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의도적인 멘트였다. 말을 던진 메리엘이 슬쩍 눈을 굴려 칼릭스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언니가 무척 슬퍼 보였거든요. 그래서 언니 기분 풀어주고 싶어서 산책 겸 나온 거였어요!”
“…….”
“언니 눈에 눈물도 이렇게 그렁그렁했어요.”
또 울었던가. 눈물이 많은 여자다. 칼릭스는 최대한 건조하게 평하려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고…… 잘못한 게 있다고만 했어요. 그리고 자꾸 저한테 미안하다고…….”
“…….”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기어이 생각해 내고야 말았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며 동생의 일을 사정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도, 애처로이 떨리던 가냘픈 몸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사실 칼릭스는 집무실에 홀로 남겨두었던 아내를 줄곧 신경 쓰고 있었다.
아셀라가 낮에 왔었다는 말을 듣고 거의 일 년 만에 유리 온실을 찾았을 정도로.
“전하?”
“아니다.”
제 동요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칼릭스가 재빨리 상념을 떨쳐버렸다. 의미 두지 않기로 한 일에 더는 귀한 시간 쓸 필요 없다는 다짐을, 스스로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럼에도 아내를 닮은 아이와의 대화가 거북스러운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영애. 사람을 불러주지.”
답지 않은 친절까지 보이며 칼릭스가 급히 대화를 끝내려 했다.
“앗, 그러고 보니 전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러나 메리엘이 느닷없이 외친 목소리에, 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은 귀찮아하는 기색마저 엿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메리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은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으니까.
메리엘이 한번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준비한 말을 꺼냈다.
도주하는 대공비 48화
“언니 손목에 멍이 들어 있었어요.”
순간 칼릭스는 귀를 의심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고, 그렇기에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차마 네가 잘못 본 게 아니냐고 되묻지는 못했다.
“이렇게 길게요. 누가 꽉 붙잡은 것처럼요.”
손목까지 내밀며 설명하는 아이의 얼굴이 제 하나뿐인 언니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기에.
칼릭스의 조각상 같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혹시 전하께선 이유를 아세요?”
그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 * *
깊은 밤, 칼릭스가 홀로 집무실에 있었다.
속이 시끄러운 탓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내린 선택이었다. 차라리 일이라도 하면 불편한 생각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원체 일을 남겨두지 않는 성격 탓에 책상 위는 말끔했다. 이미 완벽하게 끝내둔 서류를 굳이 꺼내어 세 번쯤 검토했음에도 밤은 지나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젠장.”
결국, 칼릭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무실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밤이 되어 조도를 낮춘 전등 불빛이 적당한 밝기로 복도를 비추었다. 평소에도 소음과는 거리가 먼 대공성의 밤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사내의 움직임을 따라 벽면에도 그림자가 일렁였다.
‘언니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요.’
자꾸만 아이의 말이 귀에 달라붙은 듯 맴돌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주변이 적막한 탓인지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엄청 아파 보였는데…….’
이 저택에서 아셀라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시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릭스는 그녀가 몸을 씻을 때조차 시중을 꺼린다는 마고 로메인의 보고를 받았었다.
활동 반경이 넓지 않은 데다, 줄곧 방에서만 생활했던 여자였으니 어디 무모한 짓을 하다 다친 것도 아닐 터.
그렇다면 그녀의 손목을 그렇게 만든 범인은 뻔했다.
‘멍이 들었다고.’
돌연 칼릭스가 방향을 바꾸어 걷기 시작했다. 통로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그의 걸음에 약간의 조급함마저 묻어났다.
“전하, 오셨습니까.”
단숨에 아내의 방이 있는 복도에 다다랐다. 그를 발견한 기사들이 허리 숙여 예를 갖추었다.
“비전하께선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상관없어.”
대공의 성정을 익히 아는 기사들이 지체없이 문을 열었다. 이 대공성에 그들의 주인이 가지 못할 곳이 있던가. 그게 설사 대공비의 침실이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자마자 칼릭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다신 오지 않으리라던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고작 하루 만에 다시 찾은 아내의 방이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갈하고 차분한 인상을 주는 응접실을 단숨에 지나쳐, 눈 깜짝할 새 침실로 이어지는 입구까지 다다랐다.
거침없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춘 건 그때였다.
어째서인지 쉬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왠지 함부로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침실이었다. 창문이 죄다 닫히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쳐진 방 안은 달빛이 들던 어제와 달리 무척 어두웠다. 작은 미등 하나만이 희미한 불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커다란 침대 위, 살짝 솟은 이불 산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무도 없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마침내 칼릭스가 움직였다. 미약한 불빛에 의지한 걸음이 침대의 머리맡까지 느리게 이어졌다.
“…….”
칼릭스가 이 밤중에 그녀의 방을 찾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의 손을 덮을 정도로 긴 나이트가운의 헐렁한 소맷자락을 살짝 들추었다.
동시에,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얼굴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
“……빌어먹을.”
칼릭스가 흐트러짐 하나 없던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리며 나지막한 욕설을 뇌까렸다.
새하얀 손목에 검붉은 멍 자국이 선연했다. 비록 한쪽 손목만을 확인했으나 다른 쪽은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제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검을 쥐는 사내의 것이라곤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흉터 없이 매끈한 피부가 눈에 비쳤다. 그러나 칼릭스는 그 손이 한 짓을 알고 있었다.
본래의 형체와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이의 피를 묻힌 손. 종종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흉측하고 불쾌하여 욕지기가 치밀기도 했다.
그런 손으로 아내를 위협하고 상처입혔다.
초야를 거부했다는, 겨우 그 작은 이유 하나만으로.
칼릭스의 눈이 재차 아셀라의 손목으로 향했다. 앙상하리만치 말라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의 손아귀에 갇혀 희미한 신음성을 흘리며 바르작대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지경이 되도록…….’
칼릭스가 침음을 삼켰다. 주먹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뼈마디가 희게 불거져 나왔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이었다. 그는 분노에 눈이 멀었고, 겁에 질린 그녀를 다치게 했다.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눈물만 떨구는 여자에게 멸시 섞인 폭언마저 해댔다.
신분, 완력,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제게 반항조차 못 할 아내에게 그래선 안 되었다. 너무도 비열하고 파렴치하지 않나.
제가 혐오스러웠다. 스스로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제발,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세요.’
‘아내로서 의무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 세워지고도, 아셀라는 그를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기회를 달라 사정했다.
‘…….’
칼릭스의 시선이 잠든 아내를 향했다.
창백한 얼굴이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야위어 보였다. 눈가가 살짝 붉어진 채 부풀어 올라 있었고, 이곳저곳이 깨물려 터진 입술은 성한 부위를 찾기 힘들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 지나치게 파리했다. 아침에 보았던, 또렷하게 선을 그은 눈매와 복숭아빛으로 곱게 물들인 뺨, 색을 입혀 윤기가 흐르는 입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해가 뜨길 기다렸다는 아셀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밤 그가 방을 떠나 버린 뒤, 그녀는 내내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긴장하거나 두려울 때마다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였나.’
곱게 치장한 건 그녀가 할 수 있었을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함께 밤을 보내 달라고 청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여겼을 터다.
겨우 용기를 내어 말했을 아내에게 제가 무어라 답했던가. 낯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저열하기 짝이 없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정작 더 큰 잘못을 한 건, 그래서 사과를 건네야 할 사람은 그였는데도.
칼릭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아셀라를 내려다보았다.
수척한 얼굴을 보자 날카로운 바늘이 꿰뚫은 것처럼 그의 심장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밀려드는 죄책감과 함께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낯선 감정이 희미하게 일었다가 사그라들었다.
핼쑥한 얼굴과 바짝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칼릭스가 의자를 당겨와 아내의 침대맡에 앉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자그마해서인지 유독 가냘파 보이는 여자였다. 그렇지않아도 마르고 여위었는데, 심하게 마음고생까지 했으니 당장 병에 걸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이마에 손을 뻗은 건 지극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주치의를 불러서-’
‘언니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요.’
일순 뇌리를 스친 말에 칼릭스가 멈칫하고 말았다.
결혼식 날, 안토니에게 맞은 얼굴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게 될까 봐 떨던 아셀라가 생각났다. 베일을 씌워주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던 모습도 함께.
아무리 대공저의 주치의라고 하나, 그녀는 상처를 드러내는 걸 수치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칼릭스는 그 선택지를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차라리 오늘은 내가 곁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칼릭스가 아셀라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멍든 부위를 덧그리듯 매만졌다.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놀라 기겁했을,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동작이었다.
그 순간, 아셀라가 몸을 움찔거리며 희미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흑…….”
혹여 깨어났나 싶어 얼른 얼굴을 살폈으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결에 무심코 낸 소리인 듯하여 칼릭스가 도로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아셀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자, 잘못…… 했어요…….”
“아셀라?”
자그마한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칼릭스가 당혹감을 느끼며 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악몽 속에서 헤매는 아내에게 닿지는 못했다.
“……아파요…….”
“아프다니, 어디가―”
“때리지…… 마세요…….”
“……!”
더듬거리며 잇는 말 사이에 흐느낌과 신음이 뒤섞여 있었다. 창백한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칼릭스가 가위에 눌리는 아셀라를 깨우려 어깨를 붙잡았으나, 손이 닿기 무섭게 그녀의 몸이 극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제발…… 으윽!”
빌어먹을, 다물린 잇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그자의 꿈을 꾸고 있었나.’
그것도 필립에게 학대당하던 꿈을 꾸는 게 분명했다.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은 손의 마디마다 희게 도드라져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어서 깨우지 않으면…….
“아셀라!”
그러나 칼릭스의 부름은 되레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아셀라가 화살 맞은 새처럼 파드득거리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아파, 아파요…… 흐윽…… 놔주세요…….”
칼릭스가 불에 덴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뗐다. 동시에 기억 속의 어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놔, 놔줘요! 싫어!’
‘내 몸에 손대지 마!’
백지장처럼 희게 질려 절박하게 도리질하던 얼굴이 지금과 똑 닮아 있었다.
‘설마.’
머릿속을 관통하는 깨달음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강렬했다. 칼릭스가 몸을 굳혔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서늘한 진실이 눈앞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지난밤, 아내의 이해할 수 없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제가 잘못…… 용서를…….”
“아니야.”
칼릭스가 아셀라를 끌어안아 제 품속에 가두었다. 조금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댄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아셀라가 놀라 바르작댔으나 칼릭스는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나이트가운이 축축했다. 얇은 천 너머로 살집이라곤 하나도 없는 등이 만져졌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미친 듯이 쿵쿵대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맞닿은 가슴께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발…….”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칼릭스의 가슴에서 아릿한 파동이 일었다. 전쟁터를 휘저으며 온갖 상처와 고통엔 이골이 난 그였으나, 이 미묘한 아픔은 너무도 낯설고 이상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49화
“아무도 그댈 해치지 못해.”
칼릭스가 아셀라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곤 같은 말을 거듭 속삭였다. 그녀와 동생은 안전하며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마른 등을 도닥거리는 손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했다.
시간이 흐르자 아셀라의 바둥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제 박자를 못 찾던 심장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간헐적인 몸의 떨림이 잠시 이어지다 마침내 그녀가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셀라의 호흡이 고르게 변한 이후에도, 칼릭스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한참 뒤에야 몸을 떼어낸 그가 아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뉘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온 침구를 끌어당겨 가냘픈 어깨까지 야무지게 덮어주었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은빛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칼릭스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훑듯이 쓸어냈다.
‘…….’
잠든 아내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에 채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일렁였다.
* * *
칼릭스가 아셀라의 침실을 나선 때는 동이 트고 나서도 조금 더 지난 시각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물론,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한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은 칼릭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했다.
“함구하라.”
“예, 전하.”
칼릭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함구령을 내렸으니 제멋대로 입을 놀려 명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치들은 없을 터.
그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셀라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할 게 뻔했다.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창백해져선 몸을 잔뜩 움츠러뜨릴 정도로 그녀는 자신을 무서워했으니까.
희뿌연 새벽빛이 내려앉은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이 곧았다. 긴 통로를 지나 다른 건물로 들어선 그가 집무실과 이어지는 코너를 막 돌았을 때였다.
제 주인만큼이나 부지런한 대공의 가신이 깍듯한 인사로 칼릭스를 맞이했다.
“편히 침수 드셨습니까, 전하.”
가벼이 고개를 까닥인 칼릭스가 라이젠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의 풍경이 지난밤 그가 아내를 찾아가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칼릭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 내팽개쳤던 서류가 책상 위는 물론이고 바닥까지 흩뿌려져 있었다는 의미였다.
라이젠이 놀란 눈으로 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출입한 자들을 확인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한 일이다.”
“전하께서요?”
라이젠의 눈이 믿기지 않는 듯 크게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은 뭔가가 흐트러지거나 깔끔하지 못한 것을 싫어했다. 업무를 처리할 때도 거의 결벽 적이리만치 서류를 차곡차곡 보기 좋게 쌓아놓곤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라이젠이 답지 않게 질문을 입에 올렸다. 도무지 제 주인의 행동이라곤 믿기지 않았던 탓이었다.
물론 칼릭스가 답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간밤에 있었던 여러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지난밤 우연히 보게 된 건 아마도 그녀가 끝까지 감추고 싶었을 치부였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던 아셀라의 얼굴이 뇌리에 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칼릭스가 몸을 소파 등받이 쪽으로 기울였다. 새벽 공기 탓에 등에 닿는 가죽의 표면이 서늘했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짤막한 명령을 내렸다.
“신관을 불러라.”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아니다.”
제 손목이 다친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랐다던, 아내의 바람을 떠올리며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전신 회복술을 할 수 있는 신관으로.”
라이젠이 멈칫했다. 그건 신성력 치료 비용이 그 효과만큼이나 비싸서는 아니었다. 그의 주인, 칼릭스 베네비토에게 그깟 치료비 따위는 드넓은 바다의 물 한 방울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적은 돈이었다.
대공은 쓸데없는 일을 싫어했다. 대부분의 일에 무신경했고 타인에 무관심했다. 그를 성가시게 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치워버리는 성미였다. 그런데.
늘 싸늘하고 비정하던 붉은 눈에 아주 미미하지만,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이렇게 안위를 걱정하는 대상은 아마도…….
“먼젓번의 신관이 고위 신관이었다지. 그자를 불러. 가능한 한 빨리.”
“명 받듭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냉기가 풀풀 흐르던 대공 부부가 아니었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주군이 일방적으로 화를 냈던 것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기사단 전원이 초토화되었을 만큼 대공이 진노했었다. 그 상황에서 눈치 없이 입을 놀렸던 지크는 지금 반쯤 시체가 되어 자리보전 중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신관을 부르라 명하던 주인의 말투에선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늘 빙하처럼 냉정하던 얼굴도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두 분이 그새 화해하셨나?’
그가 모르는 지난밤, 대공과 안주인 사이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당분간 내성의 일은 네가 관리하라.”
“당분간, 말씀입니까?”
“아직 아셀라가 도맡기엔 힘들 거다. 이곳에 적응한 다음 시작해도 늦지 않아.”
라이젠이 귀를 의심했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명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가까스로 주인의 말에 답한 라이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국법상 유사시엔 안주인이 가주를 대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베네비토 가문만은 달랐다.
전통적으로 대공비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대공의 가신들이 성의 안살림까지 도맡았다.
그런데 대공은 마치 내성의 관리 권한을 모두 대공비에게 일임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건 지금껏 베네비토 가문에서 단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던 일이었다.
‘전하께선 무슨 생각으로…….”
라이젠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주군은 분명 쓸모와 필요를 점쳐 지금의 대공비와 결혼했다. 아내를 들이면서 얼굴 한 번 보지 않았을 정도였다. 결혼이라기보다는 사들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양부에게 오랜 학대를 받아온 건 오히려 기꺼운 조건이었다. 역대 대공들과 마찬가지로 칼릭스 역시 제게 감히 기어오르거나 목소리를 낼 아내를 원치 않았다. 아셀라가 선택된 건 그 탓이었다. 대공비에 걸맞은 신분까지도 더할 나위 없었다.
적당히 대공비의 자리에 앉혀놓을 얌전한 인형.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 완벽한 혈통의 후계를 낳을 여자. 만일 이능이 있다면 조금 더 이용 가치가 높아질,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만 이유 모를 예외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위화감을 설명하기 위한 온갖 추측이 라이젠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댔다.
‘혹시 전하께서…….’
그의 생각이 거의 정답에 다다랐을 때.
“가정교사는 어떻게 되었지?”
칼릭스의 질문이 떨어졌다. 메리엘의 새 가정교사를 구하라는 명이 떨어진 지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라이젠은 주인의 하문에 주저 없이 답했다.
“적당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믿을 만한 자인가?”
“여자일 것. 나이는 상관없으나 신체 건강하고 입이 무거울 것. 실력이 출중할 것. 마지막으로 필립 샤르투스와 연이 없을 것. 모든 조건에 부합합니다.”
칼릭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좋아. 누구지?”
“전하께서도 아시는 사람입니다.”
“마고 로메인이로군.”
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 흔치는 않았기에 정답을 맞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칼릭스의 단정한 눈매가 치켜 올라가는 걸 본 라이젠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로메인 부인만큼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시기가…….”
“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 알고 있다.”
그만큼 유능한 가정교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름난 이들은 모두 쟁쟁한 가문에 스카우트되어 지금쯤 막바지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아카데미 정치학부 수석 졸업생인 데다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던 마고였다. 칼릭스 역시 어느 정도는 마고를 염두에 두던 참이었다.
‘나쁘진 않지.’
동생의 가정교사라지만 아셀라와도 접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아무나 데려다 앉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설프게 사람을 들이느니 확실한 제 사람을 밀어 넣는 편이 나았다. 그런 점에서 마고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짧은 계산을 마친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허락하겠다.”
* * *
황제, 페르난데의 심기가 가히 좋지 못했다. 최근 들어 그렇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으나 오늘은 유독 더 그러했다. 이는 베네비토 대공성에 다녀왔던 전령이 보고한 내용과 무관하지 않았다.
“대공이 해독제를 순순히 내어주지 않을 거라 예상하셨잖습니까, 폐하.”
던컨의 말에도 페르난데의 기분은 쉬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 베네비토와 관련된 일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무엇이든 제때 처리되는 법이 없었고 매번 돌아가거나 시간이 지체되곤 했다. 그 와중에 속을 긁어놓는 건 기본이었다.
그때, 새 한 마리가 창문 밖에서 파닥거렸다. 온통 새까만 깃털에 붉은 눈.
“칼릭스 베네비토의 마법 전서구가 아닙니까.”
톡톡.
새의 부리가 유리창을 열심히 두드려댔다. 페르난데가 금방이라도 새를 죽일 듯이 날 선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물론, 애초에 생명체가 아니었으니 죽일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일까요?”
수신을 원치 않으면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던컨은 페르난데가 대공의 연락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행보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황제가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데가 제 쪽으로 손을 까닥했다. 그러자 그대로 창문을 통과한 마법 전서구가 그의 책상 위에 둘둘 말린 쪽지 하나를 톡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