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71)
  •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귀를 어지럽게 울리던 소리마저 사라지던 그때.

    “언니!”

    메리엘의 날 선 부름이 아셀라의 귓가를 관통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담요 속에서 떨고 있는 동생이 비쳤다.

    아셀라가 입술을 깊게 깨물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었다.

    부서진 틈으로 아까보다는 수가 줄어든 듯한 마수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고군분투하며 마수를 하나씩 상대해 나가고 있었고, 라이젠이 길을 막는 마수들을 베어내며 달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짜부라지는 소리와 함께 마차 옆면이 완전히 부서졌다. 마수가 울부짖으며 커다란 몸체를 들어 바닥을 내리찍자,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꺄악!”

    “메리엘!”

    목표물을 눈앞에 둔 마수가 소름 끼치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세로 동공이 얇게 수축했다 늘어나기를 반복하며 초점을 조정했다.

    마침내, 짐승의 커다란 몸체가 도약하며 입을 쩍 벌리던 찰나에.

    갑자기 마수의 몸이 뒤로 쑥 빠졌다.

    “메리엘……!”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셀라가 뒤에 있던 메리엘을 껴안았다. 동생의 작은 몸이 두려움에 애처롭게 떨리는 걸 느끼며,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눈을 꾹 감았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끔찍한 비명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그 외에 들리는 것이라곤 묵직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토막토막 잘려나가는 소리, 그것이 땅에 떨어지며 내는 둔탁한 진동음 같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다 삽시간에 주변이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마치 조금 전의 소란은 한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아셀라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삐걱대는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고, 속도 메스꺼웠다. 이제는 몸의 떨림이 메리엘에게서 전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대로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 아셀라가 맑은 공기를 급히 들이켰다.

    그 순간, 달큼한 향이 코로 훅 끼쳤다.

    너무나 강렬하여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향.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할 매혹적인 향.

    아셀라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셀라는 몇 번 눈을 깜박인 끝에, 곧 눈앞의 것이 흑색의 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이 느리게 위를 향했다.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가리고도 남을 크고 단단한 상체, 넓고 다부진 어깨에 달린 망토 고정 장식을 지나.

    굳게 다물린 입술과 속내를 짐작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 눈은 어째서인지 위험해 보였다.

    짙은 정적을 깨고, 남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아셀라 베네비토.”

    그녀의 남편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31화

    8. 흔들림

    칼릭스가 잔뜩 몸을 웅크린 아셀라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자세를 낮추었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그의 것보다 아래였다. 보호하듯 제 동생을 힘껏 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크게 충격을 받은 탓인지, 말간 물빛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은데,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달래는 따뜻한 말을 전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늦었나?”

    결국, 냉정하리만치 건조한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칼릭스는 자신이 입에 담은 말이 썩 적절치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에 독을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고작 그 질문 하나에 아셀라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것만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잠깐―”

    푸른 바닷물이 드높게 일렁이듯, 아셀라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칼릭스는 약간의 당혹스러움마저 느껴야 했다.

    다른 말을 했었어야 했나?

    하지만 그 상황에서 딱히 할 말이 무어가 있단 말인가?

    칼릭스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마주 보던 이의 눈에서 기어이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버린 탓이었다.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턱에 맺혔다가 다시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니, 아니요…….”

    그 와중에도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좌우로 고갯짓까지 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아셀라의 한쪽 뺨을 부드러이 감쌌다.

    놀라우리만치 따뜻한 온기에, 아셀라가 눈물로 희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눈을 크게 떴다.

    오랜 기간 검을 잡은 손은 단단했다. 그러나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내는 손길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신중했다.

    칼릭스는 그녀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무서웠나?”

    마치 걱정했다는 듯한 물음에, 아셀라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누군가를, 그것도 자신을 걱정한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는걸.’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답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아셀라를 잠시 응시하던 칼릭스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이내 무언가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팔목까지 내려오던 긴 소맷자락이 팔꿈치부터 죄다 뜯겨나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바로 옆에 산산 조각나 바닥에 널브러진 선반이 보였다. 선반 곳곳에 점점이 튄 마수의 푸른 핏자국을 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손을 좀 보여줄 수 있겠나.”

    “네?”

    칼릭스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아셀라가 눈을 깜박이며 머뭇거렸다. 여전히 눈가에는 아롱아롱 물기를 머금은 채였다.

    “잠깐이면 돼.”

    짧은 망설임 끝에, 아셀라가 메리엘을 끌어안고 있던 깍지낀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희고 연연한 손은 참혹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손톱은 죄다 깨졌고, 손등이며 팔은 깊게 긁혀 지금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깨진 나무 선반에 쓸린 손바닥엔 미세한 나무 조각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팔꿈치 아래로는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수의 거친 털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여린 살갗에 상처를 입혔을 터.

    “……저는 괜찮아요.”

    남자의 손에 쥐어진 제 손이 영 어색하여, 아셀라가 엉거주춤 뒤로 손을 잡아 빼며 입을 열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건 도저히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상처가 아니었다.

    “약을 주시면 제가 알아서 바를게요. 신경 쓰시지 않게 할 테니…….”

    “뭐?”

    들려온 말에, 칼릭스가 제 귀를 의심했다.

    “알아서, 하겠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셀라는 덜컥 겁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적안이 섬뜩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를 심문하는 듯한 눈빛에, 아셀라가 작게 몸을 떨었다.

    ‘어째서?’

    아셀라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을까.

    짧은 생각 끝에 완전히 부서진 마차에 눈길이 닿았다. 당장 공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채비를 명하던 사내의 서늘한 얼굴이 그 위에 겹쳐졌다.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할 생각이었을 텐데, 자신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으니 노여워하는 것이리라.

    완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의 시선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셀라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열었다.

    “죄송해요, 전하.”

    “죄송하다고?”

    칼릭스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매가 단번에 사나워졌다. 아셀라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마차를 망가뜨려 버려서요.”

    “…….”

    “어릴 때긴 하지만 말을 타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도록, 방해되지 않도록 할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금방 출발 준비를…….”

    “그만.”

    칼릭스가 아셀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기가 막히는군.’

    엉망진창이 된 손으로 직접 처치를 하겠다는 것이나, 그 와중에 부서진 마차 걱정 따위를 하는 것이나. 게다가 말을 타고서라도 따라오겠다니.

    손바닥이 저래서야 말고삐를 제대로 움켜쥐지도 못할 것이다. 말에서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칼릭스는 아셀라의 사과에 화가 났다.

    그녀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당하고 몸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응당 호위 기사들을 문책함이 당연한 것을, 오히려 자신의 책임인 양 어찌할 줄 몰랐다.

    ‘필립이 그렇게 가르쳤던가.’

    양딸을 팔아치우며 값을 흥정하던 자의 야비한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제가 심혈을 기울여 교육해 두었으니까요. 분명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내가 될 겁니다.’

    이만한 귀족 영애는 흔치 않다며 웃던 얼굴엔 묘한 만족감과 희열마저 담겨 있었다.

    그녀가 필립에게 어떤 짓을 당해왔는지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그를 그리 즐겁게 했을지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혹여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을 때는 채찍으로 몇 대만…….’

    ‘지금 나더러 아내를 손찌검하라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그때만 해도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대화였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뜬금없이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경이 쓰였다.

    ‘…….’

    제 열등감과 분노를 양딸에게 풀어댄 추악한 인간이니, 모든 일을 그녀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하기도 했을 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

    물기 가득한 파란 눈이 깜박이며 잘게 진동했다.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긴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마저 나왔다.

    “그대는 지금 다쳤잖나.”

    “저,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이 정도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걸요.”

    “…….”

    귀족이란 무릇 다른 이의 치명적인 상처보다 제 눈에 들어간 티끌만 한 먼지를 중히 여기는 족속이었다.

    특히 제국은 여타의 국가들보다도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였으니 더욱 그랬다.

    전쟁터에서조차 저 하나 살겠다고 명을 거부하여 부하들을 죄다 사지에 몰아넣는 귀족 출신 지휘관들이 있었다. 물론 그런 자들은 예외 없이 군법으로 처형했지만.

    하물며 집안에서 고이 자란 귀족 영애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엉망이 되도록 다쳐놓고서, 아프다는 말 한마디, 작은 신음성 하나 내지 않는다는 건.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런 고통이.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라이젠!”

    주군의 부름에 근처에서 주변을 수습 중이던 라이젠이 급히 달려와 예를 취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의사를 불러와. 당장.”

    대규모의 호위단이 구성된 만큼, 구성원 중에는 가문의 주치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는.

    “조금 전의 공격으로 의사가 사망했습니다. 수도의 대공저에 사람을 추가로 보내라 연락을 취해놓은 상태…….”

    “그래서, 의사가 없다?”

    칼릭스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싸늘하게 식어 내린 적안에 라이젠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주인의 표정 없는 얼굴에는 이유 모를 불쾌함이 가득했다.

    “라이젠, 네게 비의 안전을 명했다. 그런데.”

    서늘한 목소리가 음산하리만치 가라앉았다. 흉흉한 붉은 눈이 번뜩였다.

    “이게 다 무엇이지?”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라이젠은 칼릭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하마터면 큰 위험에 처할 뻔했으나, 다행히 제때 도착한 대공 덕분에 무사했다. 이만하면 피해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왜…….’

    혼란스러워하던 라이젠의 시선이 대공을 지나, 옆에 있던 가냘픈 이에게로 옮겨갔다.

    너덜너덜해진 옷자락과 이리저리 찢긴 상처. 그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비, 비전하……!”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은 라이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주군이 마수들을 도륙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제일 우선 해야 했었던 일은 대공비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차가 부서질 정도로 충격이 가해졌으니 다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정작 제가 한 일이라곤, 남은 마수들을 마저 제거하고 현장을 수습하여 정비하는 하찮은 것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던 데다 대공이 왔다는 사실에 너무 안심해버린 나머지, 말도 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아니, 이건 감히 실수라 칭할 수도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나.”

    라이젠이 곧바로 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조아렸다.

    주인에게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마수의 공격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와 기사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는 의미가 없었다.

    단지 중요한 건,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 털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될 귀한 이의 몸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할 말은?”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라이젠이 엎드려 고개를 떨군 채 답했다.

    “명을 지키지 못한 죄,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알고 있다니 더 설명할 필요 없겠군.”

    칼릭스가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검을 뽑아냈다. 수십 마리의 마수를 단숨에 베어낸 칼은 핏방울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주인의 서슬 퍼런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라이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32화

    “전하.”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칼릭스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붉은 눈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은 피투성이의 손으로 향했다.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느다란 팔목을 지나, 애처로이 떨리는 동그란 어깨, 가냘프고 긴 목선까지 차례로 움직였다.

    아셀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는 금방 낫는 상처인걸요. 그러니까…….”

    “언니, 어디에 있어?”

    “메리엘!”

    옆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아셀라가 뛸 듯이 놀랐다.

    경황이 없던 나머지 메리엘에게 아직도 담요를 씌워두었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얼른 담요를 벗겨냈다.

    “미안해. 많이 답답했었지?”

    “아니야. 하나도 안 답답했어.”

    아셀라가 메리엘이 상처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담요로 팔을 가렸다.

    그 모습에 칼릭스가 잠시 침묵했다.

    어린아이 앞이다. 제 방식대로 처벌하는 건 썩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잠시 미간을 좁힌 그가, 뽑아 들었던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까지도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처벌을 기다리던 라이젠의 귀에 주인의 말이 떨어졌다.

    “두 번은 없을 것이다.”

    라이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역시 대공비의 청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주군이 정말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공은 수하들의 실수에 너그럽지 않았고, 지금껏 어떠한 예외도 없었을 만큼 가차 없는 주인이었다.

    “약을 가져와.”

    그러나 지금 막 그 예외가 생겨났다는 걸, 라이젠은 눈치 빠르게 파악했다.

    곧바로 뛰어가 의사가 쓰던 가방을 통째로 가져오자, 재차 명령이 떨어졌다.

    “아이를 데려가 보살피도록.”

    “전하, 하지만 바깥에는 아직 마수가…….”

    듣고 있던 아셀라가 잡고 있던 칼릭스의 소맷자락에 다급히 힘을 주며 말했다.

    마수들의 시체가 즐비할 바깥에 동생을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충격적인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치료를 미루더라도 함께 있는 편이 나았다.

    “지금쯤이면 바깥 정리가 끝났을 거야.”

    “하지만…….”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어. 약속하지.”

    망설이던 아셀라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반파된 마차 안에는 아셀라와 칼릭스, 두 사람만이 남았다.

    칼릭스가 온갖 치료 도구가 든 가방에서 필요한 물품을 꺼냈다. 병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깨끗한 물과 천까지 가져오자,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따뜻한 물에 적신 천이 상처 위를 감싸듯 덮자, 아셀라가 반사적으로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아……!”

    “아픈가?”

    “그게 아니라, 조금 놀라는 바람에……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어.”

    짤막하게 대꾸한 칼릭스가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팔을 비롯해 손등이며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헝겊으로 닦아내는 모습에, 아셀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무 가시를 빼낼 요량으로 바늘을 집어 들었다.

    “원한다면 마취를 하지.”

    “괜찮아요.”

    “다른 건 몰라도 소독할 땐 통증이 심할 거야. 정말 상관없겠나?”

    아셀라가 또다시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까부터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직접 치료하는 게 못 미더운 거라면 사람을 시키면 될 일이었다. 구태여 손수 해주겠다고 나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절대 착각해선 안 돼.’

    애정에 기반한 친절이 아니다. 대공은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방심하게 한 뒤 우리를 죽이려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 마음 놓아선 안 돼.’

    아셀라가 몇 번이나 자신에게 되새겼다. 가짜 친절에 속아 대공이 그녀와 메리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아프면 말해. 참지 말고.”

    칼릭스가 달군 바늘과 집게로 나무 가시를 쏙쏙 뽑아냈다. 손바닥이 말끔해지자, 조금만 움직여도 찌릿찌릿하던 통증이 사라졌다.

    “쓰라릴 텐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칼릭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소독약이 든 병의 뚜껑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몰칵 풍겼다.

    깨끗한 천에 소독약을 듬뿍 적셔 동동 두드리듯 상처 부위를 두드리자, 아셀라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프지 않아?’

    그의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 통증이 거의 없었다.

    마법사들이 제조한, 고통을 줄여주는 특수 약품이었다. 필립이 아셀라에게 고급 약의 사용을 일절 허락지 않았던 탓에, 그녀로서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 소독이 끝났다.

    아셀라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팔과 손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많이 아픈가?”

    “아니요.”

    “그럼 혹 불편한 데라도 있는 건가? 가시는 다 뽑았을 텐데.”

    “그런 게 아니라…….”

    아셀라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익숙하신 듯해서요. 이런 일이.”

    두 사람의 눈이 맞부딪혔다.

    아셀라는 그의 눈이 맹수의 그것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눈을 마주치면 목덜미를 붙들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강렬한 시선이었다.

    붉은 눈은 밝은 선홍빛이라기보다는, 짙고 짙은 크림슨에 가까웠다.

    진득하게 고인 피 웅덩이를 연상시키는.

    “…….”

    한편, 시선을 떼지 못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대답조차 잃고 아셀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뜻밖이었다.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던 여자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하는 모습이.

    ‘아.’

    그는 문득, 그의 아내가 베일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수의 공격을 받던 와중에 벗겨진 모양이었다.

    부어올랐던 뺨은 출발 전의 치료 덕에 어느새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얗군.’

    그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그녀의 전체적인 인상과 분위기가 그러했다.

    진주를 잘게 부수어 뿌려 놓은 듯한 투명하고 흰 피부에, 길게 물결치며 내려오는 고운 은발.

    무엇보다도, 색이 옅은 바닷가의 맑은 물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

    모든 것이 저와는 대조적이었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하?”

    “……전쟁터에선 뭐든 알아서 해야 할 때가 많으니까.”

    칼릭스가 덤덤히 대꾸했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수년을 보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몸에 박힌 날붙이나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곪아 썩어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마취 없이 상처를 불로 지져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칼릭스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손놀림으로 약을 듬뿍 바르고는 붕대를 둘둘 감았다.

    모든 처치가 끝났을 때는, 아셀라의 팔꿈치부터 손등까지 죄다 붕대로 감겨 있었다. 하얀 붕대의 향연 속에서 그나마 무사히 살아남은 건 손가락뿐이었다.

    “며칠만 참아. 공국에 도착하는 대로 신관을 부를 테니.”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땀이 나는군.”

    흘끗, 그녀의 이마 부근을 본 칼릭스가 무심하리만치 평이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곤 정복 안쪽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 손수건이었다.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손수건은 너무도 새카만 나머지 기이해 보일 정도였다.

    아셀라가 무심결에 받아들려 손을 내밀었다가 제 행동을 깨닫곤 멈칫했다.

    “닦아주지.”

    칼릭스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무슨 수로?”

    칼릭스가 되물어오자 아셀라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치료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녀의 손은 자유롭지 않았다.

    아셀라가 더는 거부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자, 칼릭스가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향이 훅 밀려들며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아셀라의 동그란 이마에 닿았다.

    ‘……이상해.’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저 땀을 닦는 손길일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계속되자, 아셀라가 참지 못하고 몸을 물렸다.

    “가, 감사해요. 전하”

    “…….”

    “나머진 제가 닦을게요.”

    다소 고집스러운 청이었다. 칼릭스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셀라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감사히 잘 쓰고 나중에 반드시 돌려드릴게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아셀라는 손수건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녀가 제 손수건을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저의 물건이라 탐탁지 않은 모양이지. 칼릭스는 어째서인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 *

    “전하, 막사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칼릭스가 라이젠의 보고에 몸을 일으켰다. 영문을 몰라 저를 쳐다보는 아셀라를 향해, 답지 않게도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을 예정이야.”

    “이동하지 않는 건가요?”

    그새 동이 터서, 바깥은 쏟아지는 아침 햇살로 눈이 부실만큼 환했다.

    적당히 훈기가 도는 바람에 날도 화창하여 이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이제 막 날이 밝았는데 여기서 묵겠다는 말이 의아했다.

    “수도에서 추가 인력이 합류하기로 했어. 손실된 물품도 있고, 부상 입은 기사들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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