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71)
  • 메리엘의 반응에 당황한 아셀라가 로샨에게 황급히 변명했다.

    “죄송해요, 신관님.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기대를 크게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고는 메리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잠시간 지켜보던 로샨이 미간을 긁적이더니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치료 외에도 신성력으로 할 수 있는 신기한 일이 많답니다. 원하시면 보여드릴까요?”

    “신기한 거요? 뭔데요?”

    로샨의 제안을 듣자마자, 아셀라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메리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거야 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아가씨네.’

    눈물은 그렁그렁했으나 눈가는 조금도 발개지지 않았다. 로샨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도주하는 대공비 52화

    아무래도 아델의 능청스럽던 연기력은 둘째 딸이 죄다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질 듯했다.

    “대신 탁 트인 야외가 필요해요.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요?”

    로샨의 물음에 아셀라가 대답을 구하듯 마고를 바라보았다.

    “성 뒤편에 잔디밭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잠시 후, 그들은 거의 초원처럼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안내받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메리엘이 단호하게 다른 이들을 물리쳤다. 아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관님이랑 놀 거예요! 방해하지 마세요!”

    자연스레 둘과 나머지 사람들 간 거리가 벌어졌다. 아무도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고 나자, 로샨이 메리엘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떤 힘을 경험 중이니?”

    “치유력, 독심술, 조종술이요.”

    메리엘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어설프긴 해도 독심술을 쓰는 그녀에게 로샨이 아군임을 파악하는 건 쉬웠다.

    “어쩐지 바로 알아본다 싶더니. 나쁘진 않네. 그중에서 결정할 거니?”

    “아뇨. 전 마법을 쓰고 싶거든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구나.”

    “네.”

    가능성이 있는 이능들을 경험하고, 선택하고, 또 완전하게 각성해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기왕이면 아카데미 시험 전에 마법 이능을 각성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마탑에 들어갈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니?”

    “마탑의 마법사가 되면 언니를 보호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메리엘이 로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신관인 척하고 계세요?”

    “신관 맞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자꾸 거짓말하면 탈주한 전임 마탑주 여기 있다고 마탑에 신고해 버릴 거예요.”

    로샨의 눈동자가 빛났다. 아무래도 눈앞의 아가씨는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재능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단번에 꿰뚫어 볼 줄이야.

    “내 정체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어찌 알아보셨을까?”

    “이래 봬도 이능자잖아요.”

    “어쨌든 비밀은 지켜주길 바라요. 꼬마 아가씨.”

    “그럼 제가 각성하면 마탑의 마법사로 받아주시는 거예요?”

    “마탑주 녀석한테 잘 말해볼게.”

    마법의 이능도 나쁘진 않지, 생각하며 로샨이 저쪽의 아셀라를 응시했다. 로샨의 시선을 따라간 메리엘이 언니를 발견하곤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셀라는 괜찮은 거니?”

    “이유는 모르겠는데 대공 전하를 무서워해요. 그것도 엄청.”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로샨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가 뜨며 재차 물었다.

    “대공은?”

    메리엘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금빛 기류를 봤어요.”

    “확실하니?”

    “확실해요.”

    역시. 로샨이 제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

    아델을 똑 닮은 올곧은 눈빛이 로샨을 응시했다.

    “언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예요.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요.”

    “대공에게서 금빛 기류를 봤다며. 그런데도?”

    “저한테 중요한 건 언니예요. 대공 전하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 안 해요.”

    메리엘이 멍들어 있던 아셀라의 손목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언니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추측하는 건 쉬웠다. 아직도 그걸 생각하면 대공이 용서되질 않았다.

    “언니가 싫다고 하면 여기서 도망치게 해줄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메리엘과 로샨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러니까 로샨 님이 절 도와주세요. 각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게요.”

    “그러마.”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언니가 기다려요.”

    메리엘이 로샨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제 언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은발의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단란해 보였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로샨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뭔진 몰라도 대공이 이 꼬마 아가씨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 * *

    다음 날,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산책을 마친 아셀라와 메리엘이 저택 앞 인조 분수대를 막 지날 때였다.

    저 멀리 바깥쪽 길 끄트머리에서 힘찬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한 무리의 말이 일렬로 걸어가고 있었다.

    “새 말들이 들어왔나 봅니다. 브리더들이 꽤 공들였다더니 튼튼하고 건강해 보이네요.”

    마고의 설명에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지나가는 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셀라가 말을 처음 탄 건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엄마와 같이 타보겠니?’

    아셀라는 그날의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했다. 귓가에 스치던 부드러운 바람, 따사로이 내리쬐던 햇볕, 등에 닿는 어머니의 안온한 품…….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질 정도로 행복한 기억이었다.

    ‘말을 타겠다고? 어디서 그런 말 같잖은!’

    아델의 죽음 이후, 필립은 그녀의 승마를 금지했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이라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론 결혼 장사로 팔아먹어야 할 상품에 흠결이 날까 봐서였다.

    아셀라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다 지난 미련을 붙들고 있나 하는 자조 섞인 마음과 함께.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 메리엘이 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언니! 말 타고 싶어?”

    “어?”

    “나도 타고 싶었는데! 언니랑 마음이 통했나 봐!”

    그러고는 마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두 손을 깍지껴 모은 아이가 크게 제 바람을 외쳤다.

    “말 타는 법 배우고 싶어요!”

    아셀라가 얼른 메리엘의 어깨를 감싸며 동생을 말렸다.

    “메리엘,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 돼.”

    “그치만 언니도 배우고 싶지 않아?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못 탔었잖아.”

    아셀라가 멈칫했다. 그런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나 싶었다.

    “만날 바느질하고 꽃꽂이 같은 것만 배우게 하고. 밖에도 못 나가게 했잖아!”

    아셀라가 필립에게 빼앗긴 건 비단 후계자 자리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배움의 기회도 함께 박탈당했다. 배울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었다.

    대신 강요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것들을 익혔다. 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가 되라며 필립이 사람까지 불러와 가르치게 했던 수예로 말하자면, 눈을 감고도 장미를 수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언니랑 같이 말 타면 좋겠다! 로메인 부인, 안 되나요?”

    “안 된다기보다는…… 비전하의 안전과 관계된 일이라 제 선에서 가부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 여쭈어보겠습니다.”

    곧바로 아셀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부인. 아이가 들뜬 마음에 한 소리이니 괘념치 마세요.”

    마고가 곤란해할 정도의 일이라면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필립도 철저하게 금했던 일이 아니던가. 대공이 허락해 줄 리 없었다. 괜한 불쾌감만 살 게 뻔했다.

    “승마라.”

    그때, 아셀라의 등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몸을 돌린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큰 키의 사내가 비쳤다.

    “전하.”

    칼릭스가 걸어오기 무섭게, 아셀라의 곁에 있던 시녀며 호위 기사들이 썰물 빠지듯 멀찌감치 물러섰다. 마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공 부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사용인들의 지극히 노련하고도 당연한 태도였으나, 아셀라는 어쩐지 그들을 붙잡고 싶어졌다. 저도 모르게 메리엘을 품으로 당겼다.

    한동안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던 남자가 왜 갑자기 저를 찾아왔을까.

    “몸은 괜찮나.”

    “네.”

    간결하게 답한 아셀라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신관을 불러주셨다고 들었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다친 곳은?”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아셀라의 눈이 동그래지자 칼릭스가 곧바로 화제를 돌리며 메리엘에게 물었다.

    “영애도 말을 타 본 적이 있나?”

    “엘븐에 있을 때 몇 번이요! 혼자서는 아니었고 에트망 부인이 가끔 태워 주셨어요.”

    엘븐이라면 메리엘이 삼 년간 본가에서 떨어져 살았던 도시였다.

    “앗!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 건 아버지께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몰래 탄 거였거든요.”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역시 앞의 대화를 일부 들었다. 필립이 두 딸의 승마 교육을 막은 것도 일찌감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가 아셀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대도 타고 싶은가?”

    난데없는 질문에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필립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꿈도 꾸지 말라고 윽박지르곤 했다. 한 번은 마부가 끌고 가던 말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필립에게 들켜 뺨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얌전히 처박혀 고분고분하게 수나 놓을 일이지! 승마라니, 어디서 천박하게…….’

    아마 대공도 싫어할 것이다. 아니라고 답하는 편이 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셀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뤘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미처 없애지 못했던 열망이 고개를 들었다.

    “타 보고 싶어요.”

    결국, 말하고 말았다.

    칼릭스의 적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에 아셀라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화를 내면 어쩌지.’

    주제도 모른다며 비웃음을 살지도 몰랐다.

    “좋아.”

    예상치 못한 간결한 대답이었다. 이리 흔쾌히 허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아셀라였다.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공국에선 취미로 다들 즐기는 활동이야. 안 될 이유는 없어.”

    답하는 사내의 입귀가 살짝 풀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칼릭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곁의 충복을 불렀다.

    “라이젠.”

    “하명하십시오.”

    칼릭스가 아셀라와 메리엘을 차례로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적당한 말들을 찾아와. 순하고 길이 잘 든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라이젠이 대공 부부에게 차례로 인사를 마치곤 자리를 피했다. 눈치껏 일이 잘 풀렸음을 깨달은 메리엘이 환호성을 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메리엘, 잠깐…….”

    “얼른 우리도 준비하자! 전하, 저희 가봐도 되지요?”

    잔뜩 흥분한 메리엘이 아셀라의 치맛자락을 붙잡고는 어서 가자며 칭얼거렸다. 아셀라가 난처한 얼굴로 칼릭스와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무나 척척 진행되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칼릭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가보도록.”

    “하지만…….”

    “그대 동생이 기다리잖나.”

    재차 이어진 말에도 아셀라가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말 그의 본심이 맞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파란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일렁거렸다.

    “진심…… 이세요?”

    칼릭스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짧게 침묵한 그가 한 걸음 더 옮기자, 두 사람의 거리가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태생적인 위압감에 아셀라가 파르르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를 낼 거야.’

    칼릭스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아셀라는 제게 다가오는 긴 손가락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말을 탈 땐 묶는 편이 좋겠군.”

    그가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귀 뒤로 가벼이 쓸어넘겼다. 은근하게 뺨을 스치는 손길이 지나치게 선명히 느껴져 아셀라가 숨을 삼켰다.

    도주하는 대공비 53화

    “엉키면 곤란할 테니.”

    화를 내지도, 무섭게 굴지도 않았다. 아셀라는 그가 제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언니! 얼른 가자!”

    메리엘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묘한 긴장이 파스스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아셀라가 걸음을 떼었다. 자꾸만 망설여지는 탓에 움직임이 더뎠다. 그러다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

    아셀라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 봤을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시선을 피했지만 그라면 알아챘을 것만 같았다.

    ‘왜 나를…….’

    도무지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녀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생경한 기분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새 치맛자락을 쥔 아셀라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 * *

    아셀라와 메리엘이 준비를 막 마치고 나왔을 때 저택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집사 파비안이 정중한 인사와 함께 마차 문을 열었다.

    “승마장까지는 거리가 있어 마차로 이동하실 겁니다. 십오 분 정도 걸립니다.”

    달리는 마차에서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진짜 넓다! 여기서 말 타는 거예요?”

    마차에서 내린 메리엘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셀라 역시 내색하진 않았지만 보이는 풍경에 설레고 말았다.

    훈기가 도는 바람, 완연한 초록빛으로 뒤덮인 대지가 봄을 실감케 했다.

    “말이다!”

    마부가 끌고 오는 말을 본 메리엘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다른 말들보다 작은 망아지 앞으로 다다다 뛰어간 아이가 두 손을 그러모았다.

    “예쁘다!”

    말의 기다란 속눈썹이 아래위로 끔벅였다. 메리엘은 말의 맑고 순박한 눈동자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만져보셔도 됩니다.”

    그렇게 메리엘이 말과 친해지는 사이, 아셀라가 다른 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 왜 세 마리인가요?”

    그중에서도 흑마 한 마리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익숙했다. 대답은 마부가 아닌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나?”

    완벽한 승마복 차림의 칼릭스 베네비토가 손에 낀 검은 가죽장갑을 단단히 여미며 장내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 * *

    칼릭스가 제 앞의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저를 보자마자 창백해지던 얼굴을 생각하면 적어도 그를 반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상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전하께서도 오실 줄은 몰랐어요.”

    간신히 낸 것 같은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추지 못한 긴장이 흠뻑 밴 목소리였다. 미리 말해주지 않은 잘못도 있지.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여자를 위한 변명을 만들어냈다.

    “혼자서는 안 돼. 말 탄 지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혹여나 낙마라도 한다면 저 연약한 몸은 성치 못할 것이다. 칼릭스가 제 가슴께밖에 오질 않는 자그마한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말 타는 게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뒤에서 그녀를 받쳐줄 사람이 필요했다. 대공성에는 승마에 능한 훌륭한 기사가 많았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사내와 함께 말을 탄다는 건.

    ‘어림없는 소리.’

    칼릭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셀라 혼자 말을 타게 할 수도, 그렇다고 다른 이와 함께 타게 할 수도 없었다. 칼릭스가 이 바쁜 와중에도 승마복까지 갖춰 입고 직접 나선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메리엘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안전하게 알려드릴 테니까요!”

    “지크 아저씨다!”

    “아저씨 아니라니까요!”

    아셀라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입술을 뗐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칼릭스는 인내심 있게 그녀를 기다렸다.

    “그럼 저는 전하께서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간신히 말문을 연 그녀가 정답을 말하자 칼릭스의 입매가 팽팽해졌다. 고작 그 말이 무엇이라고,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졌다.

    “그래.”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렸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잘…… 부탁드려요. 여, 열심히 할게요.”

    뒤에 덧붙인 말이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져서, 칼릭스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히익……! 지금 전하께서 웃으시는 거 맞아? 내가 잘못 본 거지?”

    “닥쳐라, 지크.”

    저 멀리서 목소리를 한껏 낮춘 지크와 라이젠의 대화가 들렸다. 평소라면 경솔한 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었겠으나, 칼릭스는 이번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아셀라는 모를 테니.’

    애초에 인간의 청력을 훨씬 뛰어넘은 그였기에 들을 수 있었던 대화였다.

    게다가 아내에게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저를 무서워하는데, 더 두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 전, 공포심을 이용해 그녀를 제 입맛대로 길들이려 했던 처음의 계획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할 게 많아. 가지.”

    칼릭스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셀라가 그의 손바닥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겁먹은 표정을 짓자, 재빨리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직은 무리인가.’

    상처는 깨끗하게 치료했다 하나 그날의 충격이 전부 가시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손목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에 쥐고도 남을 정도로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검붉게 물들였던 멍을 떠올리자 착잡함이 고개를 들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도록.”

    어쩔 수 없이 칼릭스가 먼저 뒤돌아섰다.

    차마 손을 잡을 순 없었으나 그의 신경은 온통 뒤에 쏠려 있었다. 따라오는 여자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나는 것처럼 잘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부작거리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작은 움직임, 하다못해 희미한 호흡마저도 느껴질 정도였다.

    ‘……젠장.’

    칼릭스가 주먹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뒤를 돌아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채어 제 손에 가두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대공성에 도착했던 첫날, 쥐었던 손의 보드라운 촉감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 * *

    칼릭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는 아셀라와 함께 말을 타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아셀라가 사색이 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던 탓이었다. 함께 타길 고집했다간 되레 위험하겠다 싶어, 칼릭스가 생각을 거두었다. 대신 옆에서 아셀라가 말을 모는 걸 지켜봐 주었다.

    “전 괜찮아요. 전하께서도 바쁘실 텐데…….”

    “전혀.”

    “정말 혼자 탈 수 있어요.”

    “위험해.”

    물론, 그것조차 아셀라에겐 영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남자에게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지 걱정이 앞섰다.

    잘 따라가지 못해 그가 화를 내거나 답답해할 걸 생각하자,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났다.

    “긴장 풀어. 그대가 긴장하면 말도 눈치를 채.”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꽤 참을성 있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차근차근 설명하며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잘 이해하지 못해도 귀찮은 내색 없이 거듭 반복하여 알려주었다.

    “고삐를 적당히 당겨봐.”

    “이렇…… 게요?”

    “허리 세우고…… 좋아. 훌륭하군.”

    가끔은 담백한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셀라는 당황하여 흠칫거렸다. 폭언에 길든 그녀에게 칭찬과 격려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은 아니겠지만…….’

    고삐를 붙잡은 아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속이려는 것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마냥 순진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거짓된 호의와 꾸며낸 다정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기쁜 마음이 들고 말았다. 지금껏 그녀에게 잘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정말이라고 믿고 싶어져.’

    그만큼 너무도 오랜 시간이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다잡고 또 다잡아도 누군가에게 조금은 기대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곤 했다. 독이 든 잔이라는 걸 알면서도 홀릴 듯 풍겨오는 달콤함에 마시고 싶어지곤 했다.

    ‘정신 차려.’

    순간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독배를 들고 말았을 것이다.

    ‘메리엘을 걱정하더니 오히려 꿀 발린 말에 넘어가는 건 너잖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셀라가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깨무는데, 옆에서 칼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만 탄다면 문제없겠어.”

    아셀라의 시선이 저절로 흑마를 탄 남자에게로 향했다.

    적당한 훈기를 머금은 봄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반쯤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붉은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순, 늘 비정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눈에 온기가 감도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무슨 착각을……!’

    아셀라가 제 생각에 놀라 파드득거리던 그때였다.

    ‘이게 또 분수를 모르는 짓을 하네?’

    머릿속에 또 다른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안토니의 것이었다.

    ‘왜, 이제 네년이 대공비라도 된 것 같아?’

    ‘아.’

    아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자각했다.

    필립과 안토니는 후작위 승계를 대가로 그녀를 팔았다. 그리고 칼릭스 베네비토는, 그는…… 그녀를 샀다.

    비싼 값을 치르고.

    ‘팔려가는 주제에.’

    그는 어머니를 죽인 자였다. 그녀와 메리엘의 목숨을 쥔 자였다. 언젠가는 그녀들을 진창에 빠뜨려 짓밟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뜨기로서니 어떻게 아까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칼릭스 베네비토가 네게 눈길 한 번 줄 것 같아?’

    욱신.

    너무나 많이 상처 입어 웬만한 아픔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너덜거리던 심장 한구석이 찌릿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아셀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상 상태를 알아챈 말이 히이힝, 울음소리를 냈다.

    “왜 그러나?”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말을 건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허리를 걷어차인 말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셀라!”

    칼릭스가 곧바로 뒤따라 말을 몰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그녀 옆으로 따라붙은 그가 시체처럼 창백해진 아셀라의 옆얼굴을 보며 고함쳤다.

    “당장 속도를 줄여! 젠장!”

    아셀라의 상태를 확인한 칼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공포에 질린 아셀라의 머릿속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R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고삐가 느슨해졌고, 통제를 잃은 말이 미친 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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