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71)

은은하게 올라오는 차향이 내내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주는 듯하여, 아셀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마고.”

“별말씀을요. 저희는 밖에서 대기할 테니 필요하신 게 있거든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마고가 협탁 위에 놓인 동그란 수정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종의 설렁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순도 높은 마정석에 마법까지 걸어야 했기에 원체 귀하여 황궁에서나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놀랍게도 대공성 곳곳에 이런 수정구가 있었다.

“맛있어!”

메리엘이 초코칩이 콕콕 박힌 쿠키를 크게 베어 물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메리엘, 세 개만 먹는 거다?”

“이렇게 많은데?”

“단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못 써.”

“칫!”

실망감에 메리엘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투덜거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씩씩해졌다.

커다란 쿠키 하나를 집어 아셀라에게 쑥 내밀기까지 했다.

“언니도 먹어! 맛있는 건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

“고마워.”

아셀라가 메리엘에게서 쿠키를 건네받으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잠깐만!”

메리엘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눈썹을 한데 모으곤 무언가를 확인하듯 살폈다.

잠시 뒤, 해맑던 얼굴이 굳어지더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이의 입에서 충격받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니 손목이 왜 그래?”

긴 소매 안쪽, 아셀라의 손목이 검붉게 멍들어 있었다.

그제야 아셀라도 손목의 멍 자국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꽉 쥐었다가 뗀 모양새였다.

언제, 어쩌다가?

되돌이켜본 끝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대공이 도망치려던 그녀를 붙잡았을 때, 강한 손아귀 힘 탓에 이리된 모양이었다. 평소 작은 부딪힘에도 멍이 잘 드는 피부였던지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당시에는 너무 놀랐던 탓에 아픈 줄도 몰랐고, 그 뒤로는 정신이 없어 문득 통증이 느껴진 것도 같았으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셀라가 급히 옷자락 사이로 손목을 감추며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도 안 돼! 내가 분명히 봤어. 멍이 들어 있었단 말이야!”

“탁자에 부딪혔어. 며칠 지나면 나을 테니 너무 놀라지 않아도 돼.”

“그래도…….”

어느새 메리엘이 아셀라 곁으로 다가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내가 호 해줄게. 헤르니야 여신님께 기도도 드리고.”

아프거나 다친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진심으로 여신에게 기도하면 빨리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괜찮아, 메리엘.”

“그러지 말구. 응?”

동생이 걱정하는 게 싫어 가능하면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메리엘이 소맷부리를 붙잡으며 집요하게 졸라대는 통에, 결국 아셀라가 한쪽 손목을 내주었다.

“아프겠다.”

검붉게 변한 살결을 안타까이 매만지던 메리엘이, 아셀라의 손목을 통통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헤르니야 여신님. 우리 언니 빨리 낫게 해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주시고요.”

메리엘의 기도가 이어졌다.

“감기에도 안 걸리게 해주세요. 언니는 추위를 많이 타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감기에 잘 걸려요. 열이 심하게 나서 며칠이나 끙끙 앓아요. 그래서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도 자주 못 나가요. 그러니까 내일도, 모레도, 그 담날도 계속 따뜻하게 해주세요.”

자신의 사소한 것까지도 기억하는 동생의 마음 씀씀이에 아셀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메리엘의 기도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46화

“그리고 언니가 대공 전하랑도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싸우지 않고 항상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요. 언니 닮은 예쁜 아가들도 낳아서 행복하게…….”

“메리엘!”

당황한 아셀라가 엉겁결에 메리엘을 소리쳐 불렀다. 기도에 열중하던 메리엘이 그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왜, 언니?”

메리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셀라가 요령 좋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만하고 이제 쿠키 먹자.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하지만 아직 기도가 안 끝났는데?”

“지금도 충분해. 벌써 몸에 힘이 도는 것 같은 기분인걸?”

“정말? 헤르니야 여신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그럼. 당연하지.”

아셀라가 다정스레 답하며 쿠키 접시를 메리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제야 아이가 심각하던 표정을 풀고 헤헤 웃으며 다시 의자에 폴짝 올라가 앉았다.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엇갈리게 흔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언니가 얼른 나으면 좋겠어. 멍들면 살짝만 눌러도 얼얼하고 아프잖아. 하필 손목은 잘 보이는 곳인데…… 어?”

갑자기 메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어어?”

“메리엘, 왜 그래?”

이제 메리엘은 입까지 떡 벌리고 있었다.

아셀라의 눈이 천천히 동생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찻잔 손잡이를 잡느라 탁자 위로 올라간 그녀의 손목이었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소매가 어느새 조금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 전 메리엘을 의식하여 가렸던 손목이 도로 드러나고 말았다.

아셀라가 다시 소맷자락을 덮어 눈처럼 희고 투명한 손목을 가렸다.

‘잠깐, 희다고?’

떠오른 생각에 아셀라가 멈칫했다.

‘잘못 본 걸 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소맷부리를 걷어 올리는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살짝 들어 올려지고, 안을 확인한 그녀의 눈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이 일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목에 선명하던 멍 자국이 훨씬 희미해져 있었다. 살짝 만져보니 통증도 줄어 있었다.

메리엘이 손대지 않았던 다른 쪽 손목과 비교하자 차이가 확연히 보였다. 마치 신관의 치유를 받은 듯한 변화였다.

‘치유력?’

아셀라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려 동생을 쳐다보았다. 메리엘도 그녀처럼 놀란 것인지 놀란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메리엘 너 혹시…….”

아셀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을 맞은 듯한 깨달음이 강타했다. 각오했던 일이었음에도 시기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아직, 아직 생일이 한 달이 넘게 남았는데…….”

그러나 이 놀라운 일이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였다.

메리엘이 이능을 각성했다.

12. 낯설고 기이한 파동

점점 밤이 깊어지는 시각, 반짝거리는 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메리엘이 홀로 창가 테이블에 앉아 낮의 일을 곱씹었다.

‘언니 안색이 너무 안 좋았는데 괜찮은 거겠지?’

메리엘이 치유의 이능을 사용해 상처를 치료하자, 아셀라는 그녀가 각성했음을 깨닫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면 돼. 누구에게도 이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고, 티도 내선 안 돼. 알겠지?’

‘응, 언니.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접촉도 삼가는 편이 좋겠어. 너도 모르게 치유의 이능을 또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불편하겠지만 네가 조심할 수밖엔 없어.’

아셀라의 당부가 거듭 이어졌고, 메리엘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언니를 속인 건 미안하지만…….”

사실 메리엘의 이능 각성은 오늘 처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그러나 메리엘도 아셀라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던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아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 이능 결정을 못 했는걸.”

오늘 메리엘이 아셀라의 팔목 상처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그녀가 이능을 각성하기 시작했다는 비밀은 더 오래 지켜졌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엘은 도저히 아셀라의 상처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불완전한 힘 탓에 겨우 한쪽 손목을 반쯤 치료한 게 고작이었다. 메리엘이 아쉬움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분에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벌일 일을 찬찬히 짚어보던 그녀의 귀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네!”

냉큼 대답한 메리엘이 후다닥 뛰어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가 침대 옆 테이블에 물병과 잔을 놓고는 메리엘의 침대보를 목까지 바투 당겨 덮어주었다.

“그럼 쉬세요, 아가씨.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수정구로 호출하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아이의 씩씩한 대답에, 시녀가 저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메리엘이 싱긋 따라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나직한 음성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자, 그럼 알려주세요.”

“아가씨?”

돌연 바뀐 음성에 몸을 돌리려던 시녀가 깜짝 놀라 메리엘을 다시 쳐다보았다.

“어떤 걸 알려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일순 메리엘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조종의 이능이 개방되었음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물론 평범한 사람인 시녀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대공 전하께선 남은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메리엘의 눈에서 빛이 튀었다. 시녀의 동공이 커지더니 이내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이능의 힘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이제 시녀는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메리엘의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알아봐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정보를 아는 사용인들을 발견하면 눈을 마주치면 돼요.”

“네.”

완전히 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시녀가 방을 나갔다. 문밖으로 시녀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다 사라지자, 메리엘의 눈에서 천천히 이채가 사그라들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가 도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툴툴댔다.

“조금만 더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조종의 이능은 메리엘이 오늘 아침에서야 처음으로 ‘경험을 시작한’ 힘이었다.

“나쁘진 않네. 꽤 유용한 힘이야. 하지만…….”

메리엘이 조종의 이능과 관련된 정보를 다시금 가늠했다.

“사용하려면 한 명씩 눈을 마주쳐야 하는 데다 유지되는 시간도 짧아.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겐 듣질 않으니 사용 범위도 제한적이고.”

메리엘이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힘은 포기하는 편이 낫겠어.”

샤르투스 가문의 이능 각성.

이와 관련된 정보는 샤르투스의 가주에서 다음 대의 가주에게로만 극비리로 전수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거라곤 그들이 여신 헤르니야의 축복을 받았으며, 샤르투스 가문의 시작이 제국의 건국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 정도였다.

이렇듯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각성과 동시에 필요한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머잖아 다른 힘들도 써볼 수 있으려나?”

샤르투스의 이능에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그들의 능력이 개인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는 점이었다. 마법, 환각, 치유력, 재생능력, 조종술, 독심술, 정령술 등 이능의 종류도 다양했다.

“좀 더 강력한 힘이면 좋을 텐데. 둘 이상이라면 더 좋고.”

각성 초기에는 동조율이 높은 이능들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경험을 제공했다. 직접 힘을 써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이능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반면 동조율이 낮은 이능들은 아예 경험조차 불가능했다.

메리엘이 현재 경험 중인 이능은 치유력, 독심술, 조종술이었다.

발현 가능한 이능들이 모두 나타난 뒤, 최종적으로 이능을 결정하고 나면 나머지 힘들이 소멸했다. 때때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가주의 경우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구사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아델 샤르투스가 이에 해당하는 강력한 이능자였다.

“아무래도 예지력은 무리겠지?”

예지력.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월적인 힘.

그렇기에 예지의 이능은 샤르투스에서도 드물게 발현되는 능력이었다. 지금까지 예지의 이능을 가졌던 사람은 초대 샤르투스 후작과 아델, 단 둘뿐이었을 정도로.

그렇기에 메리엘 역시도 크게 기대하진 않고 있었다.

“치유력도, 독심술도 좋은 힘이지만, 이런 이능으론 언니를 지킬 수 없어.”

메리엘은 강력한 힘을 원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그렇다면 역시 마법이 가장 나으려나.”

본인의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마법은 이 대륙에 실존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역사서에 기록된 대마법사들이 실제로 행했다는 마법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패배가 확실해진 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바꾸기도, 날씨를 조종하기도, 심지어는 강의 흐름까지 돌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경이로움과 함께 신을 마주하는 듯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그런 힘이 필요해.”

그래야만 하나뿐인 언니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 언니가 포기했던 수많은 것을 되찾아줄 수 있을 테니까.

‘동생이라도 살려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우습기도 하고, 좀 안돼 보이기도 하고.’

아셀라를 두고 샤르투스의 사용인들이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그 목소리에 배어 있던 음습한 적의와 소름 끼치는 악의를 떠올린 메리엘이 자그마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언니는 언니를 위해 살아야 해.”

아셀라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메리엘이었다. 메리엘도 알았다.

어릴 때는 다정다감하고 착한 언니가 잘해주는 게 그저 좋았다. 아무리 아끼던 물건이라도 갖고 싶다고 말만 하면 망설임 없이 내주었고, 놀이할 때도 하자는 대로 들어주곤 했다. 무서운 양아버지 앞에 대신 나서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언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단념해야 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야만 했는지.

떨어져 지냈던 지난 시간, 메리엘이 배움에 힘썼던 건 그래서였다.

언니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가엾은 언니를 그 끔찍한 감옥에서 탈출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고작 안토니 같은 자식을 후작위를 주려고 언니를…….’

메리엘이 이를 앙다물었다. 필립 부자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셀라가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하고 가문을 빼앗았다. 수년간 학대하며 지옥 속에서 살게 했다. 그마저도 모자라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내에게 팔아넘겨 버렸다.

‘그런데도 언니는…….’

그러나 아셀라는 결혼을 받아들였다. 원치 않으면서도 선택했다.

‘나 때문에.’

필립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자신 때문에.

눈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자, 메리엘이 팔로 얼른 눈가를 훔쳤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셀라의 결혼을 앞두고 샤르투스 후작저로 돌아왔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도주하는 대공비 47화

‘많이 컸구나, 메리엘.’

삼 년 만에 마주한 그리운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저를 위해 얼마나 의연하고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는지.

그래서 마음 아팠다.

가문을 되찾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언니가 좋은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으니까.

다정하고 배려심 깊고, 무엇보다 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셀라의 결혼식 날, 메리엘은 기쁜 척 생글생글 웃으며 귀빈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식이 시작되자 아셀라를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스스로 지옥 불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언니를 생각하자 목이 졸린 듯 숨이 막혔다.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

필립에게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 하나를 던져주고, 언니를 사들인 남자.

그가 미웠다. 사랑 한 줌 없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야 할 언니가 가여웠다. 필립도, 대공도,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결혼식을 죄다 망쳐버리고 싶었다.

‘이로써 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의 성혼을 선언합니다.’

끔찍한 내용을 담은 대신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메리엘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것도 그때였다.

아셀라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긴장하여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제 아내를 내려다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 선득한 핏빛의 붉은 눈.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남자였으나, 메리엘을 소스라치게 만든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황금…… 빛?’

메리엘이 제 눈을 의심했다.

만일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면 분명 잘못 본 것이라 치부해 버렸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셀라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몸 주변으로 황금빛 기류가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황금빛. 애정을 뜻하는 빛깔.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동생을 향해 아셀라가 달려 나오던 때, 그녀의 주위에 만들어지던 기류와 똑같은 색이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

메리엘이 사용하는 독심술은 불완전했다. 임시로 사용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거라곤 상대가 다른 이에게 품는 감정의 색깔 정도였다. 그나마도 애정, 증오, 두려움 등 일부 감정에 불과했다.

‘아냐. 착각했을 리가 없어.’

아주 희미했으나 대공에게서 흐르던 색은 분명 황금빛이었다. 좋아하는 색이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러나 대공의 곁에 있던 아셀라에게서 흘러나오던 감정은 진하디진한 붉은색.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메리엘이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깨닫기까지는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공국으로 이동하던 중에 마수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메리엘은 양팔이 붕대로 칭칭 감긴 아셀라를 품에 안고 막사로 걸어 들어가는 대공을 보았다. 그에게선 더 진해진 황금빛 기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대로 아셀라의 붉은 기류는 조금 연해져 있었고.

‘어쩌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메리엘이 기대 비스름한 것을 품기 시작한 건.

공국으로 향하는 일주일간의 여정 동안, 메리엘의 신경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그녀는 행렬이 멈추어 설 때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밖을 살폈다. 그러고는 집요한 눈빛으로 칼릭스를 주시했다.

‘확실해.’

대공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라이젠이라든가 하다못해 대공성의 기사라도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선 좀처럼 색깔을 관찰하기 힘들었다. 그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아주 가끔, 대공의 주위로 희미한 황금빛이 흐를 때가 있었다.

‘언니를 보고 있어.’

그럴 때면 칼릭스의 시선이 여지없이 아셀라를 향해 있었다.

아셀라는 주로 마차 안에서만 머물렀으나 간간이 바람을 쐬러 짧게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마다 칼릭스가 그녀를 지켜보곤 했다.

은은하게 감도는 황금빛 기류와 함께.

유심히 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기류에 섞여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연하고 흐릿했다.

아마 대공 자신도 모르고 있을 감정.

‘언니가 대공 전하를 너무 무서워해서 걱정이긴 하지만…….’

아셀라가 대공을 좋아하게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어쨌거나 칼릭스 베네비토가 제 아내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명확했으니까. 이는 아셀라에겐 두말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메리엘은 언니를 위해 이 상황을 아낌없이 이용하기로 했다.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메리엘이 얼른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는 시녀를 안으로 들였다.

“알아냈나요?”

“네. 전하께선 지금…….”

시녀에게서 정보를 들은 메리엘이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절 숨겨서 밖까지 데려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시녀의 풍성한 치맛자락 속에 몸을 숨긴 메리엘이 방을 빠져나왔다. 기사들이 아셀라와 메리엘이 머무르는 방 앞 복도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조종의 이능을 써볼까도 생각했으나, 수가 여럿인 데다가 한 명이라도 실패할 경우 아무 소용이 없었기에 그만두었다.

“아가씨께선 주무십니까?”

“네.”

“알겠습니다.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 쉬십시오.”

호위기사라 한들 주인 허락 없이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들은 이제 메리엘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빈방을 지킬 것이다.

몇 개의 복도와 계단을 지나치는 동안 사용인들과 마주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시녀의 임기응변으로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아가씨, 나오셔도 됩니다.”

정원으로 곧장 이어지는 출입구였다. 메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수고했어요. 이제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서 자도록 해요.”

“네.”

이제 시녀가 잠든 뒤에 이능을 풀기만 하면 되었다.

시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남은 기억이라곤 어린 아가씨를 위해 자리끼를 마련하고 이불을 갈무리해 덮어준 일이 전부가 될 터. 시녀에게 대공의 위치를 말해준 자도 마찬가지였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메리엘 아가씨.”

인사를 마친 시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메리엘이 마침내 몸을 돌렸다. 아이의 눈에 의욕이 넘실거렸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메리엘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리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의 정원은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 고요했다. 발밑에 일정한 높이로 고르게 깔린 잔디의 감촉이 느껴졌다. 은은한 수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메리엘이 우뚝 멈추어 섰다.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온실 정원 입구였다.

‘불도 안 켜고 뭐 하는 거람.’

온실 입구에 다다른 메리엘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칼릭스가 그새 기척을 알아채고 문을 연 탓이었다.

검까지 꺼내 들고.

칼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어둠 속에서 비추는 달빛만으로도 시퍼렇게 빛났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을 정도였다. 덕분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기가 한결 더 쉬워지긴 했다.

“저, 전하…… 무, 무서워요.”

한편, 대상을 확인한 칼릭스가 멈칫했다.

달빛을 건져 한올 한올 뽑아낸 듯한 아름다운 은발.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푸른 눈망울.

그는 저도 모르게 아셀라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제가 쏟아내는 분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여자를.

“예상 못 한 손님이군.”

곧바로 검을 집어넣은 칼릭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 밤늦은 시간에 온실까지는 웬일이지?”

“그게 실은 잃어버린 게 있어서…… 정원에 떨어뜨린 것 같아서요.”

“영애가 직접 말인가? 호위는 어디 있나?”

칼릭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메리엘이 다급히 손에 쥐고 있던 브로치를 들어 올리며 말을 돌렸다.

“이제 찾아서 괜찮아요!”

나이가 어린 것의 장점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행동조차 이유를 만들어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객기 어린 장난이었나 싶어 칼릭스가 매서운 눈매를 풀었다.

메리엘이 해맑게 웃으며 냉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도 온실에 놀러 오신 건가요? 저는 아까 언니랑 여기에 놀러 왔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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