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손놀림에 약간의 다급함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순식간에 줄을 풀어헤친 그가 쪽지를 펼치곤 내용을 확인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폐하?”
“이 건방진 놈이!”
페르난데가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책상을 쾅 내려쳤다. 던컨이 재빨리 황제가 집어 던진 종이의 글귀를 확인했다. 고작 한 줄짜리의 짧은 쪽지였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전령이 무사하기를.]
‘이런.’
던컨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들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황제가 농락당하는 꼴이지 않나. 하기야 그는 처음부터 황제의 계획에 반대했었다. 물론 들어먹을 페르난데가 아니었지만.
그때였다. 쪽지를 금방이라도 찢어발길 듯 노려보던 페르난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깐…….”
우아하고 유려한 필기체로 적힌 글씨가 사라지더니, 이내 새로운 내용이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신자가 첫 문장을 읽은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도록 마법이 걸린 편지지였다.
[호의의 답례로 보냅니다.]
일순 종이가 화르르 타올랐다. 그러곤 검게 탄 재 사이로 작은 병 하나가 나타났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액체가 병의 반쯤 채워져 있었다.
‘맙소사.’
던컨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탄식할 뻔했다. 힐끗 황제의 표정을 살피니 페르난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던컨이 제 생각을 정정했다. 대공은 황제를 농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이…… 칼릭스 베네비토!”
황제의 분노에 찬 음성이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병에 든 건, 정량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해독제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50화
13. 모든 건 사소한 것에서부터
마고의 화려한 이력에 아셀라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움에 눈을 몇 번이나 끔벅거리던 그녀는, 마고를 메리엘의 가정교사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뒤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지크 아저씨!”
메리엘이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적발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힘차게 흔들며 외쳤다.
“빨리 오세요!”
아셀라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는 동생을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메리엘은 지크가 목말을 태워 주기로 약속했다며 어젯밤 내내 설레했다.
“아저씨라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메리엘의 부름에 잽싸게 달려온 주제에, 그 말만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지크가 발끈하며 외쳤다. 그러나 메리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뭐가요?”
“아가씨께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아직 스물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젊고 잘생긴 아저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음…….”
메리엘이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크 아저씨를 지크 아저씨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 왜 다른 좋은 말도 많잖습니까!”
“뭐가요?”
“잘생긴 지크 기사님이라든가, 멋진 기사님…… 악! 왜 자꾸 사람 머리를 때리고 그래!”
어디선가 번개처럼 나타난 라이젠이 지크의 후두부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지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펄펄 뛰었으나 라이젠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비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아셀라가 주먹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곤 쿡쿡 웃으며 답했다.
‘둘이 오래 알고 지내온 친우라면서,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건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신기할 때가 종종 있었다.
“좀 무식하긴 해도 악의는 없는 녀석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친우를 대신해 사죄한 라이젠이 곧장 몸을 돌리곤 지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정신 나간 놈. 혹시 몰라 확인하러 오길 잘했지.”
“내가 뭘!”
“감히 아가씨께 뭐가 어째? 잘생…… 아니다, 말을 말자.”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도 민망하다는 듯 라이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자세를 낮추어 메리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가씨, 저 녀석 말은 하나도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죄다 헛소리니까요.”
“헛소리라니, 말 다 했어?”
“또다시 저러면 그땐 정강이를 걷어차 버리십시오.”
“뭐? 라이젠! 너……!”
“수도로 가는 길은 저쪽이다, 지크.”
발끈하려던 지크가 합,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수도로 보내버리겠다는 협박이야말로 제멋대로인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한 번만 아가씨께 시답잖은 소릴 했다간 전하께 보고드릴 테니 그리 알아라.”
“야! 라이젠!”
“지크 아저씨, 목말 태워 주세요!”
지크의 눈에 양팔을 번쩍 위로 든 아이가 비쳤다. 바다처럼 파란 눈이 사랑스럽고 어여뻤다. 애들은 귀찮고 짜증스럽지만, 어째서인지 이 자그마한 아가씨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릎을 굽혀 메리엘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든 지크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앉혔다.
“우와! 높아!”
“당연하죠. 이래 봬도 제 키가 몇인지 아십니까?”
“몇인데요?”
“그게 말이죠, 아…… 몇이더라?”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이젠이 바보가 따로 없다고 중얼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말에 분노한 지크가 길길이 날뛰었다. 메리엘이 출렁거리는 지크의 몸 위에서 더 큰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셀라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속내는 무척이나 복잡했다.
지난 며칠간, 아셀라는 대공성의 주요 인물들을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메리엘의 일로 마고나 라이젠, 지크를 비롯해 집사인 파비안까지 만날 일이 잦았던 덕분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들의 정보를 얻었다.
‘쉽지 않겠어…….’
매사 철두철미한 마고나 라이젠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겉으론 다정한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파비안 조차 굉장히 예리하고 날카로운 면모가 있었다. 격의 없이 대하는 지크가 그나마 편했으나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공성 어디에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들 모두는 칼릭스 베네비토의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아직까진 아무도 메리엘의 각성 사실을 몰랐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대공성엔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이 살얼음 같은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만일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그래서 칼릭스 베네비토가 메리엘의 각성을 알게 된다면.
그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알 수 없으니 두려움만 커졌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은 물론, 메리엘까지 위험해지고 말 것이다.
‘왜 나와 결혼했을까.’
최근 아셀라가 거듭하는 고민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그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대공성에서 며칠 생활하는 동안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대공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어떠한 흔적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그렇다면 단순히 죽이기만 하려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용가치가 있다거나…….
‘역시 이능 때문일까?’
각성 시기를 한참이나 놓친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를 실패작이라 단정 지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그녀가 장차 이능을 각성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대공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샤르투스의 이능이 만들어내는 일들은 가히 놀라운 것이어서, 그 힘을 탐내는 이가 많았다는 건 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역설적으로 그 사실이 칼릭스 베네비토의 의중을 헤아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 남자에게 과연 샤르투스의 이능이 필요할까.’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그에게는 굳이 그녀의 이능이 필요치 않았다.
남자는 압도적으로 강하고 부유했으며, 거의 지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보아도 될 신분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는 황위를 손에 쥐는 일조차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셀라가 팔꿈치 근처의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안쪽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동글동글하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를 치료해 주었던 신관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건네주었던 정체불명의 물건이었다.
‘신전은 늘 열려 있답니다. 누구에게나요.’
아무도 없을 때 살펴보았으나 그저 하얀 돌멩이일 뿐이었다. 문질러 보기도 하고, 힘을 가해 꽉 쥐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여태껏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겨왔다.
‘언젠가 꼭 필요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거의 확신과도 비슷한 예감이었다.
아셀라의 시선이 목말을 타고 있는 동생에게로 향했다. 신이 난 메리엘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지크의 어깨 위에서 환호성 치고 있었다.
“더 빨리 걸어봐요, 지크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그럼 달려봐요, 아저씨!”
“거참, 제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가씨?”
어쩌면 정말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작동하는 물건일는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축복까지 내려줄 정도로 호의를 보였던 신관이 아무 이유 없이 비밀리에 물건을 건넬 리가 없었다.
‘들켜선 안 돼. 절대로.’
아셀라가 작은 돌멩이의 감촉을 뒤로한 채 소맷자락을 놓았을 때였다.
“비전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를 평소처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마고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아셀라가 태연한 척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부인?”
“곧 신관이 도착한다는 기별입니다.”
“신관이요?”
순간, 아셀라의 눈빛에 두려움이 스쳤다. 얼마 전 신관에게 치료를 받았던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다시 신관이 찾아온 걸까.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소맷자락 속에 감추어진 손목을 쥐었다. 그녀가 다친 걸 아는 사람은 메리엘뿐이었다.
‘설마, 비밀이 새어나간 걸까?’
아셀라는 긴장을 내비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갑자기 왜…….”
“치료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더불어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북돋아 주는 진료도 병행한다고 합니다. 간단한 신성력 치료이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전 괜찮아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내뱉는 말에 떨림이 가득했다.
신관이 그녀의 상처를 확인한다면 메리엘이 치유한 기운을 읽어낼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메리엘의 각성 사실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저번에 치료를 받았는걸요.”
“마수로부터 입은 상처는 몸에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성력으로 치유를 했어도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어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아셀라가 어떻게든 사양하려 했으나 마고의 단호한 대답에 곧바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오시는 길에 그리 큰일을 겪으셨으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아녜요. 그건 부인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가 그런 습격이 있을 거라고 예상…….”
순간, 아셀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고의 말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메리엘을 노리는 적이 또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
그날의 광경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흉포하게 번득이던 마수의 눈과 정확하게 그들이 탄 마차를 찾아내 가해지던 공격, 메리엘을 찾아낸 짐승의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까지도.
왜 잊고 있었을까. 마수의 표적은 그 누구도 아닌 메리엘이었다.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마고에게 물었다.
“혹시 마수의 공격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밝혀졌나요?”
마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 의도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 날카로웠다. 다행히 잠깐의 침묵 끝에 마고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산에 살던 마수들이 번식기를 맞아 갑작스레 이상행동을 벌인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요.”
마수들의 공격은 단순한 우연이나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벌인 일이었다. 아셀라는 담요에 몸을 숨긴 메리엘을 찾아내곤 미친 듯이 울부짖던 마수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했다.
“마수는 대부분 개별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아요. 그날처럼 무리 지어 사람을 공격한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그저 이상행동일 뿐이라고요?”
“예.”
망설임 없는 답이 돌아왔으나 어쩐지 일부러 답을 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51화
“자주 벌어지는 현상은 아닌 줄로 압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나,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니 좀 더 기다려 보시지요.”
마고의 단호한 목소리에 더 이상의 언급을 바라지 않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아셀라는 확신했다. 마고 로메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일순,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끔찍한 생각에 아셀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단순 이상행동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이상했던 마수들의 움직임. 안전을 핑계로 마차에서 나오지 말라 당부하던 카단 경. 그녀들의 비명에도 점점 멀어져만 가던 기사들.
황궁에 갔다 온다던 칼릭스 베네비토는 어떻게 때맞춰 그 장소에 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그녀와 메리엘의 목숨이 경각에 빠진 그 위험한 찰나에,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 의문조차 품지 않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였다.
‘만일, 만일 그런 거라면…….’
아셀라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한 손을 마주 잡았다. 소매가 긴 데다 테이블에 가려져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요하는 모습을 마고에게 들키고 말았을 터였다.
‘그 모든 일이 대공의 자작극이었다면.’
떠오른 생각에 아셀라는 아연해졌다. 현기증이 일어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뻔했다.
‘그렇다면 그때 행동들도 설명이 돼.’
직접 상처를 살피고 치료까지 해주던 사내의 행동은 돌이켜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걷질 못하는 그녀를 안아서 막사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하등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도.
‘우릴 안심시켜서 샤트투스의 정보를 빼낸 뒤 제거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
과거의 영광에 비해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는 하나, 샤르투스는 여전히 제국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다. 개국공신 가문인 데다, 지금껏 가주에게 대대로 발현되었던 신비로운 이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능과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떠도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았으나 대부분이 거짓된 공상에 불과했다. 정확한 진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가주에게만 이어졌다.
‘대공 전하 말이야. 좋은 분인 것 같았어.’
칼릭스 베네비토의 계산된 칭찬 몇 마디에 기뻐하면서, 그를 좋은 사람이라 평했던 메리엘이었다. 남자의 거짓된 친절과 배려에 속아 마음을 열고 비밀을 전부 털어놓게 될지도 몰랐다.
치미는 불안에 아셀라가 헛숨을 삼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날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하지 않아요.”
“또 뵙네요.”
기름칠하지 않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아셀라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지난번에 찾아와 그녀를 치료해 주었던 노신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고가 기다렸다는 듯 신관을 맞이했다.
* * *
방으로 돌아온 아셀라의 낯빛이 어두웠다.
그녀는 마고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푸른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그런 아셀라를 지켜보는 로샨 역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녀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두르며 마고에게 부탁했다.
“따뜻한 물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하라 이르지요.”
“그리고 오늘은 모두 자리를 비워주셔야 해요.”
“그건 곤란합니다.”
마고가 딱 잘라 거절했다. 대공비의 치료를 위해 왔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신전과 베네비토 가문은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둘만을 남겨둘 순 없었다.
“하지만 진찰하려면 옆에 사람이 있어선 곤란해요. 대공께서 비전하의 건강을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히 살피라 하지 않으셨던가요?”
“방해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이번 치료는 무척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해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집중하기가 힘들어요.”
마고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비만 두고 나가 있기엔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또 라이젠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 신관의 말을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먼젓번의 치료가 미흡하다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축복의 힘까지 있던 고위 신관이었는데요.’
‘ 전하의 생각이 그러하십니다. 신관의 치료가 끝난 뒤에도 비전하의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십시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라이젠이 기어코 내놓은 한마디가 더 있었다.
‘전하께서 비전하를 염려하십니다. 마고,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감히 전하의 심중을 짐작기는 어려우나 어쩌면…….’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으나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동시에 의미하는 바가 꽤 큰 말이었다.
그들의 주인. 드넓은 베네비토령을 다스리는 젊은 대공을, 지금껏 걱정하게 만든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아니었다. 칼릭스 베네비토는 제 아버지의 죽음을 연락받고서도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았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가 무려 ‘염려’씩이나 하는 존재가 생겼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매우.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헤르니야 여신의 종으로서, 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요.”
마고의 고민을 읽은 로샨이 말을 덧붙였다.
결국, 마고는 걱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로샨의 말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호출용 수정구를 대공비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사용인들을 부르라는, 아셀라를 위한 무언의 메시지였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신관 로샨입니다.”
“……바쁘실 텐데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해요.”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눈 뒤, 아셀라가 초조하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까 마고와 로샨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 명령은 대공이 직접 내린 것이었다. 피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로샨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은 건 그때였다.
“듣는 귀는 없어 보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로샨이 허공에 가벼이 손짓했다. 그러자 아셀라와 로샨의 주변으로 얇은 반구 형태의 반투명한 경계가 만들어졌다.
“결계예요. 이제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어째서 이런 걸…….”
“제게 할 말이 있지 않으신가요?”
로샨이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정곡을 찌르자, 아셀라가 흠칫했다.
“말이 새어 나갈 염려는 안 하셔도 돼요. 비밀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요.”
아셀라의 대답을 기다리는 로샨의 눈빛이 따사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거야.’
그녀와의 약속을 깨고 대공에게 전부 실토할지도 몰랐다. 신관이라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아셀라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망설이던 와중, 로샨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맞춰 볼까요?”
“네?”
“메리엘 아가씨께서 이능을 각성하셨군요.”
순간, 아셀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지며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듬더듬 말이 새어 나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샤르투스의 이능에는 독특한 흔적이 남아요.”
아셀라가 부인하려 했으나, 로샨은 온유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비전하께 그 기운이 미세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도로 흡수되지 않고 주변으로 흩어지는 걸 보면, 아마도 메리엘 아가씨의 힘인 것이겠지요.”
아셀라의 눈이 충격으로 요동쳤다. 이 노신관은 어떻게 그녀조차 몰랐던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다, 당신은 누구…….”
“많이 놀라셨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비전하를 도와드리려 하는 거니까요.”
로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셀라를 마주 보고 섰다.
“전에 드렸던 돌은 아직 가지고 계시지요?”
아셀라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돌에 이동 마법이 걸려 있어요. 포털이 생성되어 신성 자치주 헤뷔움의 대신전으로 올 수 있죠.”
“포털이요?”
아셀라가 놀란 눈으로 로샨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녀가 답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요. 혹시라도 필요한 상황이 왔을 때 돌에 입을 맞추면 포털이 개방될 거예요. 아, 알고 있으시겠지만 대공성 안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니 성 밖까지는 나와야 해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가의 성이나 저택에는 대부분 포털 사용을 금제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동 마법을 이용한 침입자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걸 주신 건지 물어도 되나요?”
질문을 받은 로샨이 추억을 더듬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 위로 아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선대 샤르투스 후작님께 은혜 입은 일이 있어서요. 보답하는 거라고나 할까요.”
“어머니를 아세요?”
“꽤 많이요. 비전하께서 어렸을 적만 해도…….”
뭔가를 설명하려던 로샨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급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동시에 그들의 주변을 감싸던 반투명한 반구의 장막이 걷혀 사라졌다.
“신관님?”
“쉿! 누가 와요.”
곧바로 로샨이 아셀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서둘러야겠어요. 바로 치료를 시작할게요.”
이내 로샨에게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아셀라의 몸을 감쌌다. 저번과 같이 따뜻하고도 충만한 느낌을 주는 힘이었다.
아셀라가 소매를 살짝 들추니 손목에서 사라지는 멍 자국이 보였다.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지고 원래의 희고 투명한 살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샨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신성력이 사그라들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 * *
방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메리엘이었다. 아이의 뒤로 난감한 표정의 마고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비전하.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
아셀라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메리엘이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신관님이 치료하시는 거 보고 싶어!”
반짝거리는 맑은 눈망울이 로샨을 향했다. 그녀가 아이와 눈을 따뜻하게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비전하의 치료는 조금 전 끝났답니다.”
“벌써요?”
메리엘의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급기야 앉아 있던 아셀라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