귀족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샤르투스 영애가 가문까지 상속받았다고 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샤르투스 영식이 후작위를 물려받기로 했다면서요?”

“록트린 가문 말이에요.”

“록트린……?”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이름에 저마다 머리를 굴렸다.

“비전하의 친부께서 결혼 전에 록트린의 후계자셨죠.”

“아! 생각났어요. 전염병 때문에 계승권자가 모두 사망했다지 않아요?”

“맞아요. 그 가문을 승계받기로 한 모양이에요. 영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 비전하께서 후견인을 맡기로 하셨다고 들었어요.”

“세상에, 그게 가능해요?”

모여앉은 귀족들의 눈이 저마다 동그래졌다. 소식을 전한 귀부인이 입을 가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답했다.

“물론이죠. 대공 전하께선 안 될 일도 되게 만들 분이신데.”

그녀가 덧붙이자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약간의 탄성을 터뜨렸다.

“샤르투스 영애의 위치가 애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네요.”

“지금이야 록트린이 한미한 가문이라지만…….”

록트린은 그리 명망 높은 귀족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공이 뒤에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필립 샤르투스가 완벽한 예시였다. 벌이던 사업의 잇따른 좌초로 어려움을 겪던 게 무색할 정도로, 요즘은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하며 기세가 등등했다.

“샤르투스 영애가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영식을 둔 몇몇 귀족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아직 성년이 되려면 멀었으나, 귀족 간의 약혼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지는 게 통례였다.

저마다 주판알을 튕기며 계산을 시작하느라 그들 사이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런데……. 그럼 로렌스 영애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의 말에 화제가 바뀌며 다시 대화가 재개됐다.

“그러게요. 몇 년 전부터 결혼한다는 말만 있네요.”

“두 사람 다 나이가 적지 않을 텐데 너무 오래 미루는 것 같아요.”

“이제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로렌스 가문이 부유하다고는 하나 후작가에 대기엔 신분이 낮았다. 애인이나 정부로 지낼 순 있어도 결혼까지 생각하기엔 어려운 벽이 존재했다.

“예전에야 사업 자금이 필요하기라도 했다지만…….”

상황은 바뀌었고, 필립 샤르투스에겐 이제 레베카 로렌스가 필요치 않았다.

귀족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누구보다도 이해관계에 빠른 그들이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됐네요.”

결론은 간결하고도 명확했다. 모두가 말없이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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