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71)
  • 하루가 멀게 이루어지는 사형 집행에, 통치 초반에는 단두대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그 덕분에 페르난데는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가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이 페르난데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빌어먹을.’

    역대 황제들이 그러했듯, 페르난데도 베네비토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죽은 선대공이 그의 정적들을 깡그리 쳐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안정된 치세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만큼 페르난데에게는 지긋지긋한 이름이기도 했다.

    베네비토는 그의 역린이었다.

    영광스러운 제위에 올라서고도 베네비토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만 같은 기분은 늘 그를 미묘한 수치심과 불쾌함 사이에 자리하게 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페르난데의 기분이 급격히 저조해졌다.

    분노가 농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짙어졌다.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목을 조여대는 압박감에, 시종들이 컥컥대며 애원의 말을 뱉어냈다.

    “폐하, 제발…….”

    “그만, 허억…… 멈춰주…….”

    페르난데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다. 황제에게 평범한 인간이란 그저 땅 위를 돌아다니는 개미 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페르난데가 손가락 하나를 더 튕겨 힘을 더했다. 시종들이 눈에 흰자를 내보이며 입가에 거품을 물었다. 이제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전신을 바르르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보는 페르난데의 얼굴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이렇듯 강력한데.’

    이렇게나 강대한 힘이 그의 것인데.

    칼릭스 베네비토에게는 전혀 통하질 않았다.

    칼릭스가 아직 대공자였던 시절. 페르난데는 선대공의 눈을 피해 어린 소년에게 조종 마법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만두시지요, 폐하.’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표정에는 희미한 성가심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즈음 페르난데의 마법은 어느 정도 경지에까지 이른 상태였다. 만일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강력한 복속의 마법을 인지해 낸 건 물론, 심지어 튕겨내기까지 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멈추라 말하는 모습은 완벽한 지배자의 그것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페르난데가 칼릭스에게 증오와 두려움을 함께 느낀 것은.

    “폐하.”

    누군가의 목소리에 페르난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던컨이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부른 적이 있던가?”

    페르난데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스산한 물음의 의미를 읽은 던컨이 차분히 답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명하신 건에 대해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 급히 찾아뵈었습니다.”

    페르난데의 잿빛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말의 진위를 가늠하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공손하게 손을 모아 잡은 던컨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황제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아직도 이리 마음이 약해서야.’

    페르난데의 얼굴 위로 싸늘한 비소가 스쳐 지났다. 벌레 같은 것들을 살려보겠다고 용쓰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그러나 던컨은 페르난데의 기준에서 퍽 아끼는 신하였다.

    그가 던컨을 위아래로 느릿하게 한 번 훑으며 답했다.

    “그랬군.”

    원래는 화가 풀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 죽일 생각이었으나, 충직한 신하의 노력이 가상하여 이번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페르난데가 마법을 거두어들이자, 시종들의 몸이 땅 위를 엉망으로 굴렀다. 그들의 입에서 흐느끼는듯한 신음성이 흘렀다.

    “치워라.”

    다른 시종들이 재빨리 들어와 페르난데의 마법에 당한 이들을 얼른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동강 난 테이블과 고운 잔디 위로 나동그라진 찻잔, 깨진 접시, 어지러이 널려진 다과 등도 순식간에 치워졌다.

    “따라와라, 던컨.”

    페르난데의 손짓에 던컨이 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황제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산책길로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찾아왔었다.”

    “들었습니다.”

    “메리엘 샤르투스를 가문에서 탈적시키고는, 록트린 가문으로의 입적을 요구해 왔다.”

    던컨이 멈칫했다. 얼른 티 나지 않게 표정을 수습한 그가 되물었다.

    “필립이 동의했단 말씀입니까?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닐 텐데요.”

    “대공이 돈이든 뭐든 쥐여줬겠지. 후작위 승계를 빌미로 샤르투스의 첫째 딸과 결혼까지 했잖나.”

    페르난데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29화

    “대공이 그 계집과 결혼하겠다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연인은커녕 하룻밤 애인도 만든 적 없던 그 칼릭스 베네비토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이상했다.

    게다가 약혼 기간이랄 것도 없이 단숨에 결혼을 해치웠다.

    하필이면 상대가 샤르투스 가문의 첫째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을 반대할 만한 명분도 없었고, 페르난데가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두 가문의 결합을 반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져버린 뒤였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이능 각성을 못 한 계집이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겼건만.’

    어차피 페르난데가 관심을 두었던 건 샤르투스의 둘째 딸이었다. 망가진 첫째에겐 별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필립이 돈에 눈이 멀어 둘째 딸마저 팔아치워 버린 것이다. 페르난데도 예상치 못했던 실책이었다.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는 여잘 뭐 하러 데려가나 했더니,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였어.”

    사교계며 온갖 신문에서 베네비토와 샤르투스 가문의 결합을 로맨틱한 결혼으로 포장했지만, 페르난데는 믿지 않았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둘째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결혼 승인을 미뤘어야 했다.”

    “…….”

    “설마 이런 식으로 빼돌릴 줄은.”

    제대로 도끼에 발등이 찍힌 페르난데가 치미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제 안일함에 스스로의 목을 힘껏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폐하, 하오시면 붙여두었던 개들을 거둬들일까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대공도 황제가 보낸 개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쓸데없는 것들을 달고 올지도 모르니 폐기해.”

    자칫 잘못했다간 반대로 대공 쪽에서 끄나풀을 붙여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황제의 개는 소모품일 뿐이다. 부족하면 보충하고, 쓰임이 끝났을 시엔 폐기하면 그만이었다.

    “개의 수가 많이 줄었더군. 이참에 충분히 뽑아서 채워둬.”

    “…….”

    “이번엔 좀 쓸 만한 것들로 마련해. 걸핏하면 픽픽 죽어버리니 원.”

    물론, 그들 중엔 황제의 명으로 ‘폐기’된 이들이 다수였지만, 던컨은 굳이 짚지 않았다.

    “던컨, 듣고 있나?”

    “……예, 폐하.”

    던컨의 대답에 아주 미세한 간격이 있었으나 페르난데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래. 지시한 일은 어찌 되었지?”

    “명하신 대로 켈튼 산 절벽 길 초입에 풀어두었습니다.”

    수도에서 공국까지는 비교적 길이 잘 나 있어 오고 가기가 수월했다.

    딱 한 가지, 켈튼 산을 넘어가야 한다는 걸 제외한다면.

    켈튼 산을 지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산을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널찍한 길을 편하게 이동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이 주 이상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두 번째로는 산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방법이었다.

    건국 초기에 발생한 지진 탓에,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생긴 좁은 길이 하나 있었다.

    좁다고는 하나, 마차 몇 대가 동시에 지나가도 무리가 없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빠르게 이동하면 닷새 안에도 공국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런 시간적 이점 탓에, 상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길이기도 했다.

    ‘분명 절벽 길을 이용할 것이다.’

    페르난데는 확신했다.

    고작 한 달 만에 결혼식을 끝내버린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공국까지 천천히 이동해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두고 한참은 돌아가야 하는 길을 택할 리가 없었다.

    “해가 진 뒤에 출발했다 들었는데, 맞나?”

    “예, 폐하. 늦어도 내일 해뜨기 전에는 절벽 길 초입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페르난데가 서늘한 눈을 번뜩였다.

    “제대로 표적 설정은 해두었겠지?”

    “확실합니다. 냄새를 맡자마자 곧바로 달려들 겁니다.”

    샤르투스 가문에 심어놓았던 개들에게서 메리엘 샤르투스가 사용했던 물건을 넘겨받아 작업했다.

    풀어놓은 마수들은 그녀를 일차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페르난데의 얼굴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아주 볼만하겠군.”

    사람들은 황제 페르난데를 위대한 마법사 정도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그는 흑마법사였다. 그것도 대륙에서 비슷한 실력자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저주나 현혹 등에 특히 능했고, 마수를 소환하여 적당한 세뇌 끝에 그의 명령만을 듣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하르메니아 제국에서 흑마법의 사용은 절대적인 금기였다. 만일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그러니 신전의 축복을 받는 황가에서, 그것도 황제가 흑마법을 마음대로 구사한다는 건 퍽 모순된 일이었다.

    이 엄청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페르난데 본인과 그의 충복인 던컨뿐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 아니냐, 던컨?”

    페르난데는 이번 일을 위해 공들여 모아두었던 마수를 한꺼번에 풀었다.

    그의 간교한 눈매가 한껏 휘어졌다. 얇은 입매가 비틀어지며 잔혹한 웃음을 머금었다.

    “결혼하든, 아니면 다른 가문으로 입적을 하든 말이다.”

    “…….”

    “그냥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느냐?”

    충직한 신하를 쳐다보며 페르난데가 피식 웃었다. 던컨이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부디 그것들이 서둘러 절벽 길에 도착했으면 좋겠구나.”

    칼릭스 베네비토가 제 아내에게 당도하기 전에.

    황제의 얼굴에 잔악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랐다.

    * * *

    안락한 마차는 몇 시간째 이어지는 여정에도 안정된 승차감을 제공했다. 덜컹거림이나 흔들림, 소음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메리엘은 깨지도 않고 푹 잠들어 있었다. 아셀라는 새근새근 잠든 동생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한동안 지켜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어두컴컴하여 사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본 아셀라는 곧 동이 트리라 짐작했다.

    ‘켈튼 산을 지나고 있구나.’

    창문 바깥에 달린 등에서 나온 빛이 희미하게 주변을 비춰주었다. 마차는 살짝 비탈진 산길을 달리면서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어딜 간 걸까.’

    그를 닮은 커다란 흑마를 타고 사라지던 남자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아셀라는 기사들이 그를 기다릴 거라고 예상했으나 아니었다. 남자가 떠난 직후, 곧바로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셀라는 창문 너머로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남자의 눈을 떠올렸다.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던 적안은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색채로 그녀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하아…….”

    아셀라가 누구도 듣지 못할 나직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덜컹.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 * *

    칼릭스가 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한때 그의 전마이기도 했던 말은 주인이 올라타자마자 재빠르게 달릴 태세를 취했다.

    “서둘러라.”

    “존명.”

    말고삐를 단단히 붙든 칼릭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곧장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어째서인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칼릭스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대공비의 호위를 맡은 이들은 모두 가문의 정예 기사들이었다. 웬만한 도적 떼나 산길에 가끔 나타나는 마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걱정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먼저 가겠다.”

    칼릭스가 달리던 말에 박차를 가하며 속도를 높이자,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뒤따라가던 기사들과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불과 몇 분 만에, 기사들의 시야에서 그들의 주군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무슨 일이지?’

    아셀라가 창문에 이마가 닿을 듯 머리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창문에 뽀얀 입김이 서렸다.

    ‘길이 막힌 걸까?’

    산길이다 보니 종종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거나 돌무더기가 쏟아져 길을 막는 상황이 그것이었다.

    ‘비전하, 마차가 갑자기 멈추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아셀라는 출발 직전에 라이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흐응…….”

    일정하게 이어지던 마차의 작은 진동이 멈추자, 문득 메리엘이 잠에서 깼다. 아셀라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동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메리엘, 조금 더 자도 돼.”

    “……그래?”

    “아직 밤이거든. 일어날 시간이 되면 언니가 깨워줄게.”

    “으응…….”

    잠이 덜 깬 눈으로 길게 하품하던 메리엘이 뭔가 변화를 감지하고는 주춤거렸다.

    “왜 그러니, 메리엘?”

    “마차가 안 움직이는 것 같아서.”

    “아, 길이 막혔나 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출발할 거야.”

    그러나 아셀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마차 문을 다급히 노크했다.

    “비전하, 라이젠입니다.”

    “카단 경?”

    아셀라가 문을 열자 심각한 표정의 라이젠이 서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까지 빼 든 채였다.

    “비전하, 지금부터는 마차 밖으로 나오셔선 안 됩니다.”

    “카단 경, 갑자기 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떤 소리가 들려도, 마차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약하지만 보호 마법이 걸려 있으니 여기가 가장 안전합니다.”

    라이젠의 뒤쪽으로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는 모습이 보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반대편 창문 쪽으로도 무장한 기사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그리하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굳어 있던 라이젠의 얼굴이 얼마간 펴졌다.

    “별일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이 닫혔다.

    검을 고쳐잡고 이를 사리물며 걸어 나가는 라이젠의 옆모습에서, 아셀라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메리엘, 언니한테 오렴.”

    메리엘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냉큼 아셀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단 경이 하는 말 잘 들었지? 마차에서 나가면 안 돼.”

    “응.”

    “언니 곁에서 떨어져도 안 되고.”

    메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셀라의 품에 파고들었다.

    동생의 자그마한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셀라가 메리엘의 등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러나 아셀라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대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관인 라이젠 카단 역시 기분이나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에게 몇 번이나 당부하던 라이젠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을 거야.”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내리누르며 메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30화

    실제로는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몇십 배쯤 길게 느껴졌다. 창밖을 내다보는 아셀라의 바다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태풍의 눈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슬아슬한 고요에 주변이 휩싸이던 그 순간.

    “크아아아!”

    대기를 찢는 괴기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메리엘의 머리 위로 급히 담요를 덮어씌웠다.

    오싹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언니, 밖에 무슨 소리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귀 막고 있어. 알겠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담요를 덮는 아셀라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몸의 미세한 혈관 하나까지 모조리 수축하는 듯한 기분과 함께 극도의 긴장이 그녀를 강타했다.

    마수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기는 보통의 늑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인간의 연약한 목을 한 번에 잡아 뜯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했다. 갈고리 같은 발톱은 단번에 배를 갈라 내장까지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날카로웠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도, 마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먹잇감을 탐색하듯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기사들을 훑었다. 기괴하리만치 번들거리는 노란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아셀라의 눈이 불안하게 떨리던 그 순간.

    마수와 눈이 마주쳤다.

    “흡……!”

    아셀라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급히 삼켰다.

    곧이어 굶주린 듯한 짐승의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산을 뒤흔들었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면서도, 마수의 시선은 마차 안의 아셀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야.’

    아니었다.

    마수가 노리는 건 그녀가 아니라…….

    ‘메리엘!’

    충격적인 깨달음에 아셀라가 숨을 훅 들이켰다. 노랗게 찢어진 눈이 마차 안의 작은 존재를 주시하며 번득였다.

    그때였다.

    아셀라의 생각이 뚝 끊기듯 멈추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말도 안 돼…….”

    마수는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것 같던 허공에 노란 눈동자들이 한 쌍, 두 쌍, 줄지어 생겨났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하리만치 가득해졌다.

    “마법탄을 쏴라! 시야를 확보해!”

    라이젠의 외침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무언가가 쏘아 올려지는 소리가 났다. 마법탄이 뿜어내는 밝은 빛으로, 주변이 낮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러나 드러난 상황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족히 백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마수들이 기사들을 안에 두고 뱅 둘러싸고 있었다. 아셀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보통 개별 활동을 하는 마수의 특성상,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렇게나 많은 마수가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건,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대체 어째서?’

    “크아아! 키아아아아!”

    제일 처음 나타났던 마수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부짖자, 나머지 마수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대열을 갖추고 있던 베네비토의 기사들이 신속하게 전투에 돌입했다.

    “급소를 노려라! 목 아래를 베거나 눈을 찔러!”

    라이젠이 이끄는 정예 기사들이 제법 공격을 잘 막아냈으나, 마수는 영리하면서도 강했다. 무엇보다 기사 서넛이 마수 하나를 상대해야 했기에 수적으로 열세였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기사들과 마차 사이의 간격이 점차 벌어졌다.

    “마차에서 멀어지지 마라! 비전하를 보호해!”

    라이젠이 마수의 목을 내리그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베어내고 또 베어내도, 어디선가 새로이 마수가 나타났다. 마수들은 기사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를 찾아 몰려들었고, 라이젠의 시야는 좀처럼 트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빈틈이 생겼다.

    “……!”

    아셀라가 흉흉한 눈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마수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메리엘을 온몸으로 감싸기 무섭게, 전속력으로 달려온 마수가 그대로 마차에 몸을 들이받았다.

    큰 충격이 마차에 가해지면서, 그 반동으로 아셀라의 몸이 소파에서 튕겨 나가 반대쪽 마차 벽에 세게 부딪혔다.

    “으윽!”

    “언니, 언니!”

    갑작스러운 고통에 아셀라가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메리엘이 시야가 차단된 담요 속에서 절박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셀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답했다.

    “괜찮아.”

    “하, 하지만, 조금 전에 언니가―”

    “메리엘, 언니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지?”

    단호한 말투에 멈칫한 메리엘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와서 언니 뒤에 숨어.”

    아셀라가 공격을 받는 벽의 반대쪽 구석으로 메리엘을 보낸 뒤, 그 앞을 가리듯 막아섰다.

    쾅!

    다시금 마수가 몸을 들이받자 마차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고는 하나 이대로라면 마법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셀라가 다급히 마차 안을 훑었다. 마수의 공격으로 바닥에 떨어진 선반이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선반을 집어 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메리엘, 언니 말 잘 들어.”

    아셀라가 심호흡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두려움을 메리엘이 알아선 안 됐다. 그랬다간 공포에 사로잡혀 탈출할 기회마저 놓쳐버릴지도 몰랐다.

    “만일 언니가 달리라고 하면…… 담요를 벗고 무조건 도망쳐.”

    “그, 그럼 어, 언니는?”

    “언니는 뒤에서 따라가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할 수 있지?”

    메리엘은 아셀라의 음성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평상시의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벼락이 치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무서웠다.

    마차에 가해지는 충격과 쾅쾅대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괴성, 사람들의 고함, 날붙이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히며 내는 오싹한 타격음까지.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두렵고도 끔찍한 소리였다.

    “하, 할 수 있어!”

    그러나 메리엘은 크게 외쳤다. 그렇게 해야만 언니가 조금이나마 안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언니는 널 믿어. 우리 메리엘은 잘 해낼 거야.”

    아셀라가 선반 끄트머리를 꽉 고쳐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으나, 동생을 생각하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유사시에는 메리엘이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어야만 했다.

    마수의 계속된 공격에, 결국 위태롭게 버티던 창문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전하!”

    시야를 가리던 마수들을 가까스로 처리한 라이젠이 마차의 상황을 파악하곤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창문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수의 머리가 마차 안으로 쑥 밀려들었다. 아셀라가 나무 선반으로 마수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쳤다.

    “크아아악! 크악!”

    흉포한 짐승의 벌어진 아가리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쫙 찢어진 동공이 실내를 빠르게 훑더니, 담요 안의 표적을 찾아냈다.

    짐승의 동공이 극도로 얇아지며 기묘하게 번득였다.

    잠시 후, 마수가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으로 깨진 창문 아래 벽을 찍어 그대로 잡아 뜯어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부서진 틈을 타고 들어와 실내복 안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대로라면, 마차가 완전히 망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안 돼!’

    아셀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제발.

    메리엘과 함께 공국에 가기로 했던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아셀라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지독한 공포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수의 단단한 표피에 선반을 내리칠 때마다 팔이 으스러질 듯 진동했으나, 통각이 사라진 것처럼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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