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어요. 죄송…….”
“그리고.”
습관처럼 사죄의 말을 입에 담으려던 아셀라의 말이 잘렸다. 마치 그녀의 사과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 아셀라가 움찔했다.
“새 마차도 가져와야 하니까.”
“……마차요?”
“그대와 그대 동생이 탈 마차. 부서졌지 않나.”
“말을 타고 가는 게 아니고요?”
“그 손으로 말인가?”
칼릭스가 혀를 차며 되물었다.
아셀라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런 꼴로는 말고삐를 제대로 잡는 것도 힘들었다.
형편없고 무용한 짐 덩어리가 된 기분에, 아셀라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동할 땐 하루 열 시간 가까이 말을 타야 해. 그대의 몸으론 불가해.”
칼릭스가 아셀라의 자그마한 몸을 보며 말했다. 도저히 샤르투스의 직계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교적 체구가 작다 알려진 제국의 남부인들과 비교해도 그러했다.
필립의 학대 방식 중 하나가 굶기는 게 아니었던가 하는 추측은,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조만간 잘근잘근 밟아 제대로 도륙을 내겠노라,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다짐하고 있었다.
“막사가 불편하긴 하겠지만 부서진 마차보단 낫겠지. 일어날 수 있겠나?”
“네.”
아셀라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당황하고 말았다.
돌돌 감아놓은 붕대 탓인지, 손을 짚어 균형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긴장이 풀린 다리는 아무리 애써도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저기, 잠시만, 그러니까…….”
“…….”
칼릭스가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이 정도면 인내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혔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참을성이 대단하다 못해 답답할 정도였다.
“그런 몸으로 말을 타겠다고 했나.”
어쩔 수 없다.
걷질 못하니 안아 들어 데려다주는 수밖에.
도주하는 대공비 33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칼릭스가 몸을 낮추곤 아셀라에게 바짝 다가갔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물리는 그녀에게,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막사까지만 데려다줄 테니까.”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두려워하는 파란 눈이 그대로 꽂혀 들었다.
지금껏 후회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칼릭스는, 지금 이 순간 생에 처음으로 그 비스름한 감정을 느꼈다.
결혼식에서 부러 그녀를 협박하며 겁주었던 것을, 아주 약간.
“일어서기도 힘들잖나.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이미 지나간 일을, 내렸던 결정을, 돌이켜 생각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굳이, 꼭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생각.
어차피 저를 무서워하는 아내에게, 두려움을 더할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후회.
“……그럼, 부탁드릴게요.”
한참 뒤에야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긍정의 대답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자그마한 여자를 품에 안아 든 순간, 칼릭스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너무나 어렴풋하게 떠오른 그 감정은, 스스로 자각하기엔 지나치게 엷었다.
9. 보복
대공의 막사에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라이젠이 ‘차’를 만들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미묘한 불쾌감을 느낄 진득한 제형의 검은색 차였다.
늘 그랬듯 칼릭스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많은 마수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습니다.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겠나.”
칼릭스가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어 몸을 젖혔다.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살짝 비틀린 입매에서 날카로운 냉소가 비쳤다.
“황제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티 나게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라이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주군과 황제 사이엔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특히 베네비토의 힘이 필요한 황제로서는 대공과 굳이 척지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지. 가엾게도.”
정작 칼릭스의 표정은 전혀 누군가를 가여워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라이젠이 주인의 심기를 조심스레 살피며 의중을 물을 때였다.
“주군! 지크입니다!”
막사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라이젠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와 앙숙이었다. 정확히는 라이젠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잔소리하는 관계에 가까웠지만.
그 와중에도 칼릭스를 찾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주군! 저 왔습니다! 주군!”
“…….”
“여기 안 계시나? 혹시 비전하께 가신 건…….”
“들어와.”
라이젠이 말없이 제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시끄러운 데다가 쓸데없는 잡소리도 많은 놈이었다.
곧 불타는 것처럼 새빨간 머리칼의 청년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청년은 한눈에도 불량해 보이는 껄렁한 옷차림이었다.
라이젠은 하마터면 칼릭스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한소리 할뻔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군! 마수 떼가 나타났다던데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보다시피.”
“하기야 그깟 마수 떼 따위, 주군이 검 한번 휘두르면…… 윽!”
라이젠이 지크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쿡 찔렀다. 말실수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지크가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찡긋하고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비전하께서는요? 마차가 박살이 났다면서요?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대체 그분이 무슨 죄가 있다고 마수 떼를 다 보낸답니까?”
“…….”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젠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돌린 화제가 저거라니. 정말이지 저 망할 주둥이를 칭칭 동여매서 벽에 대롱대롱 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인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한낮인데도 주변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칼릭스의 표정이 빙하처럼 싸늘해지는 와중에도, 눈치 없는 지크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게 제가 전에 주군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황제 새끼 모가지를 따버려야 한다고요!”
“지크!”
라이젠이 뒤늦게 지크의 말을 막아섰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칼릭스의 입꼬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곱게 휘어지며 냉기를 품은 붉은 눈이 번뜩였다.
라이젠이 이후 벌어질 일을 짐작하고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좌천당했다 복귀된 지 몇 분 만에 다시 좌천되는 놀라운 현장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이었다.
“나쁘지 않군.”
“예?”
그러나 들려온 주인의 말은 너무도 예상 밖의 것이어서, 라이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착각마저 할뻔했다.
당연하게도, 그의 청력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보답을 해야지.”
칼릭스의 아름다운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크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그는 칼릭스가 무어라 명하기도 전에 혼자 신이 나서 외치기 시작했다.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저 시켜주세요! 네?”
모양새는 주인 앞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애교 피우는 강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고 싶다고 조르는 일의 내용이 무시무시해서 그렇지.
“주군도 아시겠지만 그런 일은 제가 제일 잘하잖습니까!”
조금 더 상세하게 표현하자면, 머리와 몸을 아름답고도 깔끔하게 분리하는 것과 같은.
“맡겨만 주십쇼! 은밀하게 접근해서 조용하게 확!”
라이젠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크와 그가 이끄는 ‘제4의 카르마’야말로 ‘은밀한’이라는 단어와 제일 어울리지 않았다.
“그동안 애들도 못 움직여서 몸이 찌뿌둥할걸요? 이참에 몸도 풀 겸 싹 데리고 가서 한 방에 쓸어버리겠습니다!”
“어떻게?”
혼자서 북치고 나팔 불던 지크의 동작이 그대로 딱 멈췄다.
“예?”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나.”
지크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머리를 써서 계획을 짜는 건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황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제위를 계승했는지 모르나?”
“아무리 잘난 놈이어도 목 잘리면 죽는 건 똑같은뎁쇼!”
라이젠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앞뒤 분간 없이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처럼 달려드는 건 여전했다.
지크가 가진 괴물 같은 검술과 배짱, 반사신경이 아니었다면 카르마를 이끄는 부대장 중 하나가 되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황궁에 확 쳐들어가서 어디 있는지 찾은 다음에 슥,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지크가 손가락을 붙인 손날을 목에 가져다 휙 긋는 시늉을 했다.
“후…….”
라이젠은 이제 한숨을 감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신은 지크에게 많은 재능을 하사하셨으나, 오로지 생각하는 머리만큼은 내려주지 않으셨다.
다행히, 그의 주인도 라이젠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예? 무슨 생각이요?”
지크의 반문에 답하는 대신, 칼릭스가 라이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이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제4의 카르마는 네가 맡아라.”
“명 받듭니다.”
라이젠은 제1의 카르마를 이끄는 상황에서 좌천된 지크의 부대까지 떠맡고 있었다.
드디어 지크가 자숙기간을 끝내고 돌아오게 되어 일이 덜어지나 했더니, 저 입방정 때문에 도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과중에 시달리던 라이젠으로서는 썩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주군, 그럼 저는요?”
칼릭스의 냉랭한 눈이 철없고 눈치 없는 맹수 새끼에게로 향했다.
“돌아가야지.”
지크가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라이젠은 올 게 왔다는 생각이었다.
‘공포의 주둥아리’라는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복귀 첫날부터 저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본디 무슨 일이든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
라이젠이 그의 앙숙이자 친우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한편, 재빨리 정신을 차린 지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 어디로 가란 말씀입니까?”
“어디긴.”
칼릭스가 의자의 한쪽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모로 턱을 괴었다.
“수도 말고 또 있나?”
“그건 안 됩니다!”
지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타고난 놀라운 생존 본능 덕분에, 지크는 지금 자신이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상황 파악을 빠르게 마치곤 넙죽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정하듯 두 손을 맞잡아 쥐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뭐든 할 테니, 거기 가란 소리만 하지 말아주십쇼!”
수도에서의 생활을 떠올린 지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무시무시한 대공저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지난 몇 달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크가 뭐 마려운 개처럼 낑낑대며 애원했다.
“왜? 편하고 좋지 않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니 말이야. 칼릭스가 붉은 입매를 팽팽하게 당기며 웃었다.
그 혼이 빠질 듯 해사한 미소에, 지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누군가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평안하고 안온한 일상을 제공하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자극이 삶의 낙이요, 즐거움인 지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난생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은 처음이었다고요! 또 보내시면 차라리 콱 죽어버릴 겁니다!”
“그럼 죽든가.”
“주군!”
지크의 외침에도 칼릭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간결 명확했다.
제정신을 못 차리는 맹수 새끼는 절벽에서 밀어버려야지. 죽더라도 별수 없고.
“그런 끔찍한 곳에는 다신 못 갑니다! 거기에 갈 바엔 기사단 화장실 변기를 매일 닦겠습니다! 아니, 그냥 차라리 죽이십쇼!”
지크의 애걸복걸이 이어졌다. 지켜보던 라이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맹수 새끼를 길들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맹수뿐이다.
세상에 무서울 거 하나 없이 막무가내로 구는 지크도, 칼릭스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라이젠.”
“예, 전하.”
“끌어내.”
“존명.”
라이젠이 우아한 동작으로 주인에게 예를 갖추고는 지크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막다른 절벽에 몰린 지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아무거나 뱉어내기 시작했다.
“오, 오는 길에 황제의 개들을 봤습니다!”
“그랬겠지.”
“한 놈도 남김없이 싹 처리했습니다! 걱정하실 일 없게요!”
칼릭스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짓했다. 빨리 끌고 가라는 의미였다.
지크가 다급히 또 외쳤다.
“그중에서 제일 강해 보이는 놈 하나를 생포했습니다! 혹시 몰라 근처에 묶어뒀는데…….”
“잠깐.”
지크의 말이 처음으로 칼릭스의 흥미를 끌었다.
“설명해 봐.”
도주하는 대공비 34화
황제의 서슬 퍼런 분노가 집무실 공기를 얼렸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에 벽난로에서 타오르던 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황제를 이토록 분노케 한 죄인은 잠자코 엎드려 그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던컨 리사크.”
페르난데가 제 앞에 꿇어앉은 충복의 이름을 씹어뱉듯 불렀다.
“……예, 폐하.”
던컨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턱을 열어 가까스로 답했다. 금방이라도 그를 땅에 짓이길 듯, 온몸을 잡아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다시 보고해.”
던컨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조금 전 마쳤던 보고를 다시 읊는 것 외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절벽 길에 배치했던 마수들이 예정대로 표적을 공격했으나, 제거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개들은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전원 사망…….”
“대체 네놈은!”
페르난데가 집무실 책상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쾅, 하는 소음과 함께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와르르 무너져 바닥에 흩어졌다.
황제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갈무리했다. 억눌린 듯 낮은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퍼졌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던컨이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박았다. 그는 페르난데가 지금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수는 죄다 소멸했고, 표적은 멀쩡히 살아서 칼릭스 그놈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게다가 개 한 마리는 죽은 시기가 다르다?”
그의 강력한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깡그리 사라졌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지 모를 존재가 살아남았다.
심지어 중요한 정보나 약점이 적에게 넘어갔을 확률까지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기회를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일을 수습…… 커흑!”
순식간에 던컨의 몸이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목을 틀어쥐고 숨통을 조였다. 순식간에 던컨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컥……! 폐, 커헉, 폐하……!”
던컨이 두 손으로 제 목을 부여잡고는, 허공에서 발을 휘저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폐에서 산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아찔한 감각에,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던컨의 모습을 무감하게 훑으며, 페르난데가 입을 열었다.
“고작 네놈 따위가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는 것이냐.”
“흐읍…… 으윽…….”
“건방지게.”
일순간, 던컨의 목을 옥죄던 힘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헉, 허억……!”
던컨이 허겁지겁 숨을 들이켰다. 막혀 있던 숨이 단번에 뚫리면서 머리가 띵해졌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반대로 심장은 터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페르난데의 싸늘한 눈빛이 던컨의 몸 위로 내리꽂혔다.
“네 말대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던컨이 곧바로 무릎을 꿇고는 페르난데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비였다.
“던컨.”
“예…… 폐하.”
던컨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답했다.
그 역시 황제의 개였다. 개들의 우두머리. 팔목 안쪽에 박힌 복종의 문신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영원히 이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각인시키듯.
“만일 또다시 제거에 실패한다면.”
마지막 자비를 내뱉는 메마른 목소리엔 온기 한 점 없었다.
“너는 물론이고, 리사크의 혈족들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 *
공국으로 향하는 여정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네.’
칼릭스가 마수에게 다친 아셀라를 직접 안아서 막사까지 데려다주었던 그 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엔 단 한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녀의 남편은 항상 바빴다.
이동 중에는 쉬지 않고 말을 탔고, 해가 지면 막사에서 측근들과 몇 시간이고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젠이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아셀라를 찾아와 그녀의 안부를 묻고 몸 상태를 살폈다.
“비전하,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맛있었어요. 메리엘도 좋아했고요.”
점심을 먹은 뒤 낮잠에 빠진 동생을 내려다보며 아셀라가 조용히 답했다.
“혹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전혀요.”
다행히 아셀라의 상처는 더디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더불어 지난 며칠 간의 지루하리만치 평온했던 여행은 그녀에게 약간의 안정감마저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젠은 아셀라의 대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비전하, 아직도 제게 존대를 하고 계십니다.”
“……익숙하지 않아서요.”
신분상으로야 아셀라가 더 높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하대를 할 순 없었다.
일단 라이젠 본인이 백작위를 가진 가신이었다. 게다가 칼릭스 베네비토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그녀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을 얼마간 지켜보던 라이젠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비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야영하지 않고 성까지 이동할 계획입니다.”
“밤새 이동한다는 말인가요?”
“예. 그리하면 내일 날이 밝을 즈음이면 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아셀라가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그녀는 마차에서 줄곧 머무르기에 밤중에 움직여도 어려울 건 없었다. 문제는 날을 새서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이었다.
“저희도 문제없습니다. 다들 그만한 체력은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전하께 이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셀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라이젠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동 중에는 불가피하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대공가의 새 안주인은 불평 한마디, 불쾌한 얼굴색 한번 내비친 적이 없었다.
지나치게 말수가 적은 분이기는 하였으나, 그걸 흠이라 할 수는 없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경이야말로 수고하셨어요.”
“저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럼, 저녁 무렵에 다시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라이젠이 마차 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렬이 출발했다.
라이젠의 걱정과는 달리, 아셀라는 지난 며칠간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수도의 대공저에서 다시 보내온 마차는 이전의 마차와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고 안락했다. 난방도 잘 되어 쌀쌀한 아침저녁에도 따뜻했다.
침대를 겸하게 된 소파 역시, 폭이 조금 좁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막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안락한 환경이었다.
달리는 마차 안, 아셀라는 여느 때와 같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은…….’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가끔 길이 호선을 그리며 크게 휘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창 너머로 행렬의 선두가 보이곤 했다.
지금이 그러했다.
거기엔 그의 머리 색만큼이나 새카만 흑마를 탄 남자가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걸까.’
긴 여정이니 마차를 이용할 법도 한데, 남자는 직접 말을 몰았다. 저녁에는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막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물론 대공의 막사이니만큼 더 넓고 쾌적하기야 하겠지만, 결코 마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와 그는 행동반경이 완전히 달랐다.
대화는커녕, 마주칠 일조차 없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아셀라는 칼릭스 베네비토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그녀로서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종종 말도 안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가 어디에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그것이었다.
* * *
깊은 밤, 황제의 침실.
홀로 잠들었던 페르난데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이 보였다. 평소라면 늘 사용하는 막대로 독의 여부를 확인했을 테지만, 너무도 극심한 갈증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기울여 물을 마셨다. 물이 가득 차 있던 병을 거의 반쯤 비우고 난 뒤에야 미칠 것 같던 갈증이 겨우 해소되었다.
“……빌어먹을.”
꿈도 뒤숭숭했다. 꿈을 꾸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그였기에, 이는 상당한 불쾌감을 일으켰다.
아마도 낮에 던컨에게서 보고받은 내용 탓인 듯했다.
다른 자였다면 그따위 말을 하는 혀를 뽑아낸 뒤, 사지를 잘라 죽여버렸을 것이다. 던컨 리사크였기에 그간의 충정을 보아 분노를 참고 살려주었다.
어차피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페르난데는 아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원을 그리듯 방 안을 천천히 돌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해결 방법을 찾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그 계집을 바깥으로 끌어낼 만한 방법.’
베네비토 대공성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자객은 물론이요, 첩자조차 발을 붙이지 못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양한 목적을 갖고 접근을 시도했으나,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 메리엘 샤르투스가 그곳에 머무르는 한, 아예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텐데.’
의심이 많은 칼릭스 베네비토다. 어중간한 속임수로는 어림도 없었다.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덥석 미끼를 물 만큼 보기에 먹음직스러워야 했다.
그렇게 페르난데가 고심하던 때.
“음……?”
물병이 놓여 있던 테이블 위, 엽서만 한 크기의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저런 게 있었던가?’
잠에서 덜 깬 채로 물을 들이켰던 터라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페르난데의 발걸음이 테이블을 향했다.
표면이 매끈하고 두께감이 있는 질 좋은 종이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늘 사용하는 메모용지였다.
그러나 집무실에서만 사용하는 종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종이 위의 글씨가 언뜻 비쳤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방 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탓에, 페르난데가 손을 튕겨 마법 불빛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