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는 안쪽이 전혀 보이질 않으니 안심하세요.’
바깥이 죄다 비치는 투명한 벽을 보고 아셀라가 화들짝 놀라자 마고가 설명했었다.
“밖에선 보이지 않아.”
아셀라가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조심스럽게 걸친 것을 벗고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
싱싱한 장미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욕조 안, 입욕제를 푼 따뜻한 물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뜨끈뜨끈한 물속 깊숙이 몸을 밀어 넣자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온기에 서서히 풀어졌다.
“금방이구나.”
벌써 하루가 지났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메리엘의 생일이 곧인데 아직도…….”
공국으로 오는 내내 고민을 거듭했지만, 도무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자그마한 한숨이 넓은 욕실 안에 안개처럼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을 차린 아셀라는,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옆으로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옮겨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오래 있었어.’
아셀라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더운 물속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탓에 작은 현기증이 일었다. 노곤해지다 못해 눅진해진 몸을 이끌고 욕실 한편에 놓아두었던 목욕가운에 팔을 꿰었다.
어쩌면 마고는 지금껏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일 오전은 푹 쉬라고 일러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막 욕실을 빠져나오던 그때.
“……!”
아셀라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겨우 억눌렀다.
누군가가, 그녀의 침실에 있었다.
* * *
칼릭스가 소파에 기대어 느른한 동작으로 다리를 꼬았다.
그의 방만한 자세에서 태생부터 권력자였던 이의 오만함이 가득 묻어났다.
황제의 전령을 앞에 세워두고 취하는 행동이라기엔 가히 불경스러웠으나,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움이었다.
“대공 전하.”
떨리는 부름에 칼릭스가 전령을 응시했다. 무미건조한 시선에 기묘한 서늘함이 감돌자 전령이 움찔거렸다.
어차피 황제의 목적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며칠 전 당한 독의 해독제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거, 왔으면 빨리 말하쇼. 우리 주군은 바쁘시니까. 신혼이라 부부끼리 이것저것 할 일도 많은데 시간 끌지 말고…….”
“지크.”
라이젠의 매서운 눈빛에 지크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물론 황제가 보내온 이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검집을 빙빙 돌리는 건 잊지 않았다.
혹여나 제게 닿을까 싶어 두어 걸음 뒤로 무른 전령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전하께 하사하시는 선물입니다.”
일순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싸늘한 비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전령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열게.”
전령의 손짓에 황실 기사가 가져온 커다란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은제 케이스 수십 개가 상자 안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라이젠이 케이스 하나를 집어 들어 안의 가루를 확인하고는,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늘 전하의 건강을 염려 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금시초문인데.”
한껏 빈정거리는 말투에 황제의 전령과 기사들의 얼굴에 순간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그걸 놓칠 칼릭스가 아니었다.
한 폭의 명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갑자기 답지 않은 일을 하니 놀라서.”
그러나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칼릭스가 소파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걸쳤다. 나른한 흑표범 같은 모습은 일견 권태로웠으나 분위기를 압도하는 원초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길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에, 사절단이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래서. 이 ‘하사품’의 대가는 무어라던가?”
황제가 친히 내린 물품을 받고서 보이는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모습이었으나, 그 자리의 누구도 감히 칼릭스를 비난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상황이 불리한 쪽은 안타깝게도 황제였다.
“폐하께서 이르시길, 베네비토의 가보라 전하면 아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웃기는군.”
칼릭스가 새어 나오는 비소를 숨기지 않았다. 지크는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고, 무표정하게 곁에 서 있던 라이젠조차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모았다.
세 사람의 반응에 전령은 언짢음을 느꼈으나,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황제가 그리 말하던가? 가보를 보내라고?”
“그,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은혜의 성의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하셨습니다.”
“은혜라.”
뱀처럼 교활하고 의뭉스러운 자 같으니. 듣고 있던 라이젠이 미간을 찌푸리며 짤막이 황제를 평했다.
가족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황제였다. 그러니 황제가 자신이 독에 당한 일을 비밀로 하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해독제는 베네비토의 가주인 칼릭스에게만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비밀을 아는 자가 있다면 아마 황제의 개, 던컨 리사크 정도일 터.
그러니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상황에서조차, 전령이 하사품 운운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뭔갈 착각하고 있는가 본데.”
칼릭스의 붉고 얇은 입술이 차게 비틀렸다. 싸해진 분위기에 전령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이런 것 따위를 ‘은혜’라고 부르진 않아.”
“전하, 그게 무슨 말씀…….”
“‘거래’라고 하는 거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거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칼릭스의 입장에서는 응해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황제가 들고 온 패가 궁금해서 장단을 잠시 맞춰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시간 낭비였다.
칼릭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이 지루하고도 짜증스러운 대화를 그만 끝내기로 했다.
“선물은 유용하게 쓰겠다 전해.”
그가 성가신 날벌레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그럼 베네비토의 가보는 어찌하시고요?”
전령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멍청한 표정이 떠오르자,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붙인 포식자처럼 칼릭스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내가 왜 그걸 내주어야 하지?”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령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흥분해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가 제 앞의 존재가 대공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어찌 이런 식으로 나오신단 말입니까!”
“언제 달라 했나?”
무표정한 얼굴로 건조하게 말을 내뱉는 사내의 눈빛이 맹수의 것처럼 번득이자, 전령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속이 훤히 보이는군.’
칼릭스의 핏빛 눈이 은제 케이스들을 감흥 없이 훑어내렸다.
일 년은 족히 쓸 분량. 약간 구미가 당기긴 했으나 어차피 황제가 지금껏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보내왔었고 앞으로도 보내와야 할 물건이었다.
본인도 죽고 싶지 않다면.
물론 황제가 너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심산으로 달려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러나 칼릭스는 황제가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탐욕스러운 인간이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지옥문 앞에 서면 무고한 사람 백 명의 목숨을 불구덩이에 던지고서라도 살아남으려 발악할 인간인데.
흥미진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가 별안간 끼어들었다.
“그런데 거, 전령 양반?”
“뭐, 뭡니까?”
“저거 도로 황궁으로 가져가도 되는 거야? 당신 주인 성격에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황제의 서슬 퍼런 분노를 떠올린 전령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죽는 거 아냐?”
지크가 손날을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전령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으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마저 감추진 못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한동안 입만 뻐끔거렸다.
그 모습을 즐거이 감상한 칼릭스가 마침내 최후통첩을 날렸다.
“더 할 말 있나?”
도주하는 대공비 40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도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절단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예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가시는 길 무탈하시길.”
“조심해서 가쇼!”
늘 그랬듯 라이젠이 깍듯한 예로 그들을 배웅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지크가 깐죽댔다. 물론 이 일련의 행위가 사절단을 무척이나 불쾌하게 만들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도 제 할당량만큼의 주접을 마친 지크가 제 부대를 점검해 보겠다며 쌩하니 사라졌다.
라이젠이 대공의 응접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회중시계가 울렸다. 알람을 끄는 라이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칼릭스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 한 번 빠르군.”
매일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울리도록 설계된 알람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칼릭스는 그 익숙한 소리가 진저리쳐질 만큼 싫어질 때가 있었다.
“이 많은 물량을 대느라 황제께서 고생 좀 하셨겠군요.”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닌데 고생은 무슨.”
“어쨌거나 성물을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니까요.”
“그따위 물건에 성물이라는 가증스러운 명칭이 가당키나 하나. 초대 황제도 대단한 악취미를 가졌던 모양이야.”
칼릭스가 신랄한 말로 제국의 건국 황제이자 자신의 시조를 깔아뭉개는 동안, 라이젠이 상자에서 은제 케이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 치 분량이 어제부로 동이 난 터였다. 단 며칠이라도 일찍 보내면 좋으련만, 황제는 늘 약이 떨어지는 날짜에 딱 맞춰 빠듯하게 약을 보내오곤 했다.
그게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무언의 요구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주인은 굽히는 법이 없었다.
“색이 진하고 윤기가 흐르는 걸 보니, 꽤 신경을 쓰신 듯합니다.”
약이 물에 잘 녹았는지 확인한 뒤, 라이젠이 칼릭스의 앞에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휘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돌아가는 찻물을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단단히 다물렸던 입가에 이내 조소를 머금었다.
“황제가 열 좀 받겠어.”
“그러라고 일부러 안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뛸 모습을 생각하니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게 누가 제 아내를 건드리라 했나. 분명 황제더러 그녀에게 관심을 끄라고 경고했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먼저 같잖은 공격을 걸어온 건 황제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받은 건 돌려줘야 직성이 풀렸다.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기꺼이 응대할 수밖에.”
칼릭스가 적당히 식은 차를 목 뒤로 넘기며, 마차를 덮치려는 마수를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전신을 휘감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변이 온통 마수의 사체로 가득했다.
거의 반파된 마차 안, 여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 희미한 안도감이었다.
‘헛소리.’
칼릭스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한껏 비웃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셀라 베네비토.
그저 형식적인 아내였고 철저하게 목적과 쓰임을 따져 데려온 여자였다. 어쨌든 후계는 필요했고 그에겐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다만 자신 외에 베네비토의 이름을 가진 유일한 존재를 공격했으니, 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보복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전하?”
상념에 빠진 그의 귓가에 라이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차를 마저 비운 칼릭스가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치료는 어찌 되었나?”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누굴 가리키는지는 명확했다. 마침 라이젠은 황제의 사절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중, 복도에서 마주친 마고 로메인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흉터 하나 없이 말끔히 회복되셨다 합니다. 지금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메리엘 아가씨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사실, 뒷말은 불필요한 덧붙임이었다. 그러나 칼릭스 또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곤 응접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라이젠이 한 일이라곤 충직하게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소파에 비딱하게 기대앉은 칼릭스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드넓은 대지를 비추던 태양 빛이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사위가 고요해졌다.
라이젠이 길고 긴 기다림을 접고, 마침내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전하, 주제넘을 수 있으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공의 형형한 눈이 저를 응시하자,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오랫동안 주군으로 모셨음에도 그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곤 했다.
“말해.”
다행히 대공의 허락이 떨어졌다. 라이젠이 소리 없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비전하의 침실에 가시는지요?”
11. 어긋난 초야
그리하여 목욕을 마친 칼릭스가 가벼운 셔츠차림으로 향한 곳은 아내의 방이었다.
‘초야니까.’
그가 제 행동에 짤막한 이유를 덧붙였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들은 합법적 부부였고, 초야는 권리이자 의무였다. 귀족의 혼인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가문의 후계를 잇는 데 있었다.
따라서 가주가 정식으로 배우자를 맞이한 뒤 함께 첫날밤을 보내지 않을 경우, 이는 상대에겐 명백한 모욕이 되었다.
배우자에게서 후계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와 진배없는 탓이었다. 가문에서 입지가 땅에 처박히는 건 물론이었다.
가주가 존중하지 않는 배우자의 신세는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과도 다를 바가 없었고, 고용인들이 가주의 배우자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일도 더러 벌어지곤 했다.
물론, 감히 그의 아내에게 그런 오만방자한 짓을 할 정신 나간 사용인들은 없을 테지만.
‘명색이 베네비토의 이름을 가진 여자가 구설에 오르게 할 순 없으니.’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자신의 것에 오명이 붙는 걸 원치 않는 것뿐.
칼릭스가 저답지 않은 행동을 꽤 적당한 이유를 들어 합리화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대공비의 시녀와 기사들이 예를 갖추었다. 그들 중 맨 앞에 선 이지적인 차림의 여자는 칼릭스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와주었군.”
“전하의 명이신데 마땅히 따라야지요.”
마고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3의 카르마를 이끄는 로메인 백작은 일 년에 한두 달을 제외하면 공국의 경계를 이루는 변방에 머물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내 마고 로메인의 덕이 컸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과 수완으로 남편을 대신해 백작가를 이끌었다.
대공성에서 그런 마고에게 연통을 넣은 건 한 달 전.
그녀는 연락을 받자마자 가문의 중요한 일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수족들에게 뒷일을 맡긴 뒤, 대공성에 왔다.
“이 일은 반드시 보상토록 하겠다.”
“아닙니다. 비전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뻣뻣할 정도로 딱딱하나 일 처리 만큼은 정확한 사람이었다. 라이젠의 추천도 있었으나 칼릭스 역시 마고 로메인의 자질을 모르지 않았기에 기꺼이 허락했다.
“비는 안에 있나?”
“예, 전하.”
신방이 아니라 제 침실을 택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첫날밤이니 익숙한 공간이 더 나을 테지. 칼릭스가 아셀라의 선택을 가볍게 긍정했다.
마고가 눈치껏 고갯짓하자, 곁에 있던 하녀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깍듯한 인사와 함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칼릭스가 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한 공간은 그의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잠들었을지도.’
늦은 시간이었다. 긴 여행 탓에 피곤하고 지치기도 했을 터. 기다리다 잠들어버렸다 하여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보폭 넓은 발걸음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뭐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칼릭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의 눈에 비친 건 텅 빈 침대였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에 기둥 침대에 달린 자수 놓인 캐노피가 하늘하늘 흔들릴 뿐이었다.
“아셀라.”
나지막한 음성이 방을 잔잔하게 울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일순, 칼릭스의 뇌리에 불쾌한 가정이 스쳤다.
초야의 거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혼식 때 입맞춤도 피했던 여자였다. 심지어 저더러 싫지 않냐며 넘겨짚기까지 했었다.
상황에 못 이겨 겨우 입맞춤을 받아들이던 모습을 떠올리자, 칼릭스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붉은 눈이 평소보다 짙은 색채를 띠며 깊게 침잠했다.
‘그래서 숨었나.’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불쾌감에 입술을 비틀던 찰나, 침실 오른편의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하, 칼릭스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생각을, 언제 그랬냐는 듯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의 아내는 겁이 많을지언정 대책 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아끼는 어린 동생까지 데려온 마당에 앞뒤 안 가리고 무책임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
닫힌 문 너머에서 참방거리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짧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불로 환하게 밝힌 통로 양옆엔 목욕가운과 잠옷, 세면도구 따위가 가지런히 비치되어 있었다. 그 끝에 욕실과 이어지는 반투명한 유리문이 있었다.
칼릭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뜨거운 공기가 감도는 욕실과 서늘한 통로의 온도 차 탓에 유리문에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안쪽에서 하얀 형체가 어른거리며 움직였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찰박이는 물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칼릭스가 저도 모르게 유리문에 손을 뻗었다가, 문득 제 행동을 깨닫고는 멈추어 섰다.
‘……!’
곧바로 뒤를 돌았다. 따뜻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날씨인데도 몸이 더웠다. 도망치듯 통로를 빠져나와 침실과 이어진 문을 닫자마자 커다란 손을 들어 제 얼굴 한쪽을 감쌌다.
“……미쳤군.”
몸에 불길이 인 것처럼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도 반투명한 유리문 반대쪽에서 흐릿하게 일렁이던 실루엣이 떠올라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뜨거운 한숨이 연신 새어 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단단히 돌았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자 덜 마른 머리칼의 젖은 감촉이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서둘러 그녀를 찾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어쩐지 목이 탔다.
칼릭스가 테이블 위의 와인을 병째 집어 든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41화
문을 여는 순간, 아셀라가 놀란 숨을 훅 들이켰다.
“……!”
마고가 아니다. 다른 시녀들도 아니었다. 침대맡의 희미한 불빛에 일렁이는 느릿한 그림자는 분명 사내의 것이었다.
그것도 건장한 체격의.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침입자? 아니, 그런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물샐 틈 없이 성을 방비하던 대공성의 병사들을 생각한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대공비의 방에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남자.
그런 이는 대공성에 오직 한 사람뿐이다.
“누, 누구…….”
“…….”
그런데도 아셀라가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곤 이 상투적인 반응이었다. 저가 듣기에도 한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져서, 아셀라가 자그마한 입술을 달싹여 뒷말을 이었다.
“여, 여긴 왜…… 어, 어쩐 일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달달 떨렸고 말까지 더듬었다.
남자에게선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아셀라는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몸이 꿰뚫릴 것만 같은 강렬한 시선을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 모르고 머뭇거리는 사이, 칼릭스가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 오, 오지 마세요!”
아셀라가 급히 나이트가운의 앞섶을 부여잡으며 소리치자 칼릭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나 그의 보폭이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 사이는 이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불과했다.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이 칼릭스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음영 짙은 얼굴 사이로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이 일견 위험함마저 자아냈다.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왠지 모르게 색정적이었다.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뜨리며 물었다.
“어째서?”
“그, 그건…….”
아셀라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행동인 탓이었다. 황제의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식을 올린 부부에게 남은 마지막 절차는 하나였다.
‘초야를…….’
분명 결혼식 전날까지 굳게 각오했던 일이었는데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잠옷을 신경 쓰던 시녀들과 욕조 안에 둥둥 떠다니던 장미 꽃잎, 욕실에 즐비하게 놓여 있던 온갖 향이 나는 보디오일을 보면서도 눈치채질 못했다.
‘긴장하지 마, 아셀라. 이건 당연한 일이야. 해야만 하는 일이야.’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전에 초야를 치렀어야 했지만 피치 못할 상황 탓에 오늘로 미뤄진 것뿐이었다. 아셀라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썩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달큰한 향이 훅 끼쳐 들어왔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체향.
그간 몇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아찔한 향이었다.
‘대체 왜.’
아무리 진한 향수의 향을 맡아도 이렇게까지 반응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의 향만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중심을 잃은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조심해야지.”
순식간에 다가온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붙들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는 물론이거니와 전신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가 된 것 같았다. 아마 그의 도움 없이는 몸을 지탱하고 서 있지도 못할 터.
어쩐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워져서, 아셀라가 파르르 몸을 잘게 떨었다.
“추운가?”
바로 앞에서 닿는 숨결에 몸의 작은 솜털 하나하나까지도 삐죽 솟았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취기가 섞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착각이었으면 했다. 아셀라가 눈을 감은 채로 힘겹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조금……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공간을 가득 채운 달콤한 향 사이로 무언가 다른 향이 섞인 듯했다. 사람의 의식을 흐릿하게 하고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드는 무언가. 확신할 순 없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오지 않길 바랐나?”
“……그런 건 아니에요.”
차단된 시야 탓에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하게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